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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문화산책/함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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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연재】원작이 있는 영화 ⑨
길을 묻다
―탈주의 한 유형 분석
함종호|문학평론가
1.
인간은 직립 보행하면서부터 시각적 자극에 경도되기 시작했다는 프로이트의 지적은 비단 정신분석학에만 유용한 논의는 아니다. 문명의 발달과 시각적 자극의 강도는 서로 비례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 발달을 통한 다양한 시각적 매체의 등장은 바로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영화 장르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기’의 방식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영화야말로 고도의 기술 복제 시대에 걸맞은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풍경 묘사라든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 세계의 시각적 재현, 매혹적이거나 도발적인 섹시한 배우의 자태 등등은 그 특유의 동영상 이미지를 통해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예술 장르, 특히 문학은 어떠한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자리가 굳이 원작이 있는 영화를 논하는 자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학과 영화의 상관성에 대한 논의를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문학의 시각적 요소는 영화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거나 끼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임을 알 수 있다. 그리피스가 디킨스 소설에 등장하는 시각적 묘사 장면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나, 에이젠슈테인이 중국 한시나 일본 하이쿠에 영향을 받아 그의 몽타주 이론을 정립시켰다는 점 등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다. 즉, 허버트 리드의 표현을 빌린다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시각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텍스트인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과 이만희 감독의 영화 <삼포 가는 길>(1975)도 예외는 아니다. 원작 소설 「삼포 가는 길」은 시각적 장면 묘사가 특히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포 가는 길」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장면 묘사의 예를 한 가지 살펴보자.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 (중략) …… 그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영달이 쪽을 보면서 왔다. 그는 키가 훌쩍 크고 영달이는 작달막했다. 그는 팽팽하게 불러 오는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 느슨히 걸쳐 메고 머리에는 개털모자를 귀까지 가려 쓰고 있었다. 검게 물들인 야전잠바의 깃 속에 턱이 반나마 파묻혀서 누군지 쌍통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남겨놓고 서더니 털모자의 챙을 이마빡에 붙도록 척 올리면서 말했다.
위 인용문은 「삼포 가는 길」에서 영달과 정씨가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매우 시각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 묘사는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면 묘사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위 인용문을 보면, 먼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는 정씨’가 보인다. 이는 영달의 시선이다. 그 다음으로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영달’이 보인다. 이는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정씨의 시선이다. 영달과 정씨의 시선에 따라 장면이 교대로 바뀌면서 전개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은 영화에서의 교차 편집 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면에서 보이는 각각의 시선은 영화에서의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정씨의 어깨→모자→턱’으로의 시선 이동이 영화에서의 카메라 이동 방식을 연상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굳이 이 장면에서 문학과 영화의 시각적 묘사 방식의 차이를 말해보라 한다면, 그것은 문학은 독자의 마음에 이미지를 창조하는 방식을 취하는 데에 비해, 영화는 직접 스크린에 이미지(영상)를 투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정도의 차이를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뇌는 스크린이다’는 들뢰즈의 선언적인 명제를 떠올린다면, 창조된 이미지가 직접 스크린에 투사되느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비춰지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나 영화 모두 시각적 이미지의 창조와 전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우리는 「삼포 가는 길」이 취하고 있는 서술 방식의 특징에 대해 주목하였다. 그것은 「삼포 가는 길」이 시각성을 중심으로 서사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서사 전개 방식이 「삼포 가는 길」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이 작품이 여로형 소설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여로형 소설이란 말 그대로 사건의 발생과 해결이 길의 여정을 따라 전개되는 소설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여로형 소설에서는 사건의 발생과 해결이 전개되는 길 위의 풍경 묘사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이점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삼포 가는 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길’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도대체 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길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일 터이다.
