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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계간평(연극)/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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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박근형 작․연출)∙
<백중사 이야기>(고연옥 작, 문삼화 연출)∙
<벽 속의 요정>(배삼식 극본, 손진책 연출)∙
아배와 남자의 귀환, 그리고 배우
이경숙|연극평론가
문학이 아비를 부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비 없는 소설극장’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상상세계를 명명하는 비평가가 있는 것으로 보면, 문학이 아비부정론을 내세우던 시절이 저물었다는 식의 과거형은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오늘도 문학계는 자신의 다른 이름인 아비와의 싸움을 서로 다른 양식과 정신으로 새로운 기법과 문법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계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4․16과 5․18세대를 거쳐 386시대를 넘어선 오늘까지 아비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무대 위의 소재가 되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 세대의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들의 군상에 비해 애정을 얇게 덜어낸 상태로, 비판과 원망의 시각으로 그려지기 일쑤였고 우리는 상처와 슬픔에 대한 한없는 연민을 끌어안은 모정을 그리워하느라 아버지의 뒷모습을 잊고 살았다. 어쩌면 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친어미적인 풍토 속에서 아버지는 어느새 그림자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다.
2006년 여름의 연극계는 그 뒷모습을 품에 안고, 아비를 딸의 시각으로, 아내의 가슴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성으로 아버지를, 감성으로 어머니를 이분하던 관점의 시대가 지나고 아버지는 감성의 영역 안에서 어머니만큼 큰 울림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아비가 아비가 되기 이전,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야 했던 시절의 사건과 문제들도 좋은 창작 소재가 되고 있다. 시대의 격변으로 상처입고 고행하던 여자들의 삶을 흥건하게 그려내던 연극계는 이제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들의 일생을 조금쯤 다른 시각으로 조명해내고자 한다. 무대 위로 이렇게 아배와 남자가 귀환하고 있다.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박근형 작․연출, 2006. 7. 5~7. 23. 게릴라 극장)
1. 아배, 경숙에게 안기다
박근형이 게릴라 극장 젊은 연출가전 첫 번째 작품으로 내놓은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는 제목 그대로 아버지에게 “깝깝한 년”으로 불리는 ‘경숙’(주인영 역)과 ‘경숙이 아버지’(김영필 역)에 대한 이야기다. 부언하자면, 이 연극은 출산의 고통 속에서도 어매가 아닌 ‘아부지’를 울부짖는 경숙의 유년기에 그녀를 엄마와 함께 전쟁 통에 버리고 떠난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과 연민에 가슴이 저린 경숙의 인생 풍경이다.
‘경숙’이라는 이름은 2000년대의 작명 경향에 근거해 볼 때, 세련되지도 무릎 칠 만큼 기발하지도 않다. 좋은 뜻에 맛깔스런 어감을 가진 현대판 이름들도 단기간의 유행을 타고 사라지는 마당이고 보니, 이제 ‘경숙’이라는 이름에서는 고가구에서나 맡을 수 있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미큼하게 난다. 우리들에게는 친구의 고모나 이모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경숙’처럼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에는 현란한 기법도 첨단의 실험도 없다. 그렇지만 밋밋하고 볼품없는 그 맛 때문에 이 연극은 빛나고 정겨우며 눈물겹다. 경숙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을 수많은 경숙들의 가지각색 사연처럼, 그리고 그것을 바라봤을 경숙이 아배의 인생처럼 연극은 저린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연극의 ‘아배’는 옛 우리네 아버지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지난했던 격랑만큼 파도와 물결에 어지러운 삶을 살았다. ‘아배’는 6․25가 발발하자 가족을 버리고 혼자 피난길을 나섰다. 그에게는 전쟁의 폭음이 무섭다고 징징대는 “깝깝한 년” 경숙이 “시끄러운 가스나”고, 피난길에 먹을 주먹밥은 해다 바치면서도 고등어 싸는 것은 잊어버리고 마는 아내(고수희 역)가 “게을러 터진 년”일 뿐이다. “전쟁 끝날 때까지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거라던 아배는 전쟁이 끝나자 수용소 동지인 꺽꺽이 삼촌(김상규 역)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태연히 장구를 치며 돌아온 아배는 꺽꺽이 삼촌에게 집과 가족을 부탁하고 자신의 꿈을 찾는다면서 다시 집을 나간다. “짬나면 가끔 들릴”거라는 말을 기겁할 만치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놓고 떠나는 그에게는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이나 책임의식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가 없는 사이 어머니와 꺽꺽이 삼촌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벼락 칠 때마다 아배가 벼락을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경숙은 아배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그보다 더 앞선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오고 어머니와 꺽꺽이 삼촌은 임신 사실을 죄스러워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경숙은 어머니와 삼촌이 자리를 비운 뒤, 아버지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본다. 집을 떠나 방랑하다 가족에게 돌아왔지만 이미 그의 자리는 없는 듯하다. 돈을 들고 다시 집을 떠나는 아배. 그가 제멋대로 또 돌아올 것이 싫은 꺽꺽이 삼촌은 이사를 제안하고, 모두 아배의 집을 버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다.
