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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문화산책/류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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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932회 작성일 08-02-29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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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연재】원작이 있는 영화 ⑩

애초에 법의 진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카프카와 오슨 웰즈의 <심판>
류상욱|영화평론가



1958년, 오슨 웰즈는 <악의 손길Touch of evil>의 연출을 맡아 촬영을 끝낸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연배우이기도 한 찰튼 헤스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형식의 새로움은 제작사인 유니버설의 경영진을 놀라게 했다. 문제는 그 놀라움이 천재적인 감독에 대한 경의로 표현되지 않고, 감독의 편집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데에 있었다. 결국 이 영화는 제작사가 자의적으로 편집한 버전으로 개봉되는 불운을 당한다. 이제 이 영화로 인해 오슨 웰즈는 할리우드의 기피인물이 된다. 물론 그는 전설적인 데뷔작 <시민 케인>부터 예산초과와 흥행실패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연출을 못하는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게 된다. 그 중에서 <제3의 사나이>는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1960년에 오슨 웰즈는 아벨 강스의 <오스테리츠Austerlitz>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한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미셸과 알렉산더 잘킨드 부자는 오슨 웰즈에게 고전문학작품 리스트를 제시하고, 그 중에서 하나의 작품을 골라 영화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오슨 웰즈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을 원했지만 그 리스트에 이 작품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심판」을 선택한다. 제작자는 오슨 웰즈에게 백지수표를 위임하고 예산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오슨 웰즈 영화답게 당연히 예산은 늘어만 갔고 그는 배우의 급료를 자신이 지불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항상 악전고투하며 영화를 찍었던 오슨 웰즈답게 이 카프카의 불멸의 걸작을 영화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두 작가의 만남을 단순히 유명한 소설을 각색해 영화화했다는 정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두 작가가 프란츠 카프카와 오슨 웰즈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잘 알려져 있듯이 체코의 프라하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럽에서 유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그것이 그의 모국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의 운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슨 웰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상식적인 스토리가 되어버린 오슨 웰즈의 삶은 불운한 천재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 케인>을 비롯한 영화들의 흥행실패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했고, 반인종주의적이고 반파시트적인 그의 세계관과 정치적 입장은 FBI의 감시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유럽을 떠돌게 되고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연기만 해야 되는 처지에 놓인다. 계속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예산을 찾아다녀야 하는 감독의 삶이란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다. 이렇게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오슨 웰즈야말로 카프카의 소설을 영화로 만다는 데 가장 적합한 시네아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오슨 웰즈의 영화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오슨 웰즈의 네레이션으로 알렉산더 알렉세이에프가 만든 판화의 이미지가 지나간다. 그 내용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법원에 소속된 신부가 조셉 K에게 들려주는 우화인데, 오슨 웰즈는 그것을 프롤로그로 사용한다. 그것은 법의 문 앞에서 서 있는 문지기와 시골에서 온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남자는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그 남자는 그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늙어죽는다. 이것은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K가 마지막에 법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지만, 오슨 웰즈의 영화에서는 영화의 주제를 미리 암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바로 잠을 자고 있는 K의 클로즈업이 이어진다. 내레이션은 오슨 웰즈가 주로 사용하는 기법이다. <시민 케인>은 처음에 케인이 죽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죽음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위대한 앰버슨가> 역시 내레이션이 영화의 처음에 나온다. <오델로>로 영화의 마지막이 처음에 등장하고, <미스터 아카딘>도 비행기 사고의 의문을 내레이션으로 제시한다. 그러니까 영화 <심판>은 소설과 다르게 이 법의 우화를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단순한 각색을 넘어 오슨 웰즈의 소설을 다시 쓰는(rewriting) 작업의 한 예를 보여준다.
