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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서평/오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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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수영 소설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
불행의 현상학
오양진|문학평론가
1.
한수영은 지난 2002년 단편 「나비」로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온 신인작가이다. 그러나 그녀는 짧은 문학적 이력에도 불구하고 2004년에 장편소설 공허의 1/4로 제2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작가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등단작을 포함해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그녀의 나무 핑궈리(민음사, 2006)라는 첫 창작집에 우리가 주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난 3년간 작가 한수영이 지속적으로 천착해 온 문제는 간단히 말하면 우리 생을 좌초시키는 불행의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이번 창작집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처럼 우리들 생의 항로에 불쑥 끼어드는, 불행이라는 암초의 문제이다. 한수영은 그녀의 나무 핑궈리에서 그 ‘불행’이라는 인생의 암초를 다각도로 탐구하고 있다.
2.
「나비」에는 엄마와 그 엄마의 초등학생 딸인 ‘나’가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일 뿐이고, 주로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비」의 주인공은 엄마라고 할 수 있다. 엄마는 갈빗집 주방에서 일하며 초등학교 4학년인 ‘나’를 홀로 키우며 살고 있다. 엄마는 현재 ‘낭미충’으로 인해 ‘나’가 “검은 나비”라고 부르는 뇌종양을 앓고 있으며, 종종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킨다. 엄마의 병은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훔쳐온 핏물 밴 돼지고기를 날 것으로 먹은 탓이었다. 생 비곗살 깊숙이 박혀 있던 기생충이 엄마의 머릿속에 알을 낳았던 것이다. 술만 마시면 무엇이든 던지는 외할아버지는 동네 저수지에 빠져 자살했고, 외할머니는 늘 가난했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늘 도둑질을 하였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엄마는 염색공장을 다니다가 아빠를 만나 한때는 행복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의 몸속에 ‘나’를 심어놓고 이승을 떠났다. 가난했던 아빠는 엄마의 머릿속에 있는 병을 고치기 위해 벌목 일을 시작했다가 커다란 삼나무에 깔려 스물넷에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당뇨병 환자인 외할머니를 외삼촌이 업고 왔다. 십오 년 만에 만난 딸에게 외할머니가 처음 한 말은 “이 독사 같은 년아.”였다. 그 후로 외삼촌은 정기적으로 나타나 엄마에게서 돈을 뜯어간다. 엄마는 매일 술을 마시고 그 술은 모두 엄마의 눈물이 되어 나온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하루 종일 꽃 그림만 그리는데, 엄마 머릿속의 “검은 나비”를 불러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 머릿속 ‘검은 나비’는 일단 질병에 붙여진 은유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것은 인생을 괴로움과 슬픔에 처하도록 만드는 모든 ‘불행’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실 엄마의 질병이라는 불행은 “외할머니가 훔쳐온 핏물 밴 날고기”를 허겁지겁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이라는 불행을 원인으로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엄마는 가난으로 인해 얻은 질병 때문에 한때 인생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을 사고로 잃게 된다. 아빠가 엄마의 병을 고치겠다고 위험한 벌목 일을 시작했다가 죽은 것인데, 이번에는 질병이라는 불행이 원인이 되어 사고라는 또 다른 불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가난’이 ‘질병’으로, 또 ‘질병’이 ‘사고’로 이어졌던 한 여자의 인생은 여전히 불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마의 인생은 지금도 당뇨병 환자인 외할머니와 수시로 돈을 뜯어가는 외삼촌 때문에 술과 눈물로 흐른다.
