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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특집/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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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신자유주의와 문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풍자적으로 성찰하는 문학
―박민규, 김경욱의 소설을 중심으로
오태호|문학평론가
1. 신자유주의 시대, 문학적 대응 양상
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탐색하는 가운데 현실의 다양한 모순을 성찰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물결이 현실을 압도하고 있는 풍경에 대해서도 문학은 끊임없이 그 의미와 문제점에 대해 질문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담론이 거대하면 할수록 그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은 초라한 형상으로 빚어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왜소해진 존재에 대한 문학적 천착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모든 것이 ‘자본과 상품’의 가치로 환원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점을 주목하게 한다.
‘신자유주의와 문학’과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18세기의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에 의해 확립된 ‘고전적 자유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핵심 논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시장 만능’의 명제이다. 그리하여 ‘개인적 자유’의 최대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으로서 ‘사적 소유제’와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옹호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여유 있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유주의’ 자체가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재산권을 법적․정치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등장한 근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상 가장 자유주의적인 자유는 ‘개인주의적 자유’이다. 하지만 그때의 자유란 ‘강한 개인의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자유는 강자와 약자를 이분하면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즉 자유주의는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원리 등을 통해 제국주의와 친화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와 ‘인간, 개인, 자유, 진보’ 등의 내용을 공유하는 ‘신자유주의’ 역시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사고와 통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이후 경제 위기의 극복 과정에서 보수 우익 세력들이 채택한 일련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류를 뭉뚱그려서 부르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 축적이 금융 지배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금융자본에 의해 자본의 세계화가 주도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본의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재구조화 공세(구조조정)’는 ‘유연화․세계화 공세’와 복지국가 해체 공세로 요약될 수 있고, 따라서 구조조정의 내용은 ‘유연화․탈규제․사유화․개방화’로 표현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는 1982년 외채 위기 이후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 경향에 대응하기 위해 안정화정책의 일환으로 제기된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그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워싱턴 컨센서스’는 ‘금융시장 개방(금융 자율화), 자유무역, 노동시장 규제완화, 공기업 개혁(민영화), 재정건전화’ 등 ‘상품․자본․노동’이라는 각 생산요소의 전 부문에 걸쳐 시장의 지배를 확대하고 국가를 축소하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즉 ‘재정긴축, 민영화, 자유화, 외국인투자 촉진’ 등의 네 가지 내용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 이론의 핵심은 ‘시장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시장’에서는 ‘첫째, 자원의 합리적 배분이 불가능하며, 둘째, 시장행위자들이 정보에 대한 합리적 기대를 예측할 수 없고, 셋째, 모든 사회적 관계가 시장 안으로 들어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며, 넷째, 사회적 소외 계층을 양산’한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채택한 ‘노동시장 유연화․민영화․감세․경영혁신’ 등의 정책들은 자본의 초국적화를 촉진시켰을 뿐, 시장 경제의 불안과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극단적인 양극화, 포드주의의 모순의 확대재생산, 유효수요의 감소를 통한 불황의 심화’ 등의 문제를 초래할 뿐이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흐름에 따라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부 들어 ‘국가경쟁력 강화’와 ‘세계화’ 등의 구호를 외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 ‘금융산업, 기업, 노동시장, 공공부문’ 등의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그리하여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정리해고제 등을 통해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며 공기업이 민영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조정은 재벌들을 살리는 데에는 묘약이 되지만,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에게는 ‘실업증가, 소득감소, 빈부격차 심화’ 등의 현상을 가져온다. 즉 구조조정의 결과로 재벌의 독점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국내 경제의 대외 종속 역시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 이후 한국 내에는 시장주의적 재벌개혁론과 글로벌 자본주의가 결합한 한국판 신자유주의 동맹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주류 대안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재벌의 경제 집중도는 1997년 이전에 비해 더욱 증가하였고, 은행․주식․부동산 등 모든 영역에서 외국자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전 부문에 걸쳐 성공 신화의 미명하에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신자유주의’란 ‘시장에서의 자유’를 표방하지만 ‘강자의 지배’ 속에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며, 세계화의 파고 속에 상품과 자본, 노동 시장이 녹아들어가면서 초국적 자본의 힘이 강력해지는 자유 시장경제의 논리를 내면화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과 「아, 하세요 펠리컨」, 김경욱의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는 문학적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담론은 단자적 개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존재론적 회의를 제공한다. 따라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이데올로기적 저항의 모습을 담지하기보다는 소극적 저항의 방식으로 현실 풍자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풍자란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화 전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문학적 방법론인 것이다.
