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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신작시/권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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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어떤 깊이
목포항 홍탁집 때 낀 통유리로
내다보이는 저녁 눈발은 참 무량하다
아득하다
가까운 바다의 배들은
순한 마소떼처럼 묶여 있고
눈이 내리자 눈발 흩어지듯
나이든 남자들이 헤쳐 모여 대열로
두셋씩 찾아와 탁주로 목을 적신 후
여주인에게 자꾸 방석을 내민다
빈 자리에 앉았으면 좋겄소, 그러면
앉지는 않으면서, 그라지요 그라지요
맨얼굴로 몇 번이고 같은 답을 주는
홍탁집 여자의 눈망울처럼 콧망울처럼
눈은 둥글게 무심하게 내려 쌓인다
푹 익은 몸의 사타구니 냄새랄지
약간 군내가 나면서도 향그러운
몸의 깊이를 들락날락 넘나들듯
눈발 부딪는 나무문이 열렸다 닫혔다
조금 맵싸한 바깥바람을 묻혀가며
홍탁의 시간을 익히고 있다 삭이고 있다
음각陰刻
한낮의 풍경을 놓친 게
하나도 아깝지 않다
떠돌이 밀입국자처럼
어둠 속에서 발이 편하다
의자가 몸에 맞는 옷처럼 들러붙는다
심야 고속버스 안에서
외롭다고, 지나가고 마는
검은 숲에게 검은 강에게
연애편지 보내다가
하룻저녁에도 수십 통
혼자 사랑을 앓다가
그것도 그만 싫증나
창밖 그늘에 내 그늘을 아로새긴다
불면증을 앓는 새가 물어가라고
허기나 면하라고
흰 자작나무 가지 위에 덧칠한 어둠을
색 짙은 꽃처럼 높이 걸어둔다
밖이 환하도록 어두워진다
안이 어둡도록 환해진다
권현형․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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