이처럼 「나비」는 엄마가 겪어 온 사슬처럼 연결된 불행을 보여줌으로써 불행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말하는 작품이다. 즉 이 소설은 가난이라는 것을 모든 불행의 원천으로 지목한다. 나아가 이 소설은 엄마의 불운한 인생을 통해서 불행이 어떻게 오는가 하는 점도 보여준다. 말하자면 외삼촌이 업고 온 외할머니가 암시하는 것처럼, 불행은 혼자서 오지 않고, 또 다른 불행을 업고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나비」는 불행을 “불쑥 나타나 돈을 뜯어가는 외삼촌”과 같다고 말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구리 연」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부부이다. 꽃 피는 봄날, 맨홀 속에서 전화회선을 새로 가설하고 증설하는 일을 하던 남자는 바로 그 맨홀 앞 꽃가게 점원이었던 ‘여자’를 만났다. 결혼한 두 사람은 구리선처럼 등황색의 배냇머리를 한 아이까지 낳고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를 태운 트럭이 사고로 뒤집어져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는 죽어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남의 아이를 데려오다가, 결국 도박이라는 병에 빠져들게 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정하고 뺨을 때리고 면도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들이밀었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후 남자는 멀리 지방에 있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여자는 며칠째 집을 비우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
십오일 만에 집에 돌아온 남자는 마침내 탄광촌에 자리 잡은 카지노에서 머리칼이 엉겨 붙었고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던 여자를 찾아낸다. 여자는 아이의 죽음을 잊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했던 것이다. 남자는 구리 연을 만들며 어두운 “갱도의 끝”일 거라고 찾아간 그곳에서 끝내 여자로부터 외면당한다. 남자는 자신을 뿌리치는 여자를 쫓아가 결국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인다. 탄진처럼 진눈깨비가 날리는 밤이었다. 남자는 그 옛날 여자를 처음 만났던 꽃가게를 찾아가 그 앞 맨홀 속으로 들어간다. 소주병과 완성되지 못한 구리 연이 유일한 동반자다. 남자는 팔을 뻗어 맨홀 뚜껑을 끌어당겨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둔다. 그리고 남자는 그동안 만들어온 구리 연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서서히 얼어 죽어간다.
이 소설에도 인생을 괴로움과 슬픔에 젖게 만드는 참담한 ‘불행’이 있다. 아이가 사고로 죽자, 여자는 도박에 빠지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죽이고 자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의 죽음을 가져온 교통사고와 아내가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빠져든 도박이라는 정신적 질병은 「나비」라는 앞선 작품에서처럼 동일하게 ‘불행의 사슬’로 묶인다. 다만 여기서는 사고로 인한 아이의 죽음이 “여자의 병”을 가져온 원인이라는 점에서 ‘사고’라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천으로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구리 연」에서는 불행이 어떻게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달리 대답한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여자는 그 비탈 근처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머리를 감다가도 트럭은 무시로 굴러 내렸고 아이의 머리칼이 젖고 있었다. 옹알이를 하고 배밀이를 하고 막 걷던 아이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지, 그렇게 작은 몸에 어떻게 죽음이 덮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삶으로 떨어진 운석이 파놓은 구덩이가 너무 깊어 남자는 올라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자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아이의 ‘작은 몸’을 덮친 죽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구리 연」은 우선 불행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으로 떨어진 운석이 파놓은 구덩이가 너무 깊어 남자는 올라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어떤 불행의 구덩이는 올라설 수 없을 만큼 너무 크고 치명적일 때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는 것 같다. 아이의 죽음 때문에 여자와 남자는 모두 죽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비에 젖고 있는 아이의 검은 머리칼’로부터 비롯한 불행의 참담한 결과를 통해 불행이라는 것이 인생에 끼어드는 방식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번지점프대에 오르다」의 배경은 녹슨 번지점프대 옆의 한 석물 공장이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번지점프대는 산 너머에 스키장이 들어서고 그곳에 더 높은 번지점프대가 세워지면서 버려졌다. 여기에 석물 공장 한켠 컨테이너에 사는 ‘시평’과 그의 어머니가 나오고,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오로라’가 등장한다. 시평은 어머니의 암 치료비 때문에 전세금을 빼 어머니의 먼 친척뻘 되는 사장의 공장에 딸린 컨테이너로 들어왔다. 벙어리였던 어머니는 열아홉에 술장사하는 당신 이모 밑으로 들어가 공사판을 따라다니다 그곳 인부였던 아버지를 만났고, 시평을 낳았지만 버림받았다. 항암제 투여로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어머니는 겨우 먹던 녹즙이나 묽은 미음 한 숟가락조차 이제는 넘기지 못한다. 얼마 전 사장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술로 버티다가 떠났고, 시평은 몇 달째 월급도 받지 못한 상태이다.