젊은 여자 ‘자야’(황영희 역)를 대동하고 야반도주해 이사한 경숙네 새 집을 찾아온 아배는 정 붙일 곳 없이 밀려난 듯한 이 결핍의 느낌을 자신의 소리와 장구 연주를 사랑한다는 자야에게 위로받고자 하지만, 자야마저도 청요리집 남자와 바람이 난다. 상심한 아버지를 위해 경숙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성령을 운운하며 자야를 설득하고, 그들 앞에서 할복하지만 연극은 이를 “예수님이 몸소 나타나” “놀라운 은혜의 순간”을 맞는 것으로 처리한다. 어느새 어매와 자야는 형님․동생 사이가 된다.
‘아배’는 다시 길을 떠난다. 방랑하면서 꿈을 꾸고, 정착의 공간에서 방랑을 꿈꾸는 그는 전쟁 이후 격변 속에서 시대와 꿈 사이를 방황하며 가족과 개인 사이의 균형감각을 잡을 생각조차 못했던 우리 ‘아배’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아배’는 경숙의 졸업식에 나타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딸에게 신발을 선물한다. 아배가 주는 거라면 모두 싫고, 아부지 친구도 싫고, 아부지 살았던 세월도 싫고, 아부지와 살았던 어매도 싫은, 아부지의 모든 게 싫다며 소리 지르는 경숙에게 아배가 하는 말은 “깝깝한 년 잘살아라, 내 간다” 정도의 무정한 듯한 뱉는 말뿐이지만, 경숙이는 무거운 가방을 지고 헤매는 아버지의 지독한 인생을 부여잡아주고 싶다. 그래서 글을 모르는 아버지가 나무든 인생이든 모두 외워버리고 마는 습관처럼 자신을 잊지 않아주길 바라며 그가 선물한 신발을 품에 안는다. ‘아배’의 삶은 그렇게 경숙에게 안겼다.
2. 박근형식 능청, 논리를 눙치다
이 연극의 힘은 박근형 특유의 작법과 극단 골목길의 배우들이 보여준 극찬할 만한 앙상블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우울한 일상의 끝은 절망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면서도 관객에게 어딘가에 있을 희망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매력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박근형은 이번 작품을 통해 담담의 미학과 능청의 작법이 그의 무대를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숙이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 장면은 작품의 앞과 뒤에 액자식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이 장면에서 작가가 가장 방점을 두고 있는 내용상의 화소는 경숙이 낳은 아이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경숙이 아배요!”를 부를 만큼 경숙이 아버지와 닮아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경숙이 평생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존재가 아이의 모습에 투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함께이지 못했던 오랜 시간의 슬픔을 아이와 함께하며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극의 논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 부분은 그러나 그 설정과 주제의 상관성이 유기적이라는 측면에서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논리를 ‘눙친’ 매듭을 유연하게 엮어내는 박근형의 작법은 경숙 어매의 할복이 일어나는 ‘어매와 자야의 화해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청요리집 사내와 바람난 자야를 아배의 부탁으로 찾아간 어매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그를 배신한 자야 앞에서 배를 가른다.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피의 장면은 ‘놀라운 일’, 즉 어머니께서 배를 가르는데 찬송가가 나오면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경숙의 독백으로 처리되면서 논리를 떠내려 보낸다. 꺽꺽이 삼촌의 인솔로 아배를 피해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도 박근형식 능청은 발휘된다. 무대는 무대 뒤편에 쌓여있는 나무 상자 몇 개를 달리 배치하고 배우들이 무대를 한번 돌고 나면, 즉 편리하고 간단한 이사 작업 한번이면 ‘새 집’으로 변화된다. 능청으로 무대 전환의 연극적 문법을 살려내는 그의 능력이 인상 깊다.
