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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작(평론)/오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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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32회 작성일 08-02-29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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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평론 부문 당선작|
이파리 양상체와 암흑물질, 그리고 공포
―기형도의 시간
오순영



1. 영대(永代)의 시간, 아에붐
린 화이트는 모짜르트가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고 말한다. 음악이란 본래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것인데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최초의 소리부터 최후의 소리까지 전부 머릿속에서 단숨에 생각해내기 때문이다. 모짜르트가 인간의 능력, 인간의 시간을 조금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그러한 천사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이를 아에붐(aevum/永代)이라 불렀고 린 화이트는 모짜르트를 ‘아에붐 속의 작곡가’라고 명명했다.
비단 모짜르트만이 아에붐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 일반은 시간의 비가역성과 일종의 투쟁관계에 있다. 일상적인 삶이 밋밋한 표면 위의 낙서이며 그 나날의 낙서가 삶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인 시간의 비가역적 흐름이라면 예술은 그 비가역성을 파괴하며 낙서는 낙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예술 속의 창조적 시간은 프루스트의 경우처럼 인간 삶의 더욱 심원한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문학에서 시간의 의미는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 왔다. 시간이 인간 실존의 중요한 항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사실 근대 이전에 시간의 보편학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고대적 시간은 원환적이었고 인도의 신화들은 시간을 무한수(무량수)와 동일시한다. 인도인들은 구제론적 목적을 고려하여 우주 순환주기의 길이와 수를 증가시켰다. 탄생과 재탄생의 무한수에 대한 공포는 그 무한한 윤회, 즉 영원회귀로부터 벗어날 종교로의 귀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새해의 시작에 벌어지는 고대의 카니발이나 제의들은 그들이 산 지난 시간을 무화하고 창조의 우주적 순간으로 되돌리는 우주 창조의 의식이었다. 
근대 이후 보편적 시간은 모던 프로젝트 속에서 물리적 시간으로서 확고한 지배적 질서를 수립하며 부르주아 우주를 구성한다. 세계 시간을 최초로 수립한 것은 철도회사들이었다. 1884년 본초자오선 회의에서 25개국 대표들은 그리니치를 자오선 제로로 확정하고 하루의 정확한 길이를 결정하였으며 전 지구를 24시간 대역으로 구획한다. 생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자 나아가 생 자체인 ‘시간’은 물리학의 한 변수로 흡수되며 부르주아 우주의 막강한 권력으로서 생을 강제한다. 시간이 새기는 모든 것과 시간에 새겨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서 잊혀져갔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술가들은 근대와 함께 시간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다. ‘저항’이라는 표현은 정당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신체에 새겨지는 혹은 작동하는 시간-아에붐 속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전제는 모든 시인들이 각자의 아에붐 속에 있다는 가정이다. 그 아에붐은 시인의 숙명이기도 하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제각기 생물시계(체내 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시인이건, 죽은 시인이건, 혹은 산 죽은 시인이건 추방된 원천시간의 힘을 빌어 그들의 묘지에 비명을 새길 것이다. 묘지의 비명이야말로 시인의 시간을 새기는 최상의 방식이 아닌가.

2. 시적 현존의 순간
한 사람의 시인이 속해 있는 시간을 묻는 것은 시간 속에 드러난 시인의 현존을 묻는 일이다. 시인은 사적 시간 속에 그 자신의 현존을 드러낸다. 시인의 현존을 시간 속에서 읽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시인의 시간에 대한 특정 관점을 해석해 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현존이 드러나는 개시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기형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어느 푸른 저녁」 부분

