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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특집/정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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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6회 작성일 08-02-29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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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문학의 향방

뿌연 문학의 거울에 비친 현실의 그림자들

정재림|문학평론가


상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다. 이 사상은 자연의 모방, 즉 사실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던 당시의 문학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1.
한때 ‘문학 위기론’이 문학담론의 핫 이슈를 차지했었다면, 최근에는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이 그 배턴을 이어받은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주요 계간지들의 특집 제목은 훑어보기만 해도 쉽게 확인된다. “2000년대 문학의 새로운 모험”(≪문학과 사회≫, 2005, 여름), “한국문학의 새로운 문법”(≪문예중앙≫, 2005, 봄), “한국문학, 새로움의 저 밑자리”(≪실천문학≫, 2005, 봄), “새로운 세기의 한국문학을 점검한다”(≪실천문학≫, 2005, 가을)의 제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새로움’이란 수사가 그러하다. ‘문학 위기론’에 이어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이 담론의 핵심부를 차지한 사실에 대해 당혹스러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위기론’과 ‘새로움’의 양자는 서로 무관하지 않을 터이므로. 차분히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새로움’의 담론이 ‘문학의 위기론’의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타계할 응원군으로 동원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의 문학은 1980년대의 문학이나 1990년대의 문학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작가들은 자기 갱신의 고군분투를 작품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점 또한 수긍해야 할 사항이다. 즉 문학의 의장(儀裝)이 새로워졌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중문화나 만화적 상상력의 도입,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의 등장으로 소설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 흥미성이란 측면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문학의 가장 특징적이고도 공통적인 현상은 문학과 현실을 묶어주던 끈이 느슨해졌다는 점이다. 문학과 현실의 고리가 헐거워진 현상에 대한 반응은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그것은 우려할 만한 현상일 수도 있지만 전혀 괘념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나아가 미묘한 시각의 차이에 따라 문학이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중력의 문학’이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젊은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여전히 현실의 중력을 나름대로 감당하는 중이라고 진단할 수도 있다.
이 글은 박민규의 「카스테라」, 김애란의 「종이물고기」, 전성태의 「존재의 숲」을 참고로 하여 2000년대 문학의 ‘新 감수성’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젊은 작가들이 소설로 쓴 ‘소설론’에 해당하는 이 소설들에는 소설가로서의 뚜렷한 자의식이 드러나 있다고 판단된다.


2.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김윤영의 「산책하는 남자」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앞에서 열거한 작품 목록에서 빠져있던 작품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2000년대의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 다르면서도 같은 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는 2년 전에 직장을 그만 두지만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고 매일 출근을 한다. 아니,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채용되었으므로 실직이란 단어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하루 동선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7시에 일어나서 아내와 딸아이의 아침식사와 등교를 돕고, 8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자동차로 출근을 한다. 자동차에서 노트북을 꺼내놓고 점심시간 전까지 환율, 코스닥, 나스닥, 다우존스, 닛케이지수 등의 업종별 등락을 체크한다.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본업인 경매 입찰을 한다. 그리고 6시가 되면 퇴근을 해서 자상한 가장의 역할을 한다.
남자는 4년 전에도 정리해고를 당해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다. 그때 남자는 밀입북을 꿈꿔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제서야 남자에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시스템의 문제야.
한국 사회의 경쟁원리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모든 조건을 싹 바꿔 새로 태어날 수 없는 문제라면 이 경쟁원리 안에서 일생 동안 쳇바퀴 돌 듯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결심했다. 그 안에서 살지 않기로. 밑천도 없으니 이민은 그렀고 지구상에 남은 길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밀입북을 꿈꿨던 것은 정리해고의 현실이 “시스템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먼저 밀입북을 시도했던 실업자가 북에서도 추방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자본주의 사회만 냉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는 재취업에 성공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2년 전 또다시 회사에서 잘리게 된다. 2백여 통의 이력서를 쓰고도 취업에 실패한 남자는 “유레카와 같은 발견”을 하게 된다.

