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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문화산책/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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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봉준호·영화에 대한 몇 가지 단상
강성률|영화평론가
1. 일상 대 비일상의 충돌
봉준호가 연출한 영화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아마도 그것은 일상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가 그린 영화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소한 일상의 편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대중영화에서 그토록 흔하게 등장하는, 애절하고도 화려한 연애는 없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도 볼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겪는, ‘그렇고 그런’ 일들이 등장할 뿐이다. 아파트 수위와 경리, 백수와 비슷한 신세의 대학 강사가 벌이는 미묘한 게임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하고, 살해범을 다루지만 정작 살해범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고 그를 좆는 형사들의 일상만 도드라지기도 하며,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 일상이 풍비박산 나지만 여전히 가족은 ‘돈 없고 빽 없는’ 일상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봉준호 영화가 일상을 다루는 것만은 아니다. 봉준호는 편안한 서민들의 일상에 무거운 돌을 던져 파장을 만들어낸다.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는 대학 교수가 되려는 강사의 처절한 ‘생존의 법칙’이 개의 살해와 더불어 그려지고, <살인의 추억>(2003)에서는 연이어 발생하는 범죄 현장을 형사들과 피해자들이 가슴 졸이며 견디고, <괴물>(2006)에서는 무심한 것 같은 한강에 느닷없이 괴물이 나타나 한 가족의 희망인 딸을 유괴해 가버린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런데 봉준호가 그린 영화 속 인물들은 무엇인가 찾아 헤맨다. 개의 살해범을 찾아서, 진짜 연쇄 살인범을 찾아서, 또는 괴물의 아지트에 있는 딸을 찾아 미친 듯이 헤매 다닌다. 그것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다. 일상적이지만 어느 순간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봉준호가 그리는 영화 세상이며,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봉준호가 보는 영화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찾아다니는 인물을 통해 과연 무엇을 그리고자 한 것일까? 평안한 아파트의 옥상에서 어느 날 개가 던져져 죽임을 당한다. 평화로운 아파트는 순간, 죽음의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풍년을 맞이하는 황금 들판의 논에서 시체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갑자기 죽음의 마을로 바뀌어 버린다. 여유롭고 넓은 한강에서 느닷없이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버린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 가장 잔혹한 공간으로 바뀌면서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뀐다. 이런 사건 속에 봉준호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슬쩍 버무려 넣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미묘한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이 문제를 건드리면서 감독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사회인지 성찰하고자 한다. 사회학과 출신이고 민노당 당원인 봉준호를 생각하면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가 주로 공격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사회적 모랄에 대한 것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코미디이든 미스터리 형사물이든 재난영화든 결코 편하지 않다. 하지만 봉준호는 이런 불편을 탁월한 영화적 완성도로 만회한다. 그의 영화가 대중적으로도 성공하고 작품적으로도 성공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그가 공격하는 한국사회의 모랄들을 찾아가보자.
2. 삶의 부조리, 부조리한 삶
봉준호가 그리는 세상은 부조리한 세상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곳에 사는 인간들의 삶이 매우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지리멸렬>(1994)을 보자. 세 개의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 교수, 언론인, 법조계 인사 등의 행동이 말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재치 있는 반전을 통해 보여주었다. 특히 사회지도층이라는 인물들은 스스로의 입을 통해 그들이 강조하는 도덕, 지도적 윤리, 범죄 등을 너무나 가볍게 어기는 행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또는 인간의 비열한 욕망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여기서 그쳤다면 단지 기발한 착상을 지닌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제까지 벌여놓았던 것을 절묘하게 마무리한다. 사회 지도층의 비열한 면을 보았던 이들은 TV에서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지도층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생계에 쫓겨 살아간다. 단지 교수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이나,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TV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지도적 위치는 확대 재생산된다. 바로 이렇게 부조리한, 현대 사회에서 계급을 확대 재생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욕망과) 사회를 다룬 영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살인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올림픽이 열리던 때이다. 신문에서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7번째 피해자 발생”과 “서울올림픽 D-10”이 동시에 실려 있다. 한쪽에서는 가장 큰 축제인 올림픽이 열리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연쇄 살인범이 활기를 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살인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지원을 요청해도 경찰당국에서는 시위진압 때문에 지원할 병력이 없다고 한다. 살인은 예정처럼 이루어졌고 경찰은 살인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살인을 막지도, 범인을 검거하지도 못했다.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사이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결국 화성에서는 무고한 여성이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경찰력이 매우 막강했던 시대에, 약간이라도 범죄의 기미가 보이면 여지없이 잡아서 무지막지한 교육을 시켰던 그 시대에, 어떻게 살인 사건이 활개를 치며 연이어 발생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정권의 정체성이 빈약했던 그 시대에 치안이 목적이 아니라 정권의 보호를 위해 경찰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아야 하고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이 경찰들의 주 임무였던 것이다. 