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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특집/최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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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2회 작성일 08-02-2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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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문학의 향방


2000년대가 호출하는 문학은 무엇인가

최강민|문학평론가


1. 문학을 호명하는 것
작가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1916)에서 한국의 근대문학은 서구문학을 모방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문명=근대성=서구문명=근대문학’이고, ‘야만=전근대성=식민지 조선=전근대 문학’이었기에, 근대문학은 근대성을 성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식된다. 서구콤플렉스와 새것콤플렉스는 문인들이 새로운 아비를 섬기기 위한 자연스러운 통과제의로 간주된다. 이광수 이후,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 중국의 문학관 대신 서구 중심의 문학관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교체된다. 1970년대 이후, 민족문학의 시각이 서구 편향의 문학관에 작은 균열을 안겨주었지만 여전히 서구 중심의 문학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후에 서구에서 형성된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진화론의 선조적(線條的) 관점에서 보면 선사시대에 문학은 주술이었고, 고대에 서사시나 노동요로, 중세에 로망스였고, 근대에 들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호명(呼名)된다. 국어사전에 보면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런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따위가 있다.”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문학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호명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정의하는 행위는 언제나 결핍으로 남는다. 선택과 배제의 메커니즘 속에 행해지는 호명은 문학을 일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조각난 육체이거나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명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잠깐이라도 문학을 소유했다는 황홀한(?)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잠시라도 소유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사랑의 환상은 문학을 정의내림으로써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자신만 사랑하도록 집에 가두는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문학을 사랑하기에 정의를 내리지만, 그 정의가 사랑을 배신하는 모순 속에서 문학은 여전히 결핍으로 존재한다. 그 결핍은 다음의 호명을 충동질하는 에너지로 작동한다. 그래서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과거의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면한 현재에도 부딪쳐 풀어야 할 문제로 다가온다.
이처럼 문학은 처음부터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 의해 새롭게 정의된다. 문학은 누가 호명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드러낸다. 한국의 근현대문학에서 문학을 호명하는 주체는 크게 보면 ‘계몽주의문학/반계몽주의문학, 리얼리즘/모더니즘, 민족(민중)문학/자유주의문학(문학주의), 집단/개인’이라는 양대 축이 존재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양대 주체는 문학을 정의내리는 지배적 문학권력을 번갈아 획득했다. 이때 양대 주체는 불행하게도 상호 협력이나 공존보다 타자의 배제나 억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자신만 최고라고 믿었기에 이들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는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기인 2000년대에도 양대 주체의 팽팽한 대립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타자의 배제를 통해 자신의 존립 근거를 확보한 전통적인 양대 주체는 혹시 함께 몰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을 규정해 왔던 기존의 양대 주체를 뛰어넘는 제 3의 길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달라진 시대환경은 그에 걸맞은 문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의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길찾기이다.

2. 민족문학론의 위기와 문학주의의 득세
근대의 도정에서 한민족은 아쉽게도 지진아로 분류되었다. 생존경쟁에서 지진아였기에 야만으로 규정되었고, 문명의 주체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근대의 결핍은 일제의 식민 지배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광복 이후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졌고, 1950년에 동족상잔이라는 한국전쟁을 경험해야 했다. 이후 분단 모순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초월적 지배이데올로기로 승격시켰으며, 근대화를 앞세운 군사독재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 왔다.
이와 같은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문학은 현실을 적극 반영하고 미계몽된 존재를 각성시켜 현실 변혁에 공헌하는 계몽주의문학이 시대적 정당성을 상대적으로 확보했다. 이광수 이후 계몽주의문학은 카프문학, 참여문학, 민족민중문학으로 면면히 계보를 이어왔다. 계몽주의문학의 창작방법론이었던 리얼리즘은 있는 현실보다 있어야 할 당위로서의 현실을 강조함으로써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의 근대문학은 개인의 구원보다 근대성에 미달한 사회 전체를 구원하려는 공리적 목적에서 태동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서구의 근대문학은 집단보다 개인의 발견을 통해 근대문학을 출발시킨다. 이러한 차별성은 우리 근대문학이 보편성에 미달했다기보다 당대의 특수 조건과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해방 이후, 분단체제 내지 냉전체제는 정치적 질서만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마저 규율한다. 억압적인 당대의 사회 질서는 나와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 투쟁해서 극복해야 할 공통의 과제였다. 문제는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배제와 억압이라는 폭력적 경계 짓기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민족민중문학의 배타적 독점 현상은 자신의 문학론을 특권화시키며 상대 세력의 반발을 증폭시킨다.
