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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특집/감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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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15회 작성일 08-02-2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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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문학의 향방


불편한 소설들
―황당하고 괴상한 것들의 봉기, 혹은 반란․2


김남석|문학평론가


1. 더욱 새로워진 작가들에게, 더욱 낡아버린 물음을 던지며
최근, 한국 문단에 1970년대 전후 출생 작가들의 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들은 차별화된 상상력으로 기존의 문학과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의 물리적인 연령을 고려하고, 그들의 성장 환경과 생활 반경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평가는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또 한국 문단이 끊임없이 세대교체를 해왔고, 또 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에서도 그들의 등장과 개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을 무조건 용인할 수는 없다. 그들의 문학과 삶의 기초가 기존의 세대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개성을 존중해서도 안 된다. 최근 우리 문단에서 그들에게 가하는 집중적인 조명 역시 분별해서 행할 필요가 있으며, 이미 행해진 조명에 대해서도 또한 분별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면 박민규, 천운영, 정이현, 편혜영, 김애란 등이다. 이들은 분명 개성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들보다 조금 먼저 등장한 김영하, 박성원, 송경아, 이기호 등과 비교해도 이들의 개성은 두드러진다. 그러다보니 이들에 대한 찬사 역시 차별화에 맞추어져 있다. 가령 박민규의 소설은 기존의 어떠한 스타일에도 속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심지어는 ‘창비’ 계열의 주목마저 이끌어내고 있다. 최근 ‘창비’는 박민규에게 파격적인 연재를 제안했고, 백낙청은 과대평가에 가까운 찬사로 박민규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백낙청의 문학관이 창비 계열에만 묻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비평적 배포가 하나의 문학관에 고립될 정도로 협소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예상치 못한 행보는 다른 의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천운영에게 가해졌던 관심과 2005년 신춘문예(문학비평)에서 쏟아졌던 열광적인 응원, 김애란에 대한 출판사들의 과열 경쟁, 편혜영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등은 작금의 상황에 대해 이견을 갖게 만든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문단의 반응이 능동적이라는 점은 한국 문학의 장래를 밝게 만들지만, 이러한 반응이 적확한 관점을 갖추고 비판적 대안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은 한국 문학의 현실을 우려하게 만들기도 한다.
차별화는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니다. 차별화는 그 이유를 동반할 때, 문학적 의의를 파생시킬 수 있다. 지금, 2000년의 현실에서, 30대 중후반을 통과하고 있는 1970년 전후 출생 작가들의 진입과 활동과 평가가 얼마나 유효한가는 다시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면밀한 검토와 그 위에서 행해진 평가만이, 그들의 문학과, 그들의 문학과 함께 가야 할 비평이, 이 시대를 과연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신시켜 줄 것이다.

2. 과연 박민규를 믿어야 할 것인가
박민규의 소설은 낯설다. 일단 그 낯섦은 형식에 나온다. 박민규의 소설(특히 단편소설)을 펴 보면, 이상한 ‘단락 나누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단편집 표제작 「냉장고」의 일부이다.

신속하고 정확할 줄 알았던 AS는, 그러나 길고 지루하게 한참을 이어졌다. 제상 히터의 점검에서 각종 부품의 교체, 결국은 모세관의 청소까지. 방은 어수선했고, 중복에서 말복 사이의 언제나 찜통 같은 오후였다. 기사는 결국 네 번씩이나 내 방을 방문했고, 수리가 끝날 때마다 매번 다른 얘기를 늘어놓았다. 첫 방문 때는 ‘이제 괜찮을 겁니다’, 두 번째는 ‘거참 이상하네’, 세 번째는 ‘차라리 하나 사시죠’, 네 번째는 들릴락 말락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짓도 이제 관둬야겠어’

소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럭저럭 2학기가 시작되었으나 절대로 맘이 개운할 리 없었다. 결국, 라디오를 분해해 놓고 조립을 못 해 애태우는 소년처럼―나는 냉장의 원리, 냉장고의 구조, 냉장고의 수리, 나아가 냉장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단, 서술하는 외형을 보자. 박민규의 소설은 어떠한 소설이든, 10여줄 안팎의 제법 긴 문단과, 한두 줄의 인상적인 문장만 기술되는 짧은 문단이 교차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10여 줄의 문단과 1~2줄의 문단이 교차 반복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구조는 가독성을 증가시킨다. 박민규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이 보여주는 연속된 사유를 포기하는 대신, 단락화된 그리고 장면화된 편집 효과를 활용한다. 이것은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의 일관된 흐름 없이도 소설의 외형적 틀을 만들어낸다.
외형적 틀을 다시 보면, 제법 긴 문단에서 일련의 서사가 보여주는 속도감이 증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을 예로 들면, 네 번의 방문(AS 기사)이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다. 꽤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네 마디의 대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황의 변화마저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긴 단락에서의 속도감은 상당하다.
그러나 짧은 문단, 그러니까 ‘소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의 경우는, 증가된 속도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긴 문장 다음에 오는 짧은 문장은 속도감을 감소시키고, 심한 경우에는 휴지 상태로 몰고 간다. 결국 긴 문단과 짧은 문단의 교차 반복은, 빠름과 느림의 교차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카메라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긴 문단은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커팅cutting이 빠르고(한 신scene이 짧은 커트cut들로 분할되고), 짧은 문단은 클로즈 업close-up의 형태로 시선을 붙잡아 두는 효과를 거둔다. 시각적으로 보았을 때, 긴 문단도 하나의 틀frame이고 짧은 문단도 하나의 틀frame이다. 비록 분량상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외형적 틀은 등가에 가깝고, 그렇다면 의미상의 가치도 등위에 가깝다. 10줄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과, 1줄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같아야 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긴 문단을 빠르게 훑어가던 독서자의 눈은, 짧은 문단 앞에서 주춤거리며 미진한 속도로 여백을 훑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글자에서 시선이 풀려나며 생각의 여백을 더듬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10줄을 1분에 읽던 속도감이, 순간적으로 1줄에 적용되면서 독서의 여유가 생겨난다. 이것은 빠르게 전개되던(커트되던) 화면이 일시에 정지하면서 긴 롱 테이크long-take로 접어드는 효과와 비슷하다.
박민규의 이러한 화법은 짧은 문단일수록 더욱 짧은 문장으로 구성하려는 의도로 확인된다. 가령 ‘냉장고는 인격(人格)이다.’, ‘과연!’, ‘환장할 노릇이군.’, ‘나는 문을 닫았다.’, ‘하나의 세계였다.’, ‘냉장고가 고요했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짧은 문장을 외따로 떨어뜨려 배치함으로써, 박민규는 소설 내에 속도와 시선의 다채로운 변화와 낙차 큰 결합을 유도했다.