‘아무도 날 안 써주면 어때? 내가 날 고용하면 되잖아. 그래…… 그깟 돈 어떻게든 벌어서 내게 월급을 주는 거야. 그럼 나는 꼬박꼬박 출근해서 일을 해주지……. 그래 맞아, 이 거지 같은 경쟁원리 속에서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없잖아?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 그래, 앞으로 내 노동시간은 내가 정한다.
―「산책하는 남자」, pp. 185~186

그러니까 그는 문제투성이의 시스템에 소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시스템 외부에 위치시킨 셈이다. 그는 자신에게 자동차로의 출근, 주식 동향 살피기, 점심 식사 및 산책하기, 경매입찰 등의 일과를 부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남자에게 실질적인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경매 입찰이므로 그의 직업은 경매입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스스로는 “실직자” 혹은 “산책자”를 꿈꾸고 있을지라도. 그런데 경매입찰자란 그의 직업을 알고 보면 과연 그가 시스템 외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된다. 경매에 붙여진 물건을 사들였다가 이득을 보고 되파는 경매입찰자 또한 시스템 내부에 위치한 것 아닌가. 그러므로 그는 “정글자본주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단지 벗어났다는 자기 기만과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 아닌가.
김윤영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을 문제삼기 위하여 종종 ‘실업자’나 ‘여행자’, ‘백수’, ‘산책자’를 소설에 등장시킨다. 이들은 시스템 외부를 얼쩡대며 안정된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존재라는 점에서 위험하지만, 결국 시스템 내부로 소환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 「산책하는 남자」의 남자가 시스템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시스템에 복무하고 있었던 것처럼, 「루이뷔똥」의 ‘판수’나 ‘세미’는 외인부대 용병으로, 루이뷔똥 수집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된다. 교란자의 훼방작전보다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의 훨씬 더 완고하기 때문이다. 결국 ‘걸인’, ‘정신병자’, ‘실직자’는 보이지 않는 손과 복지제도의 보호 아래, 관리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김윤영 소설의 장점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와 거기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완고한 현실을 신랄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3.
이제 2000년대 젊은 작가의 최전방에 서있는 박민규를 보자. 박민규의 소설에 한결같이 따라붙는 황당함, 엉뚱함, 재미있음, 새로움, 가벼움이란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적 소재는 “불경기니 실업, 가출, 사고, 가족 붕괴 등등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들”(「산책하는 남자」)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박민규 소설의 인물들은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관(棺)만한 사이즈의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거나, 지하철 푸시맨이나 주유소 알바, 편의점 알바로 돈을 벌며 전전긍긍하거나, 실직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박민규 소설에는 “불경기니 실업, 가출, 사고, 가족 붕괴 등등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들”의 넓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셈이다.
이 끈적거리고 구질구질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가볍고 경쾌하게 읽히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소설 창작 방법론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박민규의 창작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는 「카스테라」를 보자. 소설은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라는 황당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능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냉장고는 인격(人格)”이라고 말하며, “이 냉장고는 강한 발언권(發言權)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의 상상에 의하면, 훌리건이었던 남자는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어스리그 결승전의 몸싸움 과정에서 죽었고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냉장고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엄청난 소음을 내는 기계라는 점에 미루어 그가 발언권이 강한 사나이였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냉장고의 전생이 발언권이 강한 훌리건이었다는 ‘나’의 논증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고 해야할 것이다. 개연성이나 인과성이 무시된 이러한 상상은 ‘만화적 상상’이라고 불림직한 것들이다.
그러나 “냉장고와 TV, 미니오디오와 나 이렇게 넷이 옹기종기 살고 있”는 가난한 자취생,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던 자취생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 만화적인 상상력은 자기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눈감아 버리기 위한 술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궁상스럽고 조용한 방보다 냉장고의 소음이라도 존재하는 게 낫지 않은가. 냉장고에 대한 이런 저런 상상을 전개할수록 비참한 현실은 잊혀지게 마련이므로. 이렇게 상상의 세계로 달려가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냉장고와 친구가 된 ‘나’는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냉장의 성과로 식중독, 암 등의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적어졌다는 것. 이렇게 “환상적인 냉장고의 역사”를 알게 되자 ‘나’는 냉장고를 뭔가 근사한 용도로 사용하리라 결심한다. 하지만 ‘나’는 해악적이고 부정적인 어떤 것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일단 뭐든지 다 담아 보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면 어떨까. 냉장상태라면 더 오래오래 간직되지 않을까?>란 교훈을 들었으며, 도서관의 젊은 사서에게서 <인류를 위한다면 세상의 해악(害惡)을 가두는 게 우선 어떨까?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것 말이지.>란 충고를 들었고, 단골 레코드 가게의 주인으로부터-작은 메모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글쎄,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가 건네준 종이 위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1.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넣는다.
3. 문을 닫는다.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결국 그래서-나는 소중한 것이나 해악이 될 만한 것. 행여 그것이 미국이나 코끼리 같은 것이라고 해도 무작정 냉장고에 넣어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정도면 <일단 뭐든지 다 담아보는 것>의 범주에도 포함이 되지 않겠나,란 생각이었다.