한편 시평이 일하는 석물 공장 주변에 있는 염색 공장이나 가구 공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지난여름 시평은 우연히 타일 공장에서 일하다가 이곳 가구 공장으로 옮겨온 필리핀 아가씨 오로라를 만났다. 하지만 바다를 보고 싶어 했던 오로라는 최근 강화된 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을 피해 숨어버렸다. 오로라는 소작농 아버지를 위해 물소를, 도시에 나가 있는 남동생을 위해서는 지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 온 것이었다. 며칠 전 큰 눈이 내렸고 집달관이 붉은 압류예고장 딱지를 붙이러 다녀갔다. 어쩔 수 없이 시평은 어머니를 읍내 여관으로 모시고 가 마지막 목욕을 시키고, 어머니의 묏자리로 보아둔 공동묘지를 다녀온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관에서 죽는다. 석물 공장으로 돌아온 시평은 오로라와 마주치고, 그녀는 무작정 공장 옆에 버려진 번지점프대로 오른다. 시평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시평과 어머니는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불행한 인생들이다. 벙어리라는 선천적 질병을 갖고 태어난 어머니는 아이를 가졌음에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시평은 그런 어머니의 암 치료 때문에 남은 재산을 다 날리고 보잘것없는 거처로부터도 곧 쫓겨날 판이다. 질병으로부터 가난에 이어지는 ‘불행의 사슬’이 여기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다른 작품과의 차이가 있다면 불행의 원천에 “말 못하는” 선천성 ‘질병’이 놓인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은 그러한 불행의 원천으로부터 불행이 다가오는 방식을 엄마의 불운과 아들의 불운을 연결함으로써 새롭게 정의한다. 다시 말해 「번지점프대에 오르다」는 불행이라는 것이 그것을 직접 겪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불행이 대물림되거나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한편 이 소설에는 그러한 시평 모자의 불행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를 보충해주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필리핀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오로라가 바로 그녀이다. 오로라는 고향에 있는 아버지와 동생의 가난을 면해 주기 위해 먼 타국의 공장에서 다치고 쫓기기까지 하며 일해야 한다. 그래서 오로라는 괴로운 인생을 벗어나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녀가 바다만이라도 보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평은 오로라를 사랑하면서도 바다를 보고 싶다던 그녀의 소망을 끝내 들어주지 못한다. 목소리를 갖지 못해 자식을 불행의 그늘에서 살아가도록 한 어머니처럼, 시평은 오로라를 불행의 그늘 속에 그대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구원은 고사하고 위로조차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불행이 불행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그녀의 나무 핑궈리」의 중심인물은 ‘만자 씨’이다. 5년 전 만자 씨는 병든 친정아버지 치료비를 대려고 연변에서 한국 땅 동배 씨네 집으로 시집을 왔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고급 숙녀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만자 씨의 시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아들 내외 걱정에 주름이 펴질 새가 없었다. 바라는 손자 소식 대신 며느리 얼굴에 푸른 멍이 가실 날이 없었던 것이다. 동배는 만자 씨한테서 우려낸 돈에 제 어머니가 죽자 조의금 남은 것을 보태서 주식에 투자했지만, 주가가 떨어져 요즈음 만자 씨에 대한 주먹질 횟수가 부쩍 많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만자 씨는 그렇게 맞고도 꼭 동배 곁에 붙어서 잠을 잔다는 것이다. 만자 씨는 고향의 ‘핑궈리’(연변 지방에서 많이 나는, 사과와 배를 접붙여서 만든 과일)도 그립지만,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만자 씨는 지금 이틀째 동배의 컴퓨터 앞에서 장 마담 옆에 끼고 바람을 피우는 동배 씨를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다. 하지만 만자 씨는 을지문덕 장수가 환생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뱃속에 들어선 아이마다 오뉴월 비에 풋감 떨어지듯 해 둘치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동배의 바람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여자들이 만자 씨를 위로하러 왔는데, 그 중 나이 많은 여자가 “이번에 들어오면 잘라버려.”라고 말한다. 동배는 일 년 전에도 동배네 반지하 방에 세 들어 살던 ‘오죽순’이라는 아가씨의 이불 속으로 기어든 적이 있었다. 만자 씨는 동배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동네 인근 여관에서 장 마담과 재미 보는 동배를 발견하지만, 결국 얻어맞기만 하고 쫓겨난다. 오늘 아침 돌아온 동배는 지금 안방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고, 만자 씨는 가위를 갈고 있다.
