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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계간평(소설)/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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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소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천운영∙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유시연∙
「바디페인팅 제1호-생활의 자세」 박금산∙
「달팽이들」 하재영∙
욕망의 잉여와 고립된 자들의 상상력
고명철|문학평론가
1. 두 가지 의문
두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첫째, 욕망에 관한 진부한 물음이다.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욕망은 충족될수록, 더 큰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을 말끔히 비워내지는 못할망정, 욕망의 잉여를 경계할 수는 없을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욕망을 품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둘째, ‘감금의 상상력’에 대한 궁금증이다. 타자에 의한 게 아니라 제 스스로 어떤 공간에 갇힌 채 세계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은, 기존의 ‘감금의 상상력’과 어떤 점에서 차이를 지닐까. 제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소설가는, ‘지금, 이곳’의 문학제도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위치 지을 수 있을까. 인간관계의 부재에 매혹을 느끼는 주체는 어떻게 세계의 고립을 견뎌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두 가지 의문은 천운영, 유시연, 박금산, 하재영의 단편을 읽은 후 내게 떠오른 상념들이다. 그들 모두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들인바, 그들이 고민하는 삶과 서사의 문제들에 귀를 기울여본다. 혹, 우리가 외면하고 있거나 망실하고 있, 우리들 삶의 상처와 문제들에 대한 어떤 치유와 해결의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기대를 가져볼 일이다.
2. ‘욕망의 잉여’를 넘어서기
천운영 소설의 매혹은 우리들의 내밀한 곳에 감춰진 욕망을 해부하는 바, 그의 서사적 특질을 이른바 ‘욕망의 해부학’이라고 호명을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는 ‘욕망의 해부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 누드 사진 촬영을 하는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에 들어온 몸만이 피가 흐르고 온기가 도는 살아 있는 몸”(90면)으로, “몸을 구부리고 뒤틀고 벌리고 짓누르는 동안 오히려 몸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몸에 휘감기는 조명만이 유일한 온기라는 걸 깨달아야 비로소 풍부한 표정이 나온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88면) 말하자면, 그에게 카메라 밖의 존재들은 죽어 있는 것에 불과하며, 카메라로 포착한 피사체들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피사체의 육신을 다양한 인위적 포즈로 억압할 때만이 자유로워진다고 믿는다. 그에게 아내는 있지만, 아내는 그에게 어떠한 존재 가치도 띠지 않는다. 아니, 그가 아내에게 소외되어 있다. “아내에게 그는 투명인간이나 다름 없”(106면)으며, “그는 아내의 욕망에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일 뿐”(108면)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바로 이들 부부다. 그러다보니 남편은 누드 촬영을 통해서 자신과 타자를 향한 욕망을 충족하며, 부인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향한 욕망을 충족한다.
그런데, 이러한 부부의 욕망은 어느 소년이 이들 부부 사이에 틈입을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부부 모두 이 18세 소년을 통해 서로 다른 그들만의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아내의 경우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한껏 충족하려고 한다. 이미 그동안 온갖 방편을 통해 젊음을 향한 욕망과 그 표현에 자족하고도 남았지만, 아내의 욕망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부정하며, 소년을 통한 젊음의 욕망을 채우고 채우려 한다. 이쯤 되면, 아내의 욕망은 ‘잉여의 욕망’ 혹은 ‘욕망의 잉여’ 그 자체다.
반면, 남편은 소년을 통해 “그에게는 이미 사라져버린 육체에 대한 다정함과 동정심”(103면)을 발견한다. 카메라의 렌즈 너머에 있는 피사체의 인위적 포즈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었던 그에게, 소년은 그러한 자유로움이 아닌 육체 스스로가 자아내는 자연스러움의 자유로움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근데 아저씨 제가 생각한 게 있는데 얘기해도 돼요?”
