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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서평/조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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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영옥 시집 아늑한 얼굴
최서림 시집 구멍
박찬일 시집 모자나무
우상파괴자들
조하혜|시인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종신토록 피곤하지 않는 것이야
그 구멍을 열고 그 일 자꾸 만들면
종신토록 구원은 없는 것이야
―노자 「도덕경」 52장
1. 한 바퀴에 대한 상상
평생 수행을 한 요가의 달인을 생각한다. 얼마 전 말 때문에 곤혹을 치른 한 시인을 만난 적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로 전국이 떠들썩했었다.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았던 것도 그 즈음이다. 몇 달이 지나 그를 다시 보았을 때, 상했던 얼굴 너머로 그는 전보다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평생 수행을 한 요가의 달인은 붕붕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그림의 제목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느 날 인도의 민요집 그림에서 본 것 같다. 붕붕 새처럼 날아올랐던 몸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공중그네 위에 앉아 그 새는 세상의 끝을 보았을 것이다. 후루룩 후루룩 우는 새처럼 온몸으로 노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붕붕 한 바퀴를 돌아 사뿐하게 제 몸 위로 착지를 했을 것이다. 한 바퀴를 돌아온다는 것. 말 때문에 곤혹을 치른 그녀를 보았을 때 달팽이관처럼 생긴 가슴속에서 울리던 말. ‘한 바퀴로 돌아와서 참 다행이라는 말’.
구르는 돌들도, 파란 이끼가 낀 자잘한 돌멩이들도 바람과 수모 가운데 태어났을 것이다. 한 바퀴를 구른다는 것, 한 바퀴를 돌아 깨지고 터진 살 너머 하얀 속살로 웃는다는 것.
요즘 내가 읽는 책들 중에는 더러 신학책들이 끼어든다. 교회 도서관 사서가 된 탓이다. 우상숭배자와 우상파괴자가 싸우는 동안, 두터운 페이지 속에서 활동사진처럼 하늘에 계시던 분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식민지 조선의 개화와 더불어 이 땅에 처음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편지에 적힌 알뜰한 애정사도 재미있다.
우상숭배자와 우상파괴자들, 우상숭배자는 우상파괴자이고, 우상파괴자는 또 우상숭배자이다. 사랑은 우상숭배인가, 우상파괴인가? 우상숭배이고 우상파괴이며 우상숭배……, 우상파괴……, 우상숭배, 그대가 아니었던들 까막눈의 중생인 내가 어찌 이것을 깨달았으랴.
대학교 때 노자의 도덕경은 참 따분한 책이었다. 노자는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던 유약한 현실도피자인가, 삼십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내 생각은 아니오, 글쎄올시다이다. 노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고 현실의 쓴맛과 단맛, 행복과 불행을 고루고루 맛본 자이다.
대학교 때 정작 역사는 안 가르치고 생의 요령만 가르친다고 귀를 틀어막고 일인 수업거부를 했던 강의실, 참을성 깊게 참아주신 노교수님 생각이 난다. 요령 같은 건 안 배워도 그만이다. 요령부득이다.
요즘엔 안 들리던 소리와 빛이 들리는 일이 있다. 눈과 귀로 보는 습성을 버리고 늑골과 폐로 듣고 보게 되었다. 노자는 없지만, 노자와 함께 세 명의 우상파괴자가 걸어왔다. 행복과 불행을 고루고루 맛본 자들의 책 속에서 책 속에 없는 얼굴들이 함께 따라 나왔다.
2. 첫 번째 우상파괴자
“죽음숭배자들에게”-박찬일 시집 '모자나무'
‘스카이다이버 안경을 쓰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하늘이 무슨 수영장이라고 헤엄을 치는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남자의 몸은 사라져서 그는 졸지에 공중이 몸이 된 남자이다.
그는 무엇을 꿈꾸는가. 노자의 꿈은 장자가 꾸었던 나비의 꿈처럼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혼종적인 꿈이 아니다. 그 꿈은 지극히 현실은 현실이다라는 꿈이다.
