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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외국문화탐방/이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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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66회 작성일 08-02-2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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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탐방|
카텝 야신의 삶과 문학적 여정
 이상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란 작품을 통해 1980년대의 한국에 더없이 강렬한 울림을 제공했던 프란츠 파농, 알제의 태양과 모래, 바다 냄새에 대한 매혹적인 유혹을 낳았던 작가 알베르 카뮈, 불어로 쓰는 문학을 포기하는 대신 연극을 통해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던 카텝 야신……. 이들을 묶는 공통점은 바로 그들이 모두 마그레브 출신 작가들이라는데 있다. 
북아프리카의 불어권 지역인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를 한꺼번에 지칭하는 개념인 마그레브(Maghreb)는 식민주의라는 역사의 질곡을 거친 땅이자 유럽적 정체성과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지역을 의미한다. 서구문명의 수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미개한 미지의 땅으로 묘사되었던 19세기말부터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한 1960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마그레브 문학은 아프리카에 이식된 서구 문화를 대변하는 창인 동시에 역사의 중압감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현장이었다. 아프리카와 알제리를 대표하는 지성인로서의 카텝 야신은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그 누구보다 절실히 체감한 작가이자, 글쓰기에 만족하지 않고 문학과 정치의 영역을 넘나들며 아프리카의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철저히 고뇌했던 인물이었다. 카텝 야신만큼 글쓰기에 대해 고통스러워했던 작가가 있을까? 야신에게 문학의 의미는, 장 게엔노의 '빵과 평화' 속에서의 지성인이 그러하듯, 남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파고들수록 더욱 괴로워지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문학이 사회 속의 존재로 이미 규정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엘리트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에, 야신은 문학을 포기하는 대신 민중 속으로 뛰어드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알제리 문학 약사
드레퓌스 사건과 정교 분리, 교육제도의 혁신적 변화를 가져온 쥘 페리 법안의 통과, 제국주의의 본격화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점철된 제3공화국(1870~1940)하에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에게 알제리의 모습은 알퐁스 도데가 '타르타랭 드 타라스콩'(1892) 속에서 기술한 이미지를 뜻했다. 퇴폐적인 엘리트였던 도데 생각에 방대한 알제리 영토는 프랑스 국기 아래 개발해야 할 보고(寶庫)였다. 관능과 오만한 순수, 오아시스와 사막의 혼합으로 비춰진 이러한 알제리의 모습은 파리 문화와 단절하기를 원하는 많은 작가들에게 촉매제로 작용했다. 그들은 서구인의 눈으로 알제리 현실을 마음껏 재단했다. 식민지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앙드레 지드가 '콩고 여행'를 통해 식민주의의 폐해를 고발한 1925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1893년의 알제리는 지드에게조차 오직 발견의 기쁨만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다. 지식인들의 현실 오판은 필연적인 것일까? 당시의 아프리카 현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무지는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발간되기 전까지 소련의 현실을 끝없이 미화해댔던 1960년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국적 묘사에 지친 알제리인들은 2차대전을 전후해 직접 프랑스문학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그들은 식민자들의 언어를 빌려 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언어적 분열을 튀니지 작가 알베르 멤미(Albert Memmi)는 피식민자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소외 양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피식민자의 초상' 속에서 식민지 상황을 분석하면서, 멤미는 피식민자의 내면을 황폐케 한 ‘언어적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모국어는 능욕 당하고, 짓밟혀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이 언어를 멀리하고, 외국인의 눈에 그것을 숨기려고 애쓴다.(pp. 126~127)

독립을 위한 투쟁의 성공은 이러한 자기 비하의 종식을 멤미에게 의미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가 청산될 때, ‘불어로 씌어진’ 알제리 문학의 개념은 용어 자체가 이미 모순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치적 독립에 뒤이어 바로 문화적, 언어적 독립이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62년 독립 이후 마그레브 작가들에 의해 씌어지는 작품들의 수는 오히려 급증할 따름이었다.