그는 담배를 피워 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있잖아요, 왜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들 말예요. 그런 사람들 대상으로 누드 사진을 찍는 건 어때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죽기 전에 자기 몸 한번쯤 찍어보고 싶지 않겠어요? 더 늙고 병들기 전에 말예요. 우리 할아버진 지금 누워 있어서 찍지도 못하잖아요. 아니면 말예요. 너무 뚱뚱한 사람, 너무 마른 사람, 너무 작은 사람, 암튼 자기 몸에 자신 없는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는 거예요. 우리가 정말 근사하게.”
“그래.”
“진짜 괜찮은 생각이죠? 아저씨도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요. 광고도 하는 거예요. 당신 몸은 아름답습니다, 당신 몸을 가장 아름답게 찍어줄 모모 사진관. 그래, 아저씨 이름이랑 내 이름이랑 따서 J&J 사진관이라고 하면 되겠다. 내가 생각해낸 거니까. 당연히 나도 권리가 있죠. 안 그래요? 당신 몸을 가장 아름답게 찍어줄 제이제이 사진관. 싫으면 그냥 아저씨 이름만 써요. 아, 당신 몸은 특별합니다가 더 좋겠다. 모델들 절대 사절, 이것도 꼭 넣어야 돼요. 그래야 사람들이 맘 놓고 오죠. 이참에 아저씨 먼저 찍어볼까요? 그럼 아저씨 배하고 머리통하고 같이 나오게…….”
녀석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는 눈을 감고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늘을 향해 길게 담배를 내뿜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110~111면)
소년은 전문 누드모델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주자고 제안한다. 인위적인 포즈를 취하는, 하여 아름다움의 욕망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육체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혹시 자신의 육체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육체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촬영할 것을 제안한다.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의 강박증으로부터 놓여나고,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규정되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름다움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발현되고, 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욕되지 않는다. 소년과 남편의 욕망이 아내가 지닌 욕망의 성격(잉여의 욕망)과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천운영이 욕망을 해부하면서, 욕망의 이질적 성격을 서사화하였다면, 유시연은 그의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리토피아, 2006년 여름호)에서 욕망의 생명성을 발견하고 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는 사진가가 문제적 인물이었다면, 유시연의 소설에서는 얼음조각가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도망치듯 미국으로 갔고, 다시 막막한 심정으로 알래스카를 찾아왔”(97면)다. 말하자면, 그는 한 여자와 지독한 사랑을 했는데, 그만 자신의 실수로 그녀가 얼음냉동창고 안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창고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그녀를 얼어 죽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더 큰 고통은 그가 그녀를 죽였다는 것 자체보다 그녀가 자신 몰래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배신, 이 일련의 일들은 그를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알래스카에까지 이르게 한다. 알래스카에서 그는 욕망으로 눈이 어두운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그곳에서 그는 원주민인 한 여성을 만난다. 그 원주민 여성 역시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그와 원주민 여성 모두 한때 사랑의 욕망에 붙들렸으나, 그 욕망으로 인해 지금은 상처투성이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가 다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감싸안는다. 사랑이라는 욕망의 과잉으로 상처 입은 그들 자신을 ‘외로움’이란 삶의 형식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은 바로 ‘외로움’의 치열성을 통해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살 수 없는 땅, 추위와 짐승의 울부짖음과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본능이 부화하는 것을 느꼈다. 살고 싶은 본능에 사로잡힐 때마다 언뜻언뜻 파고드는 어두운 기억이 그림자를 길게 남기며 그를 침식시켰다.
“다신 그러지 말아요.”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나만의 방식이에요.”
나만의 방식이에요……. 허공에서 아네(알래스카 원주민 여성의 이름-인용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짙은 남빛과 청회색 지평선이 맞닿아 있는 밤 속에서 커다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한밤중 짐승이 울부짖는 벌판에 나가 한바탕 혹한과 맞서 싸움으로써 외로움을 이겨나간다는 아네의 말이 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두드린다. 노을을 보러 광활한 지평선을 달려나가던 그의 무모함과 무엇이 다른가.(109면)
요컨대, 눈과 얼음의 혹한 속 벌판에 서 있는 알래스카 원주민 여성과 노을을 보러 광활한 지평선을 달려 나가는 그의 행위는, 외로운 자들이 ‘외로움’의 형식을 통해, 욕망의 과잉이 그들에게 가한 상처를 그들 나름대로 치유하는 노력이다.