이러한 능청의 작법은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가벼운 터치로 진지한 주제를 담아낼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사실 이 연극은 희곡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슬픔의 정서나 인생의 지난을 그려내는 계열에 편입되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 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경숙이라는 인물에 국한하여 초점을 맞출 경우, 이 연극에서 ‘아배’의 존재는 기존의 연출법이 흔히 선택했던 ‘가해자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변하는 한 시대의 아버지를 통찰하는 시선의 예리함이 능청의 작법과 만남으로서 이 연극은 ‘경숙이에 대한 연극’이자 ‘경숙이 아버지를 위한 연극’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들어본 듯도 한 옛날 우리의 아버지들에 대한 이 이야기가 관습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만드는 담담의 미학도 이 작품의 매력을 증대시킨다. 희곡의 어디에서도 ‘설명해대려는 부분’이 없는 것은 박근형의 큰 장점이다.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전언을 전하는데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의 ‘힘 들어간 대사’를 통해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능청의 작법에 웃다가 어느새 담담하게 다가와 그들을 울리는 작가 박근형을 만날 수 있다.
3. 배우, 골목길에서 뻗어나가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자연주의적 발성법’은 ‘예술적 발성법’(텍스트의 선율적 구조를 수용하며 예술적 기원을 숨기지 않는, 일상적인 정감적 언어와 운율도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발성법)에 비해 현실화하는 것이 쉽다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배우가 등장인물을 육화하고자 할 경우, 자연주의적 발성법을 체득하지 않고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할 정도로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자연주의적 발성법’은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극의 캐릭터가 요구하는 발성법과 그 배역을 몸에 입은 배우들의 태생적인 개성과 들어맞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배우 개인이 지닌 특유의 발성법이 자신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을 제한하는 일이 종종 존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특유의 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캐릭터가 있고, 그 배우가 그 적역을 맡았다면 무대는 발성법 하나로도 자연스러움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의 배우들이 보여줬던 발성법과 연기는 마치 이 경우의 ‘자연스러움’이 잘 발현된 예시 사례와 같았다. ‘경숙’ 역을 맡은 주인영의 부담을 덜어낸 비음 섞인 발성과 ‘경숙이 아버지’ 역의 김영필이 보여주는 쏘아 꽂히는 듯한 발성이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훈련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일체의 인위성이 부재하는 ‘꺽꺽이 삼촌’ 역 김상규의 언어 습관 ‘꺽꺽’과 그의 캐릭터에 들어맞는 흐릿한 저음 발성이 배역과 배우를 정확하게 밀착시켜 낸다. 또한 전작들에 비해 좀더 발전한 ‘경숙 어매’ 역의 고수희의 연기와 대사 표현력 역시 훌륭했다. 자야 역의 황영희가 만들어낸 젓가락 장단은 그 장면을 풍류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극단 골목길의 배우들은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를 통해 전작 <선착장에서>를 통해 보여준 모습 이상의 앙상블을 보여줬다. 이것은 희곡의 진실성과 재미 위에 연출력이 얹혀진 결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이 앙상블 때문에 작품이 진실성과 재미를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배우들의 앙상블과 체화된 캐릭터의 발현은 모든 연극 작업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박근형표 연극의 경우에는 이 필요성이 좀더 절실하다. 그가 구사해내는 비관념적인 언어와 설명하지 않고 풀어내는 대사들의 조합은 일상적 화법에 인물의 성격을 덧입힐 수 있는 배우의 화술 능력과 발성 훈련 없이는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단 골목길의 배우들은 오랜 작업을 통해 이렇게 골목길에서 뻗어나가고 있다. 이것이 연극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의 두 번째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중사 이야기>(고연옥 작, 문삼화 연출, 2006.6.9~7.23, 대학로 우리극장)
1. 고연옥을 말한다. 고연옥이 말한다
<인류 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일주일>의 작가 고연옥이 신작 <백중사 이야기>로 여성 연출가 문삼화와 만났다. 여성 작가와 여성 연출가가 만드는 중사 이야기이고 보니, 그들이 그려낼 군인으로서의 남자, 인간으로서의 남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작가와 연출가의 백중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연민에도 불구하고 백중사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초고를 쓰고 십년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노력 때문에 더욱더 백중사는 오늘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어려워진 듯 보인다. 군대에서의 모멸적인 욕설과 폭력이 증폭된 체벌, 일개 병사가 중사의 아내를 감시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업무가 2006년의 시공간 속에서 어떤 값진 의미로 다가오는지 작품은 답하지 못한다. ‘고연옥이 그려내는 백중사’는 ‘그녀가 말하는 백중사’로 가 닿지 못한다. 고현옥의 표현처럼 “이 시대를 정화시켜주는 속죄양”이라는 이름에다 백중사를 취직시키기에는 작품이 너무 많은 플롯상의 구멍과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동안 고연옥에게 선사되던 수식어에 비할 때 가혹한 측면이 있다. 또한 <백중사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상황의 긴장’, 다시 말해 직면한 사건의 순간적 갈등을 표현해내는 작가의 장점을 생각할 때도 부적당하다. 감옥 안의 세상보다 감옥 밖의 세상이 더욱 부조리한 광기로 가득 차 있음을 아이러니하게 꼬집을 수 있는 능력(<인류 최초의 키스>)을 지닌, 단단한 글쓰기와 걸쭉한 입담을 공고하게 다질 수 있는(<웃어라 무덤아>) 작가 고연옥이 자식처럼 써내려갔을 이 작품의 문제적 징후는 무엇일까.
