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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서평/김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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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8회 작성일 08-02-29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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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상운 창작집 '내 머릿속의 개들'
■박주영 창작집 '백수생활백서'


21세기 백수들의 존재론에 관한 보고서 
김경연|문학평론가



1. 프롤로그-문학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2000년대다. 박민규의 말마따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누구도 모르는 단어”가 되었고, 그 사이 전두환도 가고 노태우도 가고 문민도 가고 국민도 가고 바야흐로 참여가 도래했다. 거대 서사가 이렇듯 요란하게 들썩이는 사이, 수배자 명단에 몇 번씩 이름을 올리던 80년대 운동권 투사는 학원의 스타 강사로 룸살롱의 귀빈이 되고, 당시의 운동권 커플은 맞벌이를 해서 신도시에 아파트를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코리안 스텐다즈」, p. 184) 이른바 “코리언 스텐다즈”가 된다. 386세대라는 호명이 더 익숙한 이 코리언 스텐다즈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여 지난 시절의 대중가요를 합창하며 낭만적 향수에 잠긴다. 결국 80년대는 <7080 콘서트> 같은 것이 되었다.
‘운동권’이 ‘코리언 스텐다즈’로 변신하고 80년대는 <7080 콘서트> 같은 TV 프로그램의 낭만적 향수의 대상이 되는 사이 문학을 선택하는 기준 역시 달라졌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문학은 참여요 저항이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이 가슴 뭉클한 당위적 구호가 되던 80년대, 독자들은 단순한 작가가 아닌 투사-소설가, 운동권-시인이 ‘생산’한 문학을 읽고 ‘학습’하면서 운동권-독자로 거듭났다. 그 시절 문학 행위란 차라리 신성한 ‘의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맑스의 말대로 세상의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리는 법이다. 2000년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나온 문학은 80년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여 있다. 이제 문학 행위는 80년대와 같은 신성한 의식일 필요도 없고, 집단적․사회적 주체의 하중에 짓눌려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섰던 90년대 문학의 피해의식에 편승할 이유도 없다. 2000년대 문학은 과중한 역사적 책무와 계몽적 요구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모처럼 가벼워질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이 자유의 대가는 문학의 사회적 권위 약화와 영향력 상실이라는 이율배반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제 문학은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진 육체로 체급과 타격기술의 제한을 두지 않는 이종격투기 같은 문화의 장에서 무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야만적 경쟁의 장에서 그래도 문학은 굳건히 살아남을 것이라는 기대는 차라리 낭만적으로 들리며, 문학은 끝나고 그 잔영만이 남았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선언은 울림이 크다.
문학이 더 이상 사회를 움직일 수 없고 그 기대조차도 유효하지 않으며, 더구나 소설이나 시가 스펙타클한 광고의 외피를 걸쳐야만 겨우 상품으로 유통되는 이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 하겠다고 대단한 결심을 하는 이들이 있다. ‘예측불허의 상상력’과 ‘통념을 깨뜨리는 발상’과 ‘종횡무진 질주하는 입담’을 지녔으면서도 돈 되는 영화나 만화나 게임서사가 아닌 가난한 문학을 선택해 준 그들에게 올해도 당근 같기도 하고 채찍 같기도 한 상이 주어졌다.