3. 고립된 자들의 자기 풍자와 절망
한국현대소설의 주요 상상력 중 하나는 ‘감금의 상상력’이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인지, 누군가를 극도의 억압된 공간에 감금해 놓고, 그 공간 안에서 마주치거나 환기되는 온갖 문제들을 서사화한다. 하여, ‘감금의 상상력’이 사회적 문제들과 조응할 때는 닫힌 사회에 대한 서사적 대응으로 파악되는가 하면,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될 때는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복잡다단한 심리적 풍경에 대한 서사적 대응으로 파악된다. 그 구체적 양상이야 어떻든 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주체 스스로가 아니라 어떤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타자가 주체를 감금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감금의 상상력’을 통해 주체를 온전히 복원시키는 게 주요 관심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읽어볼 박금산과 하재영의 소설에서 ‘감금의 상상력’은 기존의 낯익은 서사와 구별된다. 그들의 소설적 주체들은 모두 스스로 갇혀 있다. 즉 타자에 의해 갇혀 있지 않다. 주체의 ‘자발적 갇힘’에 의해 소설이 씌어지고 있다.
박금산의 「바디페인팅 제1호-생활의 자세」(≪문학과경계≫, 2006년 여름호)에서는 소설가가 주인공이다. 언뜻 보면, 1990년대 초반 작단에서 한 주류였던 이른바 ‘소설가 소설’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금산의 이번 소설을 기존의 ‘소설가 소설’과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박금산의 소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주인공인 소설가가 스스로 집안에 갇힌 채 소설가로서의 주체성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소설가로서의 주체성을 ‘지금, 이곳’의 문학제도와 매우 밀접히 연계시켜 파악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저 막연히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소설쓰기의 전반적 문제들의 밑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제도적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소설의 대강은 주인공인 소설가가 문학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되고, 특정한 지원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 따른 삽화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 박금산이 정작 탐구하고 싶은 서사적 관심사는, 그동안 우리 작가들이 외면하거나, 무심한 상태로 있는 가운데, 작가와 문학을 위해 존재하는 유무형의 문학제도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다. 또한 이러한 문학제도와 연관된 작가들을 향한 자기풍자다. 그동안 소설가를 주체로 한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되, 박금산의 이번 소설처럼 작금의 문학제도를 직접적 대상으로 한 ‘소설가 소설’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박금산은 문학제도를 향해, 문학제도를 대상으로, 서사 작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문학제도 안에서, 문학제도와 친숙하지 못한, 우리 작가들의 생태를 자기풍자의 방식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진술은 우리의 문학제도 안에 붙들려 있으면서, 그 제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한 젊은 소설가의 진실한 육성으로 들려온다.
나는 인도에서 가장 싼 여관을 잡고 20일을 보내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시간당 대실료 5,000원, 하루 숙박료 20,000원인 학교 앞 여관에 틀어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지출 내역을 공개하라고 나중에 제도가 요구해 오면 나는 공항의 입출국 확인서를 위조해서 나갔다가 들어온 것처럼 조작할 수도 있을 거다. 물론 아내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겨우 1,000만 원 가지고 이런 생각을? 김복연 씨는 혀를 찰 것이다. 심사위원님들, 난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안전합니다. 난 제도한테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또한 그걸 모를 리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1,000만 원을 받을 수 있게 됐겠지요. 땡큐. (어이쿠, 쏘리라고 쓸 뻔했다.)(396면)
“난 제도한테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나’의 언술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듯, 「바디페인팅 제1호-생활의 자세」는 소설가인 ‘나’를 집에 감금시키고, 21세기의 젊은 소설가가 문학제도와 유리되는 게 아니라, (물론 소설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근대적 제도와 불화의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술가들의 숙명이다. 그것이 예술적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제도의 안쪽에서 제도를 내파(內破)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작가 박금산은 문학제도와 길항하고 있는 21세기 젊은 작가인 셈이다.
