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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신작시/전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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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매거진
4월은 실종자들의 페이지
해커들이 잠입하면
혼몽해지는 영혼들이 갈 곳을 잃어
가슴속에서 폐전선이 난무하고
난기류가 명치를 휩쓸고 지나갈 때
실종된 영혼들은 전립선염에 걸린 개처럼
종로3가에 노점을 편다.
감시카메라가 아무데서나 작동하고 있는
한 페이지 4월
폐철근이 어지러운 재건축 건물 속에서
한 소녀가 늙은 애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귀고리를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른다.
하얀 봉지가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있는 페이지에서
때에 전 만국기는 세속적으로 방울을 울리며
행인의 어깨를 친다.
장 버스가 지나가는 거리
정류장에는 뮤지컬 포스터가 찢긴 채 하늘거리고
깨진 보도블록을 먹어치우는
실직자들의 소주판이 난기류로 출렁인다.
어디에선가 해커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전기톱에 놀란 적이 있는 가로수가
제 가지를 툭툭 부러뜨리고
거리의 춤곡에 스텝을 맞출 줄 모르는 까만 봉지가
벚꽃에서 떨어지는 깨알만한 글자를 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4월의 페이지에는
여성 교양지처럼 읽을 만한 게 없어
눈요기로 훑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유레카
집에 있는데 술집에서 전화가 왔다. 술값을 계산하고 나를 데려 가라는 것이다. 지금 전화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라고 해도 술집 주인은 곧이듣지 않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단다. 나는 술집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내 분신을 두고 온 적이 없다. 그런데 누가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냐. 조상처럼 액자에 갇혀 있은 지 오래인데 내가 밖을 떠돌고 있다니 알 수 없다. 결재할 수 없는 카드가 내 이름을 자꾸 찍어대는 것이냐, 남긴 발자국이 술집을 떠도는 것이냐. 나를 찾으러 술집으로 가니 낯익은 이름이 계산서에 적혀 멱살이 잡혀 있다. 주인에게 나는 집에서 나와 본 적도 없고 이 술집에 와 본 적도 없다고 하고 싶지만 나를 확인시켜 줄 방법이 없다. 주민증을 내밀어 보지만 가난한 증언이 먹힐 리 없다. 어둠 속에서 꽃나무들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사건의 현장에서 나는 나를 의심할 밖에 없다. 멱살 잡힌 채 적당한 증서가 될 만한 나를 찾을 길이 없다.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운 사연이 담긴 얼굴에는 계산서에 항변할 만한 표정이 없어 나를 데려갈 수가 없다.
전기철․
1988년 ≪심상≫
․시집 아인슈타인의 달팽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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