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3호 신작시/유정임
페이지 정보

본문
유정임
도시적, 소통
―눈[雪]
달리는 내 차창으로
희끗희끗, 그녀는 얼굴 보이며 알은체한다
반갑다,
그녀가 내 앞에 사뿐 내려앉는다.
서로 마주보고 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琉璃벽이 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아니 알 수 없다)
나는 그녀 등 너머 달려오는 길을 보고 있다
그녀
부산하게 온몸을 부딪치면서
주루루 눈물을 보이다가
손사래를 치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몸부림친다
(우리 사이엔 유리벽이 있다)
나도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마음이 답답해)
한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여긴 노인들의 去處가 불안해지고 있어)
몸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면서(사랑이란게 존재하긴 하는 거야?)
잠시 시선을 멀리 두면서 (경계 없는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어)
(지금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만 우리 사이엔 유리벽이 있다)
나는 차 밖으로 나와
잠시 그녀의 찬 손을 잡는다.
서로 다른 체온.
학익동 산 95번지
언덕을 치달아 작은 길을 끼고 집들이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얹고 가로세로 엉겨있다
외짝 대문에 밖으로 향한 창문도 없다
학익동 산 95번지
희망처럼 꽃들이 피어있다
이 빠진 블록담장 위에 비비취가 피어있고 땅고추가 달려있다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좁은 대문으로 들어가는 길엔
옹기종기 플라스틱 화분 안에
봉숭아 분꽃 활련화 사르비아 과꽃
가지가지 꽃들이 서로 몸 대고
감나무 대추나무가 낮은 처마 밑을 피해
지붕보다 높게 열매를 달고 있다
대문 안엔 방마다 호주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쌀독에선 다~악 닥 늘 바가지 소리 나고 내일 아침 아이에게 주어 보낼 수업료가 없어서 저 앞에 보이는 높은 담장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가볼 생각도 못하고 서로 닮은 옆집 대문 밀고 들어가 미안한 얼굴로 돈 있는가 물어본다. 방문 열고 없다고 대답하는 그 사람 얼굴이 더 미안한, 나누어 먹는 찐고구마 몇 개, 옥수수 몇 자루가 따듯한
그런 동네에 산 적 있다
더께 앉은 시멘트 골목길에 햇살이 따갑던.
유정임․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 이전글23호 신작시/허청미 08.02.29
- 다음글23호 신작시/안명옥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