박민규의 소설이 낯설다는 것은 비단 문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민규는 소설 조형 능력에서도 차별화를 보인다. 박민규의 소설은 하나의 제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조형법을 선보인다.(윤대녕의 초창기 소설 중에서 이러한 성향을 보인 작품이 있다.) 가령 「카스테라」는 ‘냉장고’를 중심으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너구리 오락’을 중심으로, 「몰라몰리 개복치라니」는 ‘개복치’를 중심으로 소설을 꾸려간다. 대충 예를 든 것인데, 이것말고도 그의 소설을 얼마든지 이러한 방법으로 작품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고시원 생활’, 「핑퐁」은 ‘탁구’에 대한 정보의 집결지이다.
박민규는 어떠한 주제나 전언을 위해 소재를 모으고 그 소재를 엮고 배치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어떠한 중심 소재를 발견하며, 그 소재에 대한 지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붙여서 마치 소조처럼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소재가 냉장고라면 냉장고에 대한 정보가, 소재가 너구리라면 너구리 오락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문면에 대거 틈입하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소설 조형법은 연상 작용을 넓게 용인하게 만든다. 다시 「카스테라」를 보자. 우리는 이 소설에서 냉장고의 환상적 작용에 시야를 뺏기게 되면서, 과연 냉장고가 소설의 전체 전언과 제대로 융합되는가를 깊게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은유가 아닌 환유적 구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있고, 그 냉장고는 수리를 거부하는 완강한 면이 있고, 그래서 화자는 자체적으로 냉장고를 수리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분야로 공부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이 대략 소설의 앞부분이다. 소설은 냉장고에 대한 흥미로운 지식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면서 독자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는 이러한 전반부와 전혀 관계없이 무엇이든 집어넣을 수 있는 마법과 환상의 냉장고로 넘어간다. 박민규는 시치미 떼고 정말 천연덕스럽게 초자연적인 냉장고를 그리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사지만, 사실 뒷부분의 냉장고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냉장고에서 만들어졌다는 ‘카스테라’가 해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또 구조적인 측면에서 냉장고의 마법이 앞부분에서 말한 냉장고의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박민규의 소설에서 이러한 해석이나 구조적 통합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통합할 수 있다는 생각 위에 만들어져 있다. 냉장고에 관련된 마법도, ‘냉장고’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사고를 구획 짓는 말 중에 하나가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말의 맥락보다는 즉흥성을 중시하고, 논리의 연쇄보다는 비슷한 것, 관련 있어 보이는 것들의 자유로운 전환을 선호한다. 말과 논리의 연속은 항상 깊은 사유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박민규의 소설은 이러한 새로운 세대의 특질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박민규의 소설은 새로운 세대의 불연속적 사유 위에서 서핑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비슷한 것의 연쇄 혹은 관계없는 것들의 자유로운 전환마저 용인하는 환유적 사유의 결과물인 것이다.

문제는 「갑을고시원 체류기」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같은 경우처럼, 현실과 사회에 대한 명상을 가능하게 할 때는 상관없지만, 다른 경우에는 이러한 확장된 상상력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의외로, 그의 소설은 현실과 자본주의와 빈부의 격차와 세계적인 경제 문제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고 있다. ‘후기자본주의’니 ‘국제 시장질서’니 하는 언급은 독자들에게 박민규의 소설이 현실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심지어는 평론가들마저 이러한 언급을 이용해서 박민규의 소설이 전통적인 서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박민규 소설의 구성 체계가 환유적인 입장에 있으며, 그의 소설적 언급이 깊이 있는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소설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소설에서 전통적인 소설의 효과를 발굴하는 것은 무리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언급마저 자신의 소설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주제나 작가의 전언으로서가 아니라)로 간주할 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입장이 소설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언급만이 아니다.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 소설 조형법이 반복되고 있고, 단락을 나누어서 속도감과 시선을 교차시키는 방법도 반복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구영웅전설」이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역시 동일한 구성 체계, 동일한 조형 방식을 고수했으며, 동일한 방법으로 사회와 현실의 문제를 접목시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발표된 「핑퐁」과 같은 연작소설에서는 그 흥미마저 반감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분명 박민규의 작법은 기존의 것과는 달리 새로웠다. 그의 소설은 전통적인 문법을 파괴했다고 말할 만하며, 그의 사유 방식은 문단의 기존 세대와 달랐으며 같은 세대 가운데에서도 이질적이었다. 중심 소재 중심의 환유적 구성은 다른 작가와 그를 구별시키는 그만의 형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낙청이 암시한 대로, 박민규의 비유는 반복과 리듬을 통해 시적인 상징으로 격상되는 장점도 있다. 이것은 90년대 이후 가장 시적인 문체를 사용했다는 소설가 윤대녕과도 차별화되는 강력한 개성이었다.
그럼에도 「핑퐁」은 기존의 방식, 기존의 문제의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대안은 명확하다. 자신의 소설적 매너리즘을 점검해야 한다. 매너리즘은 의외로, 일관성 찾기의 기초 단계일 수 있다. 어떤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것은 답보와 나태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한 단계 더 심층적인 형식과 주제로 나아가기 직전 단계일 수도 있다. 박민규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자기 점검이다. 소설적 형식은 그 점검 이후에 다시 재활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진정성이다. 박민규는 가볍고 유희적인 환유 체계뿐만 아니라, 문학이 현실과 맺는 긴장의 은유 체계도 고려해야 한다. 그가 시적인 문체를 구사할 줄 알고, 「코리안 스텐다즈」처럼 괜찮은 상징 어법을 쓸 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그에 알맞은 새로운 형식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때 다시 지금의 문체와 조형방식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다시 새롭다는 평가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3. 정이현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분명, 2000년대 소설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 이유로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지나치게 솔직하게 당대 성 풍속도를 묘사한 점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되바라진 여자’이다. 서너 남자를 적당히 이용할 줄 알고, 그들의 장단점을 따져 가장 적합한 남자를 물색할 줄도 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요조숙녀인 척할 줄도 안다. 이것을 여성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여성 유형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정이현이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많은 작가들이, 특히 여성작가들이 여성의 이중성 내지는 ‘내숭’을 소설 속에 그려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글 쓰는 이들이 지식인 계층에 가깝기 때문에 대개 내숭은 내숭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거침없는 여중생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독자가 받는 느낌은 보편적인 여성(어린 여성일지라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결손 가정의 특수한 환경이 길러낸 여성의 모습에 가까웠다.
반면 정이현의 소설은 일반적인 그리고 일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정이현의 소설을 읽은 20대의 젊은 세대들 중에서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며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느껴진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접했다.) 이것은 정이현의 소설이 자연스럽고 보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정이현의 소설은 비판적 기능을 내장할 줄 안다. 정이현의 소설에서 조명된 ‘되바라진 여성’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식’으로 결국 원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토록 ‘고르고 골라서’, ‘원하고 원하던’ 남자를 만났건만, 그 남자와의 첫날밤은 수포로 돌아간다. 첫날밤을 치루는 10가지 공식은 그만 10번째에서 파탄을 드러내고, 여자의 치밀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한다.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는 특수한 계층의 특수한 상황을 그려내어 이를 사회의 일부로, 적어도 소설적 반경 안으로 흡수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암시적 비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이현은 김영하에 비해 더욱 적극적이다. 그녀는 되바라진 여자의 야멸찬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 담론의 허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효과를 차치한다면, 이러한 선택과 시각은 직접적인 야유에 해당한다. 소설이 성 의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이현의 의도는 다소 의도적으로 당대 성 풍조를 비꼬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유머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 우리 소설은 유머의 진정한 시험장이 된 듯하다. 199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 소설은 다소 찌푸린 형태의 화자가 제격이었다. 역사의 고뇌를 짊어지거나 혹은 개인적인 아픔에 짓눌려 상심하는 인물들. 그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쉽게 상처받고 가문과 가정의 문제에 흔들리는 다소 나약하고 예민한 종족들이었다. 특히 본격소설은 일반 독자들로부터 우울하다는 평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고뇌 속에 슬그머니 웃음이 틈입하기 시작했다. 성석제와 김영하를 필두로 해서, 이만교․김종광․박현욱이 그러했고, 최근에는 박민규․정이현․김애란 등이 그러하다. 이 작가들은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으려는 포즈에 익숙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차비를 돌려주는 노상강도에게 ‘땡큐’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견지하는 세계관이다. 그들은 유머 감각을 통해 그들의 소설이 지나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절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웃음은 본격문학이 견지하는 진지함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가 특정 계층에 속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섬길 수 있을지라도, 그 작가의 소설은 여러 계층을 아울러야 하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사회의 중립지대나 교차로에서 복잡한 모듬살이의 신호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래전부터 본격문학의 주어진 숙명이었던 고뇌와 위압적인 문제의식과 지나치게 심각한 세계관에서, 기존의 소설을 구해내야 할 숙명 역시 이 시대의 작가들은 저절로 떠안게 되었다.
다시 정이현의 소설로 돌아가면, 정이현 역시 이러한 감각을 체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의 현재 삶에 대한 전투적인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무기가 ‘양은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낡은 팬티’이다. 화자가 남자들의 접근을 막는 가장 커다란 이유. 낭만적 성 행위의 절대적인 장애물인 이 팬티로 인해, 결국 화자는 자신의 순결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정신적인 지조가 무너진 상황에서 낡은 팬티 한 장이 성애를 가로막을 수 있다니.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는 한 되바라진 여성의 영악함에 대한 야유를 감지할 수 있고, 그러한 여성을 다 알면서도 소설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인식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독자도 포함)에 대한 야유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여성의 말로를 통해 ‘씁쓸한 사랑과 사회’에 대해 그려내려는 비판적 조소도 감지할 수 있으며, 팬티 한 장이 보여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의 속내도 구경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에 불편함을 주기 위해서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연애를 하면서, 욕망을 분출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면서 저지르는 행태를, 밝은 문면(文面)으로 끄집어내어 함께 웃고 함께 겸연쩍어하기 위함이다. 정이현의 대담한 문체와 공격적인 야유는 「소녀시대」나 「홈드라마」와 같은 소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소녀시대」 역시 ‘되바라진 여성’을 앞세우고 있다.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의 여성 화자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최상류층에 속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이의 가정은 결손가정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아빠는 바람을 피우고, 엄마는 철지난 꿈에 매달려 각종 강습에 전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빠는 엄마의 재산에 묶여 있고, 엄마는 아빠를 타박하면서도 그 관계를 감히 청산하지 못한다. 딸은 둘 사이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결손 가정이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이현의 유머 감각은 여기에서도 빛을 발해, 허위와 가식으로 얼룩진 부부의 모습을 아이의 눈을 통해 비꼬고 있다. 특히 아이의 언어가 도발적이고 비속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다. 정이현은 아이를 통해 현실에서 통용되는 속어들을 소설 속으로 유입했다.