알제리에는 언어적 복수주의(複數主義)가 존재한다. 고전적이고도 방언 형태의 아랍어 외에도 다양한 구어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 이후 발생한 문제들은 아니었다. 카빌리의 산악지방에서는 카빌 어가, 사막에서는 투아레그 어가, 오아시스에서는 모자비트 어가 구사되고 있었고, 각 언어에도 또한 수많은 방언들이 존재했다. 게다가 알제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문맹의 문제였다. 1962년의 경우 전 인구의 85%가 불어를 구사할 줄 몰랐으며, 아랍어와 불어를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많은 알제리인들은 여전히 문맹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작가들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가장 예민하게 의식한 작가가 바로 카텝 야신이다.


시와 혁명은 하나다
알제리 서쪽 콘스탄틴(Constantine)에서 1929년 8월 6일 출생한 그는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이자 동시에 시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불어권 알제리 문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네지마'의 저자였다. 또 프랑스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작가이자, 민족주의 투쟁을 일찍부터 결심한 작가였다. 아랍어 성(아랍어로 ‘Kateb’은 ‘작가’를 뜻한다)이 말해주듯, 카텝 야신은 아마 작가로서의 천형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회교도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프랑스와 이슬람 문화를 공유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는 일찍부터 연극과 시 쪽으로 교양을 쌓게 된다. 그러나 코란 학교를 졸업한 후 카텝 야신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당시 ‘늑대 아가리(gueule de loup)’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프랑스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이러한 선택은 심각한 언어적, 문화적 외상(外傷)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정체성의 상처는 '별 모양의 다각형'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그가 불어로 글 썼던 모든 작품들 속에서 한결같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 가장 극적인 경험은 야신의 나이가 15세가 되던 1945년 5월 8일의 사건일 것이다. 야신은 식민지의 부조리한 상황에 항거하여 회교도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 세티프(Sétif) 봉기에 참가한 후 체포된 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시와 혁명은 하나다(Poésie et révolution ne font qu'un)”라는 작가의 강령은 이때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데모 가담 때문에 체포된 어린 고등학생은, 차후 그의 작품 속에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될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의 통과 의례를 감옥을 치렀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했던 야신의 눈에, 그 반란은 계몽주의 시대의 언어를 배반한 이방인(프랑스인)의 언어에 대한 반란이었다. 아마도 앙드레 말로가 '모멸의 시대'나 '고야'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감옥은 그에게 인간조건에 대한 심층적인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 9월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 야신은 보네(Bone)에서 네지마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시적, 개인적 차원은 점차 고통 받는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 승화되어 나간다. 그러기에 야신의 반항 속에는 지상에서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영웅적인 제스처, 가족과 아들을 빼앗아간 폭력 때문에 미쳐버린 후 오랫동안 블리다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어머니의 비극, 이미 결혼한 사촌이었던 네지마와의 불가능한 사랑 등 모든 것이 중첩되어 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기에, 그는 아나바를 거쳐 프랑스로 향한다. 세티프 봉기로부터 정확하게 1년 후인 1946년, 그는 첫 번째 시선집 '독백'을 출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 스승으로 부를 수 있는 시 모하메드 타하르 벤 루니씨(Si Mohamed Tahar Ben Lounissi)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야신이 작품을 팔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작품 쓰기를 계속하도록 아낌없이 격려해 주었다. 1948년에는 다시 알제리로 되돌아와 공산당 성향의 일간지 '알제 레퓌블리캥'에 입사한 후 1951년까지 근무했다. 이 시기에는 소련을 여행한다. 그 후 항만노동자 일을 하다가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다시 이탈리아, 튀니지, 벨기에, 독일 등 외국으로 떠난다. 1950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어머니와 두 명의 여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작한 여행 혹은 유형(流刑)은 그 후 20여 년 동안 계속된다. 이 시기의 많은 시간들이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그가 방문한 도시들을 순서대로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알제, 파리, 밀라노, 튀니스, 브뤼셀, 함부르크, 본, 스톡홀름, 브뤼셀, 밀라노, 몬테로쏘, 트리에스테, 자그레브, 튀니스, 베를린, 피렌체, 파리, 알제, 로마, 네미보, 모스크바, 키슬로보드스크, 파로스, 세드라타, 비르 부흐크…….
