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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서평/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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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인환 평론집 말의 매혹:일상의 빛을 찾다
■김형중 평론집 변장한 유토피아
위기에 대응하는 비평의 언어
임영봉|문학평론가
1. 90년대 ‘이후’의 비평사적 의미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면, 비평 장르의 경우 그 변화의 양상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질문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우리 시대 비평의 성격과 운명은 정해진 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시기에 씌어진 논쟁적 평문들을 다시금 모조리 독파하라는 누군가의 대답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의 질문은 시나 소설 같은 장르를 염두에 둘 때 비평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의 구체적 내용이 아직 체계적인 방식으로 설명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점을 수긍한다면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질 수밖에 없고 그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비평 장르의 특수성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비평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운명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판단 행위와는 별도로, 자신의 비평 행위에 대한 평가 문제 또한 자기 몫으로 삼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비평에 대한 비평’의 형식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고인환과 김형중이라는 두 명의 젊은 비평가가 펴낸 평론집은 그런 생각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고인환과 김형중을 포함하여 지금 평단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다수의 젊은 비평가들의 존재는, 나에게 우리 비평의 전개 과정이 ‘비평사적 시각’의 개입을 요청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느낌 또한 갖게 만들었다. 90년대 이후 비평 쪽의 변화는 다른 장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비평 주체의 대두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30대 초반에서 40대에 걸쳐 있는 비평가들이 2000년대 평단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90년대 이후 비평의 변화를 문제 삼는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당연히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대폭적인 세대교체 현상의 내면에 대한 탐구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
90년대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의 비평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의 내면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해명하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90년대 이후의 비평가들과 그들의 비평행위가 자신을 지탱하는 이념과 방법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회의,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확정성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회의하는 정신’은 그 강도에 관계없이 90년대 이후의 비평을 규정하는 공통의 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90년대 이후 비평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런 회의적 의식의 발현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성찰’의 과정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만약 그 성찰이 새로운 비평의 형성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나름의 비평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90년대 이후 비평의 주체로 등장한 젊은 비평가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문화에 대응하는 정신의 담지자, 90년대 ‘이후’가 의미하는 ‘새로움’과 대화하는 방식을 갖추고 있는 존재들이다. 물론 그들 세대 비평가의 정체성과 비평 행위 자체를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감수성과 취향체계, 인식 논리와 지식소들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요청된다.
2. 불편하고 불순한 비평가의 내면
―고인환의 말의 매혹:일상의 빛을 찾다(문학과경계, 2005)
고인환의 두 번째 평론집 말의 매혹:일상의 빛을 찾다는 90년대 이후 비평의 근거와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경우이다. 일단, 고인환 비평은 90년대 이후를 사유하는 민감한 문제의식의 담지로부터 우리 시대 비평의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머리말’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작품 속으로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근대의 메카니즘에 순응하면서도 짐짓 문학의 논리로 이를 거부하려는 포즈를 취해온 것은 아닌가? 새삼스럽게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불쑥 솟아오르곤 한다. 이 책에는 근대적 일상과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불편한 내면이 진솔하게 반영되어있다. 이 불순한 내면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책머리에」) 이 고백은 비평가로서 그가 서 있는 현재적 좌표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불편’하면서 ‘불순’하기까지 한 내면에 함축되어있는 모종의 불화 의식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비평가 자신의 내면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소지는 ‘근대적 메카니즘’에 대한 인식과 ‘문학의 논리’ 사이의 갈등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평가의 ‘자의식’이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비평가 자신의 추구, 즉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새삼스런 질문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비평가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더 이상 ‘근대(현대)문학’이라는 단일개념의 통합체가 아니다. ‘근대’와 ‘문학’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 대하여 각각 다시 사유해야만 하는 상황, 그것은 비평가 고인환의 비평적 실천을 추동하는 위기의식의 핵심이다.