처음 보는 푸른 저녁, 그리고 예감, 정지, 정적 등의 이미지들은 바로 그런 개시의 순간 속에 시인이 처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위 시에서 사람들은 태연히 걸어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직 시인만이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 잡혀 있다. ‘모든 신비’란 존재가 스스로를 개시한 순간의 느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뒤집어쓴 ‘딱딱해 보이는 모자’가 표상하는 바는 일상적 물질감으로부터의 괴리이다.
극도의 물질화는 극도의 이질성 혹은 비현실성을 자아낸다.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The Castle in the Pyrenees)」, 그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바위의 극사실주의적 묘사가 오히려 바위와 성곽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인은 낯선 저녁의 풍경 속에서 모든 사물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화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딱딱함’의 이미지, 예컨대 노랗고 딱딱한 태양, 희고 딱딱한 액체(「안개」),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백야」), 딱딱한 덩어리처럼(「늙은 사람」) 등의 이미지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탈시간의 순간 사물이 시간을 벗어나 이질적인 존재로 화하거나, 혹은 시인 자신이 ‘이질적 존재’로 화하는데서 오는 일종의 환시인 것이다. 전자인가 후자인가의 문제를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탈시간의 순간은 존재 변환의 순간이다. 일찍이 메리 더글라스는 ‘황혼(어스름)’에 관한 설득력 있는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밤과 낮 사이의 중간적 시간은 두려움과 탈자아의 불연속적 영역이다. 역광 속에 배후로부터 어두워지는 사물들의 고요는 그러한 순간의 신비를 조용히 말해준다.
기형도의 시에서 ‘처음 보는 푸른 저녁(「어느 푸른 저녁」)’, ‘낯선 저녁(「포도밭 묘지」)’, ‘신성한 저녁(「집시의 시집」)’ 등의 반복되는 저녁의 이미지들은 개시의 순간을 표상하며 ‘도시에서 씌어진 시들’-기형도는 그의 시집 자서에서 자신이 한동안 도시에서만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과는 다른 면면을 보여주는 일련의 ‘비의적인 시’의 비밀과 시인 자신이 속한 시간 영역의 정체를 풀 수 있는 열쇠 구실을 할 것이다.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안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자락 바람도 일지 않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생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포도밭 묘지․2」 부분

위 시에서도 시인은 어느 가을의 낯선 저녁 속에 있다. ‘빛-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실신한 청동의 구름떼’ 등의 이미지들이 형성하는 것은 ‘숭고’와 ‘경이로움’이다. 문제는 여기서 경이로움이 단순히 성스럽고 엄숙한 종교적 표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경이로운 순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녀야 할 새들이 떼지어 떨어져 내리고 물 밖으로는 미친 꽃들이 튀어 나온다. 묵시록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낯선 저녁 천사의 검은 옷자락이 옻나무 그림자 속을 스쳐가고 머나먼 곳에서 주인은 임종을 거둔다. 여기서 주인이란 다름 아닌 신을 의미한다. 
더더욱 주목할 점은 다른 작품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의 전언을 從者가 듣고 있다. 청자가 從者라는 사실로부터 시적 화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론해보면 시적 화자는 다름 아닌 예언자 혹은 사제이다. 연작인 「포도밭 묘지․1」에서 화자는 주인이 떠나고 없는 포도밭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주인이 떠난 포도밭은 ‘묘지’ 그 자체이다. 화자는 신이 떠난 묘지에서 신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해석하면서 詩作을 근원적으로 궁핍한 시대에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궁핍한 시대란 신이 인간을 떠난 시대로서 과거의 신들은 도피해 버리고 도래해야 할 신들이 오지 않은 ‘사이’에 처한 시대이다. ‘세계의 밤(Weltnacht)'는 깊어가고 인간들은 신의 결여를 깨닫지 못한다. 오직 시인만이 도피해 버린 신의 흔적을 찾으며 도래해야 할 신을 노래한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기형도의 위 시들을 해석하는데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하이데거의 시인관과 기형도의 시들이 일정 부분 부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기형도 시의 ‘묘지’란 신이 부재하는 공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묘지 위에 펼쳐진 묵시록적 분위기는 신의 부재 혹은 결여, 즉 ‘세계의 밤’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시인이 그토록 반복적으로 처해 있는 낯선 저녁들은 기형도 자신이 시인으로서 현존하는 순간이다. 마치 우울증 환자들처럼 시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킨 시간 속에 산다. 종종 그 시간 영역 속에서 시인은 사라져버린 신과 마주치기도 하는 것이다. 설령 도피해 버린 신들의 흔적을 찾고 도래할 신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직분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부정할 지라도 뒤엉킨 시간 속에서 즉, 일종의 초시간 속에서 신의 흔적과 마주치는 것을 단순히 예언자적 광기-하긴 모든 예언자들은 광인이었다-로 치부할 수는 없다. ‘혼돈-시간’의 극한이야말로 신들의 영역이 아닌가. 스티븐 호킹은 그의 시간학에서 그러한 신들의 영역을 상정한 바 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무한대로 이끌 경우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영역을 호킹은 ‘인간에게 금지된 영역’이라 불렀다. 그러니 그러한 ‘혼돈-시간’의 극한에서 시인이 도피한 신들의 검은 옷자락을 봤다는 것이 단순히 시적 거짓말이거나 정서적 고양의 산물이겠는가.