영달과 정씨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뜨내기 인부이다. 겨울이 되어 그들이 일하던 공사장에 일이 없게 되자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궁리하며 길에 서 있다가, 고향 ‘삼포’로 떠나는 정씨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영달과 정씨가 일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인부라는 사실은, 길 위에서 그들의 삶이 펼쳐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바로 그 길은 그들의 삶을 이루는 장소이자 삶 그 자체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그들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의식도 없다. 당연히 그들의 삶은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 사회는 일정한 삶의 양식을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들과 같은 떠돌이의 삶은 사회가 요구하는 안정되고 정체된 삶의 양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양식에 균열을 가하고 있는 인물들인 셈이다.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 뻔한 그들 삶의 노정은 함박눈이 내리고, 바람이 회오리 기둥을 이루는 길의 풍경 묘사에서 십분 반영되고 있다. 배고픔과 매서운 추위가 그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기까지 한다. 가고자 하는 길이 이처럼 순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표면적으로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영달의 경우)이고, 고향에 한번 가보기 위해서(정씨의 경우)이다. 그러나 그들이 길을 나서는 진짜 이유는 영달의 경우 “어디로 향하겠다는 별 뾰족한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정씨의 경우 고향에 “그냥……. 나이 드니까, 가보구 싶어서”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냥’, ‘무작정’, ‘어찌 하다보니’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본래 길에는 두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하나는 일정하게 정해진 출발점과 도착지를 반복적으로 왕복하는 형식으로서의 길이다. 이러한 형태의 길은 정해진 출발점과 도착지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사이를 무미건조하게 왕복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일탈적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길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단지 연결하고 있다는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다시 말하면 수단으로서의 길, 도구로서의 길에 불과한 셈이다. 우리가 흔히 집과 직장을 오가며 영위하는 삶이 바로 이러한 길의 한 단면이다. 다른 하나는 떠돌이의 길이다. 떠돌이의 길은 정해진 출발점과 도착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떠돌이의 길에는 그 어떠한 목적의식이 없다. 단지 ‘그냥’, ‘무작정’, ‘어찌 하다 보니’ 가는 길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길이며, 새로운 방향성을 얼마든지 모색할 수 있는 길이다. 하여 이 길에는 여러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과 창조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 영달과 정씨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삶은 곧, 떠돌이의 삶이며 자유로운 삶이며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탈주 혹은 탈주선의 개념과 만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주(탈주선)의 개념을 이진경의 안내를 받아 여기서 빌려 쓴다면, 그것은 삶의 관성이나 타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선이고, 비록 언젠간 다시 새로운 목적 선분이 되고 말지라도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 선이며,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해체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고유한 자아를 해체하고는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탈주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도망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영달과 정씨가 떠돌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탈주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이 그 길에서 만나는 백화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떠돌이의 삶을 살고, 탈주의 길을 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작부 생활을 하던 식당에서 빠져나와 고향집에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녀가 고향에 정착해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영달은 백화를 가리켜 “얘네들은 긴 밤 자다가두 툭하면 내일 당장에라두 집에 갈 것처럼 말”한다고 하고, “저런 애들…… 한 사날두 시골 생활 못 배겨”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달은 백화가 고향에 정착하여 살 수 없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고향을 향한 백화의 여정을 으레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의 몇몇 행위들은 영달의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하다. 백화는 고향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특별히 하지 않았다. 여비도 없이 길을 나섰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더욱이 몇 번 고향에 가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그곳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도 영달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하는 요소이다. 영달의 짐작이 맞다면, 그녀는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이러한 길 떠남은 반복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그녀의 삶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다. 단지 억압된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 떠남이며 그래서 일종의 탈주인 셈이다. 특히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는 백화가 가고자 한 곳은 고향이 아닌 목포로 설정되어 있다. 그녀는 그 이유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한번쯤 가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목포에 가고자 하는 백화의 욕망에는 특별한 의미나 목적이 없다. 영화에서 백화는 고향이 아닌 목포를 가고자 한다는 점, 여기에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부재한다는 점은 그녀가 감행하는 탈주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킨다.
원작에서는 탈주선으로서의 길의 의미가 강조되었다면, 영화에서는 이를 토대로 각기 인물들이 벌이는 몇몇 특징적인 사건이 새로 추가, 삽입됨으로써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영화에서 삽입된 특징적인 사건이란, 첫째, 영달과 정씨가 백화를 만난 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상갓집에 들러 거짓 조문을 하는 장면, 둘째, 목포로 향하는 기차를 타지 않고 다시 감천에 남는 백화의 모습, 셋째, 정씨가 탄 버스가 ‘삼포’에 놓인 다리 위를 지나는 장면 등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영화에 삽입된 이러한 사건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첫 번째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자. 영달과 정씨, 그리고 백화는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상갓집에 조문을 가서는 거짓으로 울며 슬퍼하다가, 조문객에게 내주는 술을 먹고는 이내 이곳이 마치 축제 마당인 양 젓가락 장단에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상갓집에서 행한 이러한 행동은 우리네 관습, 규범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생의 종착지로서 의미 부여하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듯 여겨진다. 우리의 삶은 생(출발점)과 죽음(도착점)에 의해 특정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과 죽음 사이의 여러 과정에 의해 우리의 삶은 지칭되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수단으로서의 길, 도구로서의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길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탈주의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냥 슬퍼할 필요가 없다. 상갓집에서 벌이는 그들의 일탈 행위는 일종의 탈주를 의미한다. 그들은 장례 문화에 내재된 기존의 관성과 타성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상갓집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유롭다.
