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3호 계간평(시)/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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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냉천탕 이야기․1-업둥이」 서안나∙
「봄밤」 천양희∙
「나는 나비의 이름․2」 박찬일∙
「극장」 박주택∙
「불후의 장면」 정병근∙
「안개의 달 18일 결사」 박정대∙
「미국식 송어낚시」 서동욱∙
「딤섬」 함기석∙
「베개의 책」 조연호∙
「비의 은신처」 이승원∙
스펙트럼
장석원|시인
1. 봄꽃이 피면 참말로 펑펑 울고 싶어져
익숙하다. 봄날의 꽃이 그러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네의 삶이 낯설지 않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겠냐마는, 시의 풍요로운 적층을 이루는 전라도 사투리는 새로움의 강도 면에서 나를 자극하지 못한다. 하지만 새롭고 기발한 것만이 시의 전부는 아니다.
오늘은 싸우나가 뜨겁지 않구마이라. 안양대 앞 냉천탕 터줏대감 김 여사가 싸우나 탕에 들어선다. 아따, 오늘은 봄꽃들이 흰눈처럼 환장하게 날려야. 쩐에는 봄이 참말로 뜨셨는디 워째 요즘 날씨는 미친년 널뛰듯 헌당께.
그러고 봉께 생각나는 게 하나 있소. 한 이십여 년 됐을랑가. 내가 세 살던 건넌방에 젊은 애기 둘이가 살림을 차렸는디, 여자는 대학생이고 남자는 노가다판 전전하는 불알 두 쪽이 전부인 넘이었지라. 여자가 미친년이제. 야들이 애를 낳았는디 남자는 쌈질하다 교도소 잡혀가 뻔지고 핏뎅이는 목이 터져라 울어쌓고 참말로 사람 눈으로는 못 볼 것이데. 답답한 참에 내가 여자 집에 전화를 넣었제. 그 집 어메한티 이 핏뎅이는 내가 알아서 할랑께 팔자 펴고 살라고 보냈제. 지금 생각허면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야. 나도 미친년이제.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 때문이제. 곰곰 생각허다 막걸리 한잔 퍼마시고 동네 애 없는 집 앞에 내려놓았제. 그날도 봄꽃들이 눈처럼 펄펄 내렸어야. 그 업둥이가 이 목욕탕도 가끔 와불어. 대학생인디 얼굴도 이쁘장하다지 않소. 그란디 아까 오다 봉께 남탕에 들어가던 사내와 눈이 떡 마주쳤는디 바로 그 교도소 들어갔던 아범이여. 내가 뒤로 자빠질 뻔했당께. 세상이 겁나게 좁아부러. 핏뎅이를 업둥이로 건네주고 일 년인가 지났나. 애 낳은 색시가 날 찾아와 부렀어. 봄꽃만 피면 교도소 갔던 사내놈이 찾아와 애 내놓으라며 집을 불싸지른다고 술 먹고 행패를 부린다는구만. 내가 눈 딱 감고 그랬제. 아그야 핏뎅이는 폐렴 걸려서 그해 봄 죽어뻔졌다. 다시는 애 찾지 말고 가슴에 묻어부러라. 봄꽃이 피면 그 사내놈이 꼭 그 지랄을 한다드만. 못사는 넘들에게 꽃도 매정한 법이여. 아까 그 남정네가 나를 보더니만 금세 두 눈에 벌건 눈물이 고여불데. 봉께 그 아범이란 작자는 아직도 교도소를 들락거린다고 하데. 사회가 받아줘야 애비 노릇을 할 게 아닌가베. 봄꽃이 피면 참말로 펑펑 울고 싶어져야.
―서안나 「냉천탕 이야기․1 -업둥이」 전문(≪리토피아≫ 2006, 여름)
목욕탕에 벗고 앉아 있는 여자의 말을 듣는다. “냉천탕 터줏대감 김 여사”가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고 봉께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젊은 두 연인이 아이를 낳고, 남자가 죄를 저지르고, 여자는 울고, “지천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 때문에” 생은 서글퍼지고, 아이는 버려지고, 김 여사는 그 아이를 거둔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장성했는데, 목욕탕에서 교도소 갔던 그 애비를 만난다. 인생은 우연이고, 모든 우연이 필연을 만들고, 그 필연을 인과응보로 여기는 김 여사는, 아이를 찾겠다고 “봄꽃이 피면 그 사내놈이 꼭 그 지랄을 한다”고, “그 남정네가 나를 보더니만 금세 두 눈에 벌건 눈물”을 보이더라고, 빠르게 되뇌인다.
우리는 방금 한 여인의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다. 이웃의 민중의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을 읽는다. 아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어도 우리는 듣고 또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것이 인생’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표준어로 씌어지지 않은 이 시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날도 봄꽃들이 눈처럼 펄펄 내렸어. 그 업둥이가 이 목욕탕도 가끔 오곤 해. 대학생인데 얼굴도 이쁘장하다지. 그런데 아까 오다 보니까 남탕에 들어서던 사내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바로 그 교도소 갔던 아범이야.’ 시의 중간 부분을 표준어로 성글게 바꿔 보았다. 사투리가 이 시의 선정성을 실현시킨다.
살아 움직이는 전라도 말의 향연 속에 담긴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즐거웠다. 1연에서 시인은 딱 한번 시에 개입한다. “안양대 앞 냉천탕 터줏대감 김 여사가 싸우나 탕에 들어선다”고 이야기의 출발점을 제시하는 시인 역시 김 여사의 말을 들으며 ‘펑펑 울고 싶어’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울지 않는 자이다. 시인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시인은 감정과 투쟁하여 자신의 언어로 감정을 표백시킨다. 불쑥 떠오르는 의문. 전형성과 스테레오 타입 사이에서 이 시는 어떤 좌표를 갖게 될까.
