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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2006년 여름호) 서평/전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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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현미 시집 곰곰
■윤성학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김지연 시집 소심(素心)을 보다
체험으로 시를 쓴다는 것
전병준|문학평론가
1.
시가 체험의 기록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사용된 말이어서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골동품인 양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만큼 오래되고 낡았다는 뜻이겠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새로운 것들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원리가 아닐까. 더구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발명되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우리는 그러한 새로움에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니 지나간 것들이 어디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오늘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것들은 사망 선고를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시간의 파도에 떠밀려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하여 늦게까지 살아남은 것들만이, 혹은 우연에 의해 살아남은 것들만이 포획되고 전시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생명을 잃은 채 박제된 것들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사라진 것들이라 하여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는 힘들 것 같다. 낡고 오래된 것이라 하여 거기서 어떠한 유용성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나간 것들을 망각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쉽게 긍정하기 힘들다. 오히려 오래된 것에 아직 우리가 찾지 못한 진실과 가치가 있음을 목격하는 것이 우리 삶의 역설이자 신비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명이 시간의 풍화를 거치면서도 아직까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시와 체험을 결합시키는 말에 일말의 진실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이가 있을 수 없듯 시인도 자신의 체험을 선택할 수 없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체험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에 나타난 체험의 무늬를 읽으며 시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시인이 겪은 체험이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해석하든 우리는 그것에 깊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직 그때에만 시인의 체험과 독자의 체험이 만나 새로운 체험이 탄생할 것이다.
2.
윤성학의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는 우선 그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눈길을 끈다. 무협 소설에나 어울릴 당랑권이 시집의 제목을 차지하고 있다니. 이 의아스러움은 전성시대라는 말과 연결되어 한층 더 증폭된다. 당랑권의 전성시대? 실제로 당랑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성기는 오래 전에 이미 지났을 터인데 당랑권의 전성시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협 소설의 과장이나 허풍 같은 것은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는 오늘에 시인은 이러한 제목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우선 시집의 표제로 삼은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
익히더라도 강한 것을 익혀야 산다
나는 당랑권을 택했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이다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다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 흘리며
쉼 없는 상하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고 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당랑권 전성시대」 전문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시인에게 권법이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고 하니 권법은 개인이 지니고 있는 나름의 관점 같은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인 당랑권은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는 권법이며 그래서 상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노출시키지 않는 권법이다. 그래야 급소인 “혈”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공격이 미치지 않는 거리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드”는 권법, 그리하여 승부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권법을 익힘으로써 시인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권법이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 이외에 도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 것일까.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소금 시」) 생활인인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일상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를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나 매개로 생각할 때 노동이란 단지 피해야 하거나 벗어버려야 하는 의무로만 생각되지 않을까. 그럴 때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윤성학의 시는 일상의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도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는 시작법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대상을 담담하게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고, 특유의 유머와 해학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내통(內通)하기 적당한 거리”(「내외」)란 세상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존재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기도 한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곳에서 “꿩이 튀어오르”는 것처럼(「매」) 시도 탄생하겠지만 그러한 긴장이 와해되는 순간 꿩이 날아오르지 못할 것처럼 시도 태어나기 힘들지 모른다.
3.