2. 미국 중심의 ‘너무나 슈퍼’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풍자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DC 코믹스가 창조해낸 만화주인공들을 통해 ‘정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제국주의적 시선과 기획이 허구적․위선적 토대를 지닌 것임을 풍자한다. 특히 ‘9․11테러’라고 부르는 2001년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에서 충돌 여객기의 모습을 보며 슈퍼맨과의 유사성을 읽어내는 ‘바나나맨’의 시선은 이 작품이 미국의 패권주의적 세계화 전략의 모순을 주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비판의 주체이자 희극화된 풍자의 대상인 ‘바나나맨(=화자)’이 마이애미의 정신병원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과 함께 지구를 지키는 슈퍼특공대의 일원이라고 주장한다. ‘바나나맨’은 열두 살(1979년)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세계가 ‘미국과 소련, 남과 북, 청군과 백군, 좋은 놈과 나쁜 놈’ 등으로 선명하게 대립되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해는 ‘슈퍼특공대’ 텔레비전 시리즈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해였고, 영웅들이 화자의 태생과는 전혀 다른 ‘슈퍼한 존재’들이었기에 화자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폐지 수집하는 아버지와 빌딩 청소일을 나가는 계모’ 밑에서 늘 외롭게 혼자 생활하던 화자에게 삶의 유일한 즐거움은 영웅들의 ‘권선징악’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머지 공부를 하는 지진아였던 화자는 즐거움의 매개물인 TV가 아버지에 의해 부서지자 자살을 실행에 옮기려고 빌딩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슈퍼맨의 흉내’를 내며 평범한 죽음으로 가장하기 위해 ‘빨간 보자기’를 목에 묶고, 러닝 가슴팍에 커다란 ‘S’자를 그려 넣고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슈퍼맨’이 화자를 구해 ‘정의의 본부’가 있는 미국으로 데려간다. 화자의 이러한 모습은 미국 문화에 경도된 한국 사회의 문화적 병폐를 보여준다.
1979년 ‘정의의 본부’에 온 화자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특공대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더 이상 지진아도 한국인도 아닌 ‘영웅들의 친구’가 된다. 화자는 평범한 인간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보지만 슈퍼맨으로부터 미국인도 아니며 백인도 아니므로 영웅에 대해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지구의 영웅’은 ‘미국 백인’이라는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트맨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예로 들며 ‘화자 같은 놈도 필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며 화자의 영웅화에 찬성한다. 화자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회의에서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희다’는 이유로 화자는 각종 ‘포즈’만을 열심히 취하는 ‘바나나맨’으로 설정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1990년 외양은 유색인종이지만, ‘백인의 영혼’을 지닌 ‘희극적 영웅’으로 탄생된다.
