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계간평(연극)/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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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연극>
∙<빈손>(유진규 연출)
∙<주공행장>(배삼식 작, 손직책 연출)
∙<올드보이>(최치언 작, 김관 연출)
흔한 실험에서 뻔한 대중으로
―2006년 봄, 연극계의 스펙트럼
이경숙|연극평론가
연극의 실험은 무대의 생명력과 관계한다. 거대 자본 시장의 논리로 조율되는 영화나 TV드라마, 대극장 뮤지컬의 기획에 비해 연극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실험할수록, 더 깨지고 부딪칠수록 연극다워질 수 있다. 연극다워진다는 것은 분명, 오늘날 연극계가 원하는 혹은 원해야 하는 ‘무엇’이다. 극단적이고 비대중적이기만 한 실험은 그 공연의 성패에 단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고 실험적인 공연들이 우리 연극계를 장기적으로 살릴 수 있는 오늘의 방법인 것 역시 부인할 수는 없다. 연극은 다른 매체에 비해 실험하고 실패하고 실현할수록, 실질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증식시킬 수 있는 예술적 장르이기 때문이다.
2006년 봄의 연극은 실험에서 대중으로, 절박한 진심에서 교묘한 눈치 보기로 오그라들고 있는 느낌이다. 발전 없이 재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서 눈치만 살핀다. 실험극이라고 해서 훌륭한 것도 아니고 대중극이라고 해서 형편없는 것만도 아니다. 대중을 움직이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실험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불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관객 없는 연극이란 진정한 연극일 수 없다는 논리로 대중의 기호와 취향에 발맞추려는 연극을 옹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의 무게는 그들에게 발맞추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취향과 기호를 새로운 길로 안내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여기서는 연극적 실험과 대중과의 거리를 양 극단에 설정하고 그 좌표 위에 세 개의 연극들을 놓아보도록 한다. 이 극들은 실험과 대중 각각을 표상하기도 하고 그 둘의 몸섞기를 상징하는 작품이 있기도 있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의 자리가 작품의 미학적 층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험극이 대중극의 우위에 놓일 수만도 없고 그 역도 역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2006년 봄의 연극이 우위의 문제를 제외하고 말한다고 하더라고 그 편향됨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에 있다.
1. 실험하기-유진규네 몸짓 <빈손>
1) 기호, 마임 그리고 실험
2006년 런던국제마임축제 공식 초청작 유진규의 <빈손>(유진규 연출, 2006. 03. 09~11, 사다리아트센터 세모극장)은 스스로의 양식적 표상을 ‘몸짓’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임의 대가’ 혹은 ‘한국 최초의 Mimicker’라고 불리는 유진규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마임’이라는 이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일종의 의지적 전복이다. 유사성을 지닌 장르적 모태(마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다른 기호(‘몸짓’)로 자신의 장르적 존재 영역을 묶어 엮는 행위는 다른 기표를 통해 다른 기의를 낳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표와 기의가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Language can also be compared with a sheet of paper)” 앞면(기표)의 모양과 질의 변형이 뒷면(기의)의 그것을 본질적으로 담보한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이 지닌 기호적 전복성은 제시된 작품명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 공연의 제목은 일단 <빈손>인데, 그는 이것은 <ㅂㅣㄴㅅㅗㄴ>이라는 ‘기호’로 대체하여 전시하고 있다. 파롤로서의/bin:son/은 동일하지만 후자가 랑그의 일반 법칙을 뒤틀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이 둘은 변별적인 기의를 지니게 된다. 단어(기호)를 자음과 모음의 단위로 나누어 수평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랑그가 파롤로 구현되는 시간 자체를 지연시키고, 그것의 해석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관습성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덮고 있는 이러한 기호 전복의 면면은 무대 위로 이어진다.