사투리가 재현시킨 풍성한 디테일을 읽는다. 결국 사는 게 이렇다는 결과를 얻고자 시를 읽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봄날 흩날리는 꽃잎의 생을 닮은, 환장할 듯한 장삼이사들의 인생사를 눅눅하게 표현해낸, 이 시에서 볼 수 있었던, 구체적인 언어들의 조화로운 율동이다.
2.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나, 그만
화자 ‘나’는 왜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無序錄을 읽고 말았”을까.
서쪽을 향해 자란다는
측백나무를 생각하다가
북쪽을 향해 봉오리가 솟는다는
목련나무를 생각하다가
안뜰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는
회화나무를 생각하다가
새들이 좋아하는
아가위나무를 생각하다가
새가 아니면서 날아다니는
입술박쥐를 생각하다가
새이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생각하는 봄밤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린
화가 이징을 생각하다가
한 곡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 신발에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노래를 그쳤다는 명창 학산수를 생각하다
일생동안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가 열 개도 넘었다는
명필 이삼만을 생각하다가
노래를 잘 듣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악사 사광을 생각하는 봄밤
나, 그만 無序錄을 읽고 말았네
―천양희 「봄밤」 전문(≪서정시학≫ 2006, 여름)
화자가 생각하는 것들의 목록. 측백나무, 목련나무, 회화나무, 아가위나무, 입술박쥐, 거위, 이징, 학산수, 이삼만, 사광. 나무, 동물, 사람의 이름. 이 명사들을 수식하는 각각의 행은 이렇다. 서쪽을 향해 자란다, 북쪽을 향해 봉오리가 솟는다, 안뜰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 새들이 좋아한다, 새가 아니면서 날아다닌다, 새이면서 날지 못한다,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노래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 신발에 던졌다 그리하여 그 신이 모래로 가득 찬 후에야 노래 부르기를 그쳤다, 구멍 낸 벼루가 열 개가 넘었다, 노래를 잘 들으려고 자신의 눈을 찔렀다. 그리고 나는 “그만 무서록을 읽”었다.
이 시의 내용을 행 별로 분리해 보았다. 나는 시인이 기재한 ‘무서록’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서언이 없는 기록으로 읽는다. 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시의 전형적인 양상을 본다. 나는 시인의 두서없는 나열을 읽으면서, 이 체계 없음 때문에 시인이 겪고 있는 창작의 고통을 감지하게 되었다. 측백나무는 서쪽으로, 목련나무는 북쪽으로 움직인다. 안뜰의 회화나무로 시선이 옮겨진다. 회화나무, 큰 인물이 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회화나무 옆에 아가위나무가 보인다. 새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아가위나무 너머로 박쥐가 날아간다. 새이면서 날아다니는 박쥐와 새이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생각하는 봄밤”이다. 화자는 날아간 박쥐 뒤에 남겨진 어둠을 보면서 위대한 예술혼을 지닌 큰 인물들을 떠올린다. 새에서 촉발된 상상은 눈물로 새를 그린 화가 이징으로 전이된다. 화자는 예술혼으로 존재를 불태운 예술가라는 환유적 고리를 타고 이동한다. 명창 학산수와 명필 이삼만을 거쳐 화자가 도달한 마지막 예술가는 악사 사광이다. 소리를 잘 듣기 위해, 몸의 모든 감각을 청력으로 집중하기 위해 눈을 제거해버린 미친 예술가 사광. 화자는 그를 닮고 싶어 한다. 시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런 봄밤에 ‘나’는 이태준의 ‘무서록’을 읽는다. 완벽한 한국어 문장의 아름다움을 실현한 이태준의 산문을 순서 없이 읽으며 시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왜 시인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는가. 생각의 운동을 멈추고 무서록을 “읽고 말았네”라고 말하는 시인의 육성을 들으며 나는 시 앞에서 탁 풀어지는 시인의 그림자를 본 듯하다. 봄밤의 맑은 어둠과 하나되는 시인의 실루엣을 본 듯하다. 강인한 듯한 화자의 유려한 발화 이면에 드리워진 시에 대한 절망, 그 절망마저도 받아들이며 봄날의 불멸을 염원하는 시인의 깊은 눈을 본다.
3. 하늘이 하늘하늘
우리는 세 번째 역에 도착했다. 지금 읽고 있는 시들의 좌표를 정한다. 거쳐 온 세 시들은 쉽게 말해 난해시가 아니다. 젊은 시인들이 쓰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아니다. 이 시들은 어렵지 않다는 의미에서 쉬운 시이고, 좋은 시이다. 어렵지 않은 시는 쉬운 시이고, 쉬운 시는 모두 좋은 시라는 이상한 논리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니다. 구태여 정하자면 나는 순서대로 「냉천탕 이야기」를 오른쪽에 두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봄밤」을 위치시킨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시들의 좌표는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점점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흐르는 大氣가 나의 몸통
그가 나를 단박에 멀리까지 가게 한다
꽃나무가 나의 몸통
그가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다
그리고 몸통은 나, 나의 날개 나의 몸
하늘 안이 다 나의 몸통
하늘은 하늘 안으로 채워져 있다
내가 날아가는 것은 하늘이 날아가는 것
하늘이 하늘하늘 날아가는 것
―박찬일 「나는 나비의 이름․2」 전문(시집 모자나무, 민음사, 2006. 5)
나비의 몸을 빌어 화자 ‘나’는 말한다. “나의 몸통”은 “흐르는 대기”이다. 나비인 화자 ‘나’가 말한다. 그 대기가 “나를 단박에 멀리까지 가게 한다.” 나비의 몸을 빌어 화자 ‘나’가 다시 말한다. “꽃나무가 나의 몸통”이다. 나비인 화자 ‘나’가 이어 말을 한다. 그 꽃나무가 “나를 먹여주고 재워준다.” 화자 ‘나’와 나비는 융합한다. 나비의 몸통은 하늘이 된다. “하늘 안이 다 나의 몸통”이다. ‘나’는 나비이며, 하늘이다. “하늘은 하늘 안으로 채워져 있다.” 하늘과 ‘나’와 나비가 분간되지 않는다. 주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주체라는 말이 아니다. 주체 ‘나’가 다른 주체를 포섭하고 녹여내어 큰 주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호주체도 아니다. ‘나’와 나비 ‘너’의 장자적 결합도 아니다. 모든 주체가 소거된 후,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나듯이, 새롭게 탄생되는 공집합(φ)의 주체이다. 이 돌연변이적인 주체는 혼돈에 빠진다. “내가 날아가는 것은 하늘이 날아가는 것”이다. 나비가 날아간다, 하늘이 날아간다. 하늘이 ‘하늘하늘’ 날아간다. 하늘이 중첩된 ‘하늘하늘’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린 시의 출발점은 이렇게 해서 회귀된다. 나비와 하늘이, 하늘과 하늘이 결합된다. 나비와 하늘의 무주체적 결합은 기표에 기원을 둔다.