1948년부터 1953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포르쥬≫, ≪콩바≫, ≪솔레이유≫, ≪에스프리≫, ≪메르퀴르 드 프랑스≫, ≪레 레트르 누벨≫ 등 여러 잡지에 기고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또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야신은 1972년 알제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극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에는 알제리 해방전쟁이 발발하고, 1955년 1월에는 ≪에스프리≫ 지에 「포위된 시체」가 발표된다. 그리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과 파리에서 만나 교분을 쌓는다. 또 연출가인 장-마리 세로(Jean-Marie Serreau)와의 협력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1956년에는 대표작 '네지마'가 쇠이유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며, 1959년에는 '보복의 순환', 암살당한 알제리인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담은 비극 '포위된 시체', 소극 '지식의 가루'가 발간된다. '보복의 순환'은 장-마리 세로에 의해 연극으로 만들어져 195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비밀리에 상연된 후 파리에서 공연을 가진 작품이었다. 1960년에는 신문 <아프리크-악시옹>에 기고하기도 했다.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선포한 후, 그는 이 해 7월 조국으로 되돌아가 <알제 레퓌블리캥>에 다시 기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2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시기에 그는 프랑스와 알제리로 오가며 작품 활동에 주력했는데, 이때 그의 많은 극작품들이 프랑스 극장에 오르기도 했다. 북부 베트남에 체류한 시기도 이때였다. 1971년 다시 알제리로 되돌아와 창작에 몰두하며, 「모하메드가 네 가방을 가져간다」, 「사웃 에니싸(‘여성들의 목소리’라는 뜻), 「2천 년의 전쟁」, 「서부의 왕」, 「배반당한 팔레스타인」, 「희망의 도살장」 등 아랍어 방언으로 씌어진 일련의 연극들을 ‘노동자 문화집단(ACT:Action Culturelle des Travailleurs)’과 함께 무대에 올렸다. 그의 연극을 관람한 알제리인들 숫자는 백만 명을 상회했다. 1975년에는 ACT가 파리 가을축제에서 「모하메드가 네 가방을 가져간다」와 「2천 년의 전쟁」을 무대에 올리며, 알제리 이민노동자들을 위해 동독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이하여 야신이 불어로 쓴 작품 「과격공화파 부르주아 혹은 몽쏘 공원의 유령」이 토마스 겐나리(Thomas Gennari) 연출로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상연되었다. 그 외에도 '별 모양의 다각형'(1966), 민중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내용의 '고무 샌들을 신은 남자'(1970), '단상(斷想)들의 작품'(1987) 등의 작품이 차례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단상들의 작품'은 야신이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글들을 그의 친구 자클린 아르노가 편집한 것이다. 120개 정도의 시선집인 이 책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는데, 보다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그의 요구가 전혀 식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여러 연극작품을 가지고 외국 순회공연을 계속했고, 1989년 10월 28일 그르노블에서 사망한 후 알제에 묻혔다. 

카텝 야신 방식의 투쟁
소설을 통한 참여
야신은 카빌리 산악지방에서 ‘원주민들’이 겪었던 끔찍한 상황에 대해 여러 글을 통해 고발한 작가 알베르 카뮈가 먼저 걸어갔던 길을 뒤따라갔다. 하지만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카뮈와는 달리, 알제리인이자 아랍인, 그리고 아프리카 인이자 베르베르 사람이었던 야신은 자국민들의 잠들어 있는 의식을 일깨우면서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었다. 사춘기의 나이에 폭력적인 식민지 상황과 감옥을 경험했던 야신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야신을 휘감고 있는 열정과 불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석하고도 사실적이며, 때로는 앞을 예견하는 듯한 그의 작품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정치, 사회문제, 종교, 인터내셔널리즘, 제국주의의 폭력, 정체성 문제 등 고통 받고 투쟁 중이고 구원을 청하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주제가 그의 작품 속에 들어있다. 베트남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투쟁은 소설과 연극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구체화된다. 불어로 씌어진 소설이 그의 절망을 알게 모르게 드러내는 공간이었다면, 아랍어 방언으로 기술한 후기 극작품은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거칠게 정의할 수 있다.