1990년대 들어 문학주의(또는 자유주의문학) 진영은 1980년대의 민족민중문학이 범했던 폭력적 경계 짓기를 그대로 복제하거나 확대 재생산한다. ‘문학주의’ 진영은 거대담론의 몰락과 영상매체의 확장을 계기로 1990년대 들어 복수의 내전을 벌였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벌어졌던 리얼리즘논쟁은 이 내전의 시발점이다. 양자는 상호 대립하면서 서로 닮아갔던 것이다. 1990년대에 문학주의 진영의 ≪문학과사회≫와 ≪문학동네≫ 등은 다시 문학이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거대담론인 민족, 분단, 계급, 현실보다 미시담론인 개인, 일상, 욕망, 환상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러면서 거대담론에 집중했던 교사로서의 역할을 했던 비평의 선도성을 폐기시키면서 미시담론인 텍스트에 시중을 드는 문학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문학주의를 내세운 평자들은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정치 논리에 의해 문학의 자율성을 훼손한 민족민중문학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들은 민족민중문학론이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타자인 문학주의 진영을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 자체도 즉자적 민중 대 대자적 민중처럼 이분법으로 분류하여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문학과사회≫ 편집위원인 박혜경의 다음 글은 문학주의 진영의 생각들을 잘 대변하고 있다.

주체든 현실이든 자명한 것은 없다. 단지 자명성이라는 담론적 욕망, 곧 신화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주체의 자명성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문학의 자기 정체성을 지탱해주던,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재현의 욕망이나 문학이 지닌 계몽적 권능에 대한 믿음은 점차 그 논리적 시효성을 주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문학은 문학의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어떤 과도기적 단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박혜경 「소설이 주체의 위기를 살아가는 방식」(󰡔문학의 신비와 우울󰡕, ≪문학동네≫, 2002, 42쪽)

문학주의 진영은 90년대 들어 80년대 엄숙주의와 결별한 가벼운 신세대문학을 적극 옹호한다. 탈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 받은 신세대문학의 약진 속에 문학의 위기론도 함께 퍼져나간다. 영상매체의 급격한 확장 속에 활자매체인 문학의 영역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문학 위기론을 주장하는 일부 평자들은 함량미달인 신세대 작가들이 범람하면서 문학의 위기가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평한다. 이에 대해 문학주의 진영의 평론가들은 1990년대 신세대 작가인 장정일, 김영하, 백민석 등을 적극 옹호하면서 문학의 위기론이 가짜의 허구적 담론이라고 공박한다. 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문학이 위기라고 주장하는 허구의 담론이 문학의 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문학판 전체는 과거에 비해 영역이 분명 축소되었다. 더 이상 문학은 문화계의 왕이 아닌 일개 봉건영주로 지위가 추락했던 것이다. 이것은 과거 비대했던 문학의 제자리 찾기라는 측면도 분명 있지만 문학의 부실화도 한몫했다. 문학주의 진영의 신세대문학에 대한 적극적 옹호는 2006년에 소통단절의 ‘미래파 시인’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 2000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문학의 공리성보다 미학적 유희성에 치중한 개인주의적 문학관이 지배담론이 된다.
문학주의 진영의 화려한 부활 속에 ≪창작과비평≫과 ≪실천문학≫으로 대표되는 민족민중문학 진영은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리얼리즘 논쟁, 자유주의문학 비판, 민족문학의 모색, 6월항쟁, 90년대 문학제도, IMF체제, 87년체제, 6․15시대 등의 특집을 통해 지속적으로 거대담론의 필요성과 문학의 대사회적 기능을 강조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매너리즘에 빠진 민족문학 진영은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7년에 문학평론가 진정석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포괄하는 ‘광의의 모더니즘’을 제시하여 민족문학 진영의 침체를 충격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점증하는 민족문학 진영의 위기 앞에서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위기 탈출과 새로운 문학판 짜기를 시도한다.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1999)에서 “리얼리즘/모더니즘을 대칭적으로건 비대칭적으로건 차이 속에 정의하려는 노력을 통해 얻어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집단정체성은 상상된 또는 창안된 표지이기 쉽다.”고 주장하면서 상상된 허구적 대립을 넘는 회통론을 제시한다. “리얼리즘의 최량의 작품들은 통상적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순간 산출되었으며, 모더니즘의 최량의 작품들도 통상적인 모더니즘을 비월(飛越)하는 찰나에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지식인문학의 위기를 주장하면서 민중문학의 당파성을 주장했던 문학평론가 김명인도 2000년대에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이라는 선언을 통해 민족문학론의 와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민족문학론의 폐기를 주장한 문학평론가 신승엽의 행보도 이 연장선에 있다.