치안이 가장 좋았던 시대에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아직까지 범인이 검거되지 않는 부조리해 보이는 상황은 다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려한 경제적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모두가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음습한 폐부였다.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을 그리는 봉준호의 영화에는 부조리한 공간이 등장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공간은 아파트 지하실이 그런 역할을 한다. 어둡고 침침한 그 공간은 경비원의 세상이다. 경비원은 그곳에 주민들이 버린 물건을 재활용해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해 놓았다. 그곳에 다른 사람이 침입하면서 돌연 무서운 공간으로 변해버린다. 노숙자가 머물면서 오해를 받고, 강사가 들어가 있다가 무서움에 떨어야 한다. 밝고 환한 이 세상에는 없는 어둡고 음침하고 두렵고 떨리는 공간이 바로 아파트의 지하실이다. 멀쩡한 사람도 그곳에 들어가면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시체가 발견되는 논가의 배수구가 그런 역할을 한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곳에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시체가 있다. 아이들이 무심히 바라보는 그곳은 어둡고 음침한 공간으로 바로 옆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들판과는 극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곳은 대부분 부조리한 공간으로 보인다. 가을걷이가 끝나 짚단이 쌓여있는 들판도, 강가의 갈대밭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범인 추적을 했던 거대한 채석장 역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초현실적 부조리한 공간으로 보인다.
<괴물>에서는 거의 모든 요소가 부조리하게 보인다. 한강의 다리도 부조리하게 보이고 다리의 배면도 그렇고 숱한 하수구과 배수구도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그곳에 괴물이 등장해 사람을 삼켜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강의 다리와 하수구, 배수구가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거나 CG로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는 점이다. 속성(速成) 근대화의 상징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어두운 그늘이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봉준호는 가장 평안하고 일상적인 공간을 갑자기 부조리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숲에 둘러싸여 있는 단아한 아파트, 풍요로운 물결이 요동치는 황금 들판, 넓은 어머니의 품 같은 한강이 순식간에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영화가 평안하지 않고 불편한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3.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
봉준호가 집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에 대한 치밀한 공격이다. 그는 데뷔작부터, 아니 단편영화 시절부터 끊임없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편영화계의 명성 높은 작품인 <지리멸렬>에서 그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영화화시켰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 사회의 가장 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 신문 논설위원, 법조인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거나 그것을 호도하거나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배 이데올로그이거나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언론 매체를 비판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보여주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살인의 추억>은 표면적으로는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정 지역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특별팀이 조직돼 범인 검거에 나서지만 별다른 단서가 없다. 결국 영화는 살인범을 검거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일반적인 형사 영화라면 범인을 검거해 해피엔딩의 결말을 내지만, 이 영화는 범인을 검거하지 않음으로써 살인범이 아직도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다룬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와 같이 살인범이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도 언젠가는 살인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별팀을 꾸려 범인을 검거하려고 하는 경찰의 활동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정신이 모자라는 동네청년 백광호(박노식 扮)를 잡아 범인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고문수사, 조작수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백광호가 논에서 현장 검증을 하는 장면은 슬로우모션으로 촬영되었는데, 누가 봐도 범인이 될 수 없는 백광호를 범인으로 조작하는 모습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고한 틀을 깨는 봉준호의 전략을 알 수 있다. 형사라는 사람(김뢰하 扮)이 시위하는 대학생을 폭력배처럼 때리는 장면에서도 경찰에 대한 불신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그는 다리를 잘라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영화가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외관에 가려진 살인사건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 치안 문제 때문에 살인사건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는 점을 조명하는 것을 볼 때, 봉준호가 다루려는 것은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스릴러가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을 파고드는 전략적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물>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화이다. 한강변에 살면서 매점을 운영하는 일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그들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딸(이자 손녀이며 조카인) 현서(고아성 扮)가 유괴된 것이다. 가족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오히려 방해만 하고 있다. 미군 병사에게서 바이러스가 있다고 확신한 미국과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일가족을 병원에 갇혀 살도록 한다. 심지어 괴물의 피를 얼굴에 묻혔던 강두(송강호 扮)는 바이러스가 있다는 그들의 확신에 의해 정밀조사를 받아야 했다.