2) 무대, 조명, 오브제-기호
무대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전형이다. 물론 이때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 씨어터(minimalist theater)의 의미는 서양 사조에서 말하는 ‘최소한주의’라는 뜻과는 비유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을 뿐 엄격하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사물악기를 제외하자면) ‘빈 공간’에 가까운 어둠의 무대는 다양한 몸짓 기호의 변주를 표현하기에 적당하게 열려있다. 무대는 일체의 무화(無化)를 지향하면서 시작되어 강렬한 기호(신체 기호, 소리 기호, 리듬 기호, 오브제 등)를 다루어내면서 결국 넘쳐나는 유(有)로 자유로워진다. 즉, 의도된 빈 공간은 ‘신체성이 확장되는 발전적인 공간’으로 전이되며 가득 채워진다. 이것은 마임이 아닌 한국적 몸짓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무대 공간 형식이라고도 설명될 수 있다. 총체로서의 에너지로 공간을 채워냈던 옛 놀이의 구현 방식이 이 무대를 통해 재현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해준다.
상대적으로 조명의 사용은 유(有)로부터 시작된다. 1막에서 사용되고 있는 조명은 총 4가지 색의 것이다. 사실 이 물리적인 숫자가 이 공연이 조명을 ‘복잡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공연이 조명을 단순하게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쉽다. 문제는 이것이 활용되는 컨텍스트의 양상인데, 붉은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의 조명이 활용되는 양상은 그것이 한지라는 오브제를 만남으로 해서 실로 다층적으로 변이된다. 조명을 통해 그림자가 나타나고 사라지면서 그것은 단순히 인물을 부각시키는 무엇이 아니라 신체와 행위의 의미를 통합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게다가 그들은 두 개 이상의 조명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패턴을 취함으로서 스스로를 변주시킨다. 무대 뒤편에는 총 8개의 스팟 라이트가 설치되어 있고 무대 앞쪽에는 무대 뒷벽을 향해 한 개의 프론트 중핀이 놓여있다. 노란색의 조명이 사용되는 것은 주로 이 프론트 중핀을 통해서이며, 이 중핀의 역할은 주로 배우의 신체와 표정, 행위를 시각적으로 수용하는데 있어서 명징성과 환각성을 번갈아 부여하는 것에 있다. 즉, 노란색으로 표현되는 색감의 기표는 두 개의 기의를 교차적으로 생산한다.
무대 뒤편의 스팟 라이트는 4개씩 두 세트를 이루고 한 쪽 세트의 색이 사용될 때 다른 쪽 세트의 같은 색도 함께 활용된다. 즉, 이 두 세트는 쌍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단일 색의 사용보다는 복합 색(붉은색과 파란색, 파란색과 보라색 등)의 활용이 주를 이루면서 그들은 하나의 중첩체가 된다. 색감의 활용 측면에서도 그들은 완전한 쌍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조명의 이러한 복합성과 중층성은 그것들이 서로의 채도를 한껏 낮추어 대칭의 각도로 구현자의 왼쪽과 오른쪽을 대각으로 비춘다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배우 자체를 비추어서 즉각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신체를 ‘때리고’ 그 빛이 한지를 투과(그림자와 조명)함으로써 2차적으로 시각화한다는 점에서도 돋보인다.
즉, 조명과 오브제를 통해 ‘신체 자체’를 ‘기호화’하고 간접적으로 비춰진 신체(그림자)를 통해서 새로운 시니피에(그림자 신체의 기의)를 형성하는 것이다. 조명의 대칭-쌍 활용은 그림자라는 신체를 구성해냄으로서 1차 기표로서의 신체를 뛰어넘는 새로운 기호를 탄생시키고 있다. 작품의 후반으로 갈수록 무대는 조명을 단순화함으로써(노란색과 어둠만을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이 담당하던 기호 생산의 역할을 다른 것들의 활용을 통해 대체하는 추이를 보인다.
3) 몸짓과 신체-초기호(超記號)
빠뜨리스 빠비스(Partice Pavis)는 ‘제스처’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면서 그것들을 ‘관념적인 제스처’와 ‘구상적인 제스처’ 그리고 ‘환기적인 제스처’로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구상적인 제스처’란 ‘도상적인 제스처(그림활자적, 운동활자적, 공간적인 제스처)’ 혹은 ‘판토마임적인 제스처’로도 불리는데 어떠한 행위 자체를 신체로서 재구상하여 과장(강화)하거나 생략함으로 실제보다 더욱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을 지칭한다. ‘환기적인 제스처’는 발화가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또는 발화 목적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환기와 지시를 위해 발화 전후 혹은 발화 상황 속에서 실시되는 것을 뜻한다.