움직임이 가득한 시이다. 나비는 팔랑이고, 하늘은 출렁인다. 나비와 하늘이 겹쳐지고 이어져 서로 뒤섞인다. 나비와 하늘은 동시에 서로를 궤멸시킨다. 두 존재 모두가 주체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주체의 소거로 파악한다. 나비인 ‘나’와 시인 ‘나’가 분간되지 않는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은 주체 ‘나’의 소멸 이후에야 가능하게 될 것이다.
4. 다른 날들을 더 사랑하여
우리는 이제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어둡고 따스한 눈이 있다. 생의 중간지점에서 40대 시인들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반추한다.
배호 노래 울려 퍼지던 극장
하학길에 들었네, 안개 낀 장춘단 공원이며
돌아가는 삼각지 신작로 먼지가 바지를 하얗게 만들고
자욱한 책가방 미친 듯이 날뛰던 그림자 속
보리밭은 푸른색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으로
교도소 담장을 비웃고 텃새들은 텃새들대로 왕을 모방했었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부였던 그때
머리카락은 추억이 되지 않는 것들에 소침해하고
여자들을 여자들대로 하이킹을 떠났지
종점 위 교회 철로변 지붕에 걸린 여자 얼굴 비추네
다른 날들을 더 사랑하여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집으로 삼은 것들과 작별을 고하며
먼지 나는 그 길 위에 가난이며 연애며 이별 따위가
오늘을 만들 줄을 알았었지만 그 길 위에서
떠나보냈던 많은 것들은 말없이 고목을 쓸어안네
배호 노래 울려 퍼지네
모든 밥은 자작이었으며 모든 빛은 그림자였네
―박주택 「극장」 전문(≪문예중앙≫ 2006, 여름)
유하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떠오른다. 이 쓸쓸한 상실에 대하여 나 역시 할 말이 많지만, 머릿속의 덩어리를 언어로 치환하려는 순간, 무너지는 담장처럼 실패가 나를 덮친다. 나에게 남겨진 극장. 청주대 앞의 청도극장. 그곳의 화장실에는 수상한 눈빛의 남녀가 오갔고, 담배를 문 청소년들이 죽치고 있었다. 중학 시절 <킬링 필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U-보트> 등의 단체 관람 영화를 보며 나는 앞자리 친구들의 까까머리를 피하느라 영화를 거의 못 보았다. 친구 용규의 아버지는 중앙극장의 검표원이었다. 그곳에서는 와 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곤 했다. 스칼렛과 버틀러가 키스할 때였다. 자유극장에서는 애정 영화가 주로 상영되었다. 그곳에서 여배우의 젖가슴은 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시고니 위버가 주연하고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SF 영화 <에이리언 2>를 봤다. 지금도 그때 느꼈던 두려움이 생생하다. 여자 중위 리플리가 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팔로는 기관총을 들고 괴물과 싸우러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장면. 끝으로 군대 시절 광주의 어느 극장. 그곳에서 친구와 나는 <서편제>를 봤다. 토요일 오후, 저녁의 술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킬링 타임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가 그것뿐이었다. 때마침 그 영화가 상영되었고, 우연히 표가 남아 있었다. 친구 몰래 울음을 삼키느라 혼났다. 내 눈물은 친구의 웃음이 되었고, 나는 친구에게 술을 샀고, 친구는 노래방 비용을 지불했다. 노래방에서 나는 생전 처음 가사에 아버지가 나오는 노래를 불렀다.
저음이 중후한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이 흐른다. 「돌아가는 삼각지」에 가면 금방이라도 배호를 만날 것 같다. 시인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 검정 교복 바지를 하얗게 만들던 “신작로 먼지” 속으로 “미친 듯이 날뛰던 그림자”가 들어간다. 보리밭은 푸른데, 어느 누구는 “교도소 담장”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부였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인은 “추억이 되지 않는 것들에 소침”해 한다. 그곳의 우리들은 남겨졌다. 우리를 두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하이킹을 떠났”다. 시인은 종점 위 철로변 교회 “지붕에 걸린 여자 얼굴”을 발견한다. “다른 날들을 더 사랑하여” “집으로 삼은 것들과 작별을 고하며” “먼지 나는 그 길 위에 가난이며 연애며 이별 따위가/오늘을 만들 줄 알았”던 시인은 “떠나보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며 말없이 고목을 쓸어안는다. 다시 배호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청춘’극장에서 모든 밥은 스스로 만든 것이고, 모든 빛은 그림자였다. 모든 빛이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극장 안의 화자를 바라보며 나는 줄곧 울고 싶었다.