실제Realty는 꿈처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제Realty가 아니다. 신이 우상이라면 그는 신이 아닐 것이다. 죽음이 고통이라면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생을 위협하는 협박장 같은 것일 게다. 그의 시는 이러한 주체의 부정, 나아가 자신의 위속 가득 잔뜩 불안하려는 생의 음식물을 삼킴으로써 불안이라는 병을 통해 위협적인 죽음으로부터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 법을 익힌 어떤 생의 대범함을 보여준다.
그는 불안과 우울의 진통제를 삼킨 자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자이다. 그는 스카이다이버 안경을 쓰고 이 시집에서 너무 일찍 죽음에 길들여진 자들에게 혹은 죽음을 파는 불온한 자들에게 삶의 통증처럼 불안의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댄서가수이다. 웃지 마라. 통증을 가볍게 하기 위해 더러 우리는 누군가의 불안에 기대어 살 때가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에게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지만, 아픈 삶을 아프지 않기 살기 위해 때로는 변명처럼 누군가의 죽음에 기대는 일들도 있다. 그것은 청첩장처럼 또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문상객이 되어 장례식장을 드나들며 겪었을 일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라진 자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정작 알아들을 수 없는 제 말들에 취해 빈 소주잔을 채우다가 얼치기처럼 죽음이라는 말에 비틀거리며 자리를 뜨곤 했다. 죽음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는데 죽음의 조문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장례식장이었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죽음에 취해 돌아간 빈 장례식장에서 시인은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만나자 하라(「수리산에서:노자의 가르침 5」)’고 말하는 그는 ‘不可抗力’이던 죽음, 불행한 인간의 조건이던 오래된 우산-죽음-을 걷어치우고 생의 날씨 속으로 활보하자고, 생을 ‘立法’하려는 자이다(「나는 우산을 모른다」).
그는 진정한 ‘위버맨쉬ubermensch(넘어선자)’인가, 그럼 위버맨쉬는 대체 누구인가? 위버맨쉬는 한 바퀴를 모르는 자. 한 바퀴 따위엔 관심이 없는 자. 죽음의 요령 따위엔 관심이 없는 자. 영원히 살아있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계속해서 ‘가는 것을 예찬할 수밖에’(「아포리즘·기타」 p. 94) 없다.
그러나 앞으로 이 위버맨쉬가 가는 길에 최대 변수는 무엇인가? 단정적으로 말하면 그의 시에 몸이 없다는 것, 아마도 그에게 몸은 총체적 고통의 원인이고 결과일지도 모른다. 죽음과 내통하는 몸을 끝끝내 돌아보지 않으려는 고집쟁이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몸이 사라진 허공에서, 그 모자나무 위에서 한참동안 죽은 이들과 함께 걸려 있었던 게다.
그의 시를 읽으며 붕붕 유연하고 멋진 폼나는 착지처럼 나는 그만 그가, 그의 시가 땅 밑으로 어서 내려왔으면 하고 조금 따분해하며 기다렸다. 저 위에서는 어떤 헤엄이 어울리려나?
공자의 생활난처럼 생은 없지만, 생을 뛰어넘으려는 줄넘기 장난. 이 유연한 포즈는 배형인가, 접형인가 혹시 평형?
그는 언젠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을 염려하는 사과씨처럼이 아니라, 멋진 포즈로 착지하는 순간 또 다시 생을 뛰어넘는 개구리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만의 낙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을 파는 불온한 행상들이나 삶에 목을 매고 뒤뚱뒤뚱 넘어지는 것들에게 언젠가 그는 이 보법을 소개해 줄 것이리라.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저 ‘사과나무의 불안’처럼 아직 남아있는 사과나무의 사과알들처럼 ‘불안에 쾌히 시달리자’는 ‘사과나무’를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사과나무의 불안」)…….