K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데 평소 아침을 가져다주는 하녀 안나는 보이지 않고 웬 남자가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영화에서는 K가 뷔르스트너 양을 찾는 것으로 바뀌어져 있다. K가 하숙하고 있는 그루바흐 부인의 아파트는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시작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에서 촬영되었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서 한 쇼트는 파리의 스튜디오지만 그 리버스-쇼트는 유고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이것은 오슨 웰즈의 천재적인 예산절감 능력의 결과였다. 제작자의 파산으로 촬영중단의 위기에 처하자 유고로 촬영장이 옮겨졌고, 영화의 주요 무대인 은행이나 법원은 파리에 있는 오르세 역의 폐쇄된 창고에서 촬영되었다. 어쨌든 K는 갑자기 체포된다. 그렇다고 감옥에 당장 갇히는 것은 아니고 평소처럼 직장에 나가 일할 수도 있다고 경찰은 말한다. 매우 이상한 체포인 것이다. K는 뷔르스트너 양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다. 그녀의 직업은 댄서이어서 아침에 퇴근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오전 11시 30분이 지나서 K가 그녀의 방으로 가는데 영화는 체포 사건 직후에 그들은 그녀의 방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은 침대에서 키스를 하기도 한다. 잔 모로가 연기하는 뷔르스트너 양은 퇴폐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오슨 웰즈가 카프카의 인물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더 에로틱하다. 또 인물들의 캐릭터는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오슨 웰즈는 평론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원작을 제멋대로 훼손했다고. 그러나 그런 비난은 의미 없는 상투적인 불평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제 K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자신이 체포되었는데 왜 체포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K는 왜 체포되었고 그의 죄는 무엇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K는 미로와 같은 길을 헤매야 한다. 카프카의 그 미로를 오슨 웰즈는 탁월한 공간적 표현으로 재현해낸다. 그 공간들을 묘사하기 위해 오슨 웰즈는 오르세 역과 자그레브의 체육관과 로마의 법원 등을 활용한다. <시민 케인>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거대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집회 장면은 <심판>에서도 되풀이된다. K가 출두한 법정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법정이 아니다. 정치집회장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은 상식적인 절차를 무시한다. 검사도 변호사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법정직원의 부인인 힐다를 짝사랑하는 대학생은 법정 안에서 그녀에게 달려든다. 이렇듯 카프카의 소설과 오슨 웰즈의 영화에서 제시되는 법은 합리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찾으려는 K의 노력은 어떤 결실도 얻어낼 수 없다. 그 과정은 단지 K가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여자들의 존재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다. 여자들의 역할이 바로 각 부분을 연결하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로미 슈나이더가 연기하는 레니-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 같은 것이 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카프카적인 동물변신의 화신처럼 보인다-는 변호사 집단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힐다는 분명히 법원에 소속되어 있다. 심지어 K가 도움을 청하러 찾아가는 화가 티토렐리 주변에 있는 어린 소녀들도 법원에 소속되어 있기까지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부는 K에게 여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닌다고 그를 비난한다. 그의 말처럼 이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보면 K가 여자들을 쫓아다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경찰들에 의해 처형당하기 위해 잡혀가면서도 K는 뷔르스트너 양의 모습을 얼핏 보기까지 한다. 이것은 이 작품이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욕망의 대상이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하는 여자들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 변호사의 집에 있는 하녀인 레니는 변호사와 K, 그리고 고객인 블록까지 애무한다. 영화에서 이 여자는 소설과 달리 K에게 법원에 연결된 화가인 티토렐리에게 찾아가라고 충고를 한다. 법정에서 대학생이 달려든 여자인 힐다는 K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 역시 K에게 다가가 애무를 한다. 또한 K에게는 어린 사촌 어미(Irmie)가 찾아온다. 이 소녀는 K의 숙부에게 그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렇게 15살밖에 안 된 이 소녀는 자신의 사촌오빠에 대한 걱정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암시를 하는 인물이다. K의 상사인 차장인 그에게 사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한다. K 역시 사촌과 결혼하는 것은 범죄라고 어미에게 말한다. 이렇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누이의 성격과 하녀의 성격 그리고 창녀의 성격을 지닌다. 사실 카프카가 꿈꾸었던 여자는 이 모든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카프카는 여성에 대한 욕망과 근친상간에 더불어 동성애에 대한 묘사까지 한다. 이것은 징후적으로 묘사되는데 소설의 처음에 K에게 체포되었음을 알리는 경관들은 “꼭 맞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행복처럼 여러 가지 주름과 주머니와 버클과 단추, 벨트가” 달려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 경관들은 검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 형 집행인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이것이 오슨 웰즈의 영화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성애 부분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하나의 징후로써 묘사되기 때문이다. 