<빈손>은 기존의 판토마임이 활용하는 제스처의 양태-구상적인 제스처-를 극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구상적이다. 그리고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호소함으로써 기본적으로 환기적인 제스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는 무언가를 흉내 내려고 하는 신체의 지향을 버리고 ‘신체를 정신 속에 두기’를 희망한다. 또한 논리적인 플롯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굳어진 서사’ 역시 불필요해 보인다. 이에 그것의 주안점은 연계성이 강화되어 있지 않은 총 5막의 퍼포먼스 속에서 추상적․관념적 제스처를 엮어내고 이를 통해 신체와 정신 모두를 함께 보여주려고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양태는 ‘관념적 제스처’가 개인의 주관에 많은 부분 의지한다는 측면에서 기호의 ‘자의성(arbitrary)’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관념적 제스처는 실체를 전제하는 ‘도상(icon)’과 ‘구상’을 취하지 않는 점에서 대상과 거리를 두며, 존재하지 않는 실체(대상)를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연기자의 자의에 닿는다. 그의 공연이 우리의 언어 체계 혹은 기호 체계의 심연과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작품의 제스처가 지닌 이러한 양식적 특성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특히 2막에서 보이는 그의 신체 연기는 ‘몸’이 ‘정신’을 서사 없이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였다고 판단된다. 2막에서 활용되는 오브제 ‘신칼’은 잡귀를 물리치거나 제장을 정화시킬 때 무굿에서 사용되는 도구인데, 신의 뜻을 보여주거나 신과 만난다는 측면에서 무당의 역할과 그 궤를 함께한다. 유진규는 신칼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다가 결국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하나의 주체(신체)가 객체(신칼)로 전이되며 하나의 객체(신칼)가 주체(신체)와 소통함을 표현한다. 즉 각각의 기호는 분절된 두 개의 기의를 지닌 것이 아니라 기표를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기의(혼령)로 섞인다. 신칼과 신체가 하나 된 제3의 기호는 그것들의 반개성적 중화가 아닌 전혀 새로운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기호의 유동성과 변이가능성을 증명하는 연극적 기호가 되는 것이다.
4) 소리, 냄새 그리고 다시 기호
작품 <빈손>의 미덕 중 하나는, 기존의 마임이 신체 표현을 위주로 하고 소리나 리듬․음악․후각적 표현, 촉각적 접근을 부수적인 차원의 것으로 강등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에 반해,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통합적 기호로 녹여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3막에서 사용된 ‘향내’나 4막의 ‘상여소리’, 공연 전반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동시에 신체의 리듬감을 부각해주는 ‘사물패의 소리’ 등은 <빈손>의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그너의 표현-“다른 예술들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곳에서 음악은 ‘이것이 있다’고 말한다.”-을 빌리자면, 기존의 마임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을 때 유진규의 몸짓 <빈손>은 청각과 후각, 촉각 모두를 빌어 ‘이것이 있다’고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향’이 지니고 있는 상징의 원형은 ‘기원’에 있다. ‘신’이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그 타자에게 주체의 의지를 구현해주길 비는 기복의 의식은 향을 태우는 행위를 동반하기 쉽다. 이때의 향은 그러므로 주체와 타자가 분리된 상태에서 타들어가는 물상일 뿐이다. 그런데 유진규는 이것을 일종의 ‘접신놀이’로 변형시키고 있다. 향내가 진동하는 공연장, 암흑 속에서 작은 향 불빛과 타오르는 연기들의 빠른 움직임을 통해 관객들은 그들의 접합(接合)을 간접적으로 상상한다. 사물패의 격렬한 소리와 함께 표현되는 이것은 주체-타자의 분리가 아닌 통합을 의미하며 공간의 향내만큼 지독하게 강렬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후각은 매우 강력한 감정과 기억을 유도하는 종류의 감각이며 이것이 청각과 함께 발현될 때 시각의 힘을 뛰어넘기는 더욱 용이해진다. 시각적 사유의 정렬성은 우리의 상상을 제한하기 쉽지만, 시각 표현을 걷어낸 채(암전 상태) 펼쳐지는 후․청각의 향연은 관객의 공간을 현실계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4막에서 사용된 ‘상여소리’의 상징 층위는 훨씬 단조롭다. 상여소리가 죽음을 상징한다고 했을 때, 유진규는 그 상징의 법칙에 순종한다. 