‘바나나맨’은 1983년의 지구가 선악이 나누어진 양면의 동전과도 같았고, 슈퍼맨이 있었기에 정의가 지켜질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자유세계의 구세주’인 슈퍼맨은 1938년 이후 지구를 지키기 위해 ‘빛보다 빠르게, 소리 소문 없이’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쁜 무리들을 해치우는 데에 자신의 힘을 사용해 온 것이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전소시킨 1945년의 원폭이 성층권에서 휘두른 슈퍼맨의 원투 스트레이트였으며, 그때 죽은 것이 원숭이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지구의 운명이 그때부터 슈퍼맨에게 달려 있었다고 판단한다. 냉전시대에 ‘새로운 나쁜 무리’들인 ‘빨갱이’들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자 미국의 담론을 무력으로 실천하는 슈퍼맨은 그들을 없앨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수산업과 기간산업을 포함한 미국의 경제를 위해, 그리고 자유세계의 경제를 위해 그들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는다. 슈퍼맨은 지구에 새로운 나라가 생기면 그 나라를 ‘정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며, 소련이 가장 나쁜 점은 자신과 맞먹는 힘을 가지려 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슈퍼맨에게 타협이란 없으며 자신이 곧 ‘세계의 정의’이기 때문에 자신만이 그런 힘을 가져야 된다는 논리는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1991년 냉전의 한 축이던 소련이 몰락하자 힘의 대립이 끝났다며 슈퍼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그리하여 ‘워싱텅 콘센서스’를 통해 새로운 리더로 부르스 웨인(배트맨)이 나서게 된다. 세계 최고의 재벌인 그는 자본과 첨단 장비로 세계의 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리하여 ‘정의의 본부’는 웨인이 리더가 되자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의 땅속 백 미터 아래로 옮겨진다.
‘슈퍼맨’이 냉전 시대 무력의 논리를 대변한다면 ‘배트맨’은 세계화 시대 자본의 위력을 표상한다. 1990년대의 ‘새로운 리더’인 배트맨은 ‘유색 인종과 패배, 다른 종교’를 죽음보다 싫어한다. 배트맨의 특기는 ‘마운틴’인데, 그것은 동물들의 섹스 행위를 닮은 ‘후배위(後背位)’로서 옷을 입고 행하는 ‘일종의 통치행위’이다. 바나나맨은 1994년 ‘국제무역기구(WTO)’ 창설을 위한 막후회담장에서 배트맨이 로빈에게 통치행위로서의 ‘마운틴’을 행하자 의제가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모습을 본다. 국제통화기금도 국제무역기구도 웨인이 만들어낸 시나리오이며,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세계 전체를 ‘마운틴(통치)’하는 것이다. 배트맨은 ‘관계’만 정립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마운틴(통치)’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자유세계 대부분과 그 관계가 정립되어 있다. ‘IMF’와 ‘WTO’라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배트맨은 1990년대부터 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나나맨의 첫사랑이었던 ‘원더우먼’은 자유세계를 위해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증폭을 위해 제작된 것이 투명 비행기이다. 즉 슈퍼맨이 ‘자유세계의 영역’을 넓히면 배트맨이 ‘마운틴의 체계’를 세우고 그 다음에 원더우먼은 ‘정의의 정착’을 이끈다. 그녀의 임무는 비키니 차림으로 전쟁에너지를 낮추고 섹스에너지를 높이는 데에 있다. 즉 그녀는 투명 비행기를 타고 ‘황홀한 바기나’를 아래 세계에 내보이며 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의 상공을 날아다니는데, 그 아래에선 거대하게 증폭된 ‘바기나의 자기장’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파라다이스’의 제국이 생성된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을 통해 투명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고, 달고, 선명한 당근’ 같은 미국의 ‘음악, 영화, 스포츠’의 폭탄은 지상의 존재들에게 ‘발기와 은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통조림형 복제인간 ‘아쿠아맨’은 자유경제의 무역과 협상을 통제하는 바다의 왕자로 거대한 네트워크 같은 존재이다. 배트맨이 결정권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WTO의 체계를 정비하고 윤곽을 잡아나가는 것은 아쿠아맨이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을 위해 아쿠아맨은 DC 코믹스(공화당 후원)와 함께 만화의 쌍벽을 이루는 만화산업체인 마블(민주당 후원)의 영웅 중에서 화가 나면 헐크로 변신하는 브루크 배너 박사를 대동하고 협상장으로 향한다. “제발 부탁이에요. 절 화나게 하지 마세요.”라는 식의 ‘신사적이고 정중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배너의 호소 속에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성공리에 끝난다.