그러나 언젠가 그가 저만의 낙법으로 생의 보법으로 걸어와 사뿐히 죽음을 뛰어넘으리라는 꿈. 그리고 너무 일찍 나이 들어버렸거나 죽음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죽음을 훌쩍 뛰어넘는 생의 보법을 가르쳐주리라는 것. 첫 번째 우상파괴자에게 거는 나의 우상숭배는 여기까지다. 그날이 곧 머지않아 오리라. 이 우상파괴자는 사실 생의 열렬한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젖은 운동화를 그늘에 잘 말려두어야겠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이승에서 이승으로 옮겨간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옮겨가지 않는 것처럼.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했지만 저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으므로
다람쥐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람쥐가 안 보인다고 저승에 갔다고 할 수 없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하자 이 세상에서 꼭 찾아내겠다 하자 어머니 이 세상에 있다 새끼 이 세상에 있다
수리산에서 마주칠지 모른다 모퉁이에서 홀연히 나타날지 모른다 너를 향해 조용히 걸어오는 자 두려워하지 말고 안으라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만나자 하라
―「수리산에서-노자의 가르침 5」
3. 두 번째 우상파괴자
“우상숭배자들에게”-최서림 시집 '구멍'
그는 구멍숭배자이다. 세상에 구멍을 숭배하는 자라니. 누군가는 물어볼지 모른다.
그러나 구멍에 대한 집요한 물음 때문에 구멍은 그의 시집에서 때때로 잘 보이지 않는다. 구멍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구멍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구멍 속에서 구멍을 찾는 일이란 어지간히 들여다보기 전까지 어려운 일이리라.
사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이런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정끝별 시인의 시였을 것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은 대체로 사납고/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그만 파라, 뱀 나온다」,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노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구멍을 열고 자꾸 구멍을 만들면 구원의 길은 없다’고.
그런데 왜 그는 자꾸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피하고 싶은 일이다. 여기저기 삼라만상의 고통을 호소해 오는 구멍들에게 몸을 빌려준 일이 있다. 귓구멍과 목구멍, 입 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연체동물 같은 고통의 손아귀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그것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목을 조르기도 한다. 더러 고통을 호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고통을 맛보는 것으로 제 고통을 아예 잊어버리자는 것. 그럼에도 내가 끝끝내 고통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은 고통이야말로 교환되지 않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교환될 수 없는 쩌렁쩌렁한 돈을 가진 고통의 사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독한 구멍숭배자는 그 구멍에 제 몸을 통째로 다 디밀고 있다. 순전히 ‘너를 위해 죽어버려도 좋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순진하게 수컷 사마귀처럼 자신을 통째로 바치고 있다(「접문接吻」). 순간 그는 뻘판 장어처럼 입구멍과 입구멍을 맞추고 ‘말보다도 글자보다도 믿을 만한’ 구멍 앞에서 어떤 거룩한 믿음의 성자처럼 숭엄한 구멍에 도달한다. 이성복의 시 「음악」처럼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면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나?
이상의 처 금홍이(「烏瞰圖」)가 성모가 되는 시간이다. 고통으로 얼룩진 문장들이 기도의 경전이 되는 순간이다.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단단한 변비증처럼 오욕의 역사가 물렁물렁한 구멍 안에서 스러지는 순간이다(「박정희론」).
그러나 그 구멍은 처음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기원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구멍 속에서 스스로 구멍이 되어 구멍이 난 것들에게 다가선다. 구멍이라는 존재의 기원 속에서 ‘누가’를 찾던 어린 동생은 이제 울고 있는 ‘누가’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게 ‘누가’가 되어줄 것이다(「누가」).
시인이 되는 것은 구멍이 되어 구멍 난 것들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게 아프지 않을 누가가 되는 고단한 일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금타이틀 벨트를 달기 위해 얻어터지는 시인이 되려고 하지마라. 쓸데없는 일이다.
이제 그는 고비사막보다 더 황폐해져가는 정욕의 땅에서 ‘조나래’라는 명찰이 붙은 여중생을 찾아나선다(「고비에서」). 조만간 시인은 아스팔트 위로 뻔뻔하게 자란 야생화들의 얼굴 속에서 ‘조나래 씨’를 보게 될 것이다.