공연의 4막이 사유의 확장보다는 상식과의 수준 맞추기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는 아마 여기-상징 관습에의 순종-에 있을 것이다. 또한 5막의 표현 양식 역시 구상적인 제스처에 갇힌 느낌이 강하다. 유진규는 5막에서 오브제로 ‘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3막의 향불을 잠재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작은 그릇의 물을 반복적으로 잡고(잡으려하고) 그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흘러 남는 것은 ‘빈 손’뿐이다. 일종의 공허와 집착에의 회의를 보여주는 이 행위는 이 공연 전체의 주제와 만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물’은 3막의 ‘불’과는 달리 보편적인 물상 그 자체에 머문다. 손에 잡히는 않는 성질을 가진 오브제라는 측면에서 사용되었을 뿐 즉, 대상 자체의 1차적인 시니피에로서 사용되었을 뿐 물-오브제에는 기호적 전복 혹은 사유 확장체로서의 기호성이 거세되어 있다. 또한 기호와 대상 사이의 직접적 유사성에 의해 선택된 물-오브제를 다루는 ‘행위’ 역시 그것이 지닌 상징성의 측면에서 확장의 깊이가 얕다. 공연의 후반은 마치 <빈손>이라는 공연명에 기대되는 주제적 몫을 ‘설명해내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사로잡힌 인상을 준다. 이것은 공연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고 기호 사용의 질적 측면을 균등하게 이끌어나가는데 일정 정도의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5) 체화된 기호, 그리고 연극적 확장
유진규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지만 보이지 않으면서 같이 흘러가는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빈손>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이 작품의 두 가지 특질을 통해서일 것이다. 첫째는 그 세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기호의 다양성’이다. 그는 물리적인 신체가 아닌 정신적인 몸을 통해, 그리고 시각 의존의 현대마임이 아닌 총체적 감각에의 호소를 위시한 우리의 몸짓을 통해, 그리고 죽어버린 일상의 물상이 아닌 유동적 의미로 재탄생한 오브제들을 통해 모든 기호를 구현한다. ‘없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잊어서 혹은 간과해서 ‘없다고’ 생각했던 기호들을 끄집어내고 그를 통해 ‘있고도 없는’ 세계를 표현해내는 그의 힘은 기호를 다양하게 활용할 줄 아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작품이 그 기호들의 가변성을 체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유진규의 연출은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기의를 가지거나 하나의 기표로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주관적 연기자의 자의가 보편의 소통으로 이어지는 결과는 신이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열려있다. 기표를 기의에 가두지 않는 무대를 만듦으로써 <빈손>은 수많은 은유와 상징 사이의 대화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손>은 연극적 기호를 활용함으로써 그 기호를 응시하는 모든 사람을 사유 확장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다양한 기호들의 기의 변화를 통해 관객은 하나의 기호로 수천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하얀 한지 한 장이 몸 전체를 가리기도, 얼굴의 가면이 되기도, 긴 막대가 되고 줄이 되며, 작은 종이 공이 되는 동시에 부채와 파도 혹은 바람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기호가 변이될수록 사유는 확장된다. 그것이 이 작품이 선택한 소통의 방법 체계이다.
2. 반복하기-연극 <주공행장>
1) 신화 전쟁 개인 vs 사회
극단 미추 20주년 기념공연 <주공행장>(배삼식 작, 손직책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06. 3. 17~26)은 ‘개인의 신화’와 ‘사회의 신화’ 사이에서 한 인간이 겪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인간의 역사만이 신화적인 언어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 신화는 고대의 신화건 현대의 신화건 오직 역사적인 근원만을 가질 뿐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역사에 의해서 선택된 빠롤(parole)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하나의 대상이 시대적으로 어떤 신화성을 획득하며 변이하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의 신화와 어떤 식으로 갈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진행된다.
