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3호 신작시/이태관
페이지 정보

본문
이태관
열매를 놓치다
은행나무는 잎보다 먼저 
열매를 버렸다 
바람의 맵찬 회초리가 
낡아 허물어진 할미의 주걱턱을 
후려친 것이다 
평생 닦지 않아 구린내 나는 저 알들을 
허리 휜 노인이 
치마폭에 담고 있다 
여름을 지나온 나무의 둥치에서 
바람이 풀리고 있다 
제 선 자리가 삶이라면 
나무를 버린 열매는 
흐르는 정신이다 
태양을 잉태한 저 작은 사리들 
떨치지 못한 미련 몇이 바람에 흔들리고 
하루의 일과처럼 
골목길을 에돌아 집으로 향하는 
노인의 긴 그림자 뒤로 
누런 알들이 수없이 떨어지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내 구둣발에 밟혀 
비로소 밝게 빛나는 세상, 
나무는 잎보다 먼저 열매를 버렸다 
비밀정원 
저녁 산책을 나서다 그 집을 보았다 
강과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곳 
오랜 전 부모 떠난 자식이
들보에 목을 매었다 했다
그의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그 후로 아무도 찾는 이 없다 했다 
지는 해는 붉은 물결로 온 집안을 감싸 흐르고 
빗장 걸린 초록 대문 옆으로 
담은 허물어져
집의 내장을 내보이고 있었다 
기와와 들보 사이 
비로소 세간이 제자리를 찾아 낡아가고 
마당을 지나 안방까지 침투한 풀들이 
제 본래의 자리라는 듯
그렇게 꽃 피고 열매 맺으며 
한생을 견디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비로소 완벽해지는 세계 
자연에 들기 위해 스스로를 허무는 집 
그날 이후 
바람과 새들만이 찾던 그곳에 
비밀스런 방문자가 생겨났다 
비밀의 정원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이태관․
1964년 대전 출생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
- 이전글23호 신작시/권현형 08.02.29
- 다음글23호 신작시/황희순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