올해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이상운의 '내 머릿속의 개들'과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는 공교롭게도 모두 백수들의 이야기이다. 상징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하위주체들이 이미 소설 속의 주류로 부상한 마당에 백수라는 소재가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다. 더욱이 백수 코드는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등 각종 대중문화 장르 속에서 흔하게 유통되는 소재다. 그러나 대중문화 상품 속의 백수들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위험한 존재들이기는커녕 노동하는 자들의 피로를 덜어주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백수 이야기에 정작 백수는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네트워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소설 역시 백수 없는 백수 이야기, 문화상품으로서의 소설로 전락할 위험은 상존한다. 이상운과 박주영의 소설 또한 경계할 부분이다. 스스로의 환부와 모순마저도 상품으로 기획하는 자본주의의 동일화 욕망에 맞서 어떻게 다른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로 쉽사리 잦아들지 않는 잡음을 낼 것인가를 이왕 문학을 선택한 작가들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적당히 달콤하고 낭만적인 백수 서사가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도발하고 독자의 성찰을 촉발하는 전혀 낭만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소설을 독자들이 선택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머릿속의 개들'과 '백수생활백서'는 어떠한가. 이상운과 박주영의 백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2. 21세기 백수의 고현학-이상운 '내 머릿속의 개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이상, 「날개」). 자본주의의 속도전에서 밀려난 어느 식민지 백수의 참담한 고백이다. 반세기 이상이 흘러 ‘질풍신뢰의 속력’이 더욱 가속을 받은 2000년대, 세상은 이러한 백수들로 넘쳐나고 그들의 고백으로 수런거린다. '내 머릿속의 개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고달수’의 현대인 분류법이 단지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그의 가름대로 세상은 “지금 실업자인”인 존재A와 “조만간 실업자가 될” 존재B로 재편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의 개들'의 고달수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배울 만큼 배웠지만 자본의 속도를 따라가는 데는 영 잼병인 지식인 백수 존재A이다. 노동이 존재를 증명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달수는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존재의미를 느끼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대학시절 학내의 봉건적 서열주의와 관료주의에 딴죽 걸던 비공식 자유주의자 동아리 ‘변신’ 시절에 머물러 있다. “자유로운 에너지 교환”을 방해하는 고달수의 아마추어적인 상상력은 그를 매번 구조조정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주저앉히고, 급기야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 “불량기계”, “시궁쥐”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다. 
고달수가 이 모멸을 견디는 방식은 “사색”이다. 비릴리오의 지적처럼 판단이나 추론의 틈을 주지 않고 무한 속도로 질주해 가는 질주정(疾走定) 사회에 대응하는 이 느림의 수행을 통해서 고달수는 “이 세계에 도덕의 절대적 근거가 있는가 없는가”를 질기게 고민한다. 그러나 고달수의 성찰은 확실히 내공이 약하다. 미국 유학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적 상상력으로 재무장한 ‘마동수’의 제안을 수락하는 그는 자신의 “돈 안 되는 사색”을 접고 “외로운 빈궁의 늪”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색한다.
그렇다면 마동수는 누구인가. ‘변신’ 시절에는 “언제나 옆구리에 '악의 꽃'을 끼고 다니며”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자유의 광장이 되어야 할 대학 캠퍼스를 돈과 관료주의의 노예들을 생산하는 하급공장으로 만들고 있는 대학 당국에 시비를 걸”기도 했으나, 지금은 후기 자본주의의 모범적 주체로 변신한 인물이다. 제국의 본토에서 제대로 자본주의를 학습한 그는 “버나드 쇼의 풍자는 제거하고 그 통찰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며, 고흐의 그림과 대중스타를 합병하고 유명인사들의 얼굴을 콜라주한 작품으로 대중들의 욕망에 영합하는, 말하자면 뇌관을 들어낸 포스트모던한 상상력으로 돈 되는 작품을 생산하는 퓨전과 리모델링의 천재 미술작가이다. 이런 그가 몇 년 만에 나타나 ‘변신’ 시절 이후 성장을 멈춘 고달수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더 이상 “세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에너지의 끝없는 교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받기 힘든 공은 받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다”는 삼미의 진실을 전해 주는 박민규의 ‘조성훈’보다 훨씬 현실적인 메시지를 일러주는 마동수가 본격적으로 기획하는 것은 ‘고달수 자본주의적 성장 프로그램’. “고달수의 인생관과 감정을 개조하는” 이 프로그램의 구체적 내용은 고달수를 매개로 자신의 아내인 장말희와의 부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때는 “고도의 생산성이 보장된 탁월한 합병”이기도 했던 마동수와 장말희의 결혼은 장말희가 “에너지의 흐름을 차단하고 소통의 종말을 가져오는 동화 같은 공상”을 하면서 “미학적으로 교환가치가 형편없는 여자”가 되자 가차 없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재배치의 대가 마동수의 트레이닝에 참가한 고달수는 마침내 장말희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마동수가 기획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마동수의 교육에 힘입은 고달수가 장말희를 대상으로 스스로 구조조정의 주체가 되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공은 약할지언정 사색으로 스스로를 단련해 온 마동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기란 녹록찮은 일이다. 마동수의 욕망을 흉내 내면서도 “내면의 나라에선 같은 종족”인 장말희 앞에서 고달수는 마동수와 같은 쿨한 상상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가 없다. 결국 장말희를 자본주의적 욕망에 부합하는 여자로 재구성하려는 고달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사색의 대가답게 이후 고달수는 이 일련의 사태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수난의 근원인 마동수를 응징”하고 장말희와의 “진정한 연대”를 모색한다. 소설은 마동수 식의 성장을 거부하고 존재A로 귀환한 고달수를 통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를 균열하고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단한 ‘성찰’임을 역설한다. 