냉장고에 넣어야 할 대상인 “코끼리”를 넣는 법은 정확히 설명되어 있지만, 그 대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소중한 것이나 해악이 될 만한 것”, 그러니까 결국 “뭐든지” 냉장고에 집어넣을 뿐이다. 그래서 인류의 걸작, 그 다음에는 아버지, 어머니, 학교, 미국, 학교, 동사무소, 신문사와 오락실, 대기업 등등이 냉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고 다음날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로 변해있었다. 즉 이질적이고 상호 모순 되는 모든 것이 박민규의 냉장고 안으로는 초대되며, 그는 “하나의 세계”를 질료삼아 한 조각의 카스테라를 만든다는 것.
다시 말하되, 박민규가 다루는 세계는 김윤영이 취급했던 구질구질한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중한 것이나 해악이 될 만한 것”, 그러니까 ‘선/악’이나 ‘가치/무가치’의 구분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소설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훨씬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탈주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박민규의 소설이 사회 현실에 대해 날이 선 발언을 암시적으로 비출 때 그 진의에 의심이 들기도 한다.

4.
김애란의 소설 세계 역시 구질구질한 현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취업에 실패한 경력 3년 차 학원 강사이거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식이거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고학생이다. 김애란 소설의 인물들 역시 자신의 독특한 상상으로 비참한 현실을 견뎌낸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인물과 유사하다.
박민규가 「카스테라」를 통해 자신의 창작 방법론을 펼쳐 보인 것처럼, 김애란은 「종이 물고기」에서 자신의 소설론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좁고 구불거리는 계단이 하늘까지 이어지는 “똥고개”, 달동네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비참한 인물들의 계보에 위치한다. 맞벌이로 생계를 책임지던 부모였기에, 주인공은 유년시절 방에서 혼자 상상을 하거나 잠을 자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조금 더 자라서 잠자기와 상상하기 외에 하나의 놀이가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글자 읽기이다. 가르치지도 않았던 글자를 깨우치는 바람에 주인공은 천재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소년에게 도배지 대용으로 발라진 신문지를 읽는 것은 커다란 낙이었다. 하지만 한글을 혼자 깨우친 영특한 소년에게 문제가 있었는데 신문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영어와 한자가 문제이다. 때문에 소년에게 신문은 항상 구멍투성이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신문은 “OO 사건 5개항 OOO 발표, 지나친 OO는 삼가되 바로 OO 지켜야, 내년 OO831억원 확정”과 같은 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구멍투성이의 신문이 다행이었노라고 회상한다.

그는 알 수 없는 말들의 신기한 발음을 즐기며 글자들을 탐식하듯 훑어나갔다. 텔레비전 편성표와 영화광고, 날씨정보 등 신문에 씌어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그는 한자나 영어를 읽을 줄 몰랐고, 그가 읽는 신문은 대부분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서 다행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속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공란과 무지로 남겨졌던 독해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빈칸 덕택에 세상에 기만당할 가능성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구멍을 상상으로 대체하는 것을 넘어서,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듯 이 문장과 저 문장, 이 단어와 저 단어를 섞어 읽으며 구멍투성이 신문을 완벽한 놀이 도구로 활용한다. 구멍 난 신문지를 장난감삼아 놀던 소년은 어른이 되어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의 품에 간직된 것은 “포스트잇 한 뭉치”였다. 그리고 그는 옥탑방에 자신만의 방을 마련하고, 다섯 면의 벽을 원고지삼아 창작을 시작한다.
책에서 읽었던 부분을 적어서 벽의 첫째 면에 붙이고, 둘째 면을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셋째 면을 스쳐지나가는 상념으로, 넷째 면은 공사장 인부나 아주머니의 이야기로,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면인 천장에는 소설을 붙인다. 네 개의 벽면을 토대로 하여 다섯 번째 벽면, 즉 소설이 탄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여섯째 면 (아니 0번째 면인) 방바닥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첫 번째 포스티잇은 그가 서울에 온 이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누구도 알지 못하고 찾아올 수도 없는 방을 원했다. 그는 출산중인 소 우리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농부처럼 고요함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서울만큼 고요하지 못한 도시가 또 있던가. 서울만큼 잔인한 도시가 또 있던가. 엄밀히 말해 그에게는 고요함과 소음이 동시에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두 발을 딛고 있는 방바닥에는 앞으로 어떤 것도 붙이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무엇인가 붙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다른 벽면들을 받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종이 물고기」(p. 209)

