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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신작시/이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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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선
태풍과 동거
찬장 속 찻잔 옆에 굴러와 있는 바위들
옷장 서랍 개켜진 내의 사이로 콸콸대며 흘러가는 흙탕물
거실 사방 벽 타고 올라가는 뱀 대가리 같은 넝쿨
신발장 겨울털신 여름샌들 속에 떠밀려 와 있는 진흙
방 문짝마다 내달리는 야생 말떼 울음
현관에 밀려와 있는 흰 태양 덩어리
세균처럼 이불 속에 숟가락 속에 잠복해 있는 식은 물
김치를 집다가 속옷을 갈아입다가 조용한 전화기를 보다가
소용돌이치며 오가고 있는 태풍의 사지를 본다
명경
덤프트럭으로 들이붓는 햇빛, 조용한 포도넝쿨, 감잣국 점심 밥상, 흰 머리수건, 뜨거운 장독, 뒤집힌 나리꽃
뛰었네 쫓기며 늪지를 거쳐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동동대었네 짧아지는 두 다릴 내려다보며 대책 없이 다락에 숨어 얼굴을 감쌌네 복면자에게 단번에 잡히고 살려주세요 입 금세 보이지 않았네 문 밖 안면 있는 사람들 전부 떠나갔네 물뱀들 뒤엉켜 두렁에 우글우글 뒤쫓는 발소리 금세 뒤따라 왔네
대야 옆구리에 끼고 목욕 가네 늙수그레한 김이 개천에서 피어오르네 발목에 휘감기며 철다리 건너가네 덩덩덩 나를 두드리는 철다리 소리
목욕탕 곰팡이 낀 거울 속 수 없는 벌거숭이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있네 얼굴을 문지르고 머리칼을 걷어 올리며 더듬더듬 뒤집힌 나리꽃 달아오른 장독 어디에 묻혀 있었는지 앞산의 할미새야 뻐꾹새야 부르는 입 저쪽 거울에 김이 서리네
과일 코너 저마다 빛깔이 곱네 뒤에 세워진 거울 속에도 둥근 과일 가득하네 딸기 금귤 방울토마토 자줏빛 포도송이 모두 어느 샘에 뿌리 닿아 저 빛깔 얻었을까 혈관 불룩한 손으로 먼 곳의 빛 골라보네 환해지는 손끝에 물큰 상한 과일 먼저 잡히네
이태선․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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