최원식의 ‘회통론’에 대해 문학주의의 진영의 문학평론가 황종연은 회통론이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모더니즘을 식민화하려는 제국주의적 욕망이라고 규정하며 비판한다. ‘회통론’은 문학주의 진영의 잘 나가는 신세대작가를 창비의 영역으로 끌어와 단행본을 출판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비판도 개진되었다. 그 결과 문학판에서 일종의 햇빛정책이었던 회통론은 확산되지 못한 채 창비가 문학주의 진영의 작가를 끌어오기 위해 내세우는 자기합리화의 논리로 통용된다. 최원식의 회통론에서 촉발된 2000년대 초반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 논쟁(임규찬, 황종연, 윤지관 등)도 서로의 팽팽한 대립적 입장만 확인한 채 끝나고 만다. 이러한 결과는 민족문학 진영과 문학주의 진영이 상호 축적된 신뢰 부족에서 기인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활황 장세를 보이는 문학주의 진영이 굳이 민족문학 진영과 화해를 모색할 현실적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작과비평≫은 최근에 모더니스트인 이장욱을 상임 편집위원으로 위촉해 ‘회통론’의 수명 연장 내지 부활을 시도하는데 그 성공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민족민중문학론의 침체 속에 문학주의 진영은 새로운 적, 아니 있었지만 그렇게 가공할 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거대자본을 공적으로 규정하며 대응의 수준을 높여간다. 문화산업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공세 속에 황지우, 정과리 등은 ‘정신적 귀족주의’를 통해 새로운 적의 위협에 대처하자고 한다. 이들은 문학의 자율성을 거대한 자본의 무차별적 공격을 막기 위한 보루로 파악한다. 문제는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신화의 강조 속에 현실이 소거되고, 자폐적 내면만이 번성했다는 점이다. 거대 공룡인 자본의 공세에 대해 고립된 형태의 소생산자적, 귀족주의적 자율성 사수는 위기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킬 뿐 문제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을 대중과 단절시킨 자기기만의 나르시시즘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많다. 문학평론가 박성창은 “‘정신적 귀족주의’로 지탱되는 사유가 문학성에 대한 편협한 이해 속에서 그것을 문학의 순수성 또는 자율성과 동일시하게 될 경우 이는 문학과 현실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엘리트들만이 이끌어가는 예술지상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2000년대의 문학은 거대자본과 대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초국가적 자본은 민족민중문학 대 문학주의라는 대립 전선 자체를 공중분해 시키면서, 문학 자체를 고사시키거나 자본의 하위주체로 종속시킨다. 이제 시급한 문제는 양자의 대립이 아니라 ‘(본격)문학’의 생존 모색이다.

3.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당대의 문학관을 형성하는 4대 요소는 작가(저자), 작품(텍스트), 독자(평론가, 기자 등), 사회적 환경이다. 먼저 작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귀족의 품에서 벗어난 문인들은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대에, 천재적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발명하면서 종교를 대신해 신의 영역을 표현하는 지고지순의 예술가로 승격한다. 천재로서의 작가는 독창성, 상상력을 내세움으로써 신과 같은 창조의 반열에 자신을 올렸던 것이다. 천재로 통용되기를 원했던 작가들은 19세기 리얼리즘 시대에 예술가이자 동시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혁명아나 투사로 변신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 작가들은 자신들의 지적 소유권을 확립하고 대사회적 영향력을 강화시킨다.
작가의 절대적 위치는 20세기 후반 들어 크게 흔들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속에 작가는 더 이상 의미와 발생의 기원으로서의 독점적 권력을 향유하지 못한다. 작가들은 작품의 근원적 의미를 생산하는 원천이 아니라 잠정적 의미(또는 기표)만을 전달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된다. 작가와 작품이 등가 관계라는 도식도 깨어져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인식이 확산된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1967)에서 저자의 의도를 작품 해석의 기준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저자의 죽음’을 요구하기도 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가의 아우라는 평가 절하되고, 작가는 기존의 것들을 짜깁기한 스크립터 내지 언어의 고물상으로 전락한다. 절대군주였던 작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작품에 넘겨주며 하야했던 것이다. 등단제를 통해 작가의 신규 진입을 적절하게 통제했던 과거의 기득권적 문학제도도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문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흔들린다. 신성불가침의 이미지인 예술가로서의 ‘작가’ 대신에 글을 쓰는 모든 이를 지칭하는 ‘저자’로 호칭이 바뀌고 있는 것도 변화의 일단이다.