근대성,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북한문학을 쟁점으로 삼고 있는 <1부>의 글들은 그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구한다. 「1990년대 이후 서사의 자의식」은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고인환의 비판적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경우이다. 그는 90년대 ‘유희적인 주체’의 등장과 ‘새로움’의 신화가 과장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대중문화 혹은 상품 미학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는 미적 자율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주지하듯, 문학의 자율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율성임과 동시에 근대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자의식을 함축한다. 문학의 자율성 테제가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1990년대 들어 소설 장르에 대한 미학적 자의식이 중심 화두로 부각된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문학이 정치와 독립된 영역으로 분화되어 ‘문학의 문학주의화’라는 자의식을 심화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14쪽)
그의 판단에 의하면, 90년대 문학의 공허함은 미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문학주의의 결과이고 그 배경에는 압도적인 자본의 논리가 놓여있다. 여기서 고인환이 추구하는 것은 90년대의 문학주의와 80년대의 이념주의를 동시에 극복한 차원의, ‘근대를 넘어선 근대, 이성을 넘어선 이성’의 문학에 대한 가능성으로 제시되고 있다. “근대 사회는 우리가 부정/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보듬고 살아가야 할 구체적 실존의 장이다. 문학은 여전히 왜곡된 근대의 논리에 맞서 세계를 문학적으로 전이시킬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33쪽) 그는 김소진과 성석제, 하성란을 통해 그 가능성을 읽어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고인환의 문제의식은 「고통 부재의 시대, 고통의 세 변주」에서도 반복된다. 정이현과 천운영의 최근작은 서술이나 묘사의 기법 등 미학의 측면에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그려낸 삶의 내용은 ‘진부’(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하거나 ‘관념적’(천운영의 명랑)이다. 비평가의 호감을 사고 있는 윤성희의 거기, 당신?의 경우에도 ‘재구성의 의지’ 부족이라는 작가의 전망 결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고인환은 9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글쓰기의 모험, 해체 강박이 낳은 ‘새로움’의 측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의 판단에 따르자면, 그들 작가의 글쓰기는, 나쁜 의미에서 현실을 너무 앞질러감으로써 삶의 진실을 온전하게 그려내는 데 있어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체 강박과 파편화된 체험에 지배되는 우리 시대 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지고 있는 비평가 자신의 내면은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이미 재현의 위기를 불러올 만큼 복잡 비대해져 버렸고 그 앞에서 전통적 리얼리즘은 소멸될 처지에 놓여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재현의 위기와 탈식민주의 리얼리즘의 한 양상」이 드러내고 있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적 대안에 대한 그의 고민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인데 여기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미학적 대안은 ‘탈식민주의 리얼리즘’이다. 그의 탈식민주의 리얼리즘 논의는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이문구의 관촌수필이라는 구체적인 작품 읽기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꼼꼼한 작품 분석과정을 통해 그는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근대성의 자기고양 전략을 체현하는 동시에, 서구 중심의 근대 담론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문화와 전통문화 혹은 근대성의 수용과 거부 사이의 틈새에서 새로운 연결점을 모색하는 탈식민주의 리얼리즘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75쪽)임을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평가로서 고인환의 문제의식을 다시 떠올릴 때 「생태주의 문학논의의 심화와 확장을 위하여」에서 생태주의 문학론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관심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다. 근대 비판적인 생태담론의 대안적 의미는 그가 꿈꾸는 ‘근대를 넘어선 근대, 이성을 넘어선 이성’의 문학적 이념형에 접근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2부>는 작가/작품론이다. 이명랑과 이인화에 대한 작가론을 비롯하여 강순희의 백합편지, 이인휘의 내 생의 적들,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그리고 심윤경․박정요․방현희의 단편을 각각 문제 삼고 있는 이 글들은 비평가로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일층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한 작가나 작품을 읽어나가는 하나의 척도로서 ‘서사성’을 자주 거론하고 있다. 소설이란 ‘서사’를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이기에 그는 ‘서사성의 약화’에 대하여 ‘서사성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동시대의 젊은 작가 ‘이명랑’은 서사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비평가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때 고인환의 글쓰기는 ‘불안한 내면’에서 벗어나 유려해지기 시작한다. 