다음으로 영화에서 삽입된 두 번째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자. 본래 백화는 목포로 가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가서는 왜 목포로 향하지 않은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달과 백화가 전날 밤에 나눈 사랑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는 영화에 새로 추가된 내용으로, 영달과 백화 간의 심리적 긴장 상태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극 전체 서사가 추구하는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면이다. 영달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 후 백화는 영달과 함께 정착해서 사는 삶의 형태를 은근히 기대한다. 정씨 또한 그들의 정착을 옆에서 부추긴다. 그러나 영달은 백화를 떠나보낸다. 이는 아마도 정착해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거나 과거에 영달이 한번 정착 생활에 실패한 바가 있는데,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탈주의 삶이 주는 자유로움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라고 풀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실 영달은 여성 편력이 매우 심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의 대부분을 화류계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데에 허비하는 인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한 여인에게 정착하여 가족을 꾸리는 삶을 살 수 없는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영원히 떠돌이의 삶일 수밖에 없다. 백화 또한 영달의 이러한 모습을 결국 이해한 듯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목포로 향하지 않고 다시 감천역에 남는 이유는 목포가 아닌 다른 곳으로의 떠남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영달과의 재회를 소망한다면 그녀는 당연히 목포를 향해 떠나야 하며, 그곳에서 그를 기다려야 한다. 만약 영달이 그녀와 재회하기를 소망한다면, 그녀가 간 곳으로 알고 있는 목포로 그녀를 찾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 이는 그와의 재회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달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사랑은 또 하나의 억압과 강제에 불과한 것이다. 백화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사랑을 해체함으로써 탈주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결말 부분에서 정씨의 모습은 어떠한가? 정씨는 그토록 염원하던 고향 삼포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한적한 섬이 아니다. 그곳은 다리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관광 산업 육성 붐을 타고 개발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과연 그곳에 정씨는 안주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시나리오를 살펴보는 것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는 삭제된 내용이지만, 시나리오 상으로는 정씨는 그의 딸 ‘필순’을 만나기 위해 고향을 찾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교통 안내원으로 일하는 필순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서로 떨어져 지낸 10년이라는 세월이 그들의 가족을 해체시킨 것이다. 그는 이미 해체된 가족을 애써 다시 결속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억압의 굴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내 그는 삼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정씨의 떠남은 가족이라는 굴레의 억압으로부터의 탈주인 셈이다. 본래 그가 꿈꾸던 곳은 그 어떠한 억압과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래서 떠남이 자유롭고 떠남이 흘러넘치는 곳, 즉 ‘매끄러운 공간’으로서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가족이라는 굴레가, 다리로 상징되는 산업화, 근대화, 문명화의 억압과 구속이 존재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그가 ‘삼포’를 떠나는 이유이다. 비록 시나리오 상의 내용과는 달리 영화는 정씨가 고향을 찾는 이유와 이후에 다시 그가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직접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다리가 놓인 고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홈 패인 공간’으로 영토화된 고향의 모습을 가늠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사실 순수한 의미로서의 ‘매끄러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고, 이들 사이에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과정만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원작에서 정씨의 고향을 허구의 공간, 가상의 공간인 ‘삼포’로 설정한 이유가.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새로 삽입된 세 가지 사건은 탈주를 감행하는 인물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서사 장치인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탈주의 모습은 관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사랑을 해체하거나 ‘매끄러운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탈주의 모습은 변화 가능성, 새로운 창조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현실 세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주 행위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모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 모습이 폭로되며, 이를 통해 사회에 균열이 가해지기도 한다. 기존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모습은 은밀히 감추어진 비밀스런 것이다. 그러나 탈주하고자 하는 자는 세계의 숨겨진 비밀을 지각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고 저항하는 자이다. 물론 그들은 소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이들 소수를 그 특유의 이분법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무가치한 사람들인 양 치부한다. 가령, 정착하는 삶이 탈주의 삶보다 안정되고 가치 있다고 조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회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드러내는 것일까?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영달의 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영화에서 영달은 한때 정착하여 살았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약장사를 하면서 살았었는데, 가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가 쥐약을 먹고 죽음으로써 그는 떠돌이의 삶, 탈주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듯 영화에서 영달이 털어놓는 과거 자신에 대한 비밀은 근대화, 산업화,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 사회로부터 소외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획일화된 한 가지의 삶을 강요하고, 정착과 안락을 강조하는 사회가 지닌 부정적 모습에 대한 폭로로 기능할 때, 그의 탈주는 사회의 균열을 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백화가 폭로하는 비밀은 자신의 본명과 관련된 것으로써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이와 관련된 장면은 매우 중요하게 처리되고 있다. 백화의 본명은 이점례이다.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본명을 그녀는 왜 영달과 정씨에게 밝히는 것일까? 