작가에 이어 20세기 중반에 문학적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신비평과 구조주의의 후원을 받은 ‘작품’이다. 온갖 의도적 오류를 극복하고 작품 자체로만 보자는 생각은 작품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근대적 주체의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작품의 배타적 태도는 사회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진공지대에 작품을 거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영향력에서 작품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형식주의적 태도는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성의 기만적 꿈이었을 뿐이다. 20세기 후반에 근대 주체의 신화가 무너지면서 작품의 절대적 권위도 함께 몰락한다. 하나의 진실된 해석만을 허용하는 ‘작품’ 대신에 다양한 복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텍스트’ 개념이 등장한다. 텍스트의 개념은 문학 작품 이외에 모든 것도 텍스트라고 지칭함으로써 문학 작품의 우월적 위치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텍스트는 자족적이라는 성격보다 독자와의 쌍방향적 소통을 지향한다. 상호텍스트성과 하이퍼텍스트는 수직적, 선형적, 고정적 텍스트가 아닌 수평적, 비선형적, 유동적 텍스트의 등장을 의미한다.
독자들은 작가와 작품이 우월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동안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주체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 확대, 그리고 자본주의의 진행 속에 예술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권리찾기에 나서게 된다. 최초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저자이고, 텍스트는 이것을 임시적으로 실어 나르는 매개체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을 수용하고 감상해 최종적 의미를 산출하는 것은 독자들이다. 독자들에 의해 텍스트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결핍을 채워주는 제2의 창조자인 것이다. 독자의 권익 확대 속에 독자를 대표한 문학평론가의 역할도 커진다. 계몽주의 시대에 문학평론가는 문학적 전망의 제시 속에 작가들을 독려해 유토피아의 환상을 좇는 계몽의 전도사였다. 그러나 한국의 문학평론가는 1990년을 전후한 거대담론의 몰락 속에 전망을 상실한 채 주체의 혼돈 속에 환멸을 경험한다. 문학주의 진영의 평론가는 텍스트주의를 내세워 총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은폐시킨다. 다시 말해 그들은 텍스트의 존중이라는 핑계 속에 비판적 읽기라는 평론가의 본래 역할을 자진 반납하고 미시적 세계에 갇혀버렸던 것이다. 지켜야 할 문학적 신념이나 정조마저 상실한 일부 주류 평론가들은 출판상업주의와 결탁해 텍스트의 광고 문안을 작성하는 카피라이터로 추락하기도 한다. 주례사비평의 범람 속에 가짜 문학이 진짜 문학이 되고, 진짜 문학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현상도 발생한다. 2000년대 초반 문학판을 달군 ‘주례사비평 논쟁’은 비평의 본래적 역할 회복을 촉구한 비판적 글쓰기 진영의 평론가와 자기모순과 위선에 빠진 주류 평론가들이 벌이는 뜨거운 논쟁이었다.
작가, 작품, 독자 이외에 문학장을 구성하는 중요 핵심 요소는 당대의 사회적 환경이다. 문학장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 90년대 이후 집단적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근대적 기획은 파산에 직면했다. 거대담론의 몰락 속에 계몽적 이성을 통해 역사의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은 주체의 붕괴와 부재를 경험한다. 회의주의 철학에 기반한 탈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또는 해체주의)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주체 중심의 휴머니즘에 반대하는 반휴머니즘을 표명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 속에 기존 문학제도가 만들어낸 위대한 작가, 위대한 전통은 붕괴된다. 완결성, 총체성, 사회, 이성, 질서는 비완결성, 파편성, 일상, 욕망, 무질서로 대체된다. 앨빈 커넌은 󰡔문학의 죽음󰡕(1990)에서 해체주의 이후 “‘문학’이라는 실체, 작가의 창조성, 비평가와 독자에 대한 작가와 작품의 우위, 예술작품의 통일성 등이 모두 격파되었다.”고 평한다.