다른 날들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텅 빔을 나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공감한다. 그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다. 누가, 무엇이 ‘나’와 ‘너’와 ‘우리’의 청춘을 앗아갔는가.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잃어버린 것, 지워버린 것, 쓸려나간 것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답을 찾아 다가가면 조금 더 멀어진다. 과거의 시인에게는 가난과 연애와 이별이 있었다. 말없이 고목을 쓸어안는 현재의 시인에게는 “모든 빛이 그림자”가 되는 소멸의 전주곡이 있다. 이 고요한 슬픔이 전해주는 느리지만 강렬한 진동은 소중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석양 후의 검은 어둠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위무한다. 편하게 ‘다른 날들을 더 사랑’해도 좋을 것이다. 슬픈데 슬프지 않다고 하는 거짓이나 억지는 편하지 않다. 벗어놓고, 놓여나는 일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하학길의 극장으로 ‘느리게’ 돌아간다. 그곳에서 ‘다른 날들의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나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시인은 시인의 다른 ‘나’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스러지고 마는 옛날의 나를 보며 눈물 글썽이지 않을까. 이런 음울한 정서를 ‘퇴영적, 패배적, 방관적’ 같은 단어를 동원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미래 지향적, 진보적, 참여적 같은 단어들의 인공적 세계는 강요된 폭력과 권력과 시혜 의식으로 분식(粉飾)되어 있다. 오지 않은 날들의 비전을 자동인형처럼 지껄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슬픔을 토로하는 것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오늘을 만들 줄을 알았었지만” 하며 깨닫는 화자의 고통이 몸을 울린다.
5.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인데,
순두부 백반 먹고 나온 햇살이
비스듬히 기우는 오후
담장 너머 입 벌린 목련꽃이
침 냄새 피우고 있는 봄날인데
팔각 갓 쓴 쉼터 마루에
영감 둘 걸터앉아 장기를 두신다
한 영감 대여섯 개 남은 장기알 놓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골백번 누비신다
반쯤 벗은 양말 무좀 오른 발바닥 긁고 계신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릴라 다른 한 영감
바늘눈 뜨고 구경꾼들 흘기신다
장고에 든 장기판은 목하 움직일 낌새 없고
한 떼의 여학생들 까르르 흩어지며 지나가는데
제풀에 지친 구경꾼들도 침을 탁탁 뱉으며 제 갈 길 가는데
아까보다 좀더 기운 햇살이 명자꽃 울타리에 쏟아질 즈음
가만히 보고 있던 큰 눈 하나가
불멸의 한 수를 슬쩍 두고 가신다 그때
목련꽃 한 송이 담장 밖으로 툭, 떨어진다
―정병근 「불후의 장면」 전문(≪작가세계≫ 2006, 여름)
오후의 평상에 앉아 장기 두는 노인, 눈감고 수를 생각한다. 침묵이 그를 빨아들인다. 발은 무겁고 길은 아득해진다. 좌우로 한 걸음 더듬거리며 나아갔고, 한 걸음에 뛰어넘기도 했지만, 첩첩산중 성벽은 높아, 오를 수 없다. 패착이다. 退路가 없다. 지나온 길 위, 마지막 햇빛의 반점, 이마에 검버섯 피어오른다. 묘수는 없다.
이 시는 첫 행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에 작품 전체의 의미를 싣는다. 봄날 목련꽃 그늘 아래서 장기를 두는 두 영감 곁을 시인이 슬쩍 지나간다. 언젠가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파고다공원 앞을 기웃거리던 시인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구경꾼과 훈수꾼이 모여든다. 때마침 “한 떼의 여학생들 까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모든 것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시인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것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지금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같은 거짓이다. 거짓이 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인은 눈앞의 풍경에 침을 뱉는다. 경멸하는 것이 아니다. 에잇 침 맛이나 봐라, 쳇. 시인은 “불멸의 한 수를 슬쩍 두고 가신다.” “가만히 보고 있던 큰 눈 하나”의 주인은 시인인 듯하다. 불멸하는 인생의 어느 하루를 목격한다. 스러지는 봄날이었다. 사람 “침 냄새 피”어 오르는 봄날인데, 노인 둘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시인이 불멸을 읊조렸을 때, “목련꽃 한 송이 담장 밖으로 툭, 떨어”졌다. 썩어 문드러질 생의 하루라도 좋다. 시인은 불후의 장면에 침을 뱉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나는 문득 시인의 뻔한, 뻔뻔한 웃음을 떠올린다. 뭐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냐는 시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흔이 넘으니 세상이 싱거워 보인다고 시인이 말하는 듯하다.
6. 우리는 고요한 촛불의 전사
박정대의 시 역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을 노래한다. 가수 밥 딜런의 음악이 흐른다. 나는 「One more cup of coffee」를 듣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밤을 지새”운다. 혁명은 필요 없다. 은행을 털어 “자본주의를 거덜”내면 된다. 안개의 달이었고, 18일의 결사가 있었다. 녹색 컨버터블에 AK 소총을 싣고 “스러져가는 황혼이 가득” 찬 사막 횡단 도로를 달리는 중년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곧 떼강도가 될 것이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은행을 털 거야, 덜컹거리는 낡은 녹색의 컨버터블엔 AK 소총 한 자루와 스러져가는 황혼이 가득, 계획 같은 건 없어, 눈앞에 보이는 밤하늘의 모든 별들을 탈취하는 우리는 촛불의 전사
밥 딜런을 들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은행을 털 거야, 자본주의를 거덜 낼 거야, 계획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어, 그래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밤을 지새우는 흑암의 전사, 말밥굽처럼 달려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렬하고도 고요한 촛불의 전사
세상의 안개들과 습기들에 은밀하게 대항하는 우리는 고요한 불꽃의 전사들
안개의 달 18일 결사
―박정대 「안개의 달 18일 결사」 전문(≪문학사상≫ 2006. 7)
시인은 우리를 “고요한 불꽃의 전사”로, “밤하늘의 모든 별들을 탈취하는” “촛불의 전사”로 호명한다. 아니 시인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는 시대를 비웃는 “흑암의 전사”였다. 우리에게는 ‘혁명’이라는 언어가 있었다. 우리는 그때 “말밥굽처럼 달려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격렬하고도 고요한 촛불의 전사”였다. 우리는 “고요한 불꽃의 전사”였지만, “세상의 안개들과 습기들에 은밀하게 대항”했지만, 우리는 지금 마흔이고, 우리는 지금 혁명의 실패를 곱씹으며 가버린 날들에 굳바이 키스를 보낸다. “자본주의를 거덜 낼”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다. 은행을 털면 자본주의가 거덜 날 것이라는 무모함 뒤에는 모든 것이 실패로 판명된 우리의 청춘에 띄워 보내는 조사(弔辭)가 숨겨져 있다.