으 재수 없어. 졸추 열추! 졸라 추하고 열라 추하다. 어쨌든 ‘깜찍이.’ 아빠의 새로운 채팅녀. 나는 또 하나의 이름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하기야 아빠는 그보다 더 심하다. 먼지 부모님 이혼했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나랑 얼굴 마주칠 때마다 걔랑 놀지 말라고 난리, 또 난리를 쳐댄다. 결손 가정 애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나? 켁! 그냥 쭉 하던 대로 음란 채팅이나 열심히 하시지. 오지랖 넓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너 기분 캡 꿀꿀할 텐데 내가 옷 사줄게. 그 여자는 내가 뭐 사왔는지 일일이 검사도 안 하잖아.”

정이현의 소설 속에서 통속어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언어 사용에 대한 문제는 다시 검토해야겠지만, 정이현 세대의 소설가들은 일단 거부감이 덜 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요즘 젊은 작가들 중에서 비속어를 고의적 차용한 사례는 김영하의 「비상구」부터이다. 그 이전 세대에도 소설 속에 욕이 등장하고, 비속어가 차용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화체의 문장 속에 국한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소설에서 내포화자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부분은 지식인(소설가)의 언어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비상구」를 보면, 하류 인생의 언어와 세계관을 도입하기 위해서, 소설의 언어에 비속어를 대거, 그것도 고의로 도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이현이 김영하와 다른 점은, 고의적으로 도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가령 박민규의 경우에도 어릴 적 흔히 쓰던 욕을 글의 제목으로 삼는 등, 비속어의 도용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떤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이현의 소설에서는 그 어떤 효과를 고려하기 이전에, 언어의 분류 자체를 거부하는 성향을 보인다. 특히 「소녀시대」와 같은 소설에서 보이는 언어적 특성은 기존의 소설 언어/비속어의 개념과 경계를 무화시키려는 의도를 확인하게 만든다.
이러한 정이현의 글쓰기는 소설 언어의 습관적 용례에 익숙한 이들의 내성을 파괴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지향하는 바는 웃음과 함께 ‘불편함’이다. 이른바 불편한 웃음. 이 불편한 웃음은 익숙한 것, 습관적인 것, 고상해야 할 것 사이에서 일탈이 가져오는 불편함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본적 대립 구조마저 통쾌하게 무화시키는 정이현의 거침없는 태도에서 파생된다.
글쓰기와 관련지어 각주의 문제도 살펴 볼 수 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달린 각주를 보면, 각주라는 아카데믹한 언어의 사용처를 얼마나 철저하게 정이현이 농락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때 나오는 것은 웃음이다. 각주는 고증과 권위와 객관화를 위한 언어의 딱딱한 사용처였으나, 정이현은 그러한 구분 자체를 무화시키려는 듯 각주를 마음껏 희롱하고 있다.
정이현은 웃음과 언어 그리고 특유의 거침없는 불편함으로 특이한 소설적 성장을 거두었다. 그녀의 첫 번째 작품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일별하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적 성취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녀의 웃음이 새로운 야유의 대상을 찾지 못했을 때이다. 가령 「트렁크」, 「순수」를 보면 잔혹한 상황을 조성해서, 다른 소설들(다른 작가나 심지어는 자신의 작품들)과 차이를 구현하려는 듯하다. 이광호의 지적대로, 「트렁크」, 「순수」 등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악한 여자’라는 점에서 정이현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지만, 공포 영화 등에서 익숙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개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정이현의 장기인 기존의 상투적 인물을 전복시키면서도, 우리 삶의 이웃에 위치한 일상인의 모습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정이현이 소설은 아직은 도정에 있다. 정이현은 그녀의 소설이 가져온 통쾌함과 웃음에 대해 다시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 웃음의 본질이 ‘불편함’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불편함은 소설 문법을 뒤흔들고 삶의 타성을 조롱하는 그녀의 내적 통찰과 촌철 살인하는 언어의 구성에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잔혹한 소재만으로, 그러한 의도된 효과를 내기는 쉽지 않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소설은 특이한 소재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의 삶에 충격을 가할 수 있음을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4. 천운영의 소설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