“아니, 이런 체제가 과연 유지될 필요가 있을까? 우리의 근본적인 존재조건을 완화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악용하고 악화시키는 이 체제 말일세.” “제 생각으로는…….” 제가 머뭇거리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 그리고 실업자로서, 자네는 끝없이 이 괴로운 질문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일세.”(pp. 181〜182)

고달수의 스승인 철학교수 김팔봉의 입을 빌려 작가는 성찰적 주체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이상운의 현실 인식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성찰과 연대를 통한 자본주의의 대안 찾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달수가 장말희와의 결합에 실패하고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는 소설의 결말은 대단히 어둡고, 답답하다. 허나, 이 답답함이야말로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신의 밀실 속에 들거나 환상으로 초월하지 않고 존재A와 존재B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현실에 발 딛고 있으려는 작가의 정직함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작가의 태도가 오로지 인간과 삶의 세계에 관심을 집중하는 풍자를 선택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아쉬운 점은 작가의 이 같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를 담아낸 소설의 육체가 지극히 왜소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풍자와 고백과 입담을 버무려 이 앙상한 육체를 가리려고 하지만 소설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진중한 주제의식을 힘 빼고 가볍게 담아내고자 하는 작가의 구상은 종종 작품의 의미마저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의 속도전을 비판하는 소설이 오히려 그 속도를 욕망하고 지나치게 날렵해지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작가 이상운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딜레마일 것이다.

3. 나는 생산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박주영 '백수생활백서'
이상운의 '내 머릿속의 개들'이 비자발적 백수가 백수로서의 자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는 자본주의의 기율에 반항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자발적 백수의 생활을 트렌디하게 보여준다.
‘백수’라는 소재와 ‘백서’라는 형식의 유행 코드를 가져온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머릿속의 개들'의 마동수. 퓨전과 재배치의 대가 마동수의 의사-포스트모던 상상력이 충분히 한 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음을 '백수생활백서'는 여실하게 증명한다. “새로움은 헌것의 재활용”('내 머릿속의 개들', p. 90)이라는 마동수의 선언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 대한 씁쓸하지만 지극히 냉철하고 적확한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술복제시대의 소설답게 '백수생활백서'는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하는데 인용과 참조와 모방을 천의무봉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소설, 영화, 드라마의 그럴듯한 구절, 장면, 모티프를 몽타주하는 이 소설은 이제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역시 ‘편집’의 예술임을 새롭게 확인시키며, 인용한 작품들의 상상력을 모방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성찰 부재는 ‘모방은 제2의 창조’라는 산업화 시절의 낡은 구호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소설의 히트상품화를 추구하는 출판사의 의지이긴 하겠지만, 활자에 색을 입히는 경박한 자본주의적 발상은 이 소설이 겨냥하는 지점이 과연 상품 이상인지 심각하게 회의하게 만든다.
소설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 ‘서연’은 20대 여성 백수이다. 그녀가 여타 백수들과 차이가 있다면 스스로 백수-되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서연에게 백수란 결핍이나 무능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공인한 능력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따윈 상관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체적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마디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참고 견뎌야만 했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일 텐데, 그래서 서연은 무언가를 “기다리지도 소원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으며”, 반성도 후회도 없고 “희망해야 실패란 것도 있는데 그런 적이 없”기에 실패도 모른다.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려울 것도 없는 그녀는 “가볍고 의미없고 비생산적”이지만 그런 자신이 결코 한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에 든다”. 