나는 시인의 시를 반대로 읽는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별들을 탈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촛불의 전사일 뿐이다. 쪽방 하나를 밝히기 힘든 촛불을 밝혀놓고 우리는 커피를 마셔가며 밤을 지새웠지만, 어둠 속에서 더 어두워지는 영원한 암흑의 전사일 뿐이다. 불꽃처럼 타올라 전사가 되고 싶지만, 안개와 습기 가득 찬 세상을 전복시키고 싶지만, 우리는 여전히 안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사만 할 뿐이다. “계획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이 슬픈 자조를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시인의 멜랑콜리를 거부할 수 없다. 첫 번째 시집 '단편들'의 주요 모티프인 ‘촛불의 전사’와 ‘흑암의 전사’가 재등장하지만, 40대 시인의 치유될 가망이 없는 상실을 묵묵히 바라볼 때 느끼는 아픔만으로도 이 시는 소중하다.
7. 피곤한, 정말 즐거운 여행
이제 우리는 서서히 왼쪽으로 간다. 막 중간지점을 통과한 것이다.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에 전면적으로 차용된 리차드 브라우티컨의 시적인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가 다음 시의 핵심 모티프이다. 박정대는 「영원의 거리에서의 송어 낚시, 133분 40초」 같은 작품에서 소설의 한 부분을 전면적으로 인용하여 시를 썼고, 서동욱은 소설의 전체 내용을 시의 곳곳에 배치했다.
여름에 우리 모두는
서머 배케이션을 맞은 미국인들처럼 사냥을 나간다
강가에 낚싯대를 걸쳐놓고
야 저기! 잉어떼처럼 몰려드는 녹슨 깡통들
이따 점심에 불 피울 때 조심해
저 강은 인화성이니까
재빨리 야영 준비를 한다
탐, 너는 우선 음악을 틀어놔, 빌, 땔감을 모아 오너라
깊숙이 들어가지는 말아라 곰이 있으니까, 제인
네 동생과 큰 돌들을 주워 오너라 자
모두들 알았지? 열심히 하는 거야 점심때가
됐을 때 아차! 베이컨과 에그와 두툼한
스테이크가 없다 그래서 동네까지
라면을 사러 갈대숲을 거슬러 오르는데
바람결에 기름 냄새처럼 날려 온 한떼의 사람들
이 녀석아 인사해! 아버지였다 또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이 취했구나 그들 굽은 등에 기름때 묻은
작업복처럼 너덜거리는 지느러미
강 건너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
면도한 것처럼 허옇게,
비늘은 언제 다 잃었을까
돌아왔을 때 물만 올려놓은 코펠 속에선
검은 기름 납빛 거품이 부글거렸다 이런,
이 물로는 라면을 끓일 수 없겠구나!
막내가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언제나 말씀하셨지
불조심하거라 강 건너 공장이 언제 이
油田이나 다름없는 강에 불을 놓으며
쳐들어올지 모른단다 아버지!
아버지를 먹여주는 직장인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히히히
형은 천치였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정액 대신 기름을 받아 만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집을 떠난 사람
적당히 심각하게 우리 가족의 식사와 강 건너
오랑캐에 대해 얘기했다 듣던 사람들이 우는 척
했다 그러자 얼씨구 내 입 조금 더 심각하게
마구 말과 침과 튀김을 튀기고
가족들이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고결한 내 童貞에 고름이 흘렀다……
아 피곤해,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지?
아빠 이렇게 많이 잡기는 첨이야 난
이 머리 둘 달리고 등이 굽은 놈으로 엄마를 놀래켜줄래!
집에 들어섰을 땐
날카로운 광선검 같은 마지막 햇살이, 싱크대를
두 동강 내며 아주 가볍게 허공중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현듯 주르르르
수도꼭지에서 힘없이 강 한 줄기가 빠져나왔다
―서동욱 「미국식 송어낚시」 전문(≪문학과사회≫ 2006, 여름)
여름의 우리는 “미국인들처럼” 사냥을 간다. 강가에 낚싯대를 걸쳐놓자 잉어떼가 몰려든다. 시인은 잉어떼가 아니라 “잉어떼처럼 몰려드는 녹슨 깡통들”이 새카맣게 몰려온다고 말한다. 우리 가족이 도착한 강은 “인화성”이라서 불 피울 때 조심해야 한다. 이상한 세계이다. 깡통이 우글거리는 솔벤트 강이 흐른다.
이 시는 가족에 대한 시이다. 탐, 빌, 제인이 등장한다. 탐과 빌과 제인의 아버지는 존쯤 될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명령한다. 일사불란하다. 미국인 가족이 “베이컨과 에그와 두툼한/스테이크가 없다”고 “동네까지/라면을 사러” 간다. 이 지점에서 시는 탐, 빌, 제인이라고 지칭되는 한국인 가족 이야기로 옮겨간다. 가장인 아버지의 이야기로 전이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 녀석아 인사해!”라고 명령한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이 취했”다. 그들의 “굽은 등에 기름때 묻은/작업복처럼 너덜거리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다. “강 건너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 물고기는 “면도한 것처럼 허옇게” 온몸의 비늘을 잃어버렸다. 비늘이 없는 아버지송어, 지느러미가 너덜거리는 다른 송어 아버지들. 기형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거느린다.