정밀조사를 받는 가운데 세계보건기구의 조사관이 하는 영어를 한마디 알아들은 강두의 말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괴물에게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no virus”라고 하는 한마디를 알아듣고 강두는 “바이러스다가 없다는 거지?”라며 반박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전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던 인물이 영어를 이해해서 바이러스가 없다며 따지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봉준호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다. <지리멸렬>과 <살인의 추억>에서 이미 그것을 보여준 바 있다. 언론에서는 딸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일가족을 모욕하는 데 온통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딸을 구하기 위해 탈출한 강두 가족을 두고 병원 관계자들은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폭언을 보도라는 핑계로 고스란히 담아낸다. 강두가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러스의 결과가 나왔다고 했을 때 발로 TV를 꺼버리는 장면은 언론에 대한, 그리고 미국에 대한 불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의 발표를 거의 그대로 ‘리플레이’하는 언론을 손이 아니라 발로 꺼버리는 것은, 언론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언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반드시 거론해야 할 것은 공무원의 관행화된 비리의 현장이다. 소독차로 위장해 한강변으로 들어가려는 일가족을 제지한 공무원은 뒤늦게 방역사업에 뛰어든 업체에 특혜를 준 자신에게 돈을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렇게 부패한 공무원의 연결고리는 정부로 이어지고, 이런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당해야 한다. 자국 내의 국민들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미국에서 바이러스가 있다고 말하면 모든 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기침과 침을 조심해야 한다고 방송이 언급하면 모두가 환자 취급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괴물>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약점을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3. 봉준호 영화의 핵심, 계급
결국 봉준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의 문제이다. 그의 영화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삶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두 층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려는 사람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대결장이 바로 봉준호의 영화이다. 물론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사람은 유한계급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한계급자일 가능성이 높다.
봉준호가 영화아카데미 시절에 만든 단편 <백색인>에서부터 계급문제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화이트칼라이고 자가운전자이며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인공(김뢰하 扮)은 어느 날 퇴근하다가 차가 고장 나 집까지 걸어가게 된다. 산동네 너머로 보이는 고층의 화려한 아파트까지 금방 닿을 것 같았던 주인공은 산동네의 미로 같은 길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만다.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는 신기루처럼 멀어져만 가고 길은 멀기만 하다. 점입가경의 산동네를 지나 그는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집 앞에서 그는 우연히 사람의 잘린 손가락을 하나 줍는다. 그런데 사람의 손가락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반지를 끼워보기도 하고, 심지어 피아노를 쳐보기도 한다. 손가락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드러난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었던 노동자가 고용인에게 시위하기 위해 왔다가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하기만 하다. 1980년대 노동문학에서 숱하게 다루었던 ‘잘린 손가락’ 모티프를 통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즉 <백색인>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고층아파트와 산동네라는 배경을 통해 계급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계급 문제를 학계의 구조적 비리와 연관시킨다. 대학관계자들이 하는 농담처럼, 교수와 강사는 계급이 다르다. 교수는 부르조아고 강사는 프롤레타리아다. 대학 강사인 현주는 학교로부터 임용에 대한 언급을 받는다. 그토록 기다리던 계급 상승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임명의 권한을 지니고 있는 교수와 술을 마시고 (사실은 술을 대접하고) 한 가지 언급을 받는다. 임용이 되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돈을 내고 교수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대학 강사들은 대부분 가난한 삶을 산다. 1년 중 방학 중인 네 달은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 만삭인 부인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을 그는 학교관계자에게 바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교수가 된다. 마지막 장면.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그는 상념에 잠겨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대하던 교수가 된 기쁨에 젖은 것일까, 돈을 내고 교수가 된 죄책감에 사로잡힌 것일까? 이때 창밖에서는 현남이 등산을 가다가 거울을 화면 밖으로 비춘다. 그것은 자신을 비추는 것일까, 현주를 비추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비추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 영화에서는 한국사회의 부르조아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성취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봉준호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괴물>에서도 주인공은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일가족이다. 젊은 날 집안을 돌보지 않다가 나이 들어 정신 차리고 집안을 들보는 가장(변희봉 扮)이 겨우 장만한 것이 한강 둔치의 작은 매점이다. 그곳에서 식구들이 먹고 잔다. 그런데 그곳에 괴물이 출현해 그들은 병원에 격리되어 수용되어야 한다. 딸이자 손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그것을 믿어주지 않는다. 사람이 내뱉는 말의 신뢰 역시 그 사람의 직책이나 계급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보잘것없는 그들의 말을 믿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강두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4. 미국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또는 반미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의 계급은 미국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빈부의 격차 역시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계급 문제에 관심을 가진 봉준호는 그 원인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답이 바로 <괴물>에 있다.