전작이었던 <일주일>에 이어 <백중사 이야기>에서도 고연옥은 자꾸 무대 위에 등장하곤 한다. 이는 물론 희곡을 통해, 배우의 대사를 통해 그녀의 존재가 표피화된다는 의미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어찌 자신의 가슴과 손과 머리와 다리를 그려 넣지 않겠냐마는 문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설명되고 반복된다는 점에 있다. 권력과 광기, 그에 왜곡되고 비틀대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심이 배우와 배우의 소통을 통해, 연기와 대사가 구성해 내는 개체와 개체의 갈등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 관객은 얼마든지 ‘고연옥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에 배우를 통해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기회는 차단된다. 작품의 결말에 갈수록 그러한 양상은 심화되고 직접적으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데도 고연옥이 말하고 싶은 것들이 들려온다. 연극은 설명할수록 지루하고 관객은 자신이 해독해 낼 것이 없을 때 등을 돌린다. 작가가 배우를 통해 관객에게 걸어오는 흥미로운 게임이 무대 위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백중사에 대해서 스스로 이해하기도 전에 그들은 고연옥이 설명해주는 백중사를 이해해내야만 한다. 콤플렉스로 무장한 백중사를 모두가 그를 떠날까봐 두려워하는 권력 제도의 가엾은 희생양으로 선언하고 싶은 고연옥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술집 작부 금자의 품에 안겨 모래 바람 소리가 들린다며 시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는 백중사에 동조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움은 백중사라는 인물의 왜곡된 형질이 반복․묘사되는 것에 비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진 결핍과 상처를 치유하려는 자구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어떤 시절 어느 공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건과 에피소드는 단순히 설명될 듯 무대 위에 현현되지 못했다. 백중사가 우리의 죄를 품에 안은 희생자로 그려지기 위해서는 백중사라는 인물의 역사에 대한 작가의 터치가 좀더 필요할 것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기 비하적 히스테리형 인물이라는 관습적 캐릭터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자로 귀환할 백중사를 기다려 보는 이유는, 과거 뚝심 있는 여성작가 고연옥이 보여줬던 행로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백중사로 태어나야 한다. 백중사는 태어나야 했다
<백중사 이야기>에는 8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8명의 남자는 각기 계급이 다른 군인들이고, 2명의 여자는 지방 소도시 외곽의 작은 군부대 앞 술집에서 술을 팔고 몸도 파는 인물들이다. 그 두 명의 여자 중에 한 명은 백중사(이국호 역)의 부인이 되고, 또 다른 한 명의 여자는 영문과 진학을 희망하는 현모양처형 여성과 결혼하지 못해 술집 작부와의 결혼을 선택한 백중사의 누이나 애인과 같은 존재이다. 8명의 남자들 역시 모두 백중사와의 관계망 안에 놓여있다. 그 중에는 백중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함에 불만을 갖고 그를 혐오하는 부하들도 있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神)격의 상관도 있으며, 군인 원칙과 사명을 목숨처럼 주창하는 백중사의 모습에 구역질 내는 동료도 있다. 어떤 계급을 달고 무슨 일을 하든 모든 등장인물은 백중사를 중심으로 하여 연극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에 백중사를 맡은 배우의 연기는 극 전체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캐릭터가 백중사를 구심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각 인물과 백중사가 주고받는 호흡은 그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군인으로서의 백중사가 짊어진 무게보다 주인공으로서의 백중사에게 요구되는 연기 몫이 더 클지도 모른다. 백중사 역의 이국호는 특유의 강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해 백중사로 태어나기에 훌륭한 조건을 갖춘 배우이다. 특히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파장이 크기 때문에 힘을 실어야 하는 장면의 형상화의 유리한 측면을 지녔다. 