프랑스인에게 2차대전의 종식은 곧 해방을 의미했지만, 그 해방은 알제리인들에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45년 5월 수만 명의 알제리인이 사망한 세티프 봉기가 일어난다. 자신의 첫 번째 소설 '네지마' 속에서 야신은 고등학교 시절과 이 봉기를 회상하고 있다. 데모에 참가한 후 학교에서 쫓겨난 라크다르(Lakhdar)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차를 탄다. 열차에 탄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불어로 씌어진 역명(驛名)을 읽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아랍어로 배우지 못한 사실을 후회하며, 그는 자신을 배척한 학교제도가 자신의 언어 세계를 배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 에피소드 속에서 프랑스 학교는 화해의 요소, 동화의 촉매제로 더 이상 제시되기를 그친다. 이제부터 그곳은 모든 모순들이 가시화되고, 폭발하는 장소로 변모하며, 막다른 골목, 상실, 배반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네지마'에 대해 야신은 이 작품이 전부 불어로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작품, ‘아랍’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편집자 역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불어로 구상하고 씌어졌지만, '네지마'는 전적으로 아랍적인 작품이다. 그 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킬 경우 이 작품에 대해 유효한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p. 6)

자전적 성격의 두 번째 작품 '별 모양의 다각형'도 언어적 폭력을 연상시키면서 끝맺고 있다. 문인 집안에서 출생한 화자는, 어린 시절 모든 사람들이 그가 작가가 되는 것을 기대했다고 회상한다. 야신은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삼촌들처럼, 조부모들처럼’(p. 179) 아랍어로 글 쓰는 작가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프랑스 학교에 보내버리고, 이러한 결정은 질투심을 폭발시킨다. 프랑스인 여교사를 환심을 사려고 자기 아들이 애쓰는 모습을 어머니는 참을 수 없었고, 게다가 아들이 말하는 언어는 정작 어머니 자신이 모르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야신은 비극적인 배반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여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날들조차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탯줄의 두 번째 단절, 어린이를 어머니에게 더 이상 가깝게 만들지 않는 내적 유형(流刑)을 끊임없이 느꼈다. (……) 나는 소외될 수 없는-하지만 이미 소외되어버린-두 가지 보물들인 어머니와 언어를 동시에 잃어버렸던 것이다!(pp. 179~180)

라쉬드 부제드라(Rachid Boudjedra) 같은 일부 작가들은 아랍어로 되돌아와 알제에서 작품을 출간하면서 이러한 불화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언어란 보다 광대한 제도 속의 하나의 조각에 불과했다. 소설 장르 역시 마그레브의 문학적 전통과 무관했고,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에도 파리 문화의 지배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민중 연극으로의 야신의 투신(投身)은 소설을 탈피하고 구어적 문화 전통과 합류를 시도함을 의미한다. 그의 선택은 소설이 서구로부터 이식된 장르임을, 그러기에 아프리카의 현실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부적절함을 함축하고 있었다.