이렇듯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은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요하는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협상 타결 이후 영웅들에게 주어진 육 개월의 특급휴가 도중 바나나맨과 배너 박사는 지진성 해일인 ‘츠나미’를 만나 1994년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군 중심지에서 깨어나게 된다. ‘조난당한 캐나다인’으로 위장한 그들은 미국의 자유무역정책에 반대하는 ‘정의를 모르는 나쁜’ 반군들로부터 마치 이웃이나 친구를 대하듯 친절한 환대를 받는다. 배너 박사는 헐크로 변신하기 위해 마르코스에게 제발 화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반군 지도자인 마르코스는 배너와 바나나맨을 정중하게 본토로 배웅해준다. 결국 이러한 일화를 통해 슈퍼특공대의 작업이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정책’을 세계화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며,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들의 작업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위선적 행동인가가 드러난다.
2001년 9월 12일 평범한 영어강사로 살아가는 ‘바나나맨’은 한국이 ‘세계화를 향한 거대한 열기와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어제 발생한 9․11 테러를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화자가 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여객기의 모습에서 슈퍼맨의 모습을 보는 듯했으며, ‘나쁜 무리’들이 슈퍼맨을 닮아가면서 내성이 생긴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패권주의적 전략의 맹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화자는 슈퍼맨이 ‘너무나 슈퍼’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인 ‘나쁜 무리’에게 테러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구는 ‘우리’와 슈퍼맨이 함께 살기엔 너무 작은 별일지도 모른다며 화자는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 죄송하다는 조롱 섞인 미안함을 토로한다. 이것은 ‘지구 영웅’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행한 모든 행동들이 악의 무리를 생성하는 일방적인 세계 재편에 불과했음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바나나맨’이 정신병원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것은 1997년 11월 21일(IMF 구제금융 신청일)이다. 화자는 귀순자로 발표된 이후 영어강사 일을 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은인이자 영원한 우상’인 슈퍼맨에게 자신이 어떤 이유로 그곳을 떠나게 됐는지, 누구에 의해 병원 옥상 위에 쓰러져 있어야 했는지를 질문한다. 지난 6년 동안 ‘슈퍼특공대’ 일원으로서의 화자의 기억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화자가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DC 코믹스의 젊은 작가 헤일리에 의하면 ‘바나나맨’은 DC 영웅들이 너무 강하기에, ‘복잡한 내면을 가진 불완전한 영웅’으로 황인종을 선택하여 ‘아주 친근한 영웅’이자 ‘슬프고 코믹한 복잡한 존재’로 부활시키려던 존재이다. 그는 황인종의 ‘슬프고 웃기는 덜 떨어진 모습’으로 백인 팬들의 우월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DC 최초의 블랙 코미디 히어로’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2001년 어느 날 귀가하던 새벽에 만난 슈퍼맨은 바나나맨에게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라고 은근히 협박한다. 그런 슈퍼맨 앞에서 바나나맨은 DC의 크리에이터들이 지정해준 자신의 ‘토킹, 고민, 친구, 차밍, 분노, 환희’ 등의 포즈를 보여주며 여전히 ‘포즈는 자신의 삶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슈퍼맨은 ‘제3세계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고 이야기하면서, 포즈나 확실히 잡으며 열심히 응원이나 하라고 당부한다. 슈퍼맨이 떠나고 바나나맨은 슈퍼맨이 가는 방향으로 달려가며 작품은 종결된다.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슈퍼맨의 무력, 배트맨의 세계적 자본력, 복제 아쿠아맨의 무역 협상력, 전 세계를 향한 원더우먼의 성욕/문화욕 관장, 배너의 분노 촉진’ 등을 통해 ‘슈퍼특공대’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대리 실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자살하려던 한국 소년을 데려다가 풍자와 비판의 이중적 주체인 ‘바나나맨’으로 분장시켜 희극적 영웅의 자세(실은 블랙 코미디 히어로)만을 취하는 인물로 형상화한 것은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슈퍼한 존재들은 슈퍼하지 않은 존재들을 소외시키거나 악의 무리로 배제하면서 그들만이 슈퍼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표상하는 세계화의 단면인 것이다.