기이한 광경은 이어진다. 코펠에선 “검은 기름 납빛 거품이 부글”거리고, 형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정액 대신 기름을 받아 만든 사람”이다. 아버지는 우는 막내를 타이른다. 솔벤트 강에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른다. 불조심해야 한다. 아버지는 가르치는 자이다. 아버지의 경계를 위반하면 안 된다. 형은 가르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를 먹여주는 직장인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화자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형에게 기름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나’는 “집을 떠난 사람”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적당히 심각하게” 아버지의 화제에서 벗어난다. “우리 가족의 식사와 강 건너/오랑캐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나’는 가족들과 다르다. ‘나’는 오랑캐가 살고, 불을 놓으며 쳐들어올지 모르는 공장의 소재지 강 ‘건너’를 잘 안다. ‘나’가 이야기하자 듣던 사람들이 “우는 척”한다. ‘나’의 속임수에 청자도 속임수로 대응한다. 거짓을 농락하려 했지만 오히려 다른 거짓에 더 크게 농락당한 나를 가족들이 “우두커니 바라”본다. “고결한 내 童貞에 고름”이 흘렀다.
여행이 끝났다. 화자는 가볍게 “아 피곤해,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냐고 묻는다. 화자는 녹슨 깡통을 낚았다. 굽은 등에 너덜거리는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기형 물고기를 잡았다. “이렇게 많이 잡기는” 처음이다. 돌아가서 엄마를 놀래켜 주겠다고 화자는 말한다. 엄마는 과연 놀랄까. 아마도 화자가 잡은 물고기 중에는 면도한 것처럼 허옇게 비늘을 잃은 아버지송어가 들어 있을 것이다.
화자가 “집에 들어섰을” 때, “날카로운 광선검 같은 마지막 햇살이, 싱크대를/두 동강 내며 아주 가볍게 허공중에서/흘러”내리고 있었다. 기형의 세계를 파괴하는 광선검 같은 마지막 햇살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S’와 화자의 발화로 응축되는 아들 ‘s’의 대결을 가르는 ‘―’ 같은 햇빛 뒤에서, “고결한 내 동정”에 묻은 ‘고름’ 같은 정액처럼, 아버지가 어머니 몸에 쏟은 정액처럼, “주르르르/수도꼭지에서 힘없이 강 한 줄기가 빠져나”온다. ‘불현듯’과 ‘주르르르’ 사이의 넓은 공백이 내가 서 있는 이편과 화자가 있는 저편 사이를 가로지르는 솔벤트 강처럼 보인다. 넘어설 수 없는, 이어붙일 수 없는 단절이 명징하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가족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폭력의 최소 결절이 펼쳐진다.
리차드 브라우티건을 거느리며 가족에 대해 시종일관 불편하게 발화하는 이 시인은 불쌍한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돈 버느라 고생 많이 한 누나와 큰형, 늘 깊고 깊은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오는 인정가화만이 가족의 이야기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가족이 숨기고 있는 폭력을 뒤틀리고 찢어지고 일그러진 기형으로 제시한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 안의 파시즘 때문에 불안해진다. 가족이라는 파시즘 말이다. 그것을 거부하든 인정하든, 그것을 이겨내든 그것에 굴복하든 가족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없다.
8. 모래밭의 즉흥 악보
우리는 지금부터 왼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한다.
(계속) 하늘엔 앵무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상한 충동에 휩싸인 채 나는 공단 입구 승강장에 서 있었다 택시 대신 종이 양탄자가 날아왔다 양탄자엔 코끼리가 타고 있었다 코끼리가 코로 나를 휘감아 등에 태우자 양탄자는 사창 사거리로 날아갔다 시계탑을 지나 딤섬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코끼리는 한 꺼풀씩 살이 벗겨졌다 양탄자도 귀퉁이부터 찢겨나갔다 섬에 도착했을 때 코끼리는 형체도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양탄자도 없어졌다 나는 손가락 크기로 작아졌고 살이 다 발라져 뼈만 남아 있었다 아프기는커녕 상쾌했다 천천히 모래밭을 거닐었다 어린 게들이 옆으로 걸으며 내게 말했다 똑바로 걸어요 똑바로! 피가 엉킨 살들이 밀가루 반죽과 함께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위덩어리 하나가 구름처럼 떠다녔다 모래밭도 절벽도 모두 백색으로 타고 있었다 서늘했다 절벽에서 날아오른 새들이 공중에서 하얀 돌가루가 되어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모래밭에 즉흥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바위덩어리가 쪼개지고 알몸의 거인 여자가 바다로 떨어졌다 여자는 턱까지 찬 바다를 걸어 육지로 나왔다 길고 푸른 혀로 내 이마를 문지르고는 모래밭을 핥았다 악보들이 모래와 함께 여자의 입속으로 사라지자 여자는 저음의 음악소리를 내며 왼손을 내밀었다 청동 닻이었다 여자가 웃을 때마다 입에서 보라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나를 닻에 매달아 검은 오르간 건반이 무수히 깔린 해저로 끌고 들어갔다 (계속)
―함기석 「딤섬」 전문(≪문학선≫ 2006, 여름)
함기석의 ‘딤섬’은 점심(點心)일까, 고립된 어떤 섬일까. 정확하게 무엇인지 또 어디인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길이 없다. 시의 앞과 뒤에서 시를 가두는 ‘(계속)’은 끊어지지 않는 시간, 무한히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을 지시하는 것 같은데…… 쯧쯧! 나는 혀를 찬다. 시인의 어떤 환상임에 틀림없다. 의미를 찾는 순간 의미에 갇히고 만다. 시인이 기획한 의도가 이것일까 의문스럽다. 나는 의미를 강요받는 순간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
함기석의 시가 의미를 방관한다는 말이 아니다. 의미는 시 본문의 산술적 총합이 아니다. 그 말들의 의미 함량을 측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시의 의미로 완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완결되지 않는다. 「딤섬」은 의미의 완결을 거부한다. 계속되는 어떤 것이 잠시 이곳에 모여 어떤 의미를 결집시켰다가 다시 산포된다. 그래서 이 시는 계속될 것인데, 그 양상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는 시인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충동에 휩싸인 채” 시인이 “공단 입구 승강장에 서 있”는 어떤 날 어떤 의미가 시에 찾아올 것이다. 때문에 함기석의 시는 ‘즉흥 악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규정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가능성으로 출렁인다. 이 비의(非意/秘意)적인 언어의 바다에서 “알몸의 거인 여자”가 “턱까지 찬 바다를 걸어 육지로 나”온다. 여자는 시인을 “닻에 매달아 검은 오르간 건반이 무수히 깔린 해저로 끌고 들어”간다. 시인은 과연 어떻게 될까. 시인이 펼쳐놓은 환상의 바다는 무슨 빛깔일까.