이러한 만자 씨란 인물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행이라는 인생의 암초를 만나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작가는 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마련인 ‘외모’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이 소설에 나오는 또 다른 인물인 ‘해피’라고 불리는 개-사실 이 개는 흥미롭게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가 당하는 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동배 씨가 말합니다. 저는 동배 씨를 보고 컹, 하고 한번 집으려다가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동배 씨, 아니 씨자 붙이기도 아깝네요. 이제부터는 동배라고 부르겠습니다. 아휴, 아랫도리가 불룩한 걸 보니 또 단란주점 장 마담이랑 얼크러진 꿈을 꾼 게지요. 한 손은 골마리에 넣고 다른 손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동배가 제 쪽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더니 동배는 제 얼굴을 요리 쿡, 조리 쿡, 두어 번 찔러대면서 말합니다.
“못생겨도, 못생겨도 너처럼 생긴 개는 첨 봤다.”
피아노 다리에 묶여 사는 이 개는 월세 대신 잡힌 일종의 전리품인데, 동배에게서 시도 때도 없이 발길질을 당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특히 그 생김새 때문에 더욱 천대받고 있다. 말하자면 연변에 있는 친정아버지의 치료비를 대려고 동배에게 시집온 만자 씨는 “초원 위를 걸어가는 공룡”과 같은 외모 때문에 무시와 학대를 당한다는 점에서 피아노 다리에 묶여 사는 개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만자 씨에게 추한 외모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라는 사실은 더욱 안타깝다. 정말이지 불행이 오는 방식은 야속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불행은 한 사람에게 하나씩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무 핑궈리」라는 작품이 만자 씨의 불운한 삶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꽃이 진다」에는 거의 같은 무게를 지닌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정옥’과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그들이다. 몇 년 전 근종 때문에 수술로 자신의 자궁을 잃은 정옥은 요사이 건망증이 심해졌다. 그녀의 남편은 작년에 작년 회사 안팎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은 얼마 전 이십여 년 간 살았던 집을 팔았다. 집을 판 이유는 남편의 실직보다 사실은 남편이 선 빚보증 때문이었다. 시집간 딸아이 또한 친정에 닥친 일 때문에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직 부기도 빠지지 않고 있다. 정옥은 동생의 제사를 끝낸 밤 오래도록 마루에 앉아 어느 늙은 여가수가 부른, 멜로디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떠듬떠듬 부른다.
친정어머니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친정어머니는 올봄에 풍을 맞고 쓰러져 정옥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녀는 또 치매의 징조처럼 보이는 건망증을 앓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하루 종일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회심곡’을 들으며 거의 잠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그저 노래 하나로 하루하루를 건너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늘 맨바닥에서 자는데, 옛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시신이 눕혀져 있던 요가 아까워 시신을 끌어내린 일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살림에 대학 대신 군대에 자원입대한 아들은 첫 휴가를 보내고 귀대했다가 며칠 후 사고로 죽고 말았다. 바로 오늘이 젊어서 죽은 아들의 기일이다.
이 소설에는 지금까지 한수영의 소설들이 보여준 모든 불행들이 다 있다. 건망증을 앓고 있는 정옥과 중풍에 걸린 친정어머니가 나타내는 ‘질병’의 불행이 있는가 하면, 빚보증을 잘못 서 집을 팔게 된 정옥 네와 요 때문에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내려야 했던 친정어머니가 가리키는 ‘가난’이라는 불행이 있다. 또한 군대에서 죽은 정옥의 동생이자 친정어머니의 아들로 인한 사고의 불행도 있다. 이밖에도 자궁을 드러내 버린 정옥에게서는 ‘나이듦’의 불행이 암시되고, 직장을 잃어버린 남편에게서는 ‘실직’이라는 불행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불행의 원천을 따지자면, 정옥에게서는 빚보증이 그것의 근원이요, 친정머니에게서는 가난이 그것의 기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옥의 식구들은 사슬처럼 연결된 가혹한 불행의 질곡 속에서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을 견뎌야 하는 가련한 목숨들인 셈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옥네와 친정어머니가 불행을 만나는 방식을 통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가지 짐작이 가능한데, 하나는 불행의 가속도이다. 정옥의 가족이 겪고 있는 불행들, 가령 나이듦, 실직, 빚보증, 가난 등은 오랜 인생 역정의 고비들이 아니라 단기간에 한 가족의 삶을 좌초시키는 갑작스럽고 또 연속적인 위기들이다. 한번 시작된 불행에는 가속도가 붙는 모양이다.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짐작은, 불행의 유전적 성격이다. 이 소설에서 친정어머니는 가난이라는 불행에서 비롯한 사고와 질병의 불행을 겪고, 정옥은 그러한 친정어머니의 불행이라는 토대에서 남편의 실직과 빚보증이라는 불행을 경험한다. 시집간 딸아이 인생도 그러한 정옥의 불행이라는 토대 위에서라면 아마도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불행은 언제나 ‘대물림’되고 마는 셈이다.