백화가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들이 자신에게 보인 선의에 대한 보답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백화를 잡아오면 만원을 주겠다는 서울식당 주인의 제안을 외면했다. 당시 만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욱이 그들은 눈이 날리는 추운 겨울 길을 걷는 그녀를 부축해가며 그녀의 도피를 도와주기까지 했으며, 없는 돈을 털어 그녀의 차표를 끊어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사실 백화라는 이름은 시골 식당에서 작부로 일하던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녀는 냉수 떠놓고 백일기도 드리면 백화, 즉 작부인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부 생활을 하면서 여덟 명의 옥바라지를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이를 ‘순정’이라고 명명한다. 이를 통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본명, 즉 이점례라는 이름에 가치 부여한 의미는 ‘순수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자신에게 보인 선의는 곧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으므로 거기에 대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 또한 순수한 모습으로, 즉 백화가 아닌 이점례의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백화가 자신의 본명을 밝힌 이유를 영달과 정씨가 보인 선의에 대한 보답의 표현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맥락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한 가지 남는다. 왜 하필이면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들이 보인 순수한 선의에 대한 보답이었다면, 본명을 밝히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름과 관련된 의미 발생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이름이 어떻게 의미를 발생시키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실증주의 의미론의 관점이다. 실증주의 의미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름 불려진 대상은 명명행위를 통한 지시작용에 의해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실증주의 의미론은 개별화가 전제될 때 명명행위를 통한 지시작용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인 실체가 없거나, 백화의 경우처럼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실증주의 의미론으로의 접근은 한계에 봉착한다. 식당 작부로서의 ‘백화’란 이름과 순정 있는 여자로서의 ‘점례’라는 이름 사이에 백화의 존재가 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타인과 어떤 관계에 놓이느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백화의 이름은 그러므로 주체 상관적인 측면에서 선험적으로 의미가 발생한다고 보는 현상학적 의미론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다. 백화의 이름이 나누어지는 현상은 오히려 그녀가 맺고 있는 관계 양상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의미론에 더 가깝고, 이들 차이에 의해 명명되는 이름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지을 수 없다(차이에 의해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그것에 값하는 수많은 이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비결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시뮬라크르적이다. 그러므로 백화의 존재는 작부로서의 ‘백화’와 순정 있는 여자로서의 ‘점례’ 사이 어딘가에 놓인다. 우리는 앞서 길의 의미를 살펴본 바 있으며, 그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떠돌이의 길, 즉 탈주로서의 길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길은 정해진 출발지와 도착지가 없어서 자유로우며 또한 변화와 생성의 차원이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이때 그 길의 의미는 출발지 혹은 도착지가 무엇이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의 의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사이에 놓이며, 그래서 그 길의 의미는 다양하고 비결정론적이었다. 백화라는 존재가 작부로서의 ‘백화’와 순정 있는 여자로서의 ‘점례’ 사이에 놓인다는 점은 곧 그녀의 존재는 탈주자의 그것으로 이미 운명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의 이중성, 혹은 존재의 이중성은 탈영토화의 이중성을 지칭하며, 이것은 탈주의 또 다른 얼굴을 구성한다. 정착이 한 가지 삶의 유형을 고수하는 것이고, 정착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우리를 획일화된 어떤 특정 가치에 귀속시키려 강제한다면, 탈주의 삶 혹은 탈영토화의 삶은 이중적인 삶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고, 획일화된 특정 가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자신의 비밀, 곧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행위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이중적인 탈영토화, 탈주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백화가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려진다면, 반면에 정씨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니 숨기고 있다. 이는 사회가 자신의 부정적 모습을 은폐하고 감추어 비밀을 양산하는 매커니즘을 닮아 있다. 그러나 그가 찾아간 고향은 어떠한가. 근대화, 산업화, 문명화에 의해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가 숨기고 있는 이름은 곧 그가 염원하는 고향의 부정성을 암시한다. 자신의 이름을 숨김으로써 현실 세계의 부정성을 암시한다는 것은 영달과 백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탈영토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원작 소설 「삼포 가는 길」과 영화 <삼포 가는 길>은 떠돌이의 삶이 싫어 정착하고자 하나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근대화, 산업화, 문명화에 의해 야기된 이상적인 고향의 상실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이러한 결론은 지극히 표면적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주제에 불과하며,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 이야기의 근원에는 탈주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놓이며, 사회에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소외된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놓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탈주를 그 어떠한 억압과 강제로부터 벗어나 변화와 생성을 지향하는 특정 행위라 할 때, 그들의 탈주 행위는 이 사회의 부정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변화와 생성을 모색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삶의 형식을 쉽사리 선택하거나 권할 수는 없다. 여전히 이들은 소수자에 해당하며, 그래서 사회에서는 이들을 무가치한 인물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은 이렇게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통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거기에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탈주를 감행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며, 그리고 예술 작품에 대해 뭔가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려는 해석 행위 또한 탈주를 감행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탈주를 통해 예술은 수많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으며, 이것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함종호․
1970년 출생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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