공단 입구에서 사창사거리를 지나 시계탑을 지나 딤섬에 무사히 날아간 시인이 “손가락 크기로 작아졌고 살이 다 발라져 뼈만 남아 있”다. 시인은 “아프기는커녕 상쾌했다”고 말한다. 시인은 “똑바로!” 걷고 싶어 한다. 나는 함기석이 똑바로 걷는 것을 포기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게처럼 옆으로 걸을 것이다. 옆으로 걸으면서 다른 시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언어의 물질성을 시화(詩化)하는 것이든 기호의 지시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든 환상을 통해 일그러진 현실을 구체화하는 것이든 함기석의 시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새로움으로 충족시킨다.
비극적 결말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증오는 결과이고 원인은 풍부한데, 미끄러진 자는 내가 아니라서…… 창밖의 빗물과 입속의 해캄이 달콤할 때, 그게 아니야, 그건 오해에 불과하지만…… 알 수 없다고 해서, 미안해, 침대 위에 엉겨 붙은 얼음덩어리…… 멀어진다고, 헤어지자고, 말라간다고, 아무쪼록 평안할 필요는 충분하고…… 프로메테우스, 네 모퉁이에 네 명의 거인, 백일하에 드러난 음모는 어찌할 텐가. 스펙트럼, 입자가속기, 편광분석기…… 기다린다고 달성될 수는 없겠지만, 뚱보가 걸어가고, 환호가 들리고, 거미줄 갈증…… 뭘 해줄까, 혈혈단신, 사랑 더럽다…… 늘어나는 채찍을 쥐고서, 툭 툭 끊어지다가, 홍염이 필요한가,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시인.
9. 내가 나의 껍질에 대해 거의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갑충
이 시는 ‘나’를 부정한다. 주체 ‘나’를 혐오하는 이 시는 당연히 대상과의 동일시를 거부한다. 조연호는 “갑충에 불과”한 자신을 숨김없이 내보인다. 과거로 돌아간다. “기억은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졌”다. 시의 첫 행은 마지막 연 2행에서 “우린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집니다”와 도킹한다. 기억은 흩어졌고, 우리도 흩어진다.
그때 기억은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졌었다.
풍향계가 하루의 맨 끝을 향해서만 기울 때
나는 멀미를 하면서 여러 나라의 수도를 외웠다.
흐린 강에서 아이들이 키 재기 할 때, 왼손으로만 허공이 바람을 쥘 때, 4H 연필에서 6B 연필로, 태양에서 물고기로, 친절함의 재료가 바뀔 때
나는 허물을 벗기 위해 베개가 놓인 깨끗한 숲으로 떠났다.
투명한 구름은 더 투명해지기 위해 내게 여름을 빌려주고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점점 좋아지는 내 냄새들
벗어놓고 간 신발의 숫자만큼 새로운 이별이 생긴다.
연인의 편지는 노래 가사를 적거나 코 푸는 종이로 썼다.
내가 나의 껍질에 대해 거의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귀는 붉어지기 위해 내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여름의 모든 위치를 아끼고 싶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새에게 밥알을 던지고 그것이 검은 이빨이 되는 것을 바라본다. 꿈속을 떠가는 느낌으로, 낱개가 되는 느낌으로, 양치질하고 세면대에 붉은 거품을 뱉는다. 녹슨 자전거에게 안녕 나의 광대여, 엽서를 쓰고―개들이 똥을 싸는 호수 주변―배웅과 배웅 사이에서 나는 갑충에 불과했다.
조각이 많은 그림 퍼즐 한 모퉁이를 완성하기 위해
조카들은 짝이 맞지 않는 구름들을 무릎 앞에 주워 모은다.
가을이 와, 깊이가 다른 양쪽 보조개처럼.
그날은 석물(石物)처럼 고요히 곤충의 눈알만 반짝이고
바람의 맨 끝 방은 포기와 권태의 방.
흘린 눈물과 똑같은 맛으로 새들은 네 뺨 위를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건 니가 아직 우릴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린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집니다.
여름 수수는 눈부신 바다로, 나는 세속에게로.
―조연호 「베개의 책」 전문(≪현대시≫ 2006. 7)
제목 ‘베개의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시인은 제시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의’를 소유격 조사로 판단하여 베개가 지닌 책으로 봐야 하는지, 일종의 비유로 파악하여 책은 베개로만 쓰였다고 이해해야 하는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화자는 과거로 돌아간다. ‘나’의 과거로 귀환한다. “나는 허물을 벗기 위해 베개가 놓인 깨끗한 숲으로 떠났다.” 여름은 점점 깊어진다. 숲에서 ‘나’는 나무를 닮아간다. 시간이 흘렀다. 연애도 벌어졌다. 덜 익은 연애였기 때문에 연인이 보낸 편지는 “노래 가사를 적거나 코 푸는 종이로 썼다.” 화자는 자신의 “껍질에 대해 거의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화자가 독백한다. 새에게 준 밥알이 검은 이빨로 바뀐다. 밥알과 이빨의 유사성. 화자는 “꿈속을 떠가는 느낌으로, 낱개가 되는 느낌으로” 한 세월을 건너온 것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자신이 갑충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세면대에 붉은 거품이 가득했다. 호수 주변에는 똥 싸는 개들뿐이었다. 화자는 지금 “석물처럼 고요히” 눈을 반짝인다. 6연에서 “흘린 눈물과 똑같은 맛으로 새들은 네 뺨 위를 주르륵 흘러내”린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는 “포기와 권태의 방”에 갇혀 있는 듯하다. ‘너’라고 지칭했지만, 2인칭 ‘너’가 시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눈물 흘리는 주체는 화자를 내세워 무대에 올라 독백하고 있는 시인 아닐까.