소설문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는 ‘성석제’에 이르러 그의 글쓰기는 생동감에 넘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 유려함과 생동감은 언제든지 ‘불편한 내면’으로 바뀔 수 있는 운명의 것으로 나타난다. 서사를 위태롭게 하는 재현의 위기와 해체에의 강박관념에 우리 모두가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론에 해당하는 <제3부>의 내용은 나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시를 다룬 그의 글을 처음으로 읽고(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가 시 장르에 대해서도 친숙하다는 사실을 새로이 확인하게 되었다. 작가와 소설작품을 다룰 때와는 다르게, 시를 대상으로 한 그 글들 속에서 비평가의 내면은 비로소 ‘평화’를 되찾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를 대상으로 삼을 때 그의 글쓰기를 견인하는 사유와 문체는 훨씬 자유롭고도 유연해진다. <2부>에 함께 묶여있는 다른 글들에 대하여 작가 강순희와 이인휘를 다루고 있는 글의 독특한 뉘앙스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비평가로서 고인환이 지향하고 있는 이념과 방법은 매우 중립적이면서 중도적인 성격의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비평적 글쓰기는 과거와 미래, 전통과 새로움이라는 중간지대에 서있다. 그가 선 자리는 운명적으로 회색빛일 수밖에 없는 성격의 ‘현재적 시점’이고 거기서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위해 양쪽으로 열려있는 두 세계와 싸우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후로도 그의 글쓰기는 내면의 ‘불편함’과 ‘불순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그 ‘불편함’과 ‘불순함’이란 그만의 몫이 아니지 않은가. 실은, 지금 우리 모두가 그것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3. 비관적인, 그러나 유쾌한 비평가의 내면
―김형중의 변장한 유토피아(랜덤하우스중앙, 2006)
김형중의 두 번째 평론집 변장한 유토피아는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 평단에서 ‘확고한’ 개성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 비평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김형중’이라는 젊은 비평가의 대두는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에 대응하는 ‘회의적인 정신’의 한 가지 도달점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90년대 ‘이후’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나름의 청산을 끝낸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창살 안에 갇힌, 그러나 갇혀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와는 상관없는 어떤 상태를 지시하고자 온갖 애를 다 쓰는 유토피아, 그것이 내겐 문학이다. 비관을 경계하고 낙관적 전망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이 창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저자 서문」)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지금, 여기’의 문학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저자 서문」에서부터 김형중은 동시대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의 선언에 따르자면, 우리 시대의 “예술은 위험성을 거세당한 채로 비참하게만 자연 자체, 곧 등가 교환 이전 상태의 낙원을 지시”하는 ‘변장한 유토피아’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궁극적으로 문학이라는 언어 예술의 운명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무엇보다 ‘자연 그 자체’가 아닌 것, 불투명성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는 대상으로 확증되고 있다. 물론 문학에 대한 이와 같은 김형중의 사유 방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그 생각들은 아도르노 류의 비판적 근대 사회/문화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더니즘 문학론에 포섭되는 성질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평가 개인의 차원을 염두에 둘 때 문학의 가치와 기능에 대한 성찰의 결과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의 생각이 개인의 입장에 머물지 않고 ‘문학에 대한 재인식’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쟁적 성격을 가진 <1부>의 글들은 비평가 김형중의 근본적 문제의식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그가 겨누고 있는 비판의 과녁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그가 견지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핵심은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의 ‘리얼리즘 비판’에 요약되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최근의 리얼리즘 재구축 논의에 대하여 ‘리얼리즘의 자기 갱신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확고한 판단을 제시한다. 특히, 최원식과 방민호의 리얼리즘-모더니즘 ‘회통론’에 대해서는 ‘전혀 종합 불가능한 두 개의 패러다임’ 혹은 ‘화해 불가능한 두 인식론’의 산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리얼리즘의 가능성이란 ‘유보’와 ‘폐기’를 의미할 뿐이다. 그는 리얼리즘이 ‘낡았다’는 것을 몇 개의 주석을 통해 ‘가볍게’ 증명해 보인다.