구멍숭배자가 되는 동안 시인은 참 쓸쓸하고 아픈 구멍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구멍숭배자가 되는 것은 구멍파괴자가 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멍파괴자가 되어 혼자 어둠을 견디는 동안 시인의 몸에도 굵고 힘찬 옹이처럼 구멍들이 생겼을 일이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보라. (권력)우상숭배자들이여, 그대들은 혹시 너무 오래 이 구멍의 기원을 잊지는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우상이 깨어졌으니 구멍 속에서 구멍과 함께 가는 시인에게 사랑은 비늘이 벗어진 사제 바울의 눈처럼 파괴와는 거리가 먼, 단순하고 명징한 것이리라
꽃도 새도 즐거이
젖고 있다
들다귀도 사람도 그냥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를 맞고 있다
젖어있는 것들을 해가 말려주고
무심한 바람이 펴준다
고비에서는
고비에서만 고여있는 세월 안에서
모든 것들이 속으로 마른다
<이름없음>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이가
우체국 앞에서 두 팔 벌리고
야생화모냥 젖어들고 있다
고비 망아지같이 검은 힘줄을 가진 사나이는
<조나래>라는 명찰이 붙은
한국 여중생 추리닝을 뗄룽하니 껴입고 있다
고비를 떠나는 날
잠시 바깥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카메라 들고 조나래 씨를 찾아다닌다
이름 없는 얼굴에 배어 있는
짐작할 수도 없는 시간의 두께를
담아보려고
조나래 씨를 못 만나고 떠나오는 길,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있어도 상관 안 할 야생화가
발가벗은 채 수줍은 아낙처럼
정액을 받아들이듯 감전된 듯
부르르 떨며 빗물을 빨아먹고 있다
갤로퍼 세워놓고 몽골리안모냥
엉덩이 까서 치켜들고 비를 맞으며
짜릿하게 똥을 누어 본다
―「고비에서는」
4. 세 번째 우상파괴자
“허공에게 두들겨 맞는 꽃들에게”-한영옥 시집 '아늑한 얼굴'
오늘밤은 이글을 쓰기에 적당하지 않은 밤이다. ‘전적으로 무관심하기에 (시인의) 슬픔은 믿을 만하다’니. 시집 서문을 읽다가 사정없이 맥이 풀리는 밤이다. 비까지 계속 오시는데다가 아직까지 나는 슬픔이나 고통을 무관심하게 보는 데에는 익숙지 않기 때문이리라. 송구하고 송구하여 마음이 혼란스럽다.
가까이서 시인을 대면하는 나는 이 분을 뵐 때면 ‘엄정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한다. 엄정(嚴淨)하다는 것은 엄정(嚴正)하다는 말을 뛰어넘는다. 고요해지기 위해 참 맑고 고요해지기 위해. 나는 쓴물을 삼키고서도 고요해질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쓴물은 쓴물이고 단맛은 단맛인데, 가끔 충치가 생겨도 단맛이 좋아서 아이처럼 나는 뒤를 생각지도 않고 단맛에 저절로 손이 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분에게 쓴물이라는 생각, 송구하여 송구떡처럼 어린 마음에 차진 반죽덩어리 같은 글을 얼얼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시는 시라는 것이 그저 세련된 감각의 훈련이라거나 그저 운이 좋아 타고난 재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쓴물을 삼켜 향기 나는 나무를 피워내는 기술이 어찌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겠는가. 고통을 떠들면서 고통에 쉽게 세 들어 사는 것들과도 그의 시는 무관하다. 그러나 고통에 무관하다니, 이 지나친 우상숭배에 대해 나는 대체 알면서 떠드는 것인가.
얕은 수로 남의 고통에 쉽게 영합하려고 하는 의도에 대해서도 그의 시는 아무 말 하지 않으며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볼 수 없는 천성 때문이고, 볼 수 없는 것은 아예 그것을 즐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생의 대단한 비의를 엿본 사람처럼 더러 어떤 이들은 죽음의 행상처럼 찾아와 유행처럼 한 시절 죽음을 팔고 갔고, 어떤 이는 어깨에 맨 무거운 짐을 끄르는 일처럼 스스로 삼킬 수 없는 고통이나 슬픔을 토해내 팔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이나 고통은 온전히 제 것일 수 있는가. 사랑이라는 말로 한때 그대의 고통에 꽃이나 피우겠다고 더러 그대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는 않았는가. 마음이 튀어나온 못처럼 꽃무더기에 찔려 찔레꽃처럼 아픈 밤이다.
