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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신작시/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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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下草
그늘에서만 자라는 것
한밤, 물 속의 수초(水草)처럼 흐물거리다가
꿈이 아닌 꿈으로 온몸을 뜨겁게 적시다가
아무도 모르게 바위틈에 감춰둬야 하는 것
때론 한 가닥 삐져나와 세상을 낯 뜨겁게 하는 것
시간에 출렁거리다가
낮게 엎드려 다시 밤을 기다려야 하는 것
덜 익은 보리 이삭처럼 바람에 일렁이다가
어둠에 더욱 꼿꼿하게 일어서는 것
창 같은 것
칼날 같은 것
바람이 분다
눕혀야겠다
가을자판기
누가 보거나 말거나 가을 공원에 햇살 쏟아진다. 자판기 앞에 모여든 비둘기떼,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모퉁이에서 소변을 보는 노인의 주름진 바지에 햇살 머문다.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 어제의 우리도 저랬을까. 찔끔거리는 오줌발처럼 우리의 대화도 지지부진했던가. 누가 보거나 말거나 가을이 떠날 채비를 하는 공원 자판기 앞에 찔끔거리는 햇살. 어제 우리의 만남도 저랬던가. 노인이 일을 끝내고 비둘기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비둘기들은 짤랑거리고, 가을이라는 말에서도 짤랑거리는 동전소리가 난다. 가을 한 잎 자판기에 넣으면 좌르르 낙엽 쏟아질 것 같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공원 모퉁이 우리의 만남에 물이 들었던가, 아니 물이 올랐던가. 누가 보거나 말거나.
변종태․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안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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