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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2006년 가을호) 서평/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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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승기 시집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최치언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이근화 시집 칸트의 동물원
모든 시는 시일뿐이다
백인덕|시인
어느 책에선가 에셔의 「파충류」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작은 화분, 술잔과 술병, 책 등이 둥그렇게 놓인 한 가운데 그림책이 펼쳐져 있고, 그림은 도마뱀인지, 악어인지 하여간 파충류 그림인데 책 근처에서 차원의 모습인 도마뱀이 빙 돌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림이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림 속의 파충류는 3차원, 그림, 그 중간 등 세 차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마도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차원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이번 호의 서평을 구상하면서 내내 그 그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일까? 앞에 명기된 세 시인의 시집들을 아마도 이런 식의 차원 구분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좀 멍청스런 공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족을 앞에 붙이는 것이 좀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차원’이라는 어휘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은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각기 다른 자질과 특성을 가졌으며, 그 때문에 각기 다른 방식이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세 권의 시집들이 시인들에게 있어 첫 시집(김승기 시인의 경우에는 두 번째이지만 넓게 보아 첫 시집의 자장(磁場)안에서 이해가 가능하다)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또한 이때의 ‘차원’이란 시의 언어가 ‘파롤(parole)'에서 다시 ‘랑그(langue)'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필자가 인위적으로 구분해 본 것이므로, 그 실제에서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생성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나는 그 한 모금에 걸려
또 오늘 술집으로 흐려지고
여자가 탁자 위에 그 한 모금을 놓고 간다
그 한 모금 속엔, 내가 닿지 못한
네가 있고 몸짓이 있고 말이 있고
있고, 있고, 결국엔 없고
저기 불빛 하나
한 모금이 또 모자라서 자꾸
배가 고프다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전문
김승기 시인의 이번 시집의 작품들은 ‘3차원’적이다. 그리고 ‘파롤’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한 모금’은 외연적으로는 ‘술’의 비유이겠지만 내포적으로는 ‘의사소통’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그 한 모금 속엔, 내가 닿지 못한/네가 있고 몸짓이 있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사물(지시대상)로부터 비롯한다. 비록 ‘언어’는 ‘차이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생성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말’은 ‘사물’로부터 비롯한다. ‘네’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몸짓’, ‘말’의 단계로 사물인 ‘너’는 나의 의미 안으로 포섭된다. ‘말’은 개인의지의 소산이며 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언어(랑그)는 사회적이고 본질적인데 반해, 말(파롤)은 개인적이고 부수적이며 우연적이다.
그런데 김승기의 이러한 ‘말’은 부재로 현전한다. ‘결국엔 없’기 때문이다. 이 없다는 것은 ‘의사소통의 결렬’을 의미한다. 시도 자체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비는 익숙하지 않은 내 언어의 두드림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대화법은 그저 견디는 것이다”(「비ㆍ2」)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대화법’인 ‘견딤’ 이전에는 ‘이해할 수 있는 대화법’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파롤)’이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는 데서 ‘소통의 결렬’은 예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언어(랑그)에 의지하기보다는 말(파롤)의 쓰임에 있어서의 전략을 수정한다. 그것이 ‘시’일 것이다.
섬 하나 있다네
썰물이면 나타났다가
밀물이면 사라져가는
그런 섬 하나
살고 있다네
썰물 되어 빈- 뻘로
흐느낄 때면 언제나 떠오는
섬 하나!