어쩔 수 없이 <괴물>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이다. <괴물>은 괴물이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괴물은 그 모습을 전부 드러내 놓는다. 쫓고 쫓기는 스릴의 재미도 덜하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탄탄한 것도 아니다. 순간순간 터지는 코믹과 스릴은 조화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괴물>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그것은 호러영화를 슬쩍 비트는 센스에서 나오기도 하고, 배우의 연기에서 발산되기도 하지만, 역시 한국사회를 반추하는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괴물>은 매우 용감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반미를 자유롭게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미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것도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대중영화에서 이런 목소리를 담는 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반도의 문제를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한반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미국이 제공했거나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포동 미사일 발사의 기본적인 원인은 북한에 있지만, 좀더 파고들면 결국은 미국에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철저하게 북한을 고립시켜 놓고 그들이 스스로 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악취미인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허용하면서 북한의 그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이중적 태도도 문제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민간인 살해는 눈감으면서 망망대해의 바다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견제를 하려고 한다. 미사일 대추리 문제도 결국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군을 재배치한다고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한미 FTA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4강에 끼어 있는 분단된 한반도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해 협상을 강압하다시피 하는 것은 강도짓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4대 선결조건을 아무런 조건 없이 포기한 노무현 정권과 무능한 관료들, 친미주의자들이 더 짜증난다.) 21세기 유일의 강대국, 미국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지배한다. 자신들의 말이 곧 법인 시대이다.
<괴물>은 이런 상태의 미국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미군기지에서 엄청난 양의 독극물을 방출했기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는 돌연변이 괴물이 한강에서 생겼다. 괴물에게 공격당했던 미군 병사에게서 이상한 반응이 생기자 미군은 이를 ‘괴물바이러스’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강을 통제한 채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한다. 이제 한강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고 괴물과 맞섰던 이들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감금당한 채 조사를 받는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미국의 눈치만 본다.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미국을 가장한) 세계보건기구는 강압적으로 바이러스를 찾으려 한다. 심지어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는 약을 괴물에게 투여해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어떤 일이든지 강압적으로 하고야 하는, 지금의 미국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은 정부도 아니고, 미군도 아니다. 한강 둔치에 있는 매점의 한 가족이다. 딸이 괴물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다. 아무도 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지만 그들만은 싸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협동 플레이로 괴물을 물리치고 만다.
이 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화염병이다. 운동권 출신 아들(박해일)이 괴물을 처치하는 방법은 화염병으로 태워 죽이는 것이다. 1980년대 아이콘이었던 화염병이 엄청난 불길을 만들어내며 괴물을 쫓을 때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 화염병으로 미국의 은유인 괴물을 물리칠 때 묘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것이 386세대의 낭만적 해결 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지만 영화에서만이라도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혁명적 낙관주의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닌가 말이다. 386세대이며 사회학과 출신의 봉준호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었다. <괴물>은 그런 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
봉준호는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대중영화의 장르 틀 속에 녹여내는 감독이다. 단편영화 시절부터 그는 줄곧 한국 사회의 미묘한 모순을 다루었는데, 장편 데뷔 이후에도 그것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런 그의 작업이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비평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영화는 장르의 규칙을 지키는 듯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기존의 장르에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호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을 건드린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가 그리 큰 호흡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소 과장을 하자면, 대학 강사의 비애를 겪은 이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기존의 형사 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고 영화 내내 음침한 하수구에 빠진 듯한 느낌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흥행을 했다. 이것은 1980년대 억압적 철권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대부분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집단무의식처럼 고여 있던 어두운 그 기억을 적절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개봉 첫 주말 엄청난 흥행력을 보여준 <괴물> 역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대형사고의 기억과 졸속적 사후 처리, 그 뒤에 있는 관료주의와 미국의 영향력을 떠올리게 한다. 때문에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한다면 그것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아프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아픈 기억을 반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아픈 기억 속에서 우리 사회의 폐부를 함께 보는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아픈 폐부를 치료할 수도 있고 상처만 덧입힐 수도 있다. 그것은 관객들의 선택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봉준호 개인만의 영화가 아니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등
․한성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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