차가운 쇠의 기운이 섬뜩하고 낯설었지만
매혹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
빙그르르 돌면서 귓가를 간질이는 차가운 쇠의 유혹.
손 끝에 전해져오는 떨림.
어둠의 결을 풀어내는 맑고 경쾌한 진동.
바르르 떨리는 공기의 호흡.
―천운영 「눈보라콘」

「눈보라콘」의 화자는 몰래 숨어 들어간 음악실에서 심벌즈를 처음 대면한다. 홀린 듯 심벌즈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년. 그러다가 소년은 가만히 심벌즈에 손을 댄다. 차가운 쇠의 기운이 섬뜩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 안에 도사린 매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부딪쳐보는 소년.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조심성도 잊고, 음악실의 무거운 적막도 잊고, 무작정 차가운 쇠의 유혹에 온몸을 맡긴다. 빙그르르 귓가를 간지르는 금속성의 유혹. 손끝을 타고 ‘바르르’ 흘러내리는 두근거림. 어둠의 결로 스며드는 맑고 경쾌한 소리. 그 소리의 틈새를 따라 조금씩 요동치는 수상한 공기의 움직임.
천운영은 소설집 󰡔바늘󰡕에서 유난히 금속(성)에 집착했다. 그녀는 데뷔작부터 금속이 전하는 불온한 떨림과 심장 박동을 계산할 줄 알았다. 손의 진동과 내면에서 번져 나오는 수상한 파괴 심리도 그려낼 줄 알았다. 이것이 그녀를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만들고, 그녀의 소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천운영의 데뷔작 「바늘」은 이 점을 확실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바늘을 알코올 램프에 달구어 각각의 바늘귀에 명주실을 꿴다. 바늘 끝에서부터 0.5센티미터가 남을 때까지 조심스럽게 명주실을 감는다. 명주실을 감을 때는 실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잉크가 뭉치거나 한꺼번에 나오는 일이 없다. 바늘귀 부분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1센티미터 정도 맨 몸으로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명주실에 먼저 베네치아 레드를 묻힌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 이슬이라고 부른다. 첫 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천천히 흘러 내려온다. 붉은 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여자는 침착하게 바늘을 준비했다가, 제물을 바치는 사제처럼 첫 땀을 놓는다. 준비된 바늘이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순간, 강렬한 피 냄새와 자극적 색채와 손끝의 떨림이 숨죽였던 공기의 결을 따라 일시에 퍼져나간다. 인물의 내면에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면서, 기묘한 흥분이 온몸으로 번져나간다. 마치 심벌즈의 유혹에 넘어간 소년처럼, 바늘을 손에 쥔 여자는 그렇게 차가운 쇠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 소설에는 문신을 새기는 과정이 문면에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문신을 새기는 여자의 떨림과 흥분도 문장 안에 교묘하게 새겨져 있다. 문신을 새기는 과정은 날카롭고 뾰족한 물체가 살갗을 파고드는 물리적 섬뜩함을 전해주고, 인물의 내면에 웅크린 가학적 공격 본능을 확인시켜 심정적 섬뜩함을 전해준다. 더구나 짧게 잘린 바늘 끝이 남겼을 인체 내부의 상처는 일종의 공포가 되어 우리를 전율시킨다. 즉, 차가운 쇠는 파열의 이미지를 동반하게 된다. 차가운 쇠는 「숨」에서는 소머리를 갈라내는 접칼로 변모한다.

새 면장갑을 낀다. 머리 하나만 갈라도 장갑은 피로 범벅이 된다. 그러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장갑을 벗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젖은 장갑에 달라붙는 칼자루와 칼날의 느낌이 좋다. 접칼을 쥐고 작업대에 바싹 붙어 선다. 소의 잘린 목과 손에 들린 접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아직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코거울을 향해 칼끝을 들이댄다. 커다란 콧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올 것 같다.

흉기의 변신은 각 작품에서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월경」에서 아내와 정부(情夫)를 난자하는 ‘잘 벼린 칼 한 자루’와, 「당신의 바다」에서 곰장어 머리에 박힌 송곳과, 「유령의 집」에서 쥐를 잡기 위해 설치된 ‘덫’은 모두 흉기의 목록이다. 반면 금속성 흉기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소설인 「등뼈」에서는 ‘쇠로 만들어진 침대’, ‘쇠로 만들어진 봉’ 등이 언급되며 금속성이 계속 환기되고, ‘쇠꼬챙이에 찔린 듯한 통증’이나 ‘부러진 갈비뼈가 날카롭고 무자비한 칼이 되어 심장을 찔렀다’와 같은 표현이 사용되어 파괴적인 느낌을 보강하고 있다. 「행복고물상」에서는 고물상 안마당을 가득 채운 고철 잔해가, 「눈보라콘」에서는 두텁게 선체의 표면을 점령하고 있는 녹이, 「유령의 집」에서는 ‘각종 덫과 공기총 사슬 예리한 칼들과 수술용 바늘 솜 방부제나 마취제 다양한 굵기의 철사들’이 연극 소품처럼 소설 여기저기에 늘어놓아져 있다.
금속은 인간의 신체로도 변환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육식을 좋아하는 여자와 여자 앞에 놓인 각종 육질-금방이라도 피가 배어나올 것 같은 육류나 억센 힘줄 류의 살-과 육질을 찢고 씹는 손톱 혹은 이빨이 이루는 구도이다. 그렇다면 금속성 물체가 야기하는 유혹은 인간의 신체에서 발산되는 욕망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욕망은 허기이고,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한 도살 욕구이거나 도살된 짐승을 탐하는 폭식 욕구이기도 하며, 때로는 도살을 넘어 대상을 파괴하려는 살해 욕구이기도 하고, 드물지만 전도된 성욕이기도 하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성욕은 파괴적인 감정과 등가이거나 살육의 이미지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천운영이 집중하는 욕망을 ‘살육의 욕망’이라고 간추릴 수 있겠다. 천운영 소설에 내장된 ‘차가운 금속성의 유혹’은 거꾸로 말하면, ‘뜨거운 살육의 욕망’이다. 금속성 흉기가 난자하며 상대의 살을 찢고 파고드는 섬뜩한 장면들은 이러한 살육의 욕구가 발현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왜 천운영은 이러한 살육의 이미지를 자신의 소설 속에 확산시키려고 했는가.
이러한 살육의 이미지는 천운영 소설에 활력과 원기를 불어넣고 있다. 날카롭고 파괴적인 것이 횡행하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삶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지속할 수 없다. 천운영은 위험한 것들의 활력을 빌어, 개인적인 안주에 빠져드는 일상인들을 경계시키고 긴장시키는 셈이다. 또한 섬뜩하고 두려운 감정을 동반한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여성적 자의식에 매몰된 1990년대 여성 소설이 처해 있던 답보 상태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천운영의 소설이 원초적이고 변별되는 욕망과 그것을 드러내는 독창적 표현 양상을 소설의 화두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소설과 그녀를 분리시키는 첫 번째 개성이었다.