카텝 야신의 소설은 찢겨진 구조, 즉 머리 위로 퍼부어대는 곤봉질 때문에 (눈앞에) ‘별이 총총한’ 구조로 되어있다. 시간과 공간, 인물들은 서로 뒤범벅이 되어있으며, 1960년대 알제리인들의 운명이 그 속에 모두 들어있다. 그의 소설들은 프랑스로의 유형, 세티프 대학살, F.L.N.(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내부 투쟁, 프랑스에 대한 협력의 함정 사이에서 도저히 어디로 정착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알제리인들의 수난 어린 운명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다가 10세기에 이집트로부터 북아프리카로 강제 이송된 ‘달의 아들들(Fils de la Lune)’ 부족은 침략자에 대한 저항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 야신에게 있어 흑백 양분론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서로 교배된 문화 내부에서는 모든 것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프랑스어랑 결혼한 작가 자신과도 같이, 그리고 네지마가 알제리인 아버지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프랑스인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사생아였던 것과 같이. 네지마가 불러일으키는 미칠 듯한 욕망, 혹은 간음을 갈망하는 많은 알제리인들의 정서는 바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알제리의 모습, 그리고 타자와 불화적 관계 속에서야 해답을 발견하는 알제리의 이미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타자가 이미 자신 속에 편입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학살집행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천진난만함과 미소로써 제물을 바치는 사제들을 한숨짓게 했던 ‘이해받지 못하는 희생자’ 네지마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연극을 통한 교육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속에서 제기한 바 있는 “누구를 위해 글 쓰는가?”라는 질문은 야신의 경우처럼 문학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비극으로 화하고 있다. 야신은 알제 근처의 아나바에 정착한 후 문학을 위한 독자들을 만들어내기를 모색하는데, '모하메드가 네 가방을 가져간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민중 아랍어로 쓴 최초의 연극인 이 작품은 알제리 혹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인들에게서 대성공을 거둔다. 주인공은 현대 알제리인의 생활을 특징짓는 이민노동자이다. 하지만 뿌리 뽑힌 이 프롤레타리아의 현대적 노마드(유목) 주위로, 대중적 노래, 고대의 설화 혹은 전설들로 채워진 전통적 노마드의 반향들이 울려 퍼진다. 경직된 활자언어와는 반대로 무대 위의 언어는 더 유연하며, 일상적 언어의 복잡성과 알제리에 존재하는 언어의 다양성을 더 쉽게 반영한다. 그 언어는 글쓰기가 강요하는 엄격한 언어적 선택, 또 그것이 야기하는 획일화와 빈곤화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야신은 언어와의 유희를 통해 현대의 대부분의 알제리인들이 체험하는 언어적 카오스를 멋들어지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였던 야신은 이러한 알제리의 현실을 더 큰 구조 속에서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었다. 알제리가 독립된 후 그의 투쟁은 오히려 배가된다. 카텝 야신의 연극에서의 성공은 소설만큼이나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제리 독립 후 여러 해 동안 알제리의 아랍어 방언으로 작품을 쓰면서, 야신은 자기 작품을 가장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고, 자신의 창조적 부식토라 할 수 있는 자국민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작품인 '모하메드가 네 가방을 가져간다'는 알제리에서 수십 만 군중 앞에서 상연되었고, 그 후 1970년대 초에 프랑스의 알제리인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가지기도 했다.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간파한 당시 공권력은 야신의 극단인 ‘노동자 문화집단’에게 일종의 내적 유형을 강요했기에, 야신은 알제의 중심인 밥 엘 오에드(Bab El Oued)에서 모로코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시디 벨 아베스(Sidi Bel Abbes) 지방극단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견제가 야신의 전투력을 무화시키지는 못했다. 알제리 대중들, 곧 작가 자신이 항상 연대감을 느끼고 있던 억압받는 자들과의 만남은 야신으로 하여금 ‘목소리 없는’ 국민들이 근심거리를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늘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극단 창단으로 연결되지만, 애초에 그는 문화를 불신했다. 문화가 사회적 불평등을 재현하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국민들 대부분이 아직 문맹이고, 바로 자신이 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극단을 창단하는 방식을 택한다. 시디 벨 아베스 지방극단 감독으로 임명된 뒤에도 그는 자신의 베르베르인 뿌리, 여성의 해방 등 동시대적인 동시에 자유로운 주제를 찾아 나섰다. 희곡의 주제에 대한 야신의 태도는 명확하다.

