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3호 신작시/이태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02회 작성일 08-02-29 03:05

본문

이태관


열매를 놓치다


은행나무는 잎보다 먼저
열매를 버렸다
바람의 맵찬 회초리가
낡아 허물어진 할미의 주걱턱을
후려친 것이다
평생 닦지 않아 구린내 나는 저 알들을
허리 휜 노인이
치마폭에 담고 있다

여름을 지나온 나무의 둥치에서
바람이 풀리고 있다
제 선 자리가 삶이라면
나무를 버린 열매는
흐르는 정신이다
태양을 잉태한 저 작은 사리들

떨치지 못한 미련 몇이 바람에 흔들리고
하루의 일과처럼
골목길을 에돌아 집으로 향하는
노인의 긴 그림자 뒤로
누런 알들이 수없이 떨어지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내 구둣발에 밟혀
비로소 밝게 빛나는 세상,
나무는 잎보다 먼저 열매를 버렸다



비밀정원


저녁 산책을 나서다 그 집을 보았다
강과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곳
오랜 전 부모 떠난 자식이
들보에 목을 매었다 했다
그의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그 후로 아무도 찾는 이 없다 했다
지는 해는 붉은 물결로 온 집안을 감싸 흐르고
빗장 걸린 초록 대문 옆으로
담은 허물어져
집의 내장을 내보이고 있었다
기와와 들보 사이
비로소 세간이 제자리를 찾아 낡아가고
마당을 지나 안방까지 침투한 풀들이
제 본래의 자리라는 듯
그렇게 꽃 피고 열매 맺으며
한생을 견디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비로소 완벽해지는 세계
자연에 들기 위해 스스로를 허무는 집

그날 이후
바람과 새들만이 찾던 그곳에
비밀스런 방문자가 생겨났다
비밀의 정원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이태관․
1964년 대전 출생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

추천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