3. ‘오리배’를 타고 전 세계 노동시장을 배회하는 난민의 풍경
―박민규의 「아, 하세요 펠리컨」(≪문학과사회≫, 2005년 봄)
지구영웅전설이 제국의 영웅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표상’의 허구성에 대해 만화적 상상력을 통해 풍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박민규의 「아, 하세요 펠리컨」은 ‘오리배’를 타고 전 세계를 떠도는 ‘난민’들의 문제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그리하여 제3세계의 소외된 민중들을 통해 씁쓸하면서도 발랄하고 우스우면서도 허망한 존재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아, 하세요 펠리컨」은 자살하기 딱 좋은 한적한 유원지를 배경으로 ‘오리배’를 타며 세계를 유랑하는 제3세계 실직자/구직자들의 삶을 풍자한 소설이다. 비행기나 배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이 타는 것이 ‘오리배’이고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모여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이 탄생되었다는 식의 표층적 이야기가 황당무계한 듯 이어지지만, 그 밑바탕에는 실직자들을 양산하는 현실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분위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깔려 있는 것이다.
화자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일흔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자, 이 나라가 ‘고장 난 세계’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할 곳과 쉴 곳’이 동시에 필요했던 화자는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며 연천유원지의 무료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화자는 ‘보트’가 아니라 ‘오리배’가 있고, ‘유원지’라기보다는 ‘저수지’인 곳에서 ‘열세 척의 오리배와 경품 크레인, 고장 난 두더지잡기’와 함께 근무한다. 그곳에서 화자는 21세기에도 끊임없이 발로 페달을 돌려야 하는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 같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러한 연민은 자신이 서울로부터 32킬로미터 떨어진 ‘연천’에 있다는 사실과, 늘 어딘가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전문대’ 출신이라는 소외감이 ‘저렴한 인생’에 겹쳐지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중심지로부터 멀어져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변부적 존재감이 ‘저렴한 인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도움을 줄 수도,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알 수 없으나, 세상의 외곽에선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심야전기가 흐르듯, 퐁당퐁당 퐁당 퐁”을 울려대는 이 시대의 ‘보트 피플(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 입은 중년 남성이 오리배 <라-47호>에서 약을 먹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가 나서 도피 중에 가족과 헤어져 자살한 사실이 밝혀지자, LA에 부인과 딸을 보낸 유원지 사장은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멍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 역시 초라한 유원지를 통해 겨우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세 차례의 태풍이 몰아치면서 저수지에는 갑자기 수많은 오리배들이 가득 차게 된다.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일원들이라는 후안과 호세는 아르헨티나에서 중국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태풍으로 길을 잃었다며 사장과 화자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그들이 오리배를 탄 것은 ‘비행기나 배’를 탈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린 빅 풋>이라는 세계적인 회사의 노동자였지만 미국의 본사가 중국에 새 공장을 건설하면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그리하여 페루 친구에게서 ‘오리배 사용법’을 배운 그들은 일자리가 줄어든 아르헨티나를 떠나 오리배를 타고 ‘날아서’ 중국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오리배의 숨은 기능’을 이용하여 날아다니는 그들은 베트남에서 두 달 전에 일을 했으며 일본을 경유했다고 말한다. 비가 그치자 오리배의 페달을 밟기 시작한 그들은 기러기떼 같은 편대를 형성하며 중국을 향해 날아간다. 결국 ‘오리배 사용법’이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서 낙오된 제3세계 난민들의 생존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나고 화자는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공공연한 경유지가 된 연천저수지에서 세계를 오고 가는 베트남인, 이라크인, 페루인, 동티모르인 등에게 식료품 등을 판매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공무원시험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사장은 <라-47호> 오리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사장은 <라-47호>에 LA의 가족이 동승했으며, 캐나다․브라질․미국․상해 등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화자는 어느 새벽 유원지에 ‘한 마리의 펠리컨’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장의 <라-47호> ‘오리배’를 본다. 화자는 ‘물가와 환율의 차이’에 민감해하는 사장에게, 부탁했던 다섯 개의 쇼핑봉투를 들고 가서 전해주며 언제나 삶은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아, 하세요 펠리컨」은 구직자와 실직자를 양산하는 사회에서의 삶이란 ‘저렴한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더구나 그러한 사회적 구조가 어느 한 민족이나 국가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리배’를 애용할 수밖에 없는 제3세계의 ‘세계시민’적 ‘난민’들을 생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계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양극화 체제임을 보여준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 상품, 노동’을 소유한 강자들만의 시장 지배력을 표상하면서 소외된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담론인 것이다.