다음은 그녀의 문체이다. 1990년대 이후 소설에서 묘사의 가치와 빈도가 전반적으로 감소한 인상이다. 젊은 소설가들은, 과거 소설이 지향하던 인물의 외양 묘사와 심리 묘사 혹은 시공간적 배경 묘사에 대해 예전만큼 역점을 두지 않았다. 이것은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묘사는 기본적으로 정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에, 빠르고 현란한 것을 숭앙하는 현대 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은 이러한 묘사에 대해 주저하는 감이 없지 않다. 꼭 필요한 묘사에도 예전과는 달리, 대단히 소략한 방식과 분량만 할애했다. 묘사 불황의 시점에서 천운영의 소설은 묘사의 가치와 그 필요성을 증명해주는 희귀한 예였다.

윗입술과 앞니 사이에 첫 칼을 꽂는다. 앞니를 중심으로 왼쪽 볼따구니와 오른쪽 볼따구니의 살을 안쪽에서 발라낸다. 눈과 콧등으로 이어지는 안면근육을 따라 조심스럽게 칼을 쑤시고, 손대중으로 눈알과 연결된 근육을 끊는다. 머리 가죽을 위로 들어올려 뼈가 잘 드러나게 한다. 머리 가죽을 손상시키지 않고 한 덩이로 분리해야만 나중에 털 벗기는 작업이 쉬워진다.
칼을 손 쥔 채 위턱과 아래턱을 벌린다. 다라락, 경쾌한 소리가 나며 뼈가 벌어진다. 이빨 사이로 나와 있던 혓바닥이 위로 벌떡 선다. 혀끝을 한 손으로 잡고 혀뿌리를 끊는다. 혀를 빼내어 바구니에 따로 담는다. 입천정과 입바닥을 갈래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칼집만 내놓으면 손으로 잡아당겨도 쉽게 분리된다. 아랫입술을 뼈에서 떼어내고 머리뼈를 앞으로 잡아당긴다. 머리 가죽과 살덩이가 한 덩어리로 뼈에서 떨어진다.
―「숨」

그녀의 묘사는 젊은 소설치고는 대단히 길고 정교한 편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천운영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경우이다. 번뜩이는 감수성으로 상황을 미화하여 그 질감을 돋보이게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인용문에서 천운영은 도살업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영역에 고의로 접근했을 때에만, 성사해낼 수 있는 묘사를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천운영 소설의 특장점이다. 미래의 소설이 창작자의 개인적 체험이나 제한된 정보만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천운영의 소설은 적어도 ‘머리로 쓰여진 소설’은 아니다. 그녀의 소설은 ‘발로 쓰여진 소설’이며, 면밀한 사전 조사로 흥미로운 정보를 구축한 소설이며, 따라서 적어도 소설가적 소임이 투영된 소설이다.
현대 사회는 각종 영역이 전문화되고 직업화되고 세분화된 사회이다. 사회는 자기의 전공분야를 특기로 하는 무수한 인력들에 의해 세부적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직업을 갖고 사회에 입문한다는 것은 거대 조직의 좁은 영역 안에 자신을 유폐하는 꼴이다. 아무리 인접한 분야라 하더라도, 아무리 해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의 영역은 미지의 세계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 소설은 세분된 현실의 영역을 이리저리 연결하는 가교 소임을 맡아야 한다. 많은 예술 작품들이 삶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를 구체적인 전문 분야에서 찾아내고 있다.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조차도 이러한 소임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직종은 의사나 판사와 같은 일정한 지위를 갖춘 직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쇼 호스트, 호텔 지배인, 신발 디자이너, 모델 등 사회 각 분야를 책임지는 특수 직종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직종들의 내부 세계를 엿보고 그들의 삶의 애환을 구경하는 것에 텔레비전 드라마의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영역을 궁금해 하는 우리들에게 왕성한 정보와 구경의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90년대 소설은 이러한 타자의 영역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다. 오히려 좁은 개인의 영역, 그것도 일상인의 영역에 그 구획선을 긋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소설들이 동어반복적인 상황을 설정해놓고, 개인적인 취향과 일상적 사건을 열거하는 형식에 매몰되었다. 그나마 자아의 섬세한 표정이나 글 무늬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경우는 다행이었다. 많은 소설들이 그 개인적이 취향과 심정마저 변별시키지 못하고 비좁은 세상을 더욱 비좁게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낳았다. 소설을 지나치게 안이하게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천운영의 「바늘」과 「숨」과 「행복한 고물상」을 자연스럽게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들은 우리 주위에 있지만 낯선 영역에 대한 일종의 관찰 보고서이다. 「바늘」은 문신의 분야를, 「행복한 고물상」은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폐휴지 수집 중개상의 모습을, 「숨」은 도살업자들의 세계를, 소설 속에 기억시키고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소설인 「숨」을 중심으로 천운영의 소설이 기존의 소설과 달라지는 지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밝힌 대로, 「숨」은 도살업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도살업자에 관한 소설은 두 작품이 더 있다. 하나는 황순원의 「일월」이고, 다른 하나는 서종택의 「수렁」이다. 특히 서종택의 「수렁」에는 소를 잡는 장면이 「숨」과는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렁」의 화자는 어릴 적 백정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그 할아버지의 신기에 가까운 도살 장면을 ‘춤’으로 이해했다.

소가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손에 들었던 소뿔을 조심스럽게 벽에 걸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소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곰보 아저씨에게 고삐를 잡힌 소는 그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할아버지 쪽을 향했다. 흔들리고 있는 석유 등잔의 불빛에 할아버지의 파랗게 밀어버린 웃머리가 희끄무레하니 빛나고 있었고 창고 안벽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너울거렸다. 할아버지는 둥그런 원을 그리며 소의 주위를 돌았다. (중략) 할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세우고 소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세 개의 그림자가 잠깐 벽에 얼어붙었다. 할아버지가 빠르게 소에게 다가갔는가 하자 소는 심하게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수렁」

