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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신작시/김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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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벌레처럼
비가 잎사귀를 갉아 먹는다
나무의 고통이 푸르다
그 잎사귀 하나를 따 살짝 깨물면 내 고통도 푸르다
내 속의 피 냄새가 가신다 몸이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아니 한 마리 순한 벌레가 된 심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잎사귀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말하는 데 입을 쓰지 말고 잎사귀 갉아먹는 데만 썼으면 좋겠다
그러면 관계가 어둡지 않고 투명하겠다
네 고통과 내 고통이 어우러져 푸르러지겠다
네 몸에 무성한 잎사귀를 내가 갉아먹고
내 몸에 무성한 잎사귀를 네가 갉아먹고
우리 서로 벌레처럼 다정하게 꿈틀거리면서
몸으로 말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몸속의 피마저 푸른빛으로 너울거릴 텐데
한 잎 꽃의 힘
밤사이 격렬하게 진 꽃을 아침에 무심히 밟을 뻔했다
한 잎의 꽃에 꽃의 짧은 생애가 얼룩져 있는 것을 모르고 밟을 뻔했다
꽃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는데 꽃이 푸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경련을 일으킨 건 내 손가락이었나?
한 잎 꽃 속에 새 울음이 지독하게 서성거리고 구름의 얼룩이 있고
고양이의 눈빛이 있다 내 손가락 끝에 내 눈에 안 보이는
살아오는 동안 내가 만졌던 것들이 겹겹이 사무쳐 있듯이
한 잎의 꽃을 피의 뜨거움이라고 명명하는 일은 어떤가
한 잎의 꽃을 내 혀에 붙이자 피의 뜨거움이 내 혀를 출렁이게 한다
내가 내 혀를 어찌할 수가 없다 격렬하다 펄떡펄떡,
입 밖으로 뛰어나갈 기세다
꽃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목구멍이 악기소리를 냈고
더 깊이 넣었을 때 몸속의 지평이 무진장 넓어졌다
한 잎 꽃의 피의 뜨거움이 몸속 평원을 들끓게 했다
멍청한 나의 내장들을 힘차게 일으켜 세웠다
한 잎 꽃의 뜨거움이 그리고 내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미지근한 내 피들을 이끌고 내달렸다 밤사이 죽은 내 육체를
한 잎의 꽃이 부활시켜 놓고 있었다 그 한 잎 한 잎의 꽃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니라 또 누군가를 기다리며
뜨겁게 웃고 있었다 웃음 속으로 피가 몰리고 있었다
김충규․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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