4. ‘맥도널드화’로 표상되는 제국의 전략
―김경욱의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
박민규의 「아, 하세요 펠리컨」이 신자유주의적 질서 하에서 새로운 노동 시장을 찾아 떠돌 수밖에 없는 왜소한 제3세계 노동자들의 표상을 보여준다면, 김경욱의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은 ‘표준화, 효율화, 자동화’ 등으로 대표되는 ‘맥도널드화’ 전략이 제3세계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제3세계해방전선’을 통해서 다국적기업이 보여주는 제국적 논리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김경욱의 작품은 ‘평양과 개성의 맥도널드 매장 화재 사건’을 신문기사처럼 앞뒤에 배치하고, 서울에 살고 있는 스무 살 여성 화자의 가족 이야기와 맥도널드 매장 이야기를 겹치면서 ‘맥도널드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한다.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의 화자는 스무 살이 되던 봄, 세상이 뭔가를 수호하기 위해 분주했다고 회상한다. 그 무엇은 ‘투기성 외국자본으로부터 경영권, 만연한 학원폭력으로부터 자식, 신자유주의의 칼바람으로부터 생존권, 폭설로부터 도시의 간선도로, 일본으로부터 독도’ 등으로 다양하게 편재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화자는 ‘남자친구로부터의 순결 사수’와 ‘파탄에 직면한 가정 수호’를 위해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에 노출되었던 맥도널드 매장에서의 근무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때 화자가 진정으로 독기를 품은 채 지켜내려 했던 것은 ‘순결이나 가정,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 안락한 미래와 교환될 수 있는 화자의 ‘가치(=몸값)’였다고 진단한다. 고용 불안정 속에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불투명했던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적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회사가 생산비 절감을 위해 중국으로 이전되면서 실직된다. 이후 빚을 얻어 전기구이 통닭집을 열지만 조류독감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자 아버지는 재기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동생은 고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하고 엄마는 친구들에게 정수기를 팔러 다니며, 화자는 학업을 중단한 채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주 3회 맥도널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비정규직에서 매일 출근하여 고된 일을 수행하는 정규직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된다.
하루에 전 세계에서 4천3백만 명이 드나드는 맥도널드의 영업 준비는 ‘인종과 언어,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단일한 과정으로 ‘표준화’되었기에, 화자에게 매장 준비 과정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할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성별, 나이, 계급,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고객들은 균일한 맛의 햄버거를 먹으며 음식물의 뒤처리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할 정도로 ‘표준화’되어 있다. 이렇듯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은 모든 차이를 무화시켜 매장 내의 존재들을 ‘형제자매’처럼 표준화한다. 화자가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맥도널드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주장하던 매니저의 말은 여드름쟁이 남학생의 반박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매니저는 직원들에게 ‘맥도널드 가족’으로서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맥도널드화’할 것을 요구한다.
화자가 매장의 ‘메인’으로 일한 지 한달이 지났을 때 ‘훼손된 괴전단과 원형 그대로의 전단’이 발견되면서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이 시작된다.
우리의 요구
1. 제3세계 미성년자를 착취하지 마라.
2. 환경파괴를 즉각 중단하라.
3. 아동들의 건강을 해치지 마라.
