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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신작시/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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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23회 작성일 08-03-0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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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고추 따는 여자


머릿수건을 하고 목장갑 낀 양손으로
표정도 없이 우악스럽게 고추 따는 여자
탐스럽게 열린 고추들 손아귀에 채여
비명도 없이 꼭지 떨어져나갈 때마다
줄기와 가지들 파랗게 질려 진저리친다
형제 많은 집이 그러하듯이
한 가지에 나서 자란 고추들
엇비슷하면서도 크기며 모양새가 각기 다르다
작지만 속이 꽉 찬 놈 있는가 하면
겉만 번지지하지 속 텅 빈 놈도 있게 마련
여름 푸르게 살아온 놈이 붉게 잘 익은 놈이다
가지에 애착과 미련이 많아 칭얼대며
바쁜 손놀림 둔하게 하는 놈들 보면
영락없이 영양 상태가 부실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여인의 의지를 이길 순 없다
입대한 장정들처럼 불그죽죽 우락부락한 놈들
포대 속에서 지랄 같은 성깔 애써 죽이며
차례차례 포개져서는 알아서 설설 기며 쥐죽은 듯 고요하다
300여 평 고추밭 평정하고 난 여자의 얼굴
연탄불 갈고 난 집게처럼 벌개져 있다
여자는 크고 두꺼운 손으로
불룩해진 자루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는다



양수리


나 낳은 마을 애써 외면하고
도망쳐온 지 어느새 서른 해
한 방울의 물로 태어나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생의 바닥
절뚝절뚝 걸어오는 동안
깜냥껏 잔물결 일으키기도 하고
허무하게 스러지기도 하면서
키운 꽃 몇 송이나 될까

실비처럼 어둠이 내리는 늦가을 저녁
양수리에 와서 먼지 낀, 차 창문 내리고
뫼비우스 띠인 양 수만 마리 꼬리 문,
독 없는 뱀이 되어 꿈틀거리는 슬픈 본능의 물결을 본다
합수, 저것은 지우는 경계가 아니라
지워지는 경계가 아닌가
골짜기 뛰쳐나올 때의 그 맑고 순한
눈빛으로 저들은 이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집단 속 무수한 익명 되어 흐르는
불운한 상경파들의 지리멸렬한 자전들!

들썩이는 물의 어깨와
팽팽하게 부풀었다 꺼지는 물의 유방과
완만한 능선의 물의 둔부들……
두물머리, 저 물의 나라 속에서
햇살 다녀간, 적당히 달아오른 물의 살들은
지금 열정과는 상관없는 짝짓기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 밀치고 당기면서 입 맞추고
몸 포개 물의 새끼들 치고 있을 것이다
한 방울 정한 물로 태어난 것들 그러나
자라서는 가축처럼 서럽게 유유상종이 되어버린,
급수에도 들지 못하는 물의 주민들
스스로 제 한생 제물로 바치며
거듭 바다 죽이러 가고, 또 갈 것이다


이재무․
1983년 ≪삶의 문학≫에 작품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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