이 병장(오민석 역)을 벼랑으로 몰아내듯 강압하는 분위기를 만들 때의 담뱃갑을 이용한 세부적 연기는 칭찬할만한 설정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배우는 말을 잘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말을 잘 전달한다는 것은 발성과 딕션의 정확함과 분명함을 필요로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성음의 톤과 호흡의 속도나 리듬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요하는 것이다. 백중사가 크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마다 이국호의 상반신은 위아래로 흔들리고 어깨가 들썩거린다. 이는 목에 힘을 주고 대사를 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사의 분량과 속도가 에너지를 안고 증폭될 때마다 벌겋게 변하는 목과 얼굴은 관객에게 집중을 끌어내는 목적을 기준으로 볼 때 안타까운 일일 수 있다.
고연옥이 만들어내는 대사의 영역은 일상적인 성격의 것에서 관념적이고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문학형의 것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배우들은 이 상반되는 성향의 대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또한 고민해야 한다. 특히 후자의 영역에 해당되는 대사가 사실주의 연기 패턴을 기준으로 하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안착될 수 있는지가 남겨진 과제이다. 이것이 수행되지 못할 경우, 배우는 무대 위에서 그 인물로 태어나기 어렵다. 또한 남자들 사이의 갈등 혹은 군대에서의 분열이 직접적인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격투 이외의 것으로 표현될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백중사 이야기>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연출과 희곡, 배우들 모두가 설득력 있는 백중사의 탄생을 맡기 위해 기울여야 할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가능성은 있다. 8명의 인물이 각기 모두 다른 성격을 구현하고 있어 배우들이 서로의 아우라를 부딪히며 형성해 낼 수 있는 여지가 큰 작품이라는 점, 팔각의 나무 단을 이용한 간단한 무대 활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여러 공간을 전환시켜 낼 소극장식 아이디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끊임없이 넘어지고 구르고 맞으면서도 자기가 맡은 배역과 장면을 위해 멍도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는 젊은 배우들의 열정이 전해져 왔다는 점은 이 작품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좀더 치밀한 설득력을 바탕으로 수정된 희곡을 통해, 보다 예각적인 감각의 연출에 의해, 그리고 백중사로 태어난 배우들에 의해 보다 나은 ‘백중사의 이야기’가 현현되길 기대해 본다.
<벽 속의 요정>(배삼식 극본, 손진책 연출, 2006. 7. 6~23.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1. 배우가 아버지를 불러내다
배우는 배우다. 배우로서의 김성녀는 자신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마당극에 빚지며 만들어냈다. 이는 김성녀라는 배우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한계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적 요소이기도 하다. 특화된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일단 매우 생산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 밖에서 자유로울 만큼의 다른 무기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 배우는 한정된 장르 안에서만 빛깔이 좋은, 반쪽뿐인 개살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김성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이 경우에 해당됐었고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소중한 무기에 의해서 벽 속에 갇힌 신세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고정관념이 그녀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무기들이 발견될 수 있는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여기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을 통해 김성녀는 그녀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무기를 요리할 또 다른 무기들도 보여줬다. 무대라는 전쟁터에서 그녀는 칼과 방패를 모두 가진 장군으로 뛰어다닌다. 장군과 요정. ‘장군 같은 배우’인 그녀가 자신의 ‘요정 아버지’를 통해 벽을 뚫고 다시 태어났다.