2) 신화는 변한다. 그리고 상처 입는다
<주공행장>의 무대는 그 깊이를 자랑한다. 아르코대극장의 무대를 재단하지 않고 폭과 깊이 그대로를 활용한다. 단순해보일 수 있는 깊은 무대는 경사형으로 설치되어 공간의 리듬감을 더한다. 단순하게 처리되기 쉬운 뒷벽은 잎새의 대나무들로 수려하게 채워졌다. 자극적인 색조명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은은하고 회상적인 서사톤을 이어가는 이 작품의 미덕은 이러한 무대와 미술, 조명에서 시작되고 있다. 무대 앞쪽에 설치되어 있는 장독은 바닥 아래에 파묻혀진 채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평면에 재미를 더한다.
칠순 노인 주호는 술과 관련된 자신의 행장을 읊조린다. 늙은 주호 역을 맡은 윤문식의 목소리는 익숙한 푸근함으로 극 전체를 이끌고 간다. 늙은 주호의 회상에 의하면 어린 주호(이미숙 역)의 아버지 경음(김종엽 역)은 술을 좋아하는 선비이다. 경음에게 술은 세상과의 소통을 이끌어내는 매개이며, 삶의 유일한 위안이고 기쁨이며 애무이다. 그러나 어린 주호에게 술은 세상의 일을 안주삼아 자신에게 사회의 폐단을 말하는 아버지를 만들어내는 ‘대단한 힘의 주술’이며 ‘아버지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런 주호에게 술의 의미가 달라지는 계기가 생긴다. 임금(정태화 역)의 금령을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긴 것이 한 동이의 술이기 때문이다. 이 술을 그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켠 주호에게 술은 ‘아비’이며 ‘슬픔’이다. 이 슬픔을 안은 채로 주호는 임금의 행차 자리에서 다시 한번 술을 마신다. 이때의 술은 임금이 백성들의 원성에 맞서 금령을 강화하려는 일종의 ‘위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술은 아비의 죽음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술에 대한 어린 주호의 신화였다. 개인의 신화는 어린 그를 유배의 길로 이끈다.
희곡의 서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있다. 주호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서사가 그 하나라면, 임금의 입장에서 술의 정치적 신화를 변화시켜 가는 맥락이 나머지 하나이다. 이 둘의 신화는 각각 ‘개인의 신화’와 ‘사회의 신화’로서 만나고 부딪치며 상처 입는다. 그 상처는 성장한 주호에게 지속적으로 부가된다. 임금에게 금령은 무수리였던 자신의 어머니의 묘를 궁이라고 높여 부른 것이 합당하지 않다며 ‘원칙을 운운하는 비원칙적인 세도가’들에 대한 일종의 ‘제도적 복수’와 같다. 그러므로 그는 이 금령을 강건하게 유지시켜야만 한다. 이때의 술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지켜주는 임금의 신화인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알력 다툼의 도구로 의미지어진다. 이 사회적 신화에 의해 주호는 유배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해야 하며, 어머니(박영숙 역)의 임종조차 옆에서 지켜드릴 수 없는 괴로움을 겪어야만 한다.
‘개인의 신화’와 ‘사회의 신화’로서의 술의 이중적 의미는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서 변화한다. 임금에게는 자신이 아끼는 신하인 윤현(김정환 역)의 억울한 죽음으로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져야 할 원칙이 된다. 술의 사회적 신화는 점점 더 강화될 뿐이다. 반면 성장한 주호(이기봉 역)는 관비 난영의 사랑과 존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술의 신화를 갖게 된다. 난영은 술을 마시고 지어내는 주호의 시를 동경하고 온전히 그와 그의 시를 위해 금지된 술을 만들어낸다. 그가 지어내는 시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책에 나오는 이태백의 시일 뿐 창조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위해 자신의 이로 곡물을 빻고 술을 삭히는 것이다. 그의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그에게 술은 난영의 믿음이며 그녀와의 추억이 된다.
주호의 신화는 정치의 신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신화가 ‘아비’에서 ‘슬픔’으로, 다시 ‘그리움’과 ‘애정’,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의 금령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민중에게 술은 생계 자체이거나 성적 즐거움의 매개이지만 사회는 그들의 신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주호는 임금에게 술 한잔을 권하여 그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을 외로움의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는 ‘주상전하를 그 외로움으로부터 구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술상을 차려 임금 앞에 나타나 권주시를 읊는다. 그러나 개인의 신화는 사회적 신화를 이길 수 없었다. 사회적 신화는 개인의 신화를 향해 실소를 터트린다.