소와 할아버지 그리고 고삐를 잡은 곰보의 그림자가 벽에서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소가 쓰러진다. 할아버지는 우아하고 신비한 동작으로 소의 죽음을 집행하고 또 위로한다. 이러한 환상적 묘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수렁」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보기 드물게 신비하고 아름다운 묘사이기 때문이다. 서종택이 묘사한 도살 장면과 천운영이 묘사한 소머리 분리 장면은, 엄격하게 말하면 동일한 층위에서 비교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수렁」의 화자는 아이이고 몰래 엿보고 있기 때문에, 묘사에 제약이 생겨날 수 있다. 반면 「숨」의 화자는 어른이고 자신의 행위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묘사의 정확성이나 세부 효과가 증폭될 수 있다. 이것은 내부적 시선에 의해서 정리된 결과이다.
그러나 작가의 태도와 작법의 차원으로 따지면 조금 달라진다. 「수렁」에서 신비한 느낌의 묘사가 가능했지만, 그 묘사가 적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소 잡는 광경을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숨」은 소머리를 벗겨내는 것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들도, 당시 광경을 비교적 생생하게 연상할 수 있다. 작가가 이 상황에 대해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천운영이 도살업에 종사한 적이 없으니, 소설을 위해 일부러 체험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창작집의 서문에 이러한 근거가 나와 있다.)
소설의 존재 이유를 따지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 중 하나가 소설이 정보의 매개체이자 집산처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견인하고 가독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흥미롭고 궁금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보는 실제 경험이나 이차 저작이나 각종 인공물의 형태로 얻어질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소설에서 직접적이고 현장적인 체험이 줄어들고 각종 이차 저작 형태의 정보로 대체되거나, 각종 문화적 유행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양상이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천운영은 이러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는 작가였다.
문단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은 소설이 발품을 들여 써야 한다는 것에 별로 이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분야를 공부하고 때로는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소설은 써야 한다. 이렇게 쓰인 소설만이 여타의 소설과 변별되는 특징을 부여받고 그 존재 이유를 일차적으로 인증 받게 된다. 좋은 정보만으로 좋은 소설이 쓰일 수는 없지만, 좋은 정보 없는 좋은 소설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천운영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두 번째 소설집 󰡔명랑󰡕에 오는 순간, 그녀는 이러한 필요성을 외면했다. 󰡔명랑󰡕의 작품집에 담긴 작품들은 일단, 침착해졌다. 금속성의 무기를 들고 소의 머리를 자르거나 낯선 사내 위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던 강렬한 개성이 없어졌지만, 삶과 주변 인생에 대한 이해와 관조의 태도는 향상되었다. 이것은 단편소설을 대하는 작가 의식의 성숙일 수 있다. 또 천운영의 작품 스타일에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성장의 한 측면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퇴행도 있다. 일단, 그녀의 최근 소설은 신변잡기적인 묘사와 소재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창작을 위해 특별히 소재를 취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전문적인 영역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관찰 역시 발견할 수 없다.
반면 동어반복적인 플롯이나 구성 방식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한 경우, 부모와 떨어져서 살아야 했던 아이들의 성장기를 다룬 경우, 동성애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묘사한 경우 등이 그러하다.
「명랑」, 「모퉁이」, 「아버지의 엉덩이」 등에서 등장하는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젖을 만지는 아이는 천편일률적이다. 「늑대가 왔다」나 「모퉁이」나 「아버지의 엉덩이」 등에 등장하는 외로운 아이와 비정상적인 가정(냉정한 부모와 가난한 살림살이) 구도 역시 동어 반복적이다. 한편 「멍게 뒷맛」은 같은 여자에 대해 이웃집 여인이 갖는 묘한 가학성을 다룬 경우이지만, 이미 「담배 피우는 여자」와 같은 소설에서 그러한 감정은 선취된 바 있다. 또 「세 번째 유방」은 그 중 기묘한 정보가 숨어 있지만, 동성애로 빠져들면서 이미 비슷하게 발표된 동성애 소설과의 변별력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비개성적 소설의 등장은 천운영이 초창기에 보여주었던 좋은 품성과 바람직한 창작 태도를 잃어버리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명랑󰡕 속의 작품들은 소설가의 유년 체험이나 일상적 정보, 그리고 일반적 감수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 작품을 대표하는 빛나는 묘사나 악착같은 취재 열기는 찾을 수 없다. 비록 소설의 주제를 구현하고 단편소설의 침착한 성품을 진취시킬 수는 있었으나, 세상에 대해 도발적으로 발언하고 섬뜩한 이미지를 통해 독자를 긴장시키는 날카로움은 사라진 셈이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변화가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천운영의 소설에 대한 상찬은 암묵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데뷔 시절 받았던 전폭적인 지지와 찬사 덕분일 것이다. 최근에는 장편소설을 연재해서 그 주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작품의 성취와 완성도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초심이다. 자료를 모아쓰는 소설과 개성적인 묘사 그리고 현실과 작금 소설에 대한 대타적 의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아니, 빨리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천운영의 소설은 2000년대의 외면하기 힘든 화두라 할 수 있다.

5. 편혜영의 소설이 진정으로 불편해지기 위해서는
최근 소설 중에서 편혜영 소설만큼 불편한 소설을 보지 못했다. 장정일이 그러했고 백민석이 그러했듯이, 편혜영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편혜영의 경우, 그녀가 신인임을 감안하면 그러한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편혜영의 소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를 중시하는 그녀의 소설 작법이, 내부에서 또 다른 규격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소설집) 󰡔아오이 가든󰡕을 보면, 그녀의 소설 조형 방법과 소재 취급 방식이, 거의 모든 작품에 유사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신인 작가의 경우, 협소한 세계를 그리거나 일정한 창작 방법에 갇혀 있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가령 위에서 상찬한 천운영의 경우에도,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 󰡔바늘󰡕에서 금속성의 흉기라는 동일 소재를 반복 변주한 흔적이 있다. 그러니 어떤 소설적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 문제는 편혜영의 소설이 이러한 답습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 자신이 끌어 모은 소설 세계의 구성 요소(소재 혹은 삽화)에 대해 사고하기를 기피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서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고 동일한 소설 세계를 그녀내고 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피기 위해서, 그녀의 소설 가운데 한 편을 골라보자. 「마술피리」는 상대적으로 주목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나머지 작품에 비해 인식적 혼란이 적다는 특징이 있다. 먼저, 소설의 환경이다. 편혜영은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더럽고 어지럽고 기괴스러운 공간으로 조성한다. 「마술피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꾸며진다.

몇 년 동안 창을 막고 있는 두꺼운 휘장과 빨지 않은 침대 시트와 베개. 때가 묻은 옷, 세탁도 하지 않고 일 년 내내 깔아놓는 싸구려 양탄자에 득실한 진드기가 병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놀이방에 다녀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미아가 천식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미아가 태어날 무렵 엄마는 짙은 녹색에 붉은 꽃잎이 프린트 된 두꺼운 이중 커튼으로 집 안의 모든 창을 꽁꽁 닫았다. 대낮에도 집은 외딴 골목길처럼 어두웠다. 커튼은 여름철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붉고 두꺼운 커튼은 집을 단숨에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가끔 미아는 누군가에게 뱃속에서 끄집어내졌다기보다는 휘장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마술 피리」