아버지 세대를 규율했던 노동, 생산, 금욕, 축적 등의 케케묵은 산업 자본주의적 훈육 담론을 ‘됐거든!’ 한마디로 간단히 거부하고 서연은 의식 있는 불량 주체, 이유 있는 반항아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비단 서연만이 아니다. ‘나는 생산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백수성은 서연의 친구들인 두 명의 잠재적 백수 혹은 준백수 ‘유희’와 ‘채린’에게도 역시 관철되는 바이다. 유희에게 직장은 영원한 임시직일 뿐이며, 유일하게 정주민의 표지를 달고 있는 유부녀 채린에게도 그녀의 비디오 가게는 생계나 재산증식의 수단이 아닌, 현실을 잊고 마음껏 꿈꾸기 위한 공간에 가깝다. 이들이 “자신과 세계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독서광(서연) 되고, 영화광(유희) 되고, 로맨스광(채린)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나’를 요란하게 외쳐대는 이 삐딱한 마니아들은 실상 자폐적 유아론에 빠져 있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들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아버지 세대의 삶과 단절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비판하는 아버지의 자본에 기대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아니 극복하려는 의식도 노력도 부재한다. 서연에게는 책을 사는 돈을 버는 것 외에 자신의 의식주 정도는 해결해 줄 든든한 아버지가 있고, 유희에게는 그녀가 일찌감치 독립할 수 있도록 후원해 준 배경 좋은 부모가 있으며, 채린에게는 비디오 가게에 앉아 낭만적 사랑을 꿈꿀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건실한 직장인 남편이 있다. 이들의 자본에 적당히 기대어 서연, 유희, 채린은 책을 소비하고 영화를 소비하고 사랑을 소비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선택된 책이나 영화나 사랑은 사유의 기호라기보다는 색다른 것을 소비함으로써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욕망의 반영물에 불과하다. 후회도 성찰도 없이 소비하는 주체들인 그들은 영락없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욕망하는 주체들이기도 하다.
특히 주인공 서연에게 책과 독서는 낭만적 사랑의 더듬이 역할도 하는데, 이쯤 되면 서연의 책 읽기가 그저 폼 잡기에 지나지 않음을 더욱 강하게 확인시킨다. 서연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시작으로 일련의 소설들을 매파 삼아 이른바 코드가 맞는 사랑을 찾는데, 시종일관 아저씨라고 불리는 서연의 남자는 다량의 책은 물론 아파트와 스포츠카와 신비한 아우라를 더해 주는 적당한 사랑의 상처까지 지닌, 그야말로 지(知)․덕(德)․재(財)를 겸비한 완벽한 남성이다. 시청자나 관객들 수준 싹 무시한 간 큰 드라마나 삼류영화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남성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서연과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서 예컨대 “제일 아름다운 책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는 법이고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인생만큼 재밌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서연의 깨달음을 유도하려고 했으나, 이를 위해서 작가가 부끄럼 없이 남발하는 우연과 진부한 인물 구성과 통속적인 스토리 전개는 박주영의 작가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이 작가의 문학 행위에 대한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가령 작품 속의 유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즉흥적으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낯익은 것들의 낯익은 배치’로 한 편의 소설을 ‘만들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듯 자신을 위해 소설을 쓸 뿐”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박주영의 방식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작가가 소위 ‘오늘의 작가’라면 문학의 내일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부디 박주영이 소설가로서의 최소한의 자의식을 가지고,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를 고민해 주길 바란다.

4. 에필로그-문학에 관한 오래된 믿음
아주 오랜만에 문학에 관한 오래된 생각을 읽었다. 새 소설 '인간연습'을 출간한 조정래 선생의 인터뷰에서였는데, 내용은 낯설게 다가오는 낯익은 단어와 문장들로 가득했다. 문학청년, 가난하게 살겠다는 각오, 최선을 다하고 실패해도 좋다는 각오, 진정한 작가는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 소설을 통해 진실을 쓰고 싶다 등등. 그리고 이 오래된 생각의 작가는 예언한다. “기다리면 돼. 결국 책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거든.”이라고. 비록 이 대가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생각이 문학의 미래를 만들고 문학을 벼리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영화 <왕의 남자>처럼 작품 한 편으로 대한민국 국민 1200만을 끌어들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문학을 그래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상운이나 박주영의 믿음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란 우리의 정신에 빛을 비춰주는 즐겁고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쉬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만들어내기로 맹세한 사람”이라 말하는 커트 보네커트를 동경하고 “일흔이 넘고 여든이 넘어서도 계속 글을 써야 한다. 죽음이 부르기 전에는 결코 펜을 던져서는 안 된다.”('내 머릿속의 개들', 수상소감, p. 190)고 다짐하는 이상운이 문학을 선택하는 기준과 조정래 선생의 그것이 결코 다를 리 없다. 이는 또한 “첫 소설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우연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맺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계속하기는 아주 어려울 것이다.”('백수생활백서', p. 321)라는 말로 ‘문학하기’의 지난함을 아는 박주영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이들의 오래된 믿음이 문학이 끝났다는 갖가지 흉흉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문학 이후의 문학’, ‘탈근대 문학’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김경연․
부산대, 부경대 강사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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