3. 미립자형 시간-이파리 양상체
시인이 이런 낯선 시간 속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시인을 소환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시인 자신이 건너온 과거의 응축된 시간핵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시간의 얽힌 영토’에 해당한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기억의 이상한 역학관계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현재는 매순간 이중화되어 한쪽은 과거를 향해 후진하며, 한편은 미래를 향해서 전진한다는 것이다. 이 대칭적 운동에서 전진은 지각이며 후진은 추억이다. 추억은 ‘마치 몸에 그림자가 따라다니듯이’ 지각 곁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시인이 사물을, 혹은 사람을 바라볼 때 이미 그것은 기억으로 전환되며 시인 자신의 전존재의 총체인 과거와 연결되며 이 과거가 그를 소환한다.
시인을 끝없이 소환하는 시간핵은 바로 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시간이다. 기형도에게 그리운 생각들이란 언제나 ‘죽음의 편’에 서있는 것이었다.(「10월」) 땅속에 묻힌 누이와 그밖의 유년의 모든 추억들은 중첩되어 시인을 죽음의 편으로 이끈다. 이미지의 중첩 작용은 결국 시인 자신마저 땅속에 묻혀 있는 이미지로 중첩시킨다(「식목제」), 죽은 누이와 그리운 유년의 기억이 중첩되어 땅속에 묻혀 있는 시인 자신이라는 이미지를 파생시킨 것이다. 시인은 이미 死者인 것이다. 