이 소설의 의미를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꽃이 진다」는 불행이라는 암초와 그것이 인생 항로에 끼어드는 방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말하는 작품이다.
「피뢰침」은 매우 단순한 작품이다. 어렸을 적에 느낀 고독감 때문에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이식증’이라는 특이한 병에 걸린 남자가 자신이 경비를 맡고 있는 은행에서 한 여자 은행원을 흠모하게 되지만, 그녀와의 어쩔 수 없는 숙명적 거리를 절감하다가, 은행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내용이다. 어린 시절, 남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새를 쫓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누런 볏논에 장대를 높이 치켜든 채 깜부기처럼 서 있었다. 외로움 때문에, 남자는 자기 몸을 가지고 노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배꼽에 박힌 때를 빼는 일이나 콧구멍에 구슬을 넣는 일이었다. 하지만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무언가를 삼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는데, 그러고 나면 거짓말처럼 외로움이 조금 가셨기 때문이다. 일명 이식증이라는 질병의 시작이었다.
은행 경비로 일하던 남자에게 올봄 신입사원이 된 여자와 그녀의 아래턱에 비친 푸른 실핏줄이 마른번개처럼 다녀간다. 하지만 여자에게 가 닿을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과 함께 지독한 외로움과 지독한 그리움이 찾아온다. 남자는 이때부터 한번 이상 여자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은 삼키기 시작한다. 동전 넷, 클립 두개, 캔 맥주 꼭지 두 개, 그리고 얼마 전에는 눈썹 손질용 가위 하나를 삼켰다. 이즈음 은행 맞은편 건물의 피뢰침이 남자의 눈에 띤다. 그리고 남자는 피뢰침이 찌르고 있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절대 고독을 숙명으로 안고 가야 하는 피뢰침 자신의 발부리일지 모른다고 느낀다. 이날, 남자는 여자의 의자 근처에서 주운 여자의 머리핀 하나를 또 삼킨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은행 마감 시간을 앞두고 들이닥친 ‘번개’, 즉 은행 강도의 카빈 소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여기에서 은행 건물 맞은편에 솟아 있는 피뢰침은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상징한다. 뜨거운 사랑의 전율을 기다리지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숙명적인 거리만을 느껴야 하는 남자는, 하늘을 찌르며 번개를 기다리지만 바라는 것은 오지 않고 외롭게 자신의 부동성만을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하는 피뢰침을 그대로 닮아 있다 남자는 올봄 은행의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여자의 아래턱에서 마른번개를 닮은 푸른 실핏줄을 보았지만, 숙명적인 거리만을 느낄 뿐 여자에게 결코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남자는 그럴수록, 여자의 손이 닿은 물건들을 삼키는 남자의 엽기적 행태가 암시하는 것처럼, 여자를 전유하고 싶은 욕망과 그리움만을 한없이 키워간다. 남자는 점점 견디기 어려워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자는 번개를 맞게 되는데, 불운하게도 남자의 피뢰침을 전율케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은행 강도의 총이었다.
