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2호 서평/하상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748회 작성일 08-02-29 02:53

본문

|서평|


■우대식 평전 󰡔죽은 시인들의 사회󰡕




시의 열정으로 충만한 죽음의 영원성

하상일|문학평론가


우대식의 󰡔죽은 시인들의 사회󰡕는 가슴속 깊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시를 간직하고 살았던 열정적인 시인들의 절절한 삶을 새겨놓은 장엄한 비문처럼 읽힌다. 비문에 새겨진 기록들과 죽은 시인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지인들의 증언 속에는 말 못할 슬픔과 상처들이 가득히 묻어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에 다시 새순이 피어오르고, 이제는 만개한 꽃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내면에는 시의 영원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대식의 글은 죽음의 흔적을 따라가는 애잔한 여행기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삶의 열정을 찾아가는 영원성의 길을 지향하고 있다. 죽음을 일컬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래서 죽음 또한 삶의 연속이요 축제로 인식했던 천상병 시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듯하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명의 시인들은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의 열정을 죽음으로 대신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죽음을 따라가는 길이 결코 슬프지만은 않고, 오히려 즐거운 축제를 떠나는 것 같은 설렘임을 느끼게도 한다. 그 동안 ‘죽음’ 혹은 ‘요절’은 우리 시단에 의미심장한 메시지와 울림을 주는 중요한 제재 가운데 하나였다.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우상이요 상징이었던 기형도의 죽음에서부터 진이정, 이연주 등으로 이어진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의 시를 온갖 의혹과 신비로 읽도록 만들었고, 이러한 신비감으로 인해 죽음을 내면의 풍경으로 자기화하려는 유행적 태도가 젊은 시인들의 감각을 오랫동안 지배하기도 했다.
죽음도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지난 90년대를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일까? 애초에 필자는 우대식의 글 역시 이러한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완고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딴지걸기 좋아하는 평론가의 기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전국을 떠돌며 추적한 죽은 시인들의 사회는 오히려 이러한 유행으로부터 한 발 비껴서 있는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들은, 기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당대 문단의 중심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모퉁이를 스치고 지나간 어느 낯선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대식이 다시 조명한 시인들, 즉 김민부․임홍재․송유하․김용직․김만옥․이경록․박석수․원희석 등은 생전의 그 천재적인 시의 열정과 기질에 비해서 너무도 초라한 자리에 머물다 갔던 시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죽음은 더더욱 허무한 풍경으로 오래도록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은 시인의 삶 한 가운데 유기적으로 머무는 원형질이요, 시인의 의식을 벼리는 가장 민감한 촉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유독 시인은 죽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죽음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역설적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대식의 글은 요절한 시인들의 행적을 통해 시와 시인의 본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시의 본질과 시인의 운명을 찾아내고자 한다.

시인에게 죽음이란 물리적 의미를 넘어 의식의 문제라는 것은 새삼 되물을 필요가 없을 터이다. 초월이라는 시의 양식적 특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이 죽음을 몽상하게 한다. 특히, 요절이란 물리적 죽음과 의식의 죽음이 한 지점에서 만나 불꽃처럼 타오르다 소멸해간 흔적이라는 것이 내 개인의 생각이다. 그 소멸의 흔적을 마주했을 때 어떤 통일적 인상을 느끼게 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의 모든 촉수들이 죽음이라는 물가로 그 뿌리를 아주 서서히 어느 순간 급속히 뻗어가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두렵고도 황홀한 일이기도 했다.(6~7쪽)

죽음을 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한 시인들, 시의 초월성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죽음을 몽상한 시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물리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이 불꽃처럼 한데 타오르다 서서히 소멸해간 흔적이라는 점에서 아주 공통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遭遇)한다”면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처럼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서시」)고 김민부 시인은 고백하였다. 이처럼 요절한 시인들에게 죽음은 어느 날의 일상적 풍경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의 곁으로 다가오는 소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대식은 이러한 소멸의 풍경을 두렵고도 황홀한 감정의 대위 속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상정된 시간 속으로 진행되는 시에 이르는 병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생의 본질이라는 믿음”(55쪽)을 비로소 이해하게 한다. 생전의 임홍재 시인이 송수권 시인에게 보낸 편지는 이를 절절히 토로하고 있으며, 짧은 생을 가난과 병으로 마감한 시인의 영원성을 발견하게 한다. 그의 말대로 “가난하지 않고, 환경이 좋으며 축복만 받은 인간이라면 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므로, “끝없는 병, 이 병을 앓으며 사노라면 나중에 마지막 빛나는 언어, 모국어 몇 개의 어휘도 남을 것”(55쪽)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또 다른 삶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대식은 “요절한 시인들을 찾아다니며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사실은 바로 그들 하나하나가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82쪽) 사실을 무엇보다도 주목하였다. 생전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시작 활동을 펼쳤던 시인들, 그래서 주변의 문인들로부터 천재적 시인으로 평가받았던 그들의 공통된 면모를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운 것이다. 너무도 일찍 존재론적 깊이와 넓이를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적 순수의 경지에서 길어 올린 청신한 감각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용서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까? 그들 모두는 이러한 의문들을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남긴 채 천재적 시인의 광기를 포기하고 서둘러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아니 죽음도 삶의 길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죽음은 평범한 우리들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시인 이경록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인은 죽어서 부를 노래를 생전에 지어 부르는 아주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이 뇌수의 물이 마르면, 사고도
모든 상상력의 힘도 내게서 사라질 것이다.
말 잘 듣던 신경도 자랑스럽던 햇살도
흙 속으로 스며 축축한 수분으로 변하고,
마침내 메마른 뼈들만 남아서 덜그럭거리며
노래 부르리라.
나는 왔다. 세상의 끝엔 아무것도 없다고.
―「死後」 부분

죽음 이후의 삶을 통찰하는 시인의 예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섬뜩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자리에 서있는 시인의 모습은 견자(見者)에 다름 아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세상의 끝엔 아무것도 없다고”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의 초월과 자유는 강렬하기만 하다. 그 깊은 역설 속에 내재된 시적 진정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범박한 필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들이 추구한 길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삶과 시를 조심스레 들여다볼 따름이다. 우대식의 글은 이러한 소통의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주는 지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만든 지도를 펼쳐놓고 시의 열정으로 충만했던 견자의 길을 머뭇머뭇 따라가고 있을 따름이다.
우대식은 서문을 대신한 글에서 이 글에 대해 “평론 스타일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굳게 못을 박고 출발했다. 따라서 여기에 수록된 아홉 편의 글은 전통적인 평론의 발상과 어법으로부터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글의 성격을 말하자면 ‘죽음’을 제재로 한 일종의 전기적 비평, 즉 평전의 성격을 지닌다. 주지하다시피 평전은 평론과 전기문의 특성을 혼합한 비평으로서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글 역시 비록 비평을 거부하는 자리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비평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들어 ‘비평가도 안 읽는 비평’이란 자조적인 말들이 평단을 휩싸고 있고,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기본적인 비평의 기능마저 외면한 채 아주 특별한(?) 이론 탐구와 분석에만 골몰하는 비평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점점 자기만의 고고한 성을 쌓기에 급급한 비평의 권력화 현상을 염두에 둘 때, 우대식의 글은 비평 대중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의미 있는 비평적 글쓰기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죽은 시인들의 사회󰡕는 최근에 출간된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과 더불어 근래 보기 드문 대중적 비평의 성과이며, 우리 비평이 독자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상일․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추천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