살아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
―「나리 나리 개나리」 부분

이미 死者인 시인의 ‘기억의 얼음장’은 살아있지 않은 것이므로 봄은 그것을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해,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으므로 얼음장으로 떠다니는 그의 기억, 즉 그의 총체는 죽은 것이다. 시간은 그에게 ‘잠글 수 없는 것’이다. 빗물에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듯(「물 속의 사막」) 그의 시간은 위에서 언급한 시간핵을 중심으로 끝없이 범람하고 있다.
또 한편 시인이 거주하는 이 범람하는 시간의 영토인 시간핵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시인은 말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그 이유는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그 자신의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기형도에서 ‘저녁’이 갖는 의미를 서술한 바 추억처럼 반복, 재생되는 저녁은 시간홀이다. 이 시간홀은 ‘어느 푸른 저녁’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을 빨아들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으로서 이파리나 연기 같은 가장 가벼운 것들을 불러 모은다. 그 시간홀 속으로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린다. ‘얼마나 많은 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 닥쳤는지’ 모른다. 검은 이파리들이 백색의 차량을 뒤덮은 일도 있었다(「입 속의 검은 잎」). 하나의 시간홀이 거대하며 동시에 좁고 어둡기도 하다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숨구멍이 거대할 수는 없다. 거대한 것은 숨구멍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미지의 실체이다. 
그 숨구멍, 혹은 좁고 어두운 입구로 불리는 이파리는 단순히 수동적인 사물인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적 단위로서 물활한다. 종종 그 이파리들은 그의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또 그 이파리들은 수천의 무리를 지어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을 만든다.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이파리-연기’의 이미지는 이미 死者인 시인의 떠도는 영혼이다. 이파리-연기의 이미지, 그 가벼운 영혼의 이미지는 「밤눈」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파리-연기-눈’은 모두 영혼의 이미지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등질적인 것은 아니다. 밤눈의 영혼은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돌고 있다. 따라서 밤눈이 함축하는 영혼성은 이미 死者인 시인이 살기 위해 가야했던 그러한 영혼의 모습이다. 그것은 시인이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피지’에 속한 영혼이다. 시인은 그 생의 피지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시인의 영혼인 ‘이파리-연기’ 이미지는 지상에 뿌리내릴 수 없는 것들이다. 심지어 지상에 뿌리내린 ‘나무들’조차도 그의 시에서는 부단한 존재의 균열 속에 존재한다. 그 나무들은 지나치게 소스라치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건전한 지상적 종족의 이미지를 갖는다. 대지에 굳건히 내린 뿌리와 천상을 향한 수직적 상승 동력 때문에 나무들은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에서 나무들은 ‘놀란 듯 새하얗게 서있는 겨울나무들’(「조치원」)이거나,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내는’ 나무들이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이파리-연기’ 는 또한 세상의 모든 부유하는 영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그 가벼운 영혼을 불러 모으는 시인은 또 한번 사제로 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인 시인이 서있는 자리, 그의 시간홀은 블랙홀처럼 가벼운 영혼들/잎들을 빨아들인다. 어떠한 경우에도 기형도의 시에서 수직 상승/수직 하강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시에서 사물의 역학은 흩어짐/흩날림의 형태를 띤다. 기형도의 시간은 이미 일관된 흐름 속에 있지 않고 끝없는 분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분절된 시간들이 이토록 가볍게 지상을 떠돌고 있는 이유는 그 분절이 완전히 0도에 이르거나 최소 미립자인 시간 원형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마치 무한히 0에 가까이 근접하는 극한의 세계처럼. 끝없이 무한 분할되고 있는 시인의 시간은 착지할 한줌의 영토도 확보하지 못한 채 0도를 향해 무한히 근접해 갈 뿐이다. 이것이 이 시인의 불행한 운명이다.

4. 암흑물질과 공포
나는 서두에서 모든 시인들이-더 넓게는 예술가 일반-마치 생체 시계처럼 각자의 시간 속에 처해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기형도의 시에 내재하는 시간의 형태는 특유의 시간성의 정식화를 요청한다. 그 특유의 시간은 파상적이며 극미 분절 형태를 띠는바 이를 미립자형 시간체로서 이파리 양상체라고 명명한다. 기형도의 산문집에 수록된 1982년 6월 16일자 일기에는 인간은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서너 개 이상 가지고 있으며 그 개별적인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잎을 가진, 그러나 비극적인 나무-인간이다.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내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그 나무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이파리로 상징되는 기형도의 미립자형 시간들은 떼를 지어 공중을 떠다니거나 그의 ‘초라한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일시에 떨어진다. 그 자신의 삶의 파편들, 분절된 기억의 최소 단위들, 즉 시간 원소는 매순간 한꺼번에 출몰한다. 시인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시인은 매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 자신의 삶 전체를 산다. 매순간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다 전체가 밀려오는 것이다. 매순간 전체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無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력이 ‘출생’ 뿐이라고 말한다.
시인이 매순간 살았던 삶 전체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였고, 그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 나아가 그 시간들은 원자화되어 있고 그 원자화된 시간들을 하나의 연속체로 환원할 여분의 힘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다시 말해 그는 잎이 무수히 달린 건실한 한그루의 나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오직 출생뿐인 경력을 가진 시인에게 모든 길들이 흘러들어오고 일생의 몫을 다 경험했다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기적적이었다/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나의 경력은/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나를/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오래된 서책」 부분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부분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식목제」 부분 