방바닥을 “무엇인가 붙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다른 벽면을 받치기 위한 공간”으로 규정하는 것은 소설에서 현실이 어느 정도 제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나머지 벽면의 ‘포스트잇’을 골라내어 다섯째 벽면에 옮겨 붙이는 소설 탄생의 과정에서, 현실의 방바닥이 소설 창작에 미치는 영향이 별반 없어 보인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김애란의 글쓰기를 ‘포스트잇’의 상상력, ‘포스트의 글쓰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애란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나 가혹한 현실에 상당히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 관대함은 현실의 방바닥을 제거한 데 따른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어른스럽게 이해하고 관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때로 소설의 인물이 유아적이고 자폐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5.
전성태 「존재의 숲」의 ‘나’는 개그맨이다. “모 정치인의 성대모사로 풍자의 언변이 촌철살인이라는 평을 받으며 당당히 데뷔한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데뷔 일곱 해를 넘기고도 뜨지 못하는 개그맨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억지웃음만 끌어내다가 답답한 심정으로 점쟁이를 찾아가는 ‘나’는 작가의 비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용한 점쟁이가 내린 처방은 의미심장하다.

“선생, 해학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느덧 나는 그를 선생으로 부르며 제법 진지해져 있었다.
“글쎄올시다, 캄캄한 삶을 밟아야겠지요. 그런데 말이 자연히 따르지 않겠소? 요새 사람들, 캄캄한 이야기를 싫어할 것 같지만 실상은 없어서 못 듣는 것이리다.”
“그럼 흔한 말로 진창에서 구르며 겪어봐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그 말을 안 믿소. 자기연민은 공연히 억지가 되기 십상이지. 그저 남 이야기나 재미있게 듣는 수밖에. 절실하면 남 얘기가 내 얘기가 되는 것 아니겠소?”
“이야기를 주워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런 좋은 데가 있습니까?”
“나야 여기서 줍고 있소. 날마다 기막힌 사연들이 이 책상머리에서 풀어지지요. 난 스물일곱에 어느 북쪽 골짜기에 들었다가 큰 별똥을 주워온 적이 있소. 그 뒤로 남 이야기 듣는 재미로 이렇게 살고 있고.”

점쟁이에게 북쪽 골짜기에서 큰 별똥을 주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곳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나’는 여꼴댁과 그 아들의 안타까운 삶을 전해들을 뿐만 아니라 여꼴댁이 눈앞에 나타나는 ‘환각’을 체험하게 된다. 절실한 남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변한 형국이며, 이것이 점쟁이가 말했던 “캄캄한 삶을 밟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전성태의 「국경의 밤」은 현실을 손쉽게 괄호 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 소설에서 ‘국경’은 다의적으로 해석된다. ‘국경’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태국, 남한/북한, 일본(일본인)/한국(한국인), 마지막으로 전체/개인을 의미한다. 최근 소설에서 현실이나 사회가 손쉽게 포기되던 풍경과 달리, 「국경의 밤」은 ‘국경넘기’, ‘경계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가령, 이국의 도시에 있으면서 ‘박’은 분단국가의 성원이라는 정체성이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동독 출신의 ‘얀’, 일본인 대학생들, 일본 여성 ‘나오꼬’는 모두 ‘박’으로 하여금 한국인임을 잊지 못하게 하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일본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개인과 국가가 모호해지며 혼재”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고백하며, 일본 청년은 “제가 일본의 대표선수가 된 느낌”이라고 말한다. 즉, 현실 세계에서 무국적자로 표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전체/개인’이 빗금(/)에 의해 깔끔하고 손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은 전체로 포섭되지 않는 개별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 개별성은 전체의 맥락을 제외시키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2000년대의 젊은 문학인들, 새로운 문학들은 지난 시대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달라야만 한다. ‘新 감수성’이란 수사에 걸맞게 2000년대 한국문학의 의장은 새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새로움’의 의장을 갖추었을지라도 그 젊은 문학의 거울에는 현실이 반영되어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루하고 모순 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때로는 환상의 아우라가 감돌기도 하고, 대중문화적 상상력이 덧칠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뿌연 거울은 현실의 모순을 되비치고 있는 것 아닐까.



정재림․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공저 󰡔비평, 90년대 문학을 묻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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