다시 강조하건데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배우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우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인 것’이 무엇인지를 호흡과 목소리와 표정과 몸짓을 통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도 태초부터 배우였던 것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성녀의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김성녀의 화법은 단정하지 않다.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이지도 않다. 이는 그녀가 목소리를 울리는 방법이 한 가지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에 기인한다. 음을 내는 위치가 신체의 일정 부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배우가 되기 위한 배우수업에서 복식법에 근간한 호흡을 훈련받는다. 복식호흡법은 소리를 내는 울림통이 신체의 중앙, 즉 단전에 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기법이자 훈련법이다. 이 경우 소리는 극장을 울리기에 적합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공기를 부드럽게 진동시키면서 목소리의 음파가 전달되기 때문에 관객에게 정확한 대사가 전달되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김성녀는 복식호흡법에 근간한 발성법이 지닌 장점을 배 울림통을 이용하는 것 이외의 여러 방법으로도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목에서 소리를 내도 시끄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며, 코에서 음을 내면서도 정확하다. 머리를 울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방식, 즉 두성에 근간해 대사를 만들어낼 때도 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굳이 의식하고 긴장하지 않고도 신체의 여러 부분을 통한 발성법을 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할 수 있기 때문에 모노드라마의 30역은 그녀에게 버거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패턴의 노래든지 그녀에게는 소화 가능한 맛있는 음식이 될 뿐이다. 그녀가 가진 이 능력은 철갑이라도 씹어 먹어 소화시킬 정도의 튼튼한 위장에 비유될 수 있다. 그녀가 왜 진작 이 작품을 통해 무대에 서지 못했는지, 왜 그 위장이 무언가를 소화시킬 기회가 일찍 오지 못했는지 아쉬울 정도다.
또한 신체를 움직이는 동선이 매끄럽고 유기적인 것 역시 그녀가 가진 장점으로 이번 작품에서 두드러졌다. ‘벽 속의 요정’인 아버지에서 어머니, 그들의 딸, 5살 어린 아이에서 노인까지의 모든 역을 성별과 노소를 불문하고 해내야 했던 김성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만의 발성 기술 이외에도 신체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순간적인 전환으로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속도의 문제이기보다는 방점두기의 전략이 잘 발휘되었다고 평하고 싶다.
물론 한 역할에서 다른 역할로의 변이는 빠르게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작품의 리듬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노드라마라는 특성, 게다가 ‘한 인물로서의 배우가 무대를 전진시키는 모노드라마’가 아닌 ‘한 배우로서의 여러 인물이 무대를 유동시키는 모노드라마’로서의 성격이 짙은 <벽 속의 요정>의 경우, 역할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극본 상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 즉 변환이 빠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빨라야 하는 속도의 요구 앞에서 그 역할로 분명하게 분하는 것은 신속함의 문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성녀는 이것을 각 인물의 신체적인 특성을 빠르게 잡아내어 그것을 방점 찍기의 방식으로 완성하는 연기를 보여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표현하는 부분에서 김성녀는 객석에 등을 돌리는 경우를 아버지 역할로, 객석을 바라보는 시공간에서는 어머니 역할로 표현했다. 이것은 매번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전환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각 인물을 표현해 놓고 넘어가지 않을 경우 인물의 정확도가 떨어지게 된다. 그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김성녀는 어깨의 바깥 끝을 내려놓는 각도와 위치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아버지 때에는 다리를 벌리는 정도를 넓게 하고 어머니는 좁혀 붙였다. 이는 사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다. 오히려 매우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관객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면의 형상화에서 김성녀가 아버지였다 어머니였다를 보여주는 변이가 왜 그리도 신기하게 정확했는지 분석하라면 그것은 눈에 띄는 변화인 목소리의 변주 덕분만이 아니라 디테일한 부분의 신체 변화까지도 캐릭터화되어 있던 ‘잘 만들어진 몸의 방점’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를 표현하는 데에는 목소리와 뒷모습 밖에는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뒷모습이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을 충분히 이용했다. 5살짜리 여자 꼬마 아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 어떤 여배우라도 목소리의 변화를 시도했겠지만 그리고 의상의 변화에도 일정 부분 의지하겠지만, 김성녀는 그 이외의 것도 육감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시선의 중심을 상방 15도 위로 고정하고, 입술의 가로는 의식적으로 좁게 유지하며, 말을 할 때마다 팔을 잘 움직이고 하는 아이들의 습관에 따라 신체의 떨림을 표현하는 것 등을 생각한다면 표정을 어린 아이답게 변화시키는 것쯤은 초보적인 성격의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연극에서 모든 배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인지하여 표현할 줄 아는 배우였다.
