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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권두칼럼/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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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
새로운 5년을 위해
지금은 2006년입니다. 2000년대가 시작되고 절반을 넘은 시점입니다. 그 동안 문학과 문단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창비’의 변신이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창비는 이제 한국문학을 선도하는 문학잡지의 위상을 스스로 내려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집은 여전히 무거운 이념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그들의 특집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지는 이제 ‘문학동네’와 다를 바가 없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기 직전만 해도, 문학동네에 대한 각양각색의 논란과 토론이 번성했습니다. 대부분은 문학동네의 상업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획기적인 기획으로 일거에 문단을 장악한 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분명 문학동네는 상업적인 성격을 앞세웠지만,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이 상당합니다. 그 점 때문에 문학동네는 찬사도 받고 비난도 받고 때로는 질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학동네를 다른 잡지와 구별할 힘도 미약해졌습니다. 이제는 모두 상업화된 잡지의 세상입니다.
따지고 보면, 문학잡지들이 상업화되었다고 슬퍼할 까닭은 없습니다. 비탄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학은 어느 시대나 대중들의 욕구와 바람 위에서 존재했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한국의 문학이 특수한 경험과 시기를 겪으면서 다소 다른 방향을 걸어왔다고 해서 이러한 명제 자체가 유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잡지가 상업화되었다고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지켜 볼 것입니다. 그리고 면밀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어떤 잡지가 상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닌 척하고 아직도 문단에서 세도를 부리려 하는지, 과거의 명예와 명성을 지키면서 두 얼굴을 쓰려고 하는지.
문학잡지들의 평균화 경향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할까 합니다. 부산의 비평가 황국명은 “박민규가 창비와, 문지와, 문학동네의 경계를 무화시켰다.”고 했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박민규는 여기저기서 모시고 싶어 하는 우리 문단의 초특급 스타입니다. 신예인 그가 그동안 ‘군웅할거’의 한국 문단을 평정한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심각하게 묻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이, 우리 문단과 문학의 성숙인지 아니면 우리 문단과 문학의 빈곤인지.
≪리토피아≫의 이번호 특집은 ‘2000년대 젊은 시의 지형도’입니다. 2000년대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논의는 2006년 언저리에 모여 있습니다. 2000년대가 오직 2006년 언저리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변화의 가속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2000년대의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하게 그리고 더욱 급속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집 제명을 상정할 때부터 ‘젊은 시’의 범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젊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젊은 시인들, 그러니까 생물학적 연대가 어린 시인들의 시를 뜻하는가? 아니면 최근 등단한 시인들을 가리키는가? 최근 등단이라고 하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뜻하는가? 과거의 등단했던 시인이 나이 어린 시인보다 더 현대적인 경향의 시를 쓴다면 그 시는 젊은 시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과연 젊은 시를 정의할 때, 과거의 방식으로 시를 쓰는 나이 어린 시인은 젊은 시인인가 그렇지 않은 시인인가?
질문에 대한 명쾌한 범주나 답안을 제시하지 않고 특집을 꾸려나갔습니다. 이것은 ≪리토피아≫ 편집진의 실수라면 실수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이 문제는 정의하기도,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살피고 싶었던 것은 시의 향방입니다. 2000년대의 남은 시간을 헤쳐 나갈 시의 미래와 새로운 가능성이었습니다. 그 미래와 가능성을 살피기 위해서 달라진 시의 위상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케케묵은 논법대로, 미래를 살피기 위한 현재의 점검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다른 잡지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했지만 공정하지 못했거나, 시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위장 전술에 불과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한 반성이 우리 ≪리토피아≫로 하여금 이 케케묵은 특집을 다시 꺼내도록 만들었습니다.
2006년은 2000년대의 한 시점일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다룬 시인보다 훨씬 더 많은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곧 더 젊은 시인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더디지만, 하나씩 하나씩 우리 앞에 놓인 시와 문학을 살펴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리토피아≫ 편집진은 다른 잡지들이 세력 확장과 상업화를 꾀할 때 이러한 일들을 할 것입니다. 미흡하지만 명분이 정확하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특집의 필자들은 젊은 논객들을 위주로 구성했습니다. 문단에서 최근 편향된 시 읽기를 저지하려는 젊은 논객들의 목소리를 실을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려 했던 것은, 우리 편집진이 지지하는 비평가 그룹의 목소리를 앞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방향에 서있을지도 모르는 다양한 의견도 함께 듣고자 했습니다. 경험과 식견이 부족하고 지면과 기회가 부족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반성할 부분입니다. 또 만일 우리의 의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면, 우리 잡지의 글에 정식으로 반론을 써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모자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우리가 잘못한 것을 비판하면, 우리는 겸허하게 그리고 명쾌하게 수용하고 또 인정할 것입니다. 필요하면 우리의 지면도 얼마든지 내줄 것입니다.
2006년 겨울호를 꾸려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현실적으로 힘없는 잡지를 뒤에서 도와주는 문인, 독자, 그리고 친우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우리 ≪리토피아≫에 시를 주시고, 소설 게재를 허락하시며, 좋은 글과 의견을 주시는 분께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열거는 하지 않겠지만, 그분들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 ≪리토피아≫도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감사를 말로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그들의 문학과 의견을 더욱 넓게 그리고 편견 없이 이 세상에 알리는 역할에 충실하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리토피아≫는 본분을 잊지 않은 잡지가 되겠습니다. 그것만이 가짜 문학과 사이비 이론과 이기적인 출판 관행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할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남석(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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