다시 감옥에 갇힌 주호에게 갇힌 채 말술을 먹여야만 하는 형벌이 주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임금을 ‘술로써 구하려고 하는’ 그의 또 다른 신화는 임금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것이 슬픔은 아니다. 주호는 임금이 자신이 권한 술잔을 받고 환하게 웃음 짓고 떠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그러나 사그라지는 조명의 빛만큼 관객을 슬프게 한다. 개인의 신화는 사회의 신화와 만나 슬픔을 껴안는다. 그에게는 슬픔이 아닐 이 행장이 그의 아픔과 그리움, 임금의 외로움과 갈등을 지켜본 수많은 개인들에게는 모호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관객’의 신화는 그래서 무대 위의 신화와는 또 다르다. 극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늙은 난영과 늙은 주호의 따뜻한 대화 장면마저도 온전하게 따사롭지만은 않다. 그 절반의 따뜻함을 얻기 위해 개인의 오랜 행장이 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3) 신화와 상처를 반복-표현하다.
배삼식 희곡의 강점은 감정과 서사를 이분하지 않고 단단하게 동여매는 데 있다. <허삼관 매혈기>에서부터 보였던 이러한 미덕은 <주공행장>에서도 그 역할을 다 한 것으로 보인다. 서사 속에는 감정만을 보여주는 장면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배면에 모든 감정이 깔려있기 때문에 관객은 서사와 감정이 동반 입장한 무대를 즐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문식의 연기는 이중적이다. 서사를 축약해서 ‘전하는’ 장면에서조차 그는 짙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독특한 발성과 목소리가 ‘윤문식’을 대표한다면, 그 독특함을 제시된 캐릭터에 녹이는 과정에 거부감이 끼어들 자리를 전혀 내주지 않는 것이 ‘배우 윤문식’을 특징짓는다고 할 만하다. 청년 주호를 맡은 이기봉은 전작들에 비해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과도한 감정 표출은 서사와 분리되면서 이질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주호 역의 이미숙은 술에 만취한 장면의 몇몇 관습적인 연기를 제외하고는 극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장점을 보여주어 앞으로의 연기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번 <주공행장>에서 배삼식은 상징을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술’을 ‘약’이라고 부르는 아버지 경음에게 ‘고래’는 자기 자신의 다른 이름이다. 약(술)을 먹으면 바다에 나갈 수 있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고 갇혀있는 자기 뱃속의 고래(술고래)는 자유를 찾아 헤맨다. 이제 경음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이 고래와 함께 자유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책으로 연결되는 아버지 경음과 주호 사이에는 ‘이태백’이 놓여있다. 이태백의 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면서 후에는 주호의 내면이 된다. 임금과 다른 선비들은 누구나 다 아는 이태백의 시를 자신의 시라고 우기는 주호를 비웃지만, 주호는 그만큼 이태백을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이태백과 경음, 주호는 하나의 몸이자 정신이 된다. 어쩌면 <주공행장>의 개인적 신화는 이태백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신화에 편입되지 못하고 상처 입었던 인물들은 그의 신화를 읊음으로써 그와 같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의상과 음악은 상징과 은유의 폭을 넓히지 못해서 아쉽다.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의상의 색은 좀더 개인의 내면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메타포로 작용할 수 있었을 듯 보인다. 음악의 선율은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며 감정의 결을 따라갔지만 도구적 원용에 한정된 느낌을 준다. 연극에서 의상과 음악의 위치가 서사의 부속이 아닌 극 전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고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차원의 것으로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주공행장>은 현란한 스펙터클과 자극적인 풍광 없이 한 개인의 일생을 담담하고 진중하게 그려낸다. 그 진중함의 매력은 삶의 진정성과 닮았으며 인생의 슬픔과도 소통하는 성격의 것이다. 문제는 이 희곡의 연출이 ‘삶은 어쨌든 따뜻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그 부분마저도 슬프게 느껴질 만큼 개인의 신화는 상처로서 그 문을 닫는다는 것에 있다. 술에 관한 미시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연극이 사회의 신화에 의해 쓰린 술잔을 비우는 무수한 개인들에게 먼 옛날의 슬픔을 좀더 아픈 그대로 그려내 주길 기대해 본다. 개인의 신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따뜻하기만 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미추의 작업들이 전혀 새롭지도 그렇다고 대중적이지도 않다는 것에 있다.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는 단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관록도 대단하다. 연출의 해석력은 작품의 맛을 살려내는데 있어서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감이 연극의 생동감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미추의 연극 <주공행장>은 다루는 주제의 절실함에 비해 너무 밋밋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그 단정함과 빛나는 관록과 깊이 있는 시선이 생명을 갖지 못한 채 부유한다면 그것만큼 무대 위에서 안타까운 일은 없다. 이 연극의 끝맛은 그 안타까움의 신화였다.