홀로 떠내려가던 나는
그만 지쳐서
그 섬에 안겨
잠이 든다네
허둥지둥 깨어나 다시 찿으면
벌써 사라져간 섬
그런 섬 하나
내 가슴속에
살고 있다네
―「이어도」 전문
인용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김승기의 이번 시집은 무척이나 ‘서정성’이 강하다. 이런 서정성의 강화는 동일성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비록 ‘동화(同化)나 투사(投射)’ 같은 ‘감정이입’의 방법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인 측면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이 또한 일상 속에서 공감(共感)을 목적으로 했을 때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만큼이나 나와 내 말이, 시가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시인은 “정말 무거웠던 게다/가장 절창, 그 음절 꼭대기/저렇게 뛰어내린 것은//저 징그러운 것은/절대 꽃이 아니다”(「동백꽃」)고 보고 있다. 누구나 말하는 ‘꽃’을 개인의 말로 다시 이름 붙여주는 것이 ‘절대 꽃이 아니다’라는 언술 뒤에 반드시 따라야 할 작업이다. 그래야만 ‘의사소통’을 위한 ‘시’라는 전략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간혹, 불행이 불행을 치료할 수 없듯
설탕은 설탕의 중독을 치료할 수 없답니다-하는 이들이 있는데
꿀벌이 침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하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퉁퉁 부르튼 날엔
또 설탕을 먹으세요
설탕이 없는 날엔 당나귀에게 조금 빌려보세요
당나라 나라의 말로 정중하게 한 발 물러서서
먹다 남은 설탕 있습니까 아랫입술을 세차게 가로로 저어보세요
장미꽃에 얼굴을 묻고 문을 두드리세요
슈퍼 주인에게 어제의 희망의 값을 지불해달라고 위협하세요
당신은 그 동네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이 될 거예요
누군가 당신에게 설탕을 빌려달라면
이렇게 말하세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설탕은 달콤 사르르하게 이내 녹아버리지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부분
최치언 시인의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도 여러 현대적인 기법들이 시인 특유의 상상력과 결합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어느 시인은 그 이유를 “묘사시에 구술 이야기라는 설탕을 발랐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시인이 사용한 기법 자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 보인다. 위 표제시의 ‘설탕’은 ‘희망’을 비유하지만, 작품 전체는 ‘희망’의 ‘알레고리(allegory)’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알레고리는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인, 혹은 도덕적인 뜻이 암시되어 있는 비유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는 표면 뒤에 다른 무엇이 암시되고 있는가, ‘그러나 설탕은 달콤 사르르하게 이내 녹아버리지요’라고 명시되어 있다. ‘희망의 값없음인가’의 이해는 독자들의 몫이다.
글 앞머리의 에셔 그림으로 치자면, 최치언 시인의 이번 시집은 중간 차원, 몸통의 반쯤은 납작한 그림 속에 담겨 있고, 나머지 반쯤은 3차원의 입체감을 가진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필자의 차원 구분으로 보자면 말(파롤)에서 언어(랑그)로 반쯤 기운 형세라고 해야 할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글쓰기의 영도(零度)’는 “상징들의 사라짐과 중립화, 적합성의 약화, 단어와 문장들의 관계의 우위성 등을 드러낸다. 글쓰기는 자신의 형식적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어떤 내용을 단순하고 차갑게 말할 뿐이다”는 것이다. 최치언의 작품은 일정 부분에서 이러한 ‘영도’에 근접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사용(「여자들의 저녁식사」, 「화장터」 등), 부조리에 대한 인식(「성좌」, 「원형극장」 등), 그리고 알레고리 수법 등의 사용은 말(파롤), 지극히 개인적이며 소통지향적인 말에 대한 시인 나름의 회의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납작 그림이 되어버린 부분보다는 아직 입체감이 살아있는 작품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내가 들어가지 못한 숲이 있다 그곳엔 은빛 잉어 한 마리
푸르고 깊은 상처를 내며 길을 간다
비로소 세상이 몸을 튼다
언젠가 숲에 들지 못한 날들이 단단한 돌멩이 되어
연못 속으로 던져진다
간절한 것들이 그리운 것들로 되기까지
나는 연못 위를 서성였다
―「연못」 부분
자아와 세계가 화해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시인은 아마도 많이 ‘간절한 것들이 그리운 것들로 되기까지’ 서성였을 것이다. 이때 그가 품은 의심은 “왜 모든 게임의 규칙은 원초적인 의지의 시험인가”(「원안을 보다」)라는 것일 것이다. 부조리가 비극이 아닌 것은 자아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 때문이다. 최치언 시인이 일상으로 선회할 것인지, 비극으로 기울 것인지는 독자로서 그저 지켜보면 될 일이다. 다만 재미있는 작품을 더 많이 보여주길 내심 바라마지 않는다.