이처럼 「피뢰침」은 한 남자가 느끼는 여자와의 숙명적인 거리를 통해서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곧 불행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 남자가 마지막에 겪는 불운을 통해서는 자신이 갖게 된 것이 욕망하는 것의 대용물인 것만큼 더한 불행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보다 흥미로운 것은 불행의 원천으로 지목된 것이 ‘고독’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수영의 소설에서 거론된 불행의 원천들, 가령, 가난과 질병, 사고와 외모, 그리고 실직과 빚보증 등은 대개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 데 반해, 「피뢰침」에서 말하는 고독은 다소 정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식증’조차 여기서는 정신병에 더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이다. 여전히 많은 현대인들은 가난과 질병, 사고와 같은 이른바 ‘고전적인 불행들’을 겪고 있다. 그러나 또 많은 현대인들은 의학의 진보와 경제적 풍요 속에서 그러한 불행들을 벗어난 데 있다. 대신에 새로운 ‘현대적인 불행들’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한수영은 이제 「피뢰침」을 통해 현대적인 불행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셈이다. 아직은 징후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불행을 고전적인 문제로써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문제로서도 다루고자 하는 소설세계의 변화는, 의미심장하게도 창작집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스프링벅」이라는 소설-이 작품에 대한 이해는 창작집에 실린 권택영 교수의 해설 「프로메테우스가 잊은 것」에서 구하면 좋다-에서 뚜렷하다. 작가 한수영의 다음 작품들에 큰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작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불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 질병, 사고 등과 같은 불행이라는 암초 때문에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즉 그들은 좌초되었거나 좌초되고 있는 저마다의 인생으로 인해 동일하게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가는 불행이라는 인생의 암초로 인해 고통 받는 똑같은 인물들을 그려내지만, 그 고통스런 불행의 양상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령 「나비」에서는 불행의 근본적 원인을 ‘생비곗살’이 뜻하는 가난에서 찾고 있고, 「구리연」에서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작은 몸’에 떨어진 날벼락과 같은 사고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또 「번지점프대에 오르다」와 「벽」-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작품이다-에서는 ‘오석에 박힌 실띠’가 상징하는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질병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나무 핑궈리」의 등장인물은 낯선 땅으로 시집온 연변 처녀의 결혼 생활을 통해 못생긴 외모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신체적 결함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을 환기한다. 「꽃이 진다」는 빚보증과 실직이라는 새로운 불행의 이유들이 거론되지만, 앞선 모든 불행들을 거의 다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의 의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처럼 그녀의 나무 핑궈리에서 우리 생을 괴롭히는 불행의 문제를 다루는 한수영의 관점은 다양하고 또 다각적이다. 작가는 불행의 문제를 인생의 암초로서 간주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면서도, 그 원인과 현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탐구한다. 간단히 말하면, 작가 한수영은 이른바 ‘불행의 현상학’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현상학의 목표는 다양한 경험적 세목들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소위 ‘자유변경’이라는 상상의 절차를 통해 본질을 인식하려는 데 있다. 이 점에 비추어본다면, 한수영의 여러 단편들은 일종의 현상학적 자유변경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수영의 소설들에서 자유변경을 통한 ‘본질직관’의 결과는 무엇인가? 창작집에 제시된 가난과 사고와 질병 등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불행들은 한마디로 생의 유한성이라는 우리의 숙명을 가리킨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몸’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한수영 소설에서 그 ‘몸’은 인간의 불행에서 고유한 숙명적 한계의 정확한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도발적 육체성에 대한 주목의 결과가 아니다. 영원한 정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몸의 유한성에 대한 전통적 인식론의 소산에 가깝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한수영의 몸이 지닌 한계는 ‘신(神)’이 아니라 ‘돌[石]’(「번지점프대에 오르다」)에서 온다는 점일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바 있듯이, ‘죽음’과 ‘운명’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문학의 주요한 기능들 중의 하나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소설에서 유행하는 감각과 육체성의 놀이가 그러한 문학의 진정한 교육 기능을 대체해 가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한수영 소설의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작가 한수영은 「피뢰침」을 기점으로 소설세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전적인 ‘불행의 현상학’이 새로이 ‘불행의 모더니즘’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세계는 가난과 질병과 사고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불행의 원인들보다 욕망과 불신과 고독이라는 현대적인 불행들로 훨씬 더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피뢰침」과 「스프링벅」 등에서 새롭게 모색되고 있는 ‘불행의 모더니즘’은 작가의 보다 심화된 인식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단언컨대 그녀의 나무 핑궈리는 최근 우리 문학의 최대 수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오양진․
1969년 인천 출생
․2000년 <중앙일보> 평론 당선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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