‘경향적’으로라도 관철될 거라고 믿었던 역사의 합법칙성을 신뢰할 수 없는 없게 되어버린 시대에 ‘전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 범주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기 힘들다. 기존의 리얼리즘에서 전형이란 ‘법칙의 구현체’가 아니었던가? 법칙이 사라진 자리에서(최소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게 된 상황에서), 더더군다나 그 법칙을 통해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더 묘연해지는 판국에, 어떤 인물이 전형적인지 감식해내기는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지금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고자 하는 문학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도덕이, 그 ‘한줌의 도덕’은 바로 ‘당대성’이다. 누가 전형적인 인물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누가 당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지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좌우명을 떠올리는 것도 좋겠다. “좋은 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25-26쪽)
리얼리즘의 미학적 원리인 총체성과 전형성을 대신하여 그는 ‘당대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기준을 제시하면서 젊은 작가들을 호명한다. 리얼리즘에 대해 그가 내리고 있는 비판적 결론은 “만약 ‘아직도’ 리얼리즘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쳐서 자주 당대적 현실로부터 도주하는 관성적 글쓰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이다.”라는 것이다. 김형중의 리얼리즘 비판은 많은 대목에서 수긍될 수 있지만 리얼리즘 이후의 문학(그에게서 리얼리즘은 실질적으로 이미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한국 문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젊은 작가들의 존재를 정도 이상으로 특권화하는 시각은 쟁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는 김형중의 주장은 계속해서 「민족문학의 결여, 리얼리즘의 결여」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대한 백낙청의 독법 역시 낡은 리얼리즘의 고수가 문제의 근원임을 비판한다. 그는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리얼리즘으로 읽어낼 수 있는 서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배수아 소설에 대해서는 세계의 ‘재현’이나 ‘반영’에 근거한 환원론적 해석이 불가능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판단에 따르자면 배수아를 비롯하여 하성란, 김연수, 김영하 등의 젊은 작가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서사의 해체를 통한 선험적이면서 존재론적인 의미의 ‘결핍’ 의식일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이러한 ‘결핍’의 양상은 「진정할 수 없는 시대, 소설의 진정성」에서 프로이트적 진단에 의거하여 ‘아이러니’(의심하는 자아), ‘편집증’(왜소해진 주체의 허풍), ‘알레고리’(사라진 경험)라는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부여받음으로써 그 자신의 내면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업둥이들의 과잉/과소 낙원」과 「소설의 제국주의, 혹은 ‘미친, 새로운’ 소설들에 대한 사례보고」는 김형중 비평이 아도르노의 사회/문화 이론과 더불어 ‘프로이트 심리학’을 자신의 방법론적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글들에서 그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반복하여 드러내는데 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들 작가는 ‘분열된 주체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이다. 쟁점적인 것은, 특히 후자의 글에서 몇 명의 신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존재가 90년대 이후 문학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그의 시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화의 논리는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는 그들 작가의 대두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90년대 이후 문학의 ‘새로움’이 “자본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부르조아 모더니티에 맞서 스스로 존재 방식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미적 모더니티의 전략이기도”(99쪽) 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대목에서도 그가 제시하고 있는 ‘부르조아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의 개념과 그 구별은 매우 추상적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성적인 체계에 대한 ‘해체와 부정’으로 설명되는 ‘한정된’ 신인 작가들의 글쓰기를 새로운 문학으로 특권화하면서 적극적인 선양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김형중 비평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은 <제2부>의 작가/작품론이다. 천운영의 바늘을 다룬 「Vagina Dentata:씹어 먹는 자궁」같은 글들은 그가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감수성과 논리적 인식 능력, 그리고 개성적 표현이라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변장한 유토피아에서 우리 시대와 문학에 대해 그가 보여주고 있는 머뭇거림 없는 판단은 진짜 쿨(!)하다. 그의 글쓰기는 우리 시대와 문학에 대한 비평가의 유쾌한 냉소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러나 그의 머뭇거림 없는 판단과 유쾌한 냉소는 때때로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곤 한다. 그때 그는 너무 쉽게 자신을 확증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비평가 김형중에게 있어서는 스승과도 같은 아도르노의 한 줌의 도덕에서 한 구절을 빌려오는 것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기대와 우려를 대신하고자 한다. “사유가 제약 없는 것을 위해 자신의 제약성을 열정적으로 부정하려 들면 들수록, 사유는 자신도 모르는 채, 좀더 치명적으로 세상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가능성’을 위해 사유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파악해야만 한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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