우리 시대에 세상의 지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그레브를 거친 후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베트남을 상기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야신의 연극세계는 민중의 편에 서서 권력에 대항하는 작가의 소명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 고등학생, 여성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언어를 부여하고 있으며, ‘사랑’과 ‘혁명’에 줄곧 기반을 두고서 형태적 실험을 거듭해나갔다. 예를 들어 '별 모양의 다각형'에서는 국가적 대의명분이나 주체성의 문제보다 억눌린 자들의 투쟁의 목소리가, 「철학자 구름 같은 연기의 세상보기」에서는 부패와 억압, 혼란의 시기(이 작품은 알제리가 독립한지 불과 2년 후에 씌어졌다)를 겪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져 있다. ‘구름 같은 연기’는 자신의 문제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마을 사람들의 문제들을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가난한 철학자이다. 그는 여전히 재치와 유머를 잃지 않고 있는 인물이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서 빌린 냄비에 하나 남은 토마토를 넣어 돌려주면서 냄비가 임신을 했다고 말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거지에게 적선하기를 거절하면서도 재치를 부리는 식이다. 또 좁은 방에서 북적거리며 살아가는 노인네의 한탄에 대해, 나귀를 빌리러 온 건방진 젊은이에 대해, 환상을 꿈꾼 신들린 사람에 대해, 기도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회교도에게,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한결같이 재치와 유머를 표한다. 극도의 가난이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 오히려 여유를 가져다주었다고나 할까. 그는 무료철학학교를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우주의 이치와 알라의 의미를 재치 있게 풀어주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의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마지막 표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알제리 문제는 알제리인들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야신은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으면서도 그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알제리인들에 대해, 인습에 젖어 현실을 개혁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알제리인들에게 깨어나기를 간접적으로 요구한다. 결국 문제만 남겼을 뿐 해답은 전혀 제시하지 못한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해, 알제리인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와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이 작품은 지독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에서 불과 30분 동안 진행되는 이 짧은 작품 곳곳에 발견되는 날카로운 풍자들은 시기와 지역을 뛰어넘어 이 작품에 충분히 보편적이고도 현실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자클린 아르노(Jacqueline Arnaud)는 구어체 표현으로의 야신의 회귀를 제라르 드 네르발이 발루아 왕조의 노래들을 채집한 것에 비교하고 있다. 글자를 모르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음유시인인 시-모한드(Si-Mohand) 방식처럼, 이러한 귀환을 꾀하는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야신의 민중연극 체험은 모국어의 구어성으로의 단순한 귀환으로 축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암루슈(Amrouche)와는 달리, 야신은 분열과 모순을 모르던 원래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상실한 모국에 의해 유혹 당하지 않는다. 그의 연극 속에서는 구어로의 회귀가 식민지화에 의해 파괴되고 부패한 알제리적 본질의 부활로 단순히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의 공동체와 민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야신에게 있어 민족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것은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 자클린 아르노의 눈에, 이러한 극단주의는 바로 1930년대에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잔혹 연극’, 즉 글로 씌어진 텍스트의 제국주의에 맞서 과격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연극의 이데올로기와 합류한다. 야신은 “불어권 마그레브 작가라는 개념 자체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불어권 마그레브 문학 연구Recherches sur la littérature maghrébine de langue française, p. 1009), “불어권 마그레브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하기를”(앞의 책, p. 1011) 기꺼이 선택한다. 

카텝 이후에도 마그레브 문학은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있다. 단지 언어나 정체성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주제들을 오늘날 나빌 파레스(Nabile Farès), 라쉬드 미무니(Rachid Mimouni), 하비브 텡구르(Habib Tengour), 아씨아 제바르(Assia Djebar) 같은 알제리 작가들이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저항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제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만든 제도를 공격했지만, 오늘날 문체와 주제의 다양성을 통해, 알제리 독립으로부터 탄생한 ‘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끔 불어로 글 쓰고 있는 중이다.

카텝 야신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자신의 일생을 괴롭힌 대립적인 개념들, 다시 말해 식민주의자/피식민자, 본국/식민지, 문화/야만, 교육/문맹, 엘리트/민중, 서구/아프리카, 서구/아랍 등의 도식을 그가 훨씬 뛰어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신음하는 베트남의 고통은 억압받는 아프리카의 신음 그 자체였다. 노동자로서의 야신의 여정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걸쳐있지만, ‘세계가 곧 하나’라는 그의 철저한 현실인식이 없었더라면 방문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훨씬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라짐은 유달리 아프게 느껴진다. 문학적 선택과 연극을 통한 참여가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일까. 불어를 통한 자기 이야기 기술에서 아랍어를 통한 대중들의 깨우침으로의 변천과정이 마치 하나의 성장소설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일까. 야신의 삶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담론으로 풍성한 우리 사회, 우리 시대에도 왜 문학이나 예술이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는지를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이상빈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 제8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한국외국어대 외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불어과 대우교수 역임
․현재 한국프랑스문화학회 상임이사,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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