이곳은 처음 지나가는 벌판과 황혼,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부분

여기서 우리는 ‘어둠’, 혹은 ‘검음(blackness)’이 정서적, 혹은 서정적 의미소들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에서 보듯 그것은 고유의 물질성을 띠고 있다. 「식목제」에서 지상으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리는 ‘어둠’은 분명히 주어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실체(substance)이다. 그 어둠/검음은 시인이 도처에서 감지했던 보이지 않는 숨구멍의 거대한 실체이다. 실체란 언제나 거대할 수밖에 없다. 실체는 언제나 개별적 실존의 총량보다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포의 대상이다. 화자의 입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검은 잎은 그것이 잎이어서가 아니라 검음 이어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시나 예술에서 색채는 일반적으로 서정적 코드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기형도이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둠’의 이미지가 단순히 우울의 정서를 표출하는 기표가 아니다. 노발리스의 낭만적 신비의 상징인 ‘푸름(「푸른꽃」)’이나 고호의 그림에 등장하는 광기의 의미소로서의 ‘노랑’처럼 말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파편화되고 분절된 시간은 이파리로 표상되고 그 잎은 ‘검음’ 자체이다. 검음은 색채가 아니라 실체다. 나는 고유의 물질성을 띤 이 ‘검음’을 하나의 실체로 규정하고 이를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 명명한다. 암흑물질은 우주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물질로서 우주에 안개처럼 분포하는 ‘유령입자(WIMP)’라는 소립자로 추정된다. 암흑물질에 대한 정의는 사실 무의미하다. 그 실체에 대해 정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속성상 인간의 언어로 규정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주적, 물리적 현상에 대한 숱한 공식과 정의가 과연 그 실체를 얼마나 포착하고 있는가.
한편 ‘검음’이 갖는 에너지는 ‘암흑 에너지(dark energy)'라는 개념을 차용해 규정할 수 있으며 포우의 단편에 등장하는 ‘검음’과 비견될 만하다. 포우의 상징적 동물 고양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곳의 삶을 파괴하는 ‘검음’의 화신이다. 고양이의 불길함은 그것이 늘 어둠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대낮에 어슬렁거리는 도시 한구석을 어슬렁거리는 들고양이들도 어둠 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들은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 비약하자면 그들은 ‘이곳’에 없다. 그들은 비가시적인 ‘저편’에 있으며 그들의 불길한 신비의 ‘눈’은 이곳과 ‘저편’의 경계 영역이다. 그들은 죽어 사체로 변질되었을 때만 ‘이곳’에 전면적으로 현존할 수 있다. 변질이란 질적 전환이며, 질적 전환은 존재 변환을 의미한다. 「조치원」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낙향하는 사내가 0시에 ‘검은 한 마리 새’로 변환되어 땅 위를 천천히 나는 광경을 목도한다. 존재 변환의 순간인 것이다.
‘이곳’이란 혼돈과 대조되는 문명적 경계의 이편이다. 언어, 윤리와 규범, 문화 등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의 ‘형상/이데아’야말로 이편의 질서와 논리를 역설적으로 표상하는 최초의 개념일 것이다. ‘저편’에 대해서는 숱한 풍문이 있어 왔다.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라 부르며 라깡은 ‘The Real’, 즉 실재계라 부른다. 기형도에게 그것은 경계 지을 수 없는 것이며, 매순간 도처에 ‘이곳’과 ‘저편’은 혼재해 있다. 그러한 ‘혼재성’과 가장 극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이 생체험의 시간의식이다. 왜냐하면 매순간 시간이 공간을 ‘再編’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재편 속에서 존재는 변환 가능한 무규정적 현존이 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기형도와 그의 시간표상인 물질로서의 검은 잎의 관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기형도의 시에 등장하는 이파리-연기 이미지가 기형도 작품의 시간성을 해독하는 코드임을 밝혔으며, 그의 시간성이 연속성을 잃은 것은 그 자신이 혼돈-시간의 극한에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 혼돈 시간의 극한은 그로 하여금 ‘세계의 밤’으로 진입하게 한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이’에 처한 ‘세계의 밤’에 시인은 사제 혹은 샤먼으로 존재한다. 본래 샤먼은 시인이며 의사이고 대장장이이다. 그는 이 ‘세계의 밤’이라는 공간에서 파편화된 시간을 살며 동시에 그것들을 ‘다룬다’. 왜냐하면 ‘검음’은 ‘저편’ 혹은 ‘주변부’의 에너지이여서 초월적 존재인 샤먼-시인에 의해 다뤄질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집시의 시집’에 단 한번 유사-샤먼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자신의 손을 ‘신의 공장’이라 부르고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항상 조용히 취해 있는,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빈사의 샤먼이었다. ‘저편’의 검음은 그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검음’은 ‘입 속의 잎’으로 입 안에 들러붙어 그를 질식시키고 마는 것이다. ‘잎 속의 검은 잎’은 단순한 동음어에 의한 언어유희만은 아니었다. 입 속의 잎은 형태상 ‘혀’를 의미하는 것이다. 혀가 곧 ‘검은 잎’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외상인가. 그의 시에서 ‘검은 잎’이 가지는 존재-시간론적 위상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그의 시 곳곳에서 공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밤낮으로 시간의 稜線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소리 하나하나 生捕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서야 하는 哨兵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除隊兵」 부분