이상의 요구를 묵살할 시에는 응분의 대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3세계해방전선
이 전단을 본 매니저는 요구에 대한 객관적․합리적 판단 대신 ‘사이비 테러단체와 불법테러단체’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며, ‘동요와 굴복’ 없이 ‘가족’을 내세우며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가, ‘거동수상자를 색출해서 조기에 격리 조치하라’고 지시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강자의 논리’를 보여준다. 이 전단에 대한 매니저의 반응 이후 “확정되지 않은 위협은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위협적”이 되어 아르바이트생 세 명이 매장을 떠나고 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신입으로 들어온다. 매니저는 특별 위험수당을 약속하게 되고, 직원들은 그 추가 액수만큼의 위험만을 구체적인 위협으로 체감하게 된다. 결국 ‘데땅뜨의 시대’는 가고 ‘투쟁의 시대’가 도래하여, 화자의 안전과 매장의 안위는 이 세계의 존망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고객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기는 맥도널드 직원들인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긴장 속에서 부여된 임무를 군말 없이 감당하며, ‘맥도널드화되지 않은 테러의 위협’ 앞에서 현저히 ‘맥도널드화’된다.
하지만 ‘맥도널드화’는 매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화자의 가정에서도 진행된다. 그리하여 “밥은?”, “됐다.” 식의 짧은 의사소통 속에 모든 가사노동이 개인화되면서 ‘효율화’가 이루어진다. 화자의 남자친구 역시 ‘예측 가능한 대답’과 ‘계산 가능한 데이트 비용’ 속에 ‘효율적인 만남’을 요구한다. 그리고 비디오방이나 노래방에 들어가서는 성욕의 해소를 위해 화자의 몸을 더듬어대는 ‘자동화’된 행동을 보인다. 그리하여 화자는 ‘가정의 의사소통, 가사노동, 남자친구와의 연애, 남자친구의 성욕’마저 ‘맥도널드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러한 ‘맥도널드화’가 구체적으로 ‘강요된 결과’가 아니었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맥도널드화’에 의해 화자는 ‘연애, 가정,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매장에서 아무런 공격도 없이 한달이 지나자, 특별수당 지급이 중단되고 경계와 긴장은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자본주의 시대에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위험’이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새로이 발견된 전단에는 ‘전소, 방화, 폭파, 습격’ 등 ‘제3세계해방전선’이 수행한 ‘맥도널드 매장 습격의 연대기’가 기재되어 있다. 위험이 다시 현실화되자 그에 비례하여 특별수당 액수가 불어나고 불안과 긴장 역시 더욱 커지면서 맥도널드 직원들인 ‘우리’는 신속하게 ‘가족’이 되어 고객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 속에 손놀림이 빨라진다. 그리하여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위험이 ‘예측 가능해지고 계산 가능해지며’ 경계가 ‘효율적이고 자동화’되면서, 화자는 “위험마저도 맥도널드화”됨을 느낀다.
그러다가 륙쌕을 멘 아시아계 외국인과 화자가 실랑이를 벌이던 중 매장 전체가 진동하자 그 외국인을 테러범으로 오인한 남자직원이 가스총을 화자에게 분사하게 된다. 나중에 매장에서의 흔들림이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였고, 테러범으로 오인된 외국인은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인도인임이 밝혀진다. 이런 소동을 통해 매니저는 ‘제3세계해방전선’에 대한 적의를 더욱 깊이 새기게 된다. 결국 ‘제3세계해방전선’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킨 셈”인 것이다. 화자는 다음날 매장에 출근하여 왜 테러의 대상이 ‘서울의 이곳 매장’일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매장 주변은 ‘다국적기업의 특구’ 같으면서도 서울 도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전혀 ‘맥도널드적이지 않은 의문’ 속에서 화자는 매장 직원들을 둘러보며 ‘매일 감자를 튀기고 햄버거를 조립하고 카운터를 지키며 바닥을 닦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자문한다.