3. 대중되기-연극 <올드보이>
1) 원소스 멀티유즈의 시대, 지쳐버린 올드보이
츠치야 가토 원작, 미네기시 노부아키 원화, 박찬욱 감독,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대반전, 충격, 근친상간, 칸 영화제, 문어, 폭력, 감옥 등. 끝없이 수많은 단어들이 연상의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올드보이>라는 고유명사는 이 연상들에 의해 이제 익숙한 일반명사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 누구도 이 단어로 넘쳐나는 <올드보이>의 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대학로에서 여기에 추가될 새로운 단어들이 생겨났다. 최치언 극작, 김관 연출, 2006년 연극 <올드보이>(대학로 우리극장, 2006. 03. 10~4. 30). 인내심을 갖고 이 단어들을 올드보이의 제국에 추가해보자.
하나의 원소스가 시대와 매체를 넘나들며 멀티 유즈화되어 가는 현상은 새삼 새로울 것도 없을 만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2005년 겨울, 영화 <왕의 남자>나 연극 <이>가 그랬었고, <살인의 추억>이나 <날 보러와요>도 다를 것이 없다. 만화가 연극으로 탄생한 강풀의 <순정만화>도 그랬었고 연극배우들과 연극인들의 추억의 만화인 <유리가면>의 경우도 꽤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우리가 이제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지친 우리 자신을 비추어 지친 <올드보이>를 본다.
2) 최치언의 선방(善防)
‘선ː방(善防)’이라는 단어는 흔히 스포츠 게임의 진행 과정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사용된다. ‘공격을 잘 막아내다’라는 단순한 뜻의 이 단어는 연극 <올드보이>의 탁월한 구원 투수로서의 최치언의 성과와 만난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 연극은 선방을 해내야만 하는 작가가 필요할 정도의, 단순한 실현을 넘어서는 위험한 게임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격은 다각도에서 가해졌을 것이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위험하다, 우스워질 것이다. 장사 속 아니냐.’라는 주변의 질타와 비난에 가까운 걱정을 견뎌냈어야 했을 것이며, 이 부담스러운 짐을 짊어줄 작가와 연출을 만나야 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영화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작가는 고심했을 것이고 배우들은 다른 톤과 다른 형식으로서의 무대연기를 구현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짐작만으로 움직이진 않는다는 영화 속 여자처럼 그 짐작과 안타까움만으로 박수치지 않는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해결할지를 (우리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작가 최치언은 ‘연극’ <올드보이>를 만들어냈다.