서구를 기준으로 한 문학장의 변화는 1990년대 이후 한국에도 태풍처럼 불어닥친다. 작가와 작품의 지위 하락은 1990년대 문학위기론을 불러오는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면서 문학판의 지각 변동을 초래한다. 문제는 한국의 문단 주류가 내면화한 오만한 엘리트주의는 자신의 기득권을 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별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작가, 작품, 독자의 평등한 관계 구축은 문학의 진정성 수호라는 대의명분 속에 거부되고, 오히려 작가와 작품을 저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역사적 퇴행의 징후마저 보였다. 고립과 폐쇄의 길로 치달은 문학주의는 자신의 행동을 비판한 목소리에 대해 평자의 애정 결핍이라고 비판하며 폐쇄적 울타리를 쌓는다. 문학의 자율성을 말하면서 (본격)문학의 순결성을 강조한 문학주의는 한편으로 출판상업주의와 은밀하게 결탁하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문학동네≫는 이 부분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올린다. 이러한 문학주의의 이중성은 독자들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행위이기에 영리한 독자들은 문학판을 멀리하는 것으로 통쾌한 복수를 감행했다. 이것은 문학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문학주의가 또 다른 문학의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 현실. 1990년대 문학주의는 2000년대 들어 더 이상 생존할 근거를 상실했다. 문학주의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현재의 지배적 문학관에 대해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을 냉철하게 분석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문학관을 형성해야 한다.

4. 2000년대 문학을 규정하는 것
2000년대 문학장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신자유주의체제를 앞세운 거대 자본이라는 블랙홀이다. 자본의 공세 속에 기존 민족민중문학 진영과 문학주의 진영의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은 상당 부분 무의미해졌다. 문화산업의 급격한 세력 확산 속에 ‘본격문학’을 터전으로 차별적 담론을 형성했던 문학 진영 자체가 와해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본격문학’이라는 명칭은 문학의 순결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본격문학 이외의 것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는 자랑스러운 상징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문화산업의 공세 속에 ‘본격문학’은 ‘본격’을 상당 부분 상실한 채 ‘문학’만 생존하는 기형적 구조를 보인다. 본격문학의 권위 하락과 변질 속에 문학이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과거의 고정관념은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한다. 새로운 감각을 앞세운 신세대 문학의 행보 속에 ‘본격문학’의 정체성은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본격문학은 이름만 유지하고 있을 뿐 내용적으로 이미 대중문학(또는 중간문학)과 동거를 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이 시대 본격문학이 처한 이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본격문학은 그야말로 ‘텅 빈 중심’이 되었다. 문학의 고립과 빈곤은 심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문학인 척하는 문학 아닌 것들’의 양적인 팽창은 가공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본격문학은 이제 문학에 관한 공허한 ‘알리바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의심마저 든다. 문학 제도권 안에서 ‘문학’으로 인정받은 ‘작가’들이 이런 B급 장르들의 상품 미학적 매력에 기꺼이 투항하면서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본격적인 ‘작가’로 대접받으려 하는 ‘이중성’은 이런 상황의 소산이다.
―이광호 「‘본격문학’, 죽은 시인의 사회」(󰡔사소한 정치성󰡕, ≪문학과지성사≫, 2006, 20~21쪽)

본격문학의 위기에 대한 반응은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거나,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엘리트주의적 장인정신을 고수하거나, 유희적 기능을 극도로 강조한 새로운 감각의 제시로 독자의 확충을 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세 번째의 경우인 유희성의 강조는 문학을 문화산업의 하청업자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2000년대 들어 새로운 감각의 유희성을 소리 높여 강조하는 ≪문예중앙≫ 편집동인들은 ‘새로운 현실은 늘 새로운 감각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낡은 현실을 새로운 감각으로 보여줄 수 있고, 새로운 현실을 낡은 감각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그들은 새로운 현실은 늘 새로운 감각을 수반한다는 단선적 정답만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문예중앙≫ 편집동인들은 입만 열면 열린 다원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자기모순의 언어를 생산한다. 새것콤플렉스와 출판상업주의가 결합한 ≪문예중앙≫의 새로운 감각은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결성의 노출을 후원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상품화하여 문학적 지분을 확대하려는 꼼수이다. 일반 독자와의 소통이 단절된 미래파에 대한 ≪문예중앙≫의 전폭적 지원은 이러한 전략의 산물이다. 초국가적 자본은 문학주의의 실험적 전복성마저도 상품화시키는 위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거대 자본의 공세 속에 본격문학의 종사자들은 서로의 힘을 결집시킬 통일전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원식의 회통론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외부의 강력한 적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문학계 내부의 상호 이해와 연대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문학주의를 더욱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문학적 순결성을 고수하려는 폐쇄적 엘리트주의가 세를 얻고 있다. “문학은, 민족도 국민도 시민도 아닌, ‘나’ 개인의 실존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집단적 동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개인들의 억압 없는 소통을 꿈꾸는 자리.”