작품 말미에 ‘평양과 개성의 맥도널드 매장 화재 사건에 대한 기사’ 뒤에 작가는 소방당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르게 “그러나 제3세계해방전선이라는 단체는 일련의 화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맥도널드화’가 표상하는 다국적 기업의 움직임이 제국의 시선으로 제3세계를 영토화하려고 할 때 그에 저항하는 탈영토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전단만이 존재할 뿐 실체가 없는 ‘유령단체’인 ‘제3세계해방전선’의 등장은 역설적이게도 ‘위기와 불안, 긴장과 경계’를 제3세계 직원들에게 내면화함으로써 ‘맥도널드화’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제국의 가족주의적 질서’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에서 급여를 제공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바로 유령 같은 ‘제3세계해방전선’의 존재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다국적 기업과 제3세계해방전선’의 대치는 지속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결국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은 서울 어느 지역 맥도널드 매장에 등장한 ‘제3세계해방전선’의 전단과, 그 내용이 표상하는 위험 대비를 통해 ‘맥도널드화’된 한국 사회의 표정을 읽어낸다. ‘맥도널드화’란 ‘표준화, 효율화, 자동화’를 통해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맥도널드’의 정신을 제3세계 주체들에게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전단 내용대로라면 ‘맥도널드화’는 필연적으로 제3세계에서 ‘미성년자의 착취, 환경파괴, 아동들의 건강 위해’를 초래하지만, 다국적 기업에 대한 ‘제3세계해방전선’의 시정 요구는 테러 수준에서 인식될 뿐이다. 이것이 제국적 자본의 논리인 것이다.
5. 문학적 자유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성찰하기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문학은 자신의 반성적 역할을 지속하고자 한다. 모든 ‘○○주의’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될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면 문학은 끊임없이 그 주의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모순에 착목하여 문학적 저항의 몸짓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강요하는 ‘노동, 상품,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양산되는 ‘소외된 존재’에 대해 문학은 ‘문학적 자유’의 몸짓으로 끊임없이 발언한다.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DC 코믹스의 만화주인공들을 통해 ‘슈퍼특공대’의 제국주의화된 몸짓을 그리면서 ‘지구의 영웅’이 ‘정의’를 빙자하여 미국의 백인 이데올로기와 질서를 다른 세계에 강제적으로 전파․정착시키려고 하는지를 풍자적으로 성찰한다. ‘정의와 불의, 동지와 적, 미국 백인과 비미국 유색 인종, 선과 악’ 등의 이분법은 ‘힘(무력, 자본력, 성욕)’으로 세계를 통치하려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보여준다.
박민규의 「아, 하세요 펠리컨」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오리배’를 타고 세계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제3세계 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시민-되기’의 어려움을 추적한다. 뿐만 아니라 유원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화자나 유원지 사장 역시 신자유주의가 표상하는 세계화의 주류 현실에서 소외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세계화의 질서에서 낙오된 무력한 존재들을 통해 제3세계 민중들에게 강제된 신자유주의적 노동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경욱의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은 코카콜라와 함께 전 세계 매장에 미국식 자본의 힘과 위세를 보여주는 ‘맥도널드’ 매장을 중심으로, ‘맥도널드화’된 한국 사회의 모습과 그에 반발하는 비가시적 단체인 ‘제3세계해방전선’과의 대비를 통해, 제국화된 제3세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앞뒤에 배치된 평양과 개성의 맥도널드 화재 사건은 멀지 않은 미래에 금단의 지역인 평양과 개성에도 맥도널드의 매장이 배치될 것임을 암시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대세임을 시사한다.
문학은 시대적 모순을 향해 성찰적 발언을 지속한다. 그리하여 문학은 독자적 심미안을 통해 시대를 거스르거나 시대를 앞서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 문제적 패러다임이 가진 모순에 대해 착목하고 균열적 틈새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적어도 문학 안에서는 풍자성이라는 저항의 방식을 통해 그러한 작업이 지속된다. 세계화된 자본이 화두인 시대, 문학은 질문한다. 초국적 자본은 인간의 영혼을 살지우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다수를 양산하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문학적 자유를 위해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허상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문학은 ‘또다른 자유’를 찾아 비상할 수밖에 없다.
오태호․
1970년 서울 출생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 오래된 서사 ․현재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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