안현미의 시는 “시 같은 거짓말”과 “거짓말 같은 시” 사이에서 흔들린다. 시가 거짓말 같고, 거짓말이 시 같다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이 말은 그러나 반드시 말장난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시가 현실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거짓 믿음에 대한 비난이며 동시에 거짓말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이 곧 시와 다르지 않다는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한 진술이다. 시집의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거짓말을 제조하다」와 「거짓말을 타전하다」에서 뽑은 위의 구절들은 어쩌면 자신과는 다르게 행복하고 평화롭게 산 사람들에 대한 질투 섞인 힐난과 가난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자학에 가까운 고백인지도 모른다. 이런 힐난과 고백은 “차라리 신(神)은 봄 같은 건 제조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구절에서처럼 미래라는 환상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절망 섞인 현실 인식으로, 혹은 여상을 졸업하고 고아처럼 산 시절을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라고 표현하는 구절에서처럼 고단한 시절에 대한 서글픈 회상으로 이어진다. 비루하고 지리멸렬한 젊음을 돌이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정직한 고백일 때는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을 가능하게 한다. 정직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변신의 근거가 되고, 그런 변화에 대한 믿음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건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비굴 레시피」 부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가난하고 고달픈 기억밖에 없는 이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는 그때처럼 불행하지 않다는 안도감을 주거나 오늘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아버지(「고장난 심장」)와 “서울로 돈 벌러” 갈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기차표 운동화」)로 가득한 유년 시절의 이미지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굴해지고, 또 비루해지게 만들었던 가난은 그녀로 하여금 시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가난 때문에 스스로 학대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시를 선택하였으리라. 시란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므로 더욱 자학에 이끌리게 하였을 수도 있으나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솔직하게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을 것이다. 시를 쓰게 하기도 하고, “사랑”과 “이별”과 “반성”을 주기도 한 “비굴”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한 어떤 시인에게서처럼 자신을 성장시킨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먹어줄 “당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까지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욕망일까, 아니면 자학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일까. 어쩌면 시인은 자학과 자존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학에서 자존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있는지도.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보다는 “착란에 휩싸인 봄”(「屍口門 밖, 봄」)을 그리워하고, 또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일 터이다.
4.
김지연의 시는 시집의 표제가 암시하듯 맑고 깨끗한 마음을 담고 있다. 가족과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녀의 기억은 약간의 슬픔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유쾌하고 흐뭇한 것들로 가득하다. “전화벨이 울리면 숫자판 위로 반짝거리는/연분홍 빛깔을 구경하느라 늦게/수화기를 든다는 어머니”(「홍매화」)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친전(親展)」)을 표현하는 시와 “백설공주를 꿈꾸며 충분히 잠을 자야 했고/신데렐라를 닮으려 볼 좁은 구두를 신었고/손가락에 낀 반지 들여다보며 서툰 주문을 외웠다”(「투명꽃」)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시에서 우리는 가족과 유년 시절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과 유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튼실한 체험을 가진 시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의 강도가 높아 견실한 구조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구성된 세계는 이내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고 만다.
태풍 민들레가 지나갔다
나지막하리라 했던 바람이
방충망을 뚫고 막무가내로 들어온다
또르르 탁자 위 펜이 의자 밑으로 숨는다
그 뒤로 종이가 흩어지고
차분히 누워있던 신경 하나가 벌떡 일어난다
바람은 사선에서 중심 잡길 원한다
누구든지 바람 부는 거리에 서면
중심은 늘 사선에 두고 걸어야 한다
가로수 사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잔디 위에
민들레가 반쯤 마른 잎을 들고
헝클어진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다
저무는 땅 위에서 너말고
누가 길을 안내해 줄까 민들레야,
움켜쥔 방충망 사이로 바람이 솔솔 빠져나간다
―「민들레」 전문
김지연의 시는 대개 우리가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일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의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피 잡기 힘들거나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하고자 하는 시가 아니다. 새로운 것과 기이한 것이 눈길을 끄는 요즘에 일상의 체험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일상에 대한 성찰이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삶의 조건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을 시화(詩化)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시간적인 반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태풍의 이름이기도 하고, 들에 피는 꽃의 이름이기도 한 “민들레”를 소재로 한 위의 시는 시인의 시작(詩作) 방법으로 읽힌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걷기 위해서는 “중심은 늘 사선”에 두어야 한다는, 이 중심잡기의 시론은 그러나 상식에 얽매여 있어 그 심층을 뚫기에는 허약한 것이 사실이다. 중심잡기란 중심과 주변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닥쳐올 중심과 주변의 부조화와 갈등을 충분히 견딜 수 있다면 시인이 원하는 중심잡기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직 그때에만 시인이 그토록 쓰기를 원하는 “가시가 생명이기도 한 선인장처럼/가시 있는 시 한 편”(「가시의 힘」)도 씌어질 것이다.
전병준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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