(≪문학과사회≫, 2003, 여름)라는 담론이 습관적으로 재생산된다. 문학주의는 집단, 이데올로기, 획일적 단일성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만 그 속에는 그들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성찰’이 종종 생략되어 있다. 파렴치한 세상에 다시 문학으로 귀환하는데 그것은 문학 바깥이 아니라 문학 안쪽으로 제한된다.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맥락은 소거된다. 바깥을 소거했는데 어떻게 인간과 세계의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리고 바깥을 제거한 상태에서 파악된 자폐적 인간에게 남아 있는 윤리란 대체 무엇일까. 더욱이 문학주의자들은 현 세계를 총체성 파악이 불가능한 시대로 말하면서 어떻게 문학을 통해 총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문학동네≫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담론 속에서만 숨쉴 수 있는 괴물일 뿐이다. 그 괴물은 현실에서 나가면 바로 죽기에 문학이라는 영역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문학 안쪽에 집착한 문학주의로 10년 정도 기생했으면서도 또 문학 안쪽에만 들러붙어서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이 파렴치한 세상을 돌아보며, 다시 문학으로 귀환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며 자발적 망명을 떠난다.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인간과 세계의 총체성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끝끝내 인간을 옹호하고 생명을 지지하는 윤리를 재확인하기 위해 문학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문명이란 새로운 윤리인 것.
―「2002년 여름호를 펴내며」(≪문학동네≫, 2002, 여름, 18쪽)

1990년대 문학주의는 미시적 문제를 소홀히 했던 80년대 문학에 대한 성찰 속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1997년 IMF체제, 미국과 북한의 핵분쟁,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실업,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등 일련의 역사적 격변과 냉혹한 현실은 더 이상 문학이 개인적인 세계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학은 당대 독자들이 욕망하는 것을 첨예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문학주의의 편향적 개인성 집착은 또 다른 역사적 퇴행이다. 어느 한쪽을 편식하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 균형적 영양 결핍 속에 각종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2000년대에 비판적 글쓰기의 중도파 진영은 미시담론을 끌어안는 사회적 상상력의 복원을 주장한다. 문학주의가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피해의식 속에 사회적 상상력을 배제하는 한 문학의 고립을 한층 심화시켜 위기를 증폭시킬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2006)에서 사회변혁을 지향한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았는데 현재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다.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종료되었기에 더 이상 현재의 문학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고진의 고백은 문학이 역사적 과정의 산물임을 주지시킨다.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 민주화가 불가능한 시기에 학생운동이 그 역할을 떠맡았던 것처럼 과거에 근대문학도 모든 짐을 떠맡았고, 이제 그 역할이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문학적 영향력의 쇠퇴 내지 종언은 문인들에게 충격일지 모르겠지만, 문학이 다른 예술 매체에 비해 두드러진 장점 내지 유인력이 없다면 몰락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가 김종광은 창작집 󰡔낙서문학사󰡕(2006)에서 기존 문학 장르인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에 낙서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창조하는 이단아를 형상화한다. 이 소설에서 낙서문학은 기존의 고루한 문학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이자 야유이다. 기존의 문학제도는 20세기의 산물일 뿐이고 21세기에 새로운 낙서문학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언급은 과거와 다른 문학관이 21세기에 필요하다는 생각의 우회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문학제도 속에서 가장 혜택을 받은 수혜자는 본격문학이었다. 본격문학의 등장 속에 판타지문학, SF소설, 탐정소설 등 주변 장르는 소외된 타자로 밀려났다. 한국에서 대중문학 은 고사 상태로 겨우 목숨만을 연명해 왔다. 그러나 본격문학이 구축했던 절대왕국은 현재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다. 이제 본격문학이 자행한 대중문학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주의와 배타적 폭력성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본격문학이 상업주의문학과 결탁해 비판적 성찰을 생략하라는 것이 아니다. 독자와의 평이한 소통방식에 좀더 많은 고민을 하는 대중문학을 통해 또 다른 길의 모색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중문학이 활성화되면 본격문학은 현재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격문학이 생존하려면 대중문학을 통해 미적 즐거움을 느끼는 독자가 다수 확보되어야 한다. 서점가에서 한국의 문학작품 대신 외국의 번역소설과 일본소설이 베스트셀러의 상위권을 점령한 지도 오래이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 속에 본격문학은 ‘문예진흥원’이 지원하는 ‘우수문학행사지원사업’에 의해 허구적인 독자를 창출해 겨우 연명해가는 실정이다. 본격문학은 현실의 장에서 발언권을 상실한 채 대학과 같은 학교제도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전통의 이름하에 강제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따분한 예술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본격문학이 학교제도를 통해 주로 소비되는 형태는 문학의 보수화를 가속화시켜 본격문학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확인사살이 될 것이다.