빙판에 숨죽여 엎드린 썰매, 날카롭게 잘린 손칼만큼의 공포를
―「비가」 부분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의 恐怖
―「노을」 부분

마치 공포에 매혹되고 사로잡혔던 포우라는 불운한 예술가처럼 기형도에게 공포는 일상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었고 ‘문득 혹은 불현듯’ 자신을 포획하는 ‘거대한 숨구멍’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검음’이라는 물질적 실체로서 물활하며 시인의 실존적 기관인 혀가 되어 그를 잠식한다. 그가 젊어서 죽은 장소는 심야극장 한 구석이었다. 예술가의 죽음이 관심거리가 되는 것은 그 죽음에 범속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형도를 주제로 괴담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이른 죽음을 불러올 만큼 혼돈과 공포 속에 살았던 기형도라는 시인을 애도하고 있을 뿐이다.


|당선소감|


지난겨울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생의 감각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신체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글쓰기는 끝없이 경계에 서는 것이며 원본 없는 자기 복제라는 두려운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나는 계속 갈 것이다. 숱한 언어의 기만과 미망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송곳처럼 단단해져야 할지 모른다. 스스로 속지도 속이지 않으면서 곧장 갈 것이다.
늘 힘든 내색 없이 뒷바라지 해주는 남편과 책상 한 구석에서 책베개를 하고 잠들던 쪼맹이,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부모님과 가족들, 나의 첫 번째 독자였던 동생 은영, 은정, 마음의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아직 미숙한 글을 당선작으로 밀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리토피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오순영
․1973년 제주도 서귀포시 출생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철학과 대학원 수료



|심사평|
차분한 어조로 다시 생각하자

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시의 시대가 열렸다. 너무나 많은 시인, 너무나 많은 시집, 그리고 너무나 많은 시 비평까지. 분명 90년대 이후의 시는 물적 팽창의 한계를 달리고 있다. 반면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 비평의 수효는 줄고 있다. 가뜩이나 비평이 외면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추세는 난감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리토피아≫는 한 명의 시 비평가를 세상에 추천하기로 했다. 이 비평가를 내놓은 이유는 새로운 시의 시대에 양적 팽창을 도우라는 뜻은 아니다. 비평의 질적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인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추천작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 재고하는 것을 권유해 본다. 이론의 과도한 도용이다. 이론은 시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평이 이론의 교술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재의 추천작은 이러한 위험을 안고 있다. 보다 객관적이고 명료한 문장을 사용했으면 한다. 시 비평이 시만큼 상징적인 문장을 쓰는 것도 좋겠지만,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시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시야도 고려해야 한다. 
추천작은 기형도의 시를 새롭게 읽고 있다. 비슷비슷한 비평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기묘한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신인답지 않게 패기 있는 모습도 후한 점수를 주는 요인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데뷔작은 데뷔작일 따름이다. 이후 부단한 노력과 열정으로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앞날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김남석(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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