간략하게 그러나 구체적으로 언어(랑그)와 말(파롤)의 관계를 살펴보자. 언어는 사전 속에 들어있는 모든 낱말이며 전체 개인들의 머릿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체계이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사회공동체적 문법체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법체계도 실제 인간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방대한 문법체계와 수많은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한 것을 적재적소에 골라 쓰는 것이 바로 파롤이다.
언어와 말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나름대로 시 읽기에서 유용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시의 지향점이 언어인가 말인가에 따라 맞춰야할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에 초점을 둔다면 ‘화용론적 관점’, 정보 전달이든 정서 교환이든 그 쓰임새에 더 주목해야 한다. 반면에 언어에 초점을 둔다면 ‘구문론적 관점’, 말과 말의 결합이나 문장의 기능 등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시로 환원하면 ‘말’의 경우에는 ‘작품 내재적’으로, ‘언어’의 경우에는 ‘작품 바깥에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화 시인의 이번 시집은 ‘언어’를 문제 삼는 것으로 보인다. 에셔의 그림을 다시 본다면 그림 속에 납작하게, 어쩌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어차피 3차원이든, 중간이든 다 그림이기 때문이다) ‘파충류’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는 초록과 분노로
나무는 말이 없다
나무를 사랑해
나는 당신의 축제를 믿지 않는다
당신은 점점 외로워지니까
오래 흔들리더라도 요람은 요람의 세계에
손은 제 갈 길을 간다
오른손 왼손 각각 아름답다
―「단지 금발인 여자」 부분
인용한 작품은 문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기대하는 ‘의미’가 쉽사리 형성되지 않을 뿐이다. 시로 보아도 그렇다. 세 개의 연은 인접성으로도 접촉성으로도, 인과적으로도, 병치은유도, 심지어 표제의 세팅 역할도 하지 않는다.(필자의 무식이 또 드러나는 건 아닌지 적이 걱정된다!) 그렇다면 무의미한가? 물론 단언할 수 없다.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골목에서
따로 헤매고
밤낮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 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요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밤의 전화벨 소리
―「칸트의 동물원」 부분
표제작인 이 작품은 이근화 시인의 시적 전략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제목부터 필자를 괴롭혔다. 왜 하필 데카르트가 아니고 칸트일까? 아마도 예술의 자율성, 근대 예술의 출발을 선언해 주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그 예술, 미학의 종말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또 하필 ‘동물원’일까? 칸트는 동물원은 고사하고 시내 광장에도 안 갔던 인물인데, 고심 끝에 떠올린 것이 “동물은 결코 관여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이었다. ‘무관계성’의 비유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칸트의 동물원’은 ‘무목적의 무관계’가 되었다. 이때 ‘무’는 ‘없음’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작품은 ‘고양이’와 ‘나’는 따로 헤매고(무관계), ‘헤트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보았다고’ 말할 수 없는(유사한 것의 감각적으로 불명확성),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더미’(비인과성) 등 무수한 덫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마도 시인은 “언어에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차이란 일반적으로 ‘적극적’ 항들을 전제하며, 이들 적극적 항 사이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언어에는 ‘적극적 항 없이’ 차이만이 존재한다. 언어가 내포하는 것은 언어체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개념이나 소리가 아니라, 단지 언어체계에서 나온 개념적 차이와 음적 차이일 뿐이다.”라는 쏘쒸르의 ‘차이의 테제’를 시적으로 실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구구한 해석 이전에 박수를 보내며, 곁들여 “관계적인 것을 실체로 착각하지 말라”던 데리다의 ‘차연의 차이’를 노파심으로 덧붙인다.
갈수록 시 읽기가 힘들어진다. 물리적 개인으로서 필자가 늙어간다는 것말고 우리 시단이 그만큼 들쭉날쭉하고 울퉁불퉁한 층위를 갖게 되었다는 반증이리라. 그 모든 전략을 전략적으로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니 단 하나의 믿음 ‘모든 시는 시다’라는 ‘치기’로 이제는 ‘본업’에 충실해야 하겠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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