K는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며 자신이 왜 체포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 과정은 여자 찾아다니기이면서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이다. 오슨 웰즈는 특유의 미장센으로 그 미로를 표현한다. 그런데 카프카적 공간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공간은 블록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미로처럼 얽힌 길에 의해 이어진다. K는 화가 티토렐리의 방을 찾아간다. 그것은 자신이 출두했던 법정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나오자마자 그 방이 곧바로 법원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고 매우 놀라게 된다. 오슨 웰즈는 그 연결되는 통로를 기괴한 조명효과를 통해 표현한다. 그 길을 통과하면서 K는 공포에 질린다. 이런 공간구조는 K를 짓누르고 있는 권력이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초월적인 법으로 인지되는 그 권력은 주변에 많은 파편들을 배치해 놓는다. 그것을 일종의 천체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불연속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연속적인 것이다. K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감시하는 권력체계는 공간적으로 하나의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복도는 한없이 연장되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법은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카프카의 우화는 인간이 결코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결코 왜 K가 체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카프카는 법을 내용이 없는 껍데기로 또 목적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한다. 처벌받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단지 법은 갑자기 침실 안으로 쳐들어온다. 법의 폭력성은 사적인 영역에 대한 침입으로 표현된다. K를 체포하려는 경찰들은 그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어온다. 또 뷔르스트너 양의 침실에도 들어가 물건들에 손을 댄다. K 역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데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K가 체포되는 과정을 앞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구경한다. 우리의 행동은 모두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리고 오슨 웰즈가 연기하는 변호사는 침대에서 고객들을 맞는다. 법정은 정치판의 집회처럼 보이고, 판사의 책 속에는 음란한 사진이 끼어 있다. 포르노 서적에 씌어져 있는 것이 법인 것이다. 사람들이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욕망 이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이 정치판의 집회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법에는 욕망과 권력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법정은 그것들이 싸우는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과연 K는 유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 그 스스로는 자신이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오슨 웰즈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K가 유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카프카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K 역시 거대한 사법체계 혹은 권력체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은 은행대리이다. 그 지위는 은행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이다. 그는 고객들을 기다리게 할 수 있으며,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은 권력과 법에 저항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공모자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 역시 그러한 인간조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유죄라는 것이다. 심지어 오슨 웰즈는 K가 태어날 때부터 유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K가 법에 분개하지 않고 기꺼이 권력자와 사형집행인의 편에 가담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매질을 당하고 있는 프란츠에게 폭언을 퍼붓기까지 한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는 다른 고객인 블록을 조롱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카프카의 책을 읽고 오슨 웰즈의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도 유죄이다. 한마디로 카프카와 오슨 웰즈의 세계에서는 존재 자체가 범죄인 것이다.
이렇듯이 K가 유죄라는 데에는 카프카와 오슨 웰즈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두 작가가 갈라서는 지점이 생긴다. 카프카는 그 법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 결국 K는 처형되고 마는데 그것은 자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소극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카프카의 이런 세계관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오슨 웰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화 곳곳에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는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법정 앞에 서 있는 노인들은 모두 죄수들이다. K는 그들 사이를 뚫고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피골이 상접해 있고 매우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분명히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처형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K는 자신을 죽이려는 경찰들에게 조롱의 웃음을 보낸다. 소설과 다르게 영화에서 K는 칼이 아닌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그 폭탄이 터지면서 버섯구름이 만들어진다. 이것 역시 핵무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K가 근무하는 은행에 대한 묘사에서 오슨 웰즈는 거대한 공간에서 분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그 자본주의의 테일러주의적 착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억압일 수밖에 없다.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카프카는 사무실이 진짜 지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는 컴퓨터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기계적 합리주의에 대한 맹신을 표현한다. 영화에서 표현된 이러한 장치들은 단순히 각색상의 첨가물이 아니라 오슨 웰즈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어쩌면 그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빌려 법체계뿐 아니라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주된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이 영화는 K의 체포부터 처형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슨 웰즈는 카프카의 이 소설이 위대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소설은 위대하다. 관료주의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경찰로 대표되는 권력의 남용에 대해서 이 정도로 끔찍하게 그리고 세밀하고 묘사한 작품이 또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진실인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소설과 영화에 나오는 우화처럼. 하지만 법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모든 법체계를 지탱하는 것은 거짓이다. 오슨 웰즈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K처럼 우리 역시 그 거짓된 체계에 속해 있을 뿐이다.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K는 오슨 웰즈가 연기하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참혹한 결말이지만 보편적인 원칙의 외피를 쓰고 법은 거짓으로 변한다고. 그런데 더욱 참혹한 것은 이렇게 법의 본질을 까발리는 것조차 잉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판은 소중한 것이지만 현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결국 K는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처형되고 만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고 존재조건이다. 


류상욱․
저서 호모 시네마쿠스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박사과정 수료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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