관객을 통째로 집중하게 만들고, 예상치 못한 어떤 반응에도 객석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 넘치는 에너지에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면서도, 웃음과 눈물 그 어느 쪽도 억지스럽지 않았던 김성녀의 이번 연기를 통해 ‘모노드라마를 하는 배우’와 ‘모노드라마를 해야만 하는 배우’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 모노드라마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많은 배우들 중에 그 누구보다도 기본기가 튼튼한 배우 김성녀로 남을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음에 순수하게 감사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연기를 평가하고 분석하는 입장에서도 그녀는 모자랄 것이 없는 살아있는 배우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2. 작가와 연출가가 축구 심판처럼 뛰다
배우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연극 <벽 속의 요정>은 김성녀에 의한 연극이다. 김성녀를 위한 연극이며 김성녀에 의한 연극이기도 한 <벽 속의 요정>에는 그러나 그녀에 의해 그냥 덮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양질의 무대적 요소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후쿠다 요시유키가 쓴 <벽 속의 요정>의 원작은 일본인에 의한 창작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국적 혹은 작품의 정체성 측면에서 다소 묘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원작 역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벽 속에 숨어 지내야만 하는 아버지와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 요정으로 인지하고 있던 인물이 아버지임을 알게 되는 딸의 이야기를 서사의 틀로 삼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틀거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판 <벽 속의 요정>은 훨씬 더 한국의 무대와 관객에게 안착된 느낌을 준다. 이는 최근 <주공행장>으로 안정된 극작을 보여준 배삼식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의 상황을 한국전쟁 상황으로 변화시켰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 원작에 어머니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이 희곡을 무대화시킬 배우 김성녀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보여줄 수 있게 고안된 번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품을 실정과 배우에 맞게 맞춤형으로 바꾼 모양새다.
그리고 이는 두 가지의 좋은 결과를 낳았다. 첫째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도 그 존재감이 확실한 아버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나 대사는 딸이나 어머니 배역에 맡겨진 분량에 비해서 적다. 극의 서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은 딸과 어머니이고, 무대의 감정 선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그들이다. 아버지는 그들의 감정을 유도하거나 그들에 의해 설명되는 존재이다. 즉 여성(딸과 어머니)을 통해 아버지가 그려진다. 이것은 그가 표피적으로 나서지 않고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실로 요정답다. 그래서 그가 더욱 궁금하고 그리워진다.
두 번째는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김성녀가 가장 잘 연기할 수 있는 인물들로 희곡이 채워진 느낌이다. 어머니의 자리가 넓어지면서 딸의 아버지로서의 아비뿐 아니라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아비 역시 묘사될 수 있었다. 여성 관객이 많은 한국 연극계의 입장에서도 여성들의 삶을 아버지나 남편의 시각과 함께 더불어 볼 수 있다는 점은 환영받을 수 있는 요소였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의 연출 역시 배우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지향을 통해 완성된 듯 보인다. 손진책은 마치 없는 듯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경기를 진행하는 훌륭한 축구 심판처럼 연극 속에 그의 연출색을 자연스레 녹여내었다. 강제로 연출력을 주입하지 않으면서 무대를 배우를 통해 관제될 수 있는 열린 장으로 만드는 미학을 추구했다. 조명의 활용과 그림자 인형을 통한 재미 역시 이 연극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인상적인 구성이었다. 대사회적인 무거운 관점이 녹아있음에도 이를 가족애를 통해 친연하게 접근함으로써 인생의 상처와 굴곡을 지닌 보편의 이야기로 풀어낸 연출이 없었다면, 이 연극은 일상적인 울림으로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감동에 실패했을 것이다. 주제적 강박에 갇히지 않고 내 곁의 아버지를 귀환시킨 연출이었기에 더욱 빛이 난다.
축구 경기에서의 좋은 심판이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호하고 경기를 정확하게 진행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듯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심판이라고 한다. 선수들이 공을 패스하거나 드리블할 때 심판이 공의 동선을 차단하는 경우나 선수들의 진입 방향을 가로막는 곳에 자신도 모르게 서있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심판은 아무리 명확한 판단력과 관찰력을 지녔다고 해도 자격미달이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의 작가와 연출가는 김성녀라는 무대 위의 선수가 자신의 플레이를 최대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녀의 체력만큼 자신의 체력을 소진하며 함께 뛰는 훌륭한 심판의 전형을 보여줬다.
이경숙․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4년 LG아트센터 ‘오늘의 젊은 연극 시리즈’ 연극비평 대상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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