그냥 보기에는 더러운 집이다. 빨지 않는 침구류와 옷들이 굴러다니는 집. 그러나 그 집은 이상 심리가 투영된 집이다. 이상 심리의 소유자는 대개 엄마이고, 그 엄마의 영향을 받은 자식들도 대체로 정상이 아니다. 가령 「저수지」와 같은 작품을 보면, 저수지 근처의 외딴 집에 자식 셋(그 중 하나는 죽었다)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엄마는 자식 셋을 집에 남겨두고 떠난 상태이다. 떠날 때 엄마가 아이들에게 집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누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며 자신이 올 때만 기다리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 당부를 철석같이 믿은 자식들은 쥐에게 물리고 손이 썩고 한 아이가 죽어도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정상적인 눈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요즘 간혹 발견된다는 ‘쓰레기 집’과 같은 상황이 현실에서는 가장 유사한 상황일 것이다.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어머니, 그 어머니 밑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자식들. 텔레비전에도 가끔 등장하는 이러한 집은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영위하지 못하는 어른들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편혜영의 소설에서 불결한 공간, 학대받는 자식들, 이상 심리의 부모(주로 어머니)가 등장한다고 해도, 편혜영의 소설이 현실에 있는 ‘쓰레기 집’과 ‘아동 학대’의 문제를 다룬다고는 볼 수 없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상황 자체를 위해 이러한 공간을 조성했고, 그 내부에 불편한 가족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설 작법은 전통적인 소설 관습에 익숙했던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소설이 옳고 그름을 대변하고 가늠하는 절대적인 도덕 교과서는 아니지만, 소설이 현실 사회의 문제와 논점을 제시하고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보아왔던 사람들에게, 가치 판단 자체를 도외시하고 어쩌면 그런 것들에 대해 전적으로 무관심한 소설의 출범을 마냥 기쁜 눈으로 응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학적 가치를 논하기에도 천편일률적인 소설적 배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의 소설집에서 이러한 불결한 환경 묘사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데, 하나같이 그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에서 함부로 믿기 어렵다. 다시 예를 찾아보면, 이러한 불결한 환경은 「아오이가든」이나 「맨홀」과 같은 소설에서는 도시 전체, 즉 사회 전체로 확대되어 있지만, 역시 그 안에서 우리의 삶과 주거환경에 대한 의미심장한 은유나 쓸모 있는 착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도시의 모습은 카뮈의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 같지만, 그 안의 인물들은 공포영화에서 몰려다니는 시체들에 불과했다.

다음, 편혜영의 소설에는 모호한 묘사가 있다. 어느 소설에나 한 대목씩 있는데, 가장 모호함의 정도가 약한 「마술피리」에서 찾아보자.

미아는 엄마의 자궁을 찢고 태어났다. 나 외에는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는 엄마의 자궁은 미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다. 엄마의 벌린 가랑이 사이로 붉은 피가 끝없이 쏟아졌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는 불처럼 이글거렸다. 엄마가 그 불에 타 죽을까봐 겁이 났다. 나는 무턱대고 소리를 질렀다. 재갈을 물고 있어서 입을 벌릴 때마다 침이 흘렀다. 얼굴은 땀과 침과 알 수 없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벌린 입에서는 으흐흐흐 하는 신음 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엄마는 자주 내 뺨을 때렸다. 내가 정신을 잃으려고 해서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벙어리 울음 같은 신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엄마가 불같은 피를 쏟아내면서도 죽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한편으로는 서운해 죽을 지경이었다.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붉게 물든 엄마의 가랑이에는 내가 긁은 손톱자국이 강처럼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붉은 강은 엄마의 아랫도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엄마는 강장동물처럼 커다란 구멍을 있는 힘껏 벌려 핏줄기를 끌어안았다. 미아는 그 붉은 구멍의 끝에서 터져 나왔다. (중략) 뜨겁고 습한 공기가 흐르며 끊임없이 잠이 쏟아지던 날 중의 하루였을 것이다. 가엽게 헐떡거리고 아랫도리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던 날 중의 하루였을 것이다. 그날들은 분명 나의 것이자 엄마의 것이었다.

인용된 대목의 앞부분만 읽으면, 엄마가 둘째 딸 ‘미아’(이름이 미아인 것은 퍽 상징적이다. 마치 이 아이의 정체나 출신이 모호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를 낳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의혹이 들기 시작한다. 붉은 비가 불처럼 이글거렸다는 표현도 그러하고, 엄마가 때렸다는 뺨도 그러하다. 그로테스크한 묘사를 즐기는 편혜영이, 붉은 피와 화염의 붉은 색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는, 미아를 낳은 것이 ‘나’ 즉 첫째 딸일 수 있음이 암시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화자 자신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끊임없이, 미아가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우긴다. 아마도 엄마가 첫째 딸에게 교육시킨 것을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딸은 고백한다. 미아가 태어난 날이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면서 동시에 엄마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라고.
미아의 아버지는 아마 이 집에 잠시 묵었다는 사촌이었을 것이다. 소설 중에는 사촌이 첫째 딸, 즉 화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종사촌간의 근친상간이 있었고 그 결과로 미아라는 화자의 딸이자 공식적으로는 동생인 아이가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숨겨진 비밀은 이 소설을 더욱 비밀스럽게 만든다. 엄마가 커튼을 치고 미아를 학대하는 이유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모호한 상황에 관련한, 이 소설만큼 그 이유를 뚜렷하게 제시한 경우도 드물고, 설령 그 모호한 묘사를 뚫고 진실 너머를 구경한다고 해도 그 의미를 감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가령 「저수지」에서 마지막에 실종되었다는 노파는 오두막집에서 반 짐승 상태로 살았던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설령 그렇다면, 그 노파가 실종되는 것이 이 소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 노파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 손에 넘겨진 것에 분노했다는 뜻인가? 더 근본적으로 도대체 이 소설의 괴물은 무엇이며, 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것을 그려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편혜영의 많은 소설들이 비슷한 설정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비슷한 질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환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소설에서, 모호하고 이중적인 모습은 현실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그에 필적하는 상황을 그냥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과학적으로 풀어 설명 받을 수도 있다. 토도로프는 두 해석 사이에서 망설임을 유발시킬 수 있는 소설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환상소설이라고 했는데, 편혜영의 소설이 그 주저함을 의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저수지」의 예를 다시 든다면, 과연 저수지가 공포스러운 이유가 무엇인지 미처 설명하지 못했고, 그 옆에 사는 아이들과 엄마(어쩌면 노파)의 모습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괴물을 “뼈가 겉으로 드러난 채 온몸에 가시가 돋친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가, 다시 “어떤 날은 날카로운 이빨에 붉은 피를 묻힌 늑대의 형상이기도 했”으며, “안개에 묻혀 형상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늑대인 것 같기도 하고 들개인 것 같기도 한, 야생의 것들이 내는 소리를 합쳐 놓은 듯한 소리”로 울기도 했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것이 괴물의 본 모습인지 마무리 짓지 못했다. 설령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고 해도, 그 착각의 주체가 아이들인데 왜 그러한 착각이 들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환상적인 것들이 등장하고 직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제시되고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배치되지만, 그 마무리는 속 시원하지 않다. 현대소설은 결말이 애매한 것에 그 특징이 있지만, 편혜영의 설정은 보다 숙고할 여지가 많다고 해야겠다. 그런 면에서 모호한 묘사, 환상적인 설정은 재고를 요하는 대목이다.