5. 문학의 종언을 넘어
민족과 국가를 경계로 삼았던 근대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미래는 무엇일까. 문학이 개별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영화나 게임에 스토리를 공급하는 하위주체로 자리매김되는 것일까.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시대를 이끄는 첨단사업이 아니라 일종의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문학의 위기론은 만성적인 질환으로 자리한다.
2000년대의 문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다수의 독자가 아닌 기만적 엘리트주의에 빠진 문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문학주의에 지배된 현재의 주류 문학은 자폐적 세계에 갇혀 나르시시즘의 수음을 즐기고 있다. 2000년대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현재의 문학은 대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골방에 갇혀 자가발전의 신음만 낼 수 있을 뿐이다. 본격문학의 미래는 어떠한가. 한 마디로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본격문학은 종언할 것이다. 이렇게 문학이 중병을 앓고 있음에도 주류 문학주의자들은 문학 바깥을 배제한 근본주의적 문학주의를 생산하며 만병통치약이라고 과장 광고한다. 배타적 엘리트주의에 중독된 근본주의적 문학주의는 끊임없이 ‘문학/비문학’을 가르면서 순수혈통을 강조한다. 그것은 80년대 민족민중문학이 ‘민중/비민중’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을 남용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결과 문학계는 역사적 전망을 제시하지도, 깊이 있는 실험성도 보여주지 못한 채 일반 독자와 단절되어 있다. 1980년대 문학이 준 교훈 중의 하나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는 문학은 일반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서영채는 “문학적인 것이란 매순간 그것이 아닌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호명 방식은 문학을 절대화하거나 타자를 배제할 가능성이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영채는 누구보다 다원성을 강조하는 골수 문학주의자라는 점이다. 사회적 연관성을 상실한 문학주의에 오랫동안 중독 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영채를 비롯한 문학주의자들이 2000년대 들어 보여준 것은 문학의 절대화를 통한 다양한 것들의 소거이다. 유사종교가 된 문학은 신처럼 완벽 무결한 개인주의적 유토피아가 된다. 그 유토피아의 세계에는 불행하게도 문학만이 살아 있을 뿐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죽어 있다. 문학주의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학인가? 문학은 완벽한 것이 결코 아니다. 문학을 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제발, 문학을 절대화시켜 신으로 만들지 마라! 문학이 진지한 성찰을 담아야만 한다는 믿음도, 미학적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는 강박도 일정한 진실과 당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이 절대적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문학의 불행이다. 민족민중문학과 문학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그것이 2000년대 문학의 존재방식이어야 한다.
문화산업의 무차별적 공세 속에 (본격)문학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공통의 적인 자본과 맞서 싸우는 뜨거운 자유 연대이다. 문학계 내부의 싸움에 골몰해 적전분열의 우를 범해서는 곤란하다. 본격문학이라는 제국에 의해 억압되었던 식민지적 타자인 대중문학에 대한 복권도 필요하다. 본격문학의 표방 속에 은밀하게 대중문학에 발을 걸치면서도, 정작 대중문학을 경멸하는 본격문학의 위선적 태도는 청산되어야 한다. 거대 자본의 공습 이외에 비판적 글쓰기 진영이 새로 가세하면서 기존의 민족민중문학 진영 대 문학주의 진영의 양자 구도도 붕괴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2000년대 문학에 대한 정의는 현재 완료형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문학에게 쓸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문학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호명할 적절한 언어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결핍이다. 문학은 결핍이다. 그 결핍은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자궁이다.



최강민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공저 󰡔비평, 90년대 문학을 묻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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