작품의 서사적 단서와 설정 방식은 기존 <올드보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대수의 이름은 무태천(김정균 역)으로 바뀌었고, 그의 직업은 탈출왕으로 설정되었다. ‘탈출왕 무대천 연말 대 이벤트’ 행사의 일환으로 탈출 연기를 선보이던 무태천은 최면에 걸려 납치되고 그 이후에도 9차례의 최면 납치를 당한 후 그 주동자를 잡기 위해 스스로 감옥에 갇힌다. “신이 아닌 이상 침입해서 탈출시킬 수도 없”는 이 감옥에 돈을 내고 6개월을 예약한 무태천은 그러나 자신이 예약한 6개월을 얹어 정확히 10년 6개월 동안 갇혀진 후, 광화문 이순신 동상 거북선 등에 알몸으로 버려졌다. 2막에서는 무태천이 납치녀(임정은 역)를 찾아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군만두에 딸려왔던 젓가락 포장종이가 역할 하던 사람 찾기의 단서는 그가 감옥에서 사용하던 휴지의 감촉으로 대체되어 설명된다. 갇혀있던 10년 6개월 동안의 그의 생활은 모두 비디오로 촬영되어 시중에 유통되고 있고 그는 ‘이쪽’ 계열의 스타가 되어있다. 그가 감옥에서 홀로 읊조렸던 대사들이 광팬의 입을 통해 재생되고, 그가 인형과 나누었던 섹스 장면은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되어왔으며, 아내의 물품과 아이의 장난감들은 사업 품목으로 분리되어 판매를 기다리고 있다. 복수가 장사가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무태천의 분노와 혼란은 가중된다. 그런 그 앞에 애완용 인간을 데리고 다니는 납치녀가 유유히 등장했다 사라진다. 3막에서는 두 주인공 사이의 복수의 이유가 설명되고 자신의 옆 감옥에서 자위의 큐 사인으로 사용하곤 했던 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무태천의 아내의 것이었다는 것과, 지금 사육되고 있는 애완용 인간이 그의 아들임이 밝혀진다. 납치녀를 죽이려고 했던 무태천은 혼란 상황 중에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된다. 납치녀는 혼돈에 싸여있는 그만을 남겨두고 냉정하게 자결한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스스로를 다시 가두게 된다.
작품의 서사는 주제 의식과 코드를 동일하게 가져가는 전제 아래 지엽적인 각론을 변화시켜 나간다. 그 각론의 독창성을 확보하는 측면에 최치언의 재능이 엿보이며, 그 독창성을 유머와 독설로 풀어가는 표현력과 대사 구성력 역시 작품이 지닌 강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한 소재와 낯선 사건들을 엮어내는 최치언의 극적 논리성과 정리된 깊이감이 연극으로서의 <올드보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 ‘연극적인 맛’을 우려내는 데까지는 닿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작품들과 다르기는 하지만 분명 연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연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또 연극적인 맛을 생성해내기 위해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 것인가가 질문될 것이다.
3. 무엇이 연극적인가?-연극과 올드보이 사이의 거리
‘왜 그 서사가, 왜 그 모티프가 굳이 연극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답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무대화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극은 만들어 질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매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왜 이 연극이 영화화되어야 하는가, 왜 이 만화가 드라마화되어야 하는가에 부응하는 답안을 갖지 못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재미있는 대중 작품들 특히 대중극들이 탄생한다고 해도 그것이 연극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무대만의 매력 안으로 적극적으로 흡수되지 못할 때 그 범람하는 현상들 속에서 대중과 관객과 연극인들은 지칠 수밖에 없다. 작품을 매체 변이를 통해 변화시키는 데에는 물론 일종의 기획력과 수익 전략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획의 방향은 작품 밖에 있는 외재적 요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품 텍스트 스스로가 내발적으로 요청하는 것이어야 한다.
독방을 상징하는 단순한 무대 위에 침대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섹스인형, 그리고 객석을 향해 있는 좌변기가 있다. 700: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와 힘이 넘쳐나고 있고, 극의 분위기를 제대로 구현해주는 조명과 음향이 구현되고 있다. 열악한 무대 위에서 희곡을 성장시키고 해석해내 무던하게 그려냈던 연출이 있다. 그런데 이 연극이 진정한 ‘연극’ <올드보이>가 되어야만 했던 ‘당위’와 ‘진심’은 어디로 갔는가. 날로 독특해지고 광활해지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킬 당찬 재기와 탄성어린 감탄은 무엇에서 얻을 것인가. 그 연극화 과정의 어려움을 목도할 수 있는 것만큼, 그 노력과 고통의 폭을 짐작할 수 있는 것만큼 이 연극은 새로운 연극으로의 <올드보이>와 거리가 있다. 그 거리 위에 지쳐가는 우리의 올드보이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서있다.
이경숙․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4년 LG아트센터 ‘오늘의 젊은 연극 시리즈’ 연극비평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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