그 다음으로, 공포스러운 동물이나 시체에 대한 언급이다. 그녀의 소설은 아무것이나 펴보아도, 시체에 대한 언급이 줄을 잇고 있다. 단편집 발문을 쓴 이광호는 이러한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엽기적인 것들의 세부를 전시하고 대상화하는 하위 대중문화의 영역을 ‘억압적 탈승화’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그것과는 조금 비껴 서 있다. 그것은 엽기적 대중문화의 시각적 쾌락 효과 혹은 도착의 기호학 너머의 세계이다. 편혜영은 시체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시체 되기’의 국면으로 끌고 나간다. 이 ‘시체 되기’ ‘동물 되기’ ‘벌레 되기’의 상상력은, 인간 존재의 주체화 과정을 해체하고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시각적인 코드에서의 시체의 발견과 전시가 아니라, ‘시체 되기’를 통해 경험되는 ‘다른 삶’이다.
―이광호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랜드」

이광호의 해설은, 편혜영의 소설이 실제 도달한 성취보다 더욱 유연하게 해석하는 듯하다. 편혜영의 소설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관점을 피력하는 이광호의 평론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와의 밀착 관계를 따져보면 몇 가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이광호의 해석대로 편혜영의 소설은 “시각적인 코드에서의 시체의 발견과 전시가 아니라, ‘시체 되기’를 통해 경험되는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는가. 편혜영의 소설이 지향하는 소설적 환경에서 걸어 다니는 시체, 자신이 죽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영혼, 불쑥불쑥 떠오르는 사체의 일부 등이 과연 우리에게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는가.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영화 <식스 센스>에서 주인공은 괴한이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일상을 영위하는 영혼으로 그려내었고, 반전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었던 장면들이 사실은 영혼의 착각이었음을 시사했다. 이 영화의 반전은 영화 시나리오 사상 가장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편혜영의 소설 가운데에서 「문득,」과 같은 작품이 이러한 반전과 유사한데,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모호한 상황에서 의미 있는 상황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혼란스러워 그러한 반전이 제대로 소용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여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달라져야 할 소설적 상황이다. <식스 센스>의 경우, 반전 이후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다시 해석해야 했으며, 영혼의 외로움이나 남편 없이 혼자 살아야 했을 여자의 아픔을 다시 새겨야 했다. 하지만 「문득,」에서는 범행 동기부터 시작해서, 죽은 여자가 결국 남아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도 명확하지 않다. 죽은 여자로부터,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다른 정보를 얻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런데 이광호의 표현대로 하면, ‘다른 삶’을 구경할 수 있을까. ‘다른 삶’이 상상으로 채워진 영혼들의 세계를 구경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진대, 한 여자의 억울한 사연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편혜영의 장점은 ‘시체’라는 오브제를 기피해야 할 소설의 소재에서, 활용 가능한 소재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약점도 내재한다. 왜 시체들을 활용해야 하는가라는 점에서는 깊이 있는 천착이 없었다.
1970년대 전후 출생 작가들의 성장 배경을 보면, 시체들과의 친숙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각종 영화, 특히 공포영화에서 시체들은 익숙한 형태로 뇌리에 저장되어 있다. 시체들이 걷고 영혼들이 인간 세계를 탐구하고 그들과의 공존에 몸서리치거나 흥분하는 것은 영상물의 세례를 받은 1970년대 전후 출생 작가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문제는 그러한 설정이 가져오는 공포를 제외하고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s)>나 <디 아더스(The Others)> 같은 영화들은 일정한 해답을 줄 수 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래쉬가 만들었던 인공적 환영들과, <디 아더스>의 영혼들이 느꼈던 인간이라는 타자화된 존재들은, 인식의 전환이라는 발상적 측면에서의 충격과 함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소통을 꿈꾸지만 소통되지 않는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홀로 상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천재의 고독이나, 불안에 떨기는 마찬가지인 유령들의 세계를 엿보고 그들의 삶 속에 투영된 보편적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타자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편혜영 역시 시체들의 세계에서 보편적 인간의 삶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체들의 세계가 지닌 그로테스크한 측면이나 엽기적인 사건 혹은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 묘사 못지않게 그 안에 투영된 보편적 상황, 보편적 생활, 보편적 심리를 살펴야 한다. 시체들의 이야기가 정말 이해받지 못하는 시체들의 이야기로만 끝난다면, 우리는 그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마냥 신기함에만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혜영 소설이 진정으로 불편해지기 위해서는, 읽는 이들에게 불결한 환경과 기괴한 가족 구조와 모호한 착시 현상과 시체나 끔찍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멈추지 말고, 왜 그것을 보아야 하는지 설득시켜야 한다.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은 그 자체로 충격이지만, 그 충격은 독서의 완료와 함께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독서의 기억을 연장하고 책의 의미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그 광경을 목격해야 하는 이유를 첨부해야 한다. 이광호는 중요한 언급을 했다. 전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대한 염탐이라고. 그 염탐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기 위함이며, 그 안에 투영된 우리 세계의 모습을 보고, 그 세계가 얼마나 낯선지를 스스로 깨닫기 위함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면, 편혜영의 불편함은 의미 있는 미학적 자질로 기억될 수 있다.

6. 모든 문학이 진정으로 차이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문학은 차이를 원한다. 현실과의 차이를 원하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차이를 원하며, 기존에 이미 차이를 지향했던 다른 작품들과의 또 다른 차이도 원한다. 그런 면에서 젊은 작가들의 차이에 대한 맹신은 정당하다.
앞에서 살펴 본 박민규, 정이현, 천운영, 편혜영의 경우도 그 차이를 추구하는 경우이다. 아니 그 어떤 세대보다 그 이전세대, 심지어는 같은 세대와도 다르기 위해서 애쓰는 경우이다. 결국 모든 글은, 모든 창작은 차이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네 젊은 작가에게서 발견된 대로, 차이는 곧 반복을, 반복은 곧 안주를 가져온다. 다소의 편차는 있겠지만, 네 명의 작가들이 어려워하는 지점은 획기적인 차이가 소멸되고 그 차이마저 기존의 것들 속으로 편입될 때이다. 박민규의 문체와 소설 조형 방식은 이미 익숙해진 형식이 되었고 그에 따라 과연 이러한 형식으로 계속 소설을 써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문제 제기가 이어질 때가 되었다. 정이현의 되바라진 여자와 야유, 천운영의 편리해진 글쓰기, 그리고 편혜영의 시체들은 이제, 전혀 새롭지 않다. 그녀들의 글쓰기는 변화를 꿈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형식에서만 찾아서는 곤란하다.
천운영의 흉기는 현실을 긴장시키는 작가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변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수준을 지킬 수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직전의 박민규 문체도 독특하고 새로웠다. 단편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빠름/느림을 교차 반복하는 영상 세대적 특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이현의 솔직함은 의식하지 않고 소설 쓰는 자세에서 더욱 흥미로운 미학적 자질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표현과 형식과 외형과 문체와 소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이야기겠지만, 그것들은 내용과 의미와 의식과 현실 인식을 수용하는 그릇이어야 한다. 네 명의 작가는 아직 신인이고, 신인들은 대게 자신의 소설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그냥 쓴다는 투로 말하거나, 창작 이유를 묻는 질문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젊은 작가들은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고, 그 이유를 스스로 따져 묻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을 쏟아내었다면, 그 이후에라도,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돌아보아야 한다. 네 명의 작가는 지금 무조건적인 차이를 만드는 작업을 중단하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왜 차이를 만들려고 했으며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차이와 작가의 길이 발견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 네 작가는 여행을 해야 할 때이다. 그 여행이 제대로 끝나야만 그들의 소설이 진정으로 불편해지는 길이 열릴 것이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자들이 스러지는 자리」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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