문학제도와 말을 걸고 있는 박금산의 ‘감금의 상상력’과 달리 신인 작가 하재영은 그의 「달팽이들」(≪아시아≫, 2006년 여름호, 창간호)에서 이른바 소호족(Small Office Home Office의 약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거나 집에서 인터넷 등을 통해 소규모 사업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의 면면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고립된 단자들의 삶을, 때로는 건조한 시선으로, 때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여기에는 소호족의 삶 자체에 대한 매혹이 있기에 가능하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소호족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인간관계의 부재다. 나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공감한다. 죽음도 불사할 것 같던 사랑은 변심과 배신으로 끝이 나고, 죽마고우와 맹세한 지란지교는 격조한 시간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나는 스스로에게 충고한다. 가식으로 두껍게 화장해야 유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사양하라고.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상처 주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하라고.(224면)
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 주인공 ‘나’가 소호족의 삶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인간관계의 부재’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나’가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부정하는 것은, ‘나’와 타인이 그 관계로부터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어, 그 치명적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와의 직접적 소통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인바, ‘나’는 이 두려움으로 인해 세계와의 소통 방식을 기존의 형식이 아닌, 인터넷이란 가상의 공간 속에서 소통하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인터넷의 소통 방식을 통해 ‘나’는 소호족으로서 계약관계로 맺는 것 이상의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다. ‘나’의 삶은 철저히 ‘나’가 사업상 필요한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삶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는 이처럼 메마른 계약관계에 맹목화되어 있지는 않다. ‘나’와 같은 원룸의 오피스텔에서 실종사건이 일어나는데, 비록 ‘나’는 그 실종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인터넷을 통해 실종된 여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품는다. 실종사건과 겹쳐서 환기된 클림트의 그림-“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듯 매몰차게 돌린 남자의 얼굴과 감아버린 여자의 눈에서 고립된 자들의 절망을 본다.”(231면)-에서, ‘나’와 실종된 여자 사이, 혹은 실종된 여자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작가 하재영의 소설적 전언을 쉽게 간과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고립된 자들의 절망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스스로 고립된 자들의 저 깊은 존재의 심연을 이해할 수 있을까.
4. 21세기 젊은 소설가들의 서사적 고통
경제학의 여러 법칙 중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어떤 것의 만족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기는커녕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도리어 만족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따르는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 그래서 욕망의 과잉이 문제가 아닌가. 줄어들 것 같지만, 줄어들지 않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 충족이야말로 인간을 욕망으로부터 놓여나는 게 아니라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와 유시연의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우리로 하여금 욕망의 이러한 문제들을 숙고하게 한다.
욕망의 이러한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소설 창작에 전념하는 소설가에게 문학의 제도를 향한 말걸기의 서사를 낳는다. 박금산의 「바디페인팅 제1호-생활의 자세」는 21세기의 소설가가 제도와 무관하지 않으며, 제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메타적 물음을 던진다. 이 물음은, 하재영의 「달팽이들」처럼 최소한의 계약관계만을 남겨둔 채 여타의 인간관계의 부재를 21세기 삶의 형식으로 수용해야 하는 문제와 동떨어진 게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소설가들은 세계와 소통을 하고 있되, 그 소통이란 고립된 자들의 절망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를 일이다. 문학제도로부터 고립된 소설가들의 절망, 세계로부터 고립된 소설가들의 절망이야말로 21세기 젊은 소설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서사적 고통임을 외면해서 안 될 터이다.
고명철․
1970년 제주출생
․저서 '쓰다'의 정치학 등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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