사랑은 얼마나 고독한 우상숭배인가.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참담한 우상파괴인가. 먹구름이 되는 동안 그것은 얼마나 캄캄한 밤을 먹먹해지기 위해 울었을까. 먹구름이 먹구름 속에서 흩어지는 동안 먹구름은 또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그런데 욕을 참으면서도 꽃이 진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고 있다니. 이때 사랑이 스러진 허공 위에서 꽃은 피를 토해내는 게 아니라, 제 몸 위로 흐르던 피마저도 다 삼키고서 온통 꽃을 피웠으리라. 그래서 그 꽃이 보는 것은 온통 환한 당신뿐인 당신이었을 것이다(「당신이라니요」).
꽃의 숙명으로부터 그의 시는 쉽게 미움이나 절망으로 포기해 버리거나 달아나지 않는다. 어찔어찔한 식칼 하나를 보듬고 와서는 그대의 고통을 베어버리겠다고 슥슥, 옆구리를 찌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엄정한 사랑은 식칼보다 더 무섭다.
이 엄정한 사랑은 한때 견딜 수 없었던 욕의 기억들을 ‘물컹한 허공’에 걸어두고 ‘허공에게 오래 두들겨 맞았다고’ 가려진 시간 동안, 스스로에게 엄한 마음의 매를 들이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나롯가의 여교사들로 인한').
그리고는 이제 미움으로 잘 지은 집 앞에서, 사랑으로도 다 무너진 담벼락 위에서 또 아무 것도 모르고 생글거리며 피어난 꽃들에게 그의 시는 눈물들판처럼 환하게 소리도 없는 울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이 눈물들판의 노래는 보기 싫게 머리를 쥐어뜯는 소리도 아니고, 절벽 위에서 으름장을 놓는 으름나무의 어찔어찔한 협박편지도 아니고,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검객의 사랑도 아니고, 함부로 굵은 장대비처럼 밖으로 울음을 터뜨려 흐느껴 소리 내 울지도 않는다.
꽃이 지는 것을 보는 꽃(「내 영혼의 슬픈 눈」)은 사랑이라는 우상숭배자가 결별을 통해 우상파괴자가 된 후에도, 불멸에 가까운 사랑에 도달하려는 우상숭배자의 사랑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이때 도처에서 오는 당신을 보는 것은 시인이 ‘아늑한 얼굴’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꽃이 피는 것은 흐드러진 사태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다 진 연후이다. 미움을 털어내고 정갈하고 엄정한 마음에서 꽃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어쩌면 사후적으로만 꽃은 꽃을 피워내는 일이리라.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만 눈길을 주느라 보이지 않는 꽃들을 함부로 지나친 일이 있다. 향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꽃들은 대개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피었다. 꽃무늬 나일론 원피스를 입고서도 여태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맑은 계절에도 도무지 마음은 진흙덩이니
연실(蓮實), 몇 알갱이 좋은 걸로 선사해드리고
연잎 같았던 그 품을 이제 물려야겠습니다
차마 일어나 떠나지는 못하겠으니 어쩌겠나요
잘 차려온 밥상, 도루 내가라, 내가라 고함치며
억하심정으로 부르르 떠는 못난 시어미처럼
넓고도 정갈하여 햅쌀밥 내음이던 그 품을
이제 앉은자리에서 물려야만 하겠습니다
차마 일어나 돌아설 수는 없으니 어쩌겠나요
차려온 밥상, 엎어져 깨어진 그릇들에서
지르르 번지는 국물자국 흘겨보면서
내가라니까, 내가라니까 손사래 칠밖에요
이 아수라장에 진흙덩이 죄다 풀어놓고
예서부터 한참 당신을 밀어올릴 수밖에요
듣자하니 연실(蓮實)은 불멸에 가깝다 합니다……
천 년도 더 된 까만 눈꺼풀, 살풋이 열리며
연두 잎 새고 연이어 분홍 꽃 새는 걸
꿈결처럼 보는 사이 마음의 흙 털어냈지요
지금부터 천 년입니다. 드리는 이 연밥 속에
사르륵 스며들어 당신의 기다림 속 다 지나면
천 년이 어제련듯 살풋, 눈 뜨겠습니다.
―「불멸에 가까운」
조하혜․
1994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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