그런데 익숙한 독백은 마지막 연에서 돌변한다. “그건 니가 우릴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 말인가. 하긴 그렇다. 나는 공모한 화자 ‘나’와 시인을 알지 못한다. 알려고 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그들의 과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돌연한 한 행 때문에 시는 흔들린다. 시는 탈출구를 뚫어놓는다. ‘니’라는 호칭과 ‘~습니다’의 불편한 충돌이 짓궂은 쾌감을 발생시킨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화자와 맺은 결탁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때도 흩어졌고, 지금도 흩어진다. 모든 것이 부서져 흩날린다. 반복되는 이 괴멸의 풍경에서 시인은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나’가 “세속에게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섬뜩한 고발이 아닐 수 없다. 벌레처럼 웅크리고 곤충의 눈알을 반짝거린다 해도 세속으로의 흡입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상하다. 제목 ‘베개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본문과 제목이 일종의 비유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 강력한 긴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베개의 책’은 본문과 어울려 은유의 파문을 불러올까? 아니면 베고 누워 잠들기에 좋은 베개가 바로 책이라는 것일까? 펼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과거의 퇴적물이므로 책은 베개로 눌러두어야 할까? 세속을 거부하는 시인이 “나는 갑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강력한 거부의 의지를 표명하는 선언이다.
10. 언제 나의 세계에 파국이 오는지
이제 맨 끝에 도달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오른쪽을 바른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르다’ 또는 ‘올바르다’는 말. 왼쪽은 불길하다. 그리고 불온하다.
더딘 거리 오래된 오후 우산으로 비를 가리고 걷는다
우산은 알록달록 자기는 하양
해사생도 A4용지 솜사탕 실험용 쥐
6819098인지 8606189인지 알 길이 있나 작은 흰 종이
오늘 A에게 맞았다 내일이나 모레 다른 애를 때리면 위안이 될까
왼팔의 상처 위에 아대를 차고
화상 같은 문신 파낸 자국을 소매로 가리고
그때는 피가 났겠지 많이
그런 게 중요한 건데
질정과 질정(叱正)은 조금 다르고 많이 같을까
알보칠 세나서트 카네스텐
길 위의 그들은 했거나 지금 하러 가거나 할 거다 그리고
더러는 안 하기도
오늘 B와 못했다 내일이나 모레 다른 애와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
숫자 차이가 많이 나면 발매 시기가 다르다는 뜻
자기는 하양 우산은 알록달록
B2 스피리츠 폭격기 페디큐어 막대사탕 자이언트 지네
알아야지 언제 나의 세계에 파국이 오는지를
그러나 늘 궁금해 하는 건
이루어질까요 저를 아껴줄까요잖아
죽도록이란 말을 하는 건 정신질환일까
―이승원 「비의 은신처」 전문(≪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6. 7-8)
화자가 애인과 함께 알록달록한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자기는 하양”이다. 팔짱을 낀 애인이 해사생도인가 보다. 해사 생도의 흰 제복을 “A4용지 솜사탕 실험용 쥐”로 연결시킨다. 미끄러지는 환유의 즐거움. 연쇄되는 흰 것의 목록이 재미있다. 더럽혀지기 쉬운 것, 너무나 부풀려진 것, 실험실에서 병원균의 숙주가 될 것.
2연 첫 행의 숫자들은 무엇이지? 나는 6819098을 무작정 바코드의 번호라고 단정한다. 다음 숫자 8601689는 앞의 숫자를 적당히 뒤집고 순서를 바꾼 무작위적인 수열이라고 판단한다. 맞거나 틀리거나 상관없다. 우리는 “알 길이” 없다. 2행의 ‘A' 역시 어떤 사람을 뜻하는 대명사일 수도 있고, ‘A4용지’의 알파벳 대문자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이중적인 대상이 아니다. 의미 연결이 어렵다. 기호의 인접성에 의해 이동해가는 연상의 체계 없는 체계이다. 화자는 불량 청소년인 듯하다. 한 놈에게 맞았으니 다른 놈을 때리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부지이다. “왼팔의 상처 위에 아대를 차고/화상 같은 문신 파낸 자국을 소매로 가리고” 해사 생도 애인과 적당한 모텔을 찾기 위해 거리를 걷고 있다. 3연에 나오는 피임약 질정과 질정(叱正)은 아주 많이 다르지만 기표는 똑같다. 아주 많이 다른 의미와 아주 똑같은 기표의 혼란을 화자는 즐겁게 받아들인다. 구강염 치료제 알보칠, 성병 치료제 세나서트, 무좀약 카네스텐은 기표는 다르지만 약의 작용이 비슷하다. 조금 다르고 많이 같은 대상들의 나열, 명사의 전이. ‘마르크스, 맬더스, 마도로스와 아스피린, 아달린’을 병렬시켰던 이상(李箱). 이승원과 이상은 탈주하는 기표로 유희를 즐긴다. 6연 3행에 나오는 “B2 스피리츠 폭격기 페디큐어 막대사탕 자이언트 지네” 역시 우리를 우연히 지배하는 비논리적 세계로 데려간다. 이곳에서 의미의 인과는 거부된다. 환유적 세계를 활주하는 화자는 “언제 나의 세계에 파국이 오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늘 궁금해 하는 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화자는 단언한다. ‘나’는 하양 애인이 죽도록 자신을 아껴줄까를 의문시한다. 화자는 내심 진정한 사랑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사 생도가 매달린다 해도 화자는 원 나잇 스탠드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도록이란 말을 하는 건 정신질환”이기 때문이다.
‘비의 은신처’는 없다. ‘나’의 은신처도 없다. ‘나’는 모텔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비처럼 흘러다닌다. 잠시 침대에 누워 애인과 섹스를 할 뿐이다. ‘나’에게는 미끄러지는 기표들의 사이가 은신처이다.
이 세상에는 파국이 오지 않을 것이다. 시 역시 파국을 모를 것이다.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저서 아나키스트, 김수영 시의 수사학 등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근무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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