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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특집/박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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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 문학의 향방
장르 문법의 강화와 ‘콘텐츠’로서의 소설
―2000년 이후, 소설의 영화화 동향
박유희|영화평론가
1.
<괴물>이 관객 최다 동원 신기록을 매일 경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괴물>의 흥행이 얼마나 이루어질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당분간 <괴물>이 예매순위 1위를 지키리라는 것은 예견할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괴물>과 게임이 될 만한 블록버스터 <한반도>나 <캐리비안의 해적 2>도 아직 걸려있기는 하나 이미 개봉한 지가 꽤 된 상태라 1위를 다시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여름방학 특수를 노린 픽사 애니메이션 <카>가 선전하고 있고 <플라이 대디>, <스승의 은혜>, <다세포 소녀> 등 한국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해외 영화제에서의 호평과 매출 실적을 후광으로 전국 620개 스크린(전국 1648개 중)을 점유하고 시작한 <괴물>의 적수가 되기에는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영화의 선전을 보며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문화계의 현실이다. <괴물> 돌풍에 힘입어 한국영화 점유율이 90%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몇 개의 영화가 독식하고 있는 경향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2005년에 개봉한 영화 83편 중 10위 안에 드는 작품만이 한국영화의 화려한 점유율(59%)을 채우고 있으며 나머지 70여 편의 작품은 적자이거나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새천년 들어 가속화되기 시작하여 2004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이룩한 천만 관객 돌파 이후 더욱 심해지면서 영화계에 “천만 든 영화 한 편, 백만 든 영화 열 편 보다 낫다.”는 심리를 부추겨 왔다. 그리고 이는 영화 콘텐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크게 노려볼 수 있는 블록버스터나 아예 저예산으로 짭짤한 수익을 기대해 볼만한 장르 영화가 아니면 투자를 받기 힘들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는 이러한 범위 안에서 선택되고 원작이 그렇지 않더라도 매체 전환 과정에서 장르에 충실하게 재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새로운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콘텐츠들이 다양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리피스 이후 확립된 고전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가 더욱 강고해지고 있다.
그러면 기존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며 거대 자본을 투자한 블록버스터가 언제나 성공하느냐? 그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답 안에 문화 생산자의 고민과 함께 일말의 희망도 들어 있다. ‘관객’, ‘독자’, 혹은 ‘대중’으로 불리는 문화 수용자들은 이야기의 관습을 추수하고 기대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움을 갈망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 ‘고정’과 ‘역동’을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자는 기존의 장르들, 즉 멜로드라마, 추리물, 역사물 등이 가지는 이야기의 관습을 견지하면서도 참신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수용자를 만족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관습 안에서 관습을 넘어서는 역동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넘어서는 정도가 어디까지냐’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안전하게 가려고 해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너무 많이 가서’ 실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각 텍스트의 내적구조와 더불어 그것이 처한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고, 텍스트의 구조와 상황성의 세심한 고려를 통해 당대 ‘대중성’에 접근해 나가야 해명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이후 소설이 영화로 전환된 텍스트에 주목해 보는 것은 자본의 논리와 수용자의 기대 지평 안에서 형성되는 현재 문화 콘텐츠의 본질과 성격에 접근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매체 전환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안들, 즉 ‘영화가 왜 그 소설을 선택했는지’, ‘각색을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등은 현재 이야기 경향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면서, 상이한 두 매체가 상호 거울로 작용하며 서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
영화계의 새천년은 <공동경비구역 JSA>(이후 <JSA>)와 함께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2000년을 장식한 ‘대박 영화’일 뿐 아니라, 일본 시장 수익만 2백만 달러 이상을 올림으로써 한국영화 해외 진출의 눈높이를 올려놓은 영화이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영화의 전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박찬욱 감독의 활로를 열어준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했다고 할 때 이 영화의 원작이 장편소설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향후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박상연의 장편소설 DMZ(1997)는 제3국을 선택했던 인민군 포로의 아들이 중립국 감독위 소속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파견되어 휴전선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한 평론가가 “남성적 서사의 진정성”이라고 말했듯이 이 소설은 근대소설적인 문법을 견지하고 있다. 지그 베르사미 소령의 아버지가 ‘김명준’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광장에 젖줄을 대고 있으며 ‘분단 문제’를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 80년대 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이 추리소설 구조를 취한 점이나 1990년대에 방영되었던 MBC 다큐멘터리 <중립국으로 간 포로들>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인물의 진술들이 영상화하기에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는 ‘1990년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영화의 원작으로 선택되는 데 주효했다고 판단된다.
<JSA>는 원작의 추리 구조를 전면화시켜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하며 출발한다.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서 그림 같은 한밤중 초소를 배경으로 클로즈업된 올빼미가 휙 돌아보고 총성이 들린다. 그리고 총알이 뚫고 나온 구멍으로 초소의 불빛 한 줄기가 선명하게 새어 나온다. 이 구멍 속으로 관객의 눈을 이끌어가는 과정, 즉 그 총성이 왜 울리게 되었는지를 추리해 가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을 이룬다. 소설에서도 총성이 울리는 것이 첫 장면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주인공의 꿈으로 처리된다. 이러한 각색은 DMZ가 <JSA>로 전환된 방향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지그 베르사미 소령의 시각으로 서술이 진행되며 그의 내면 서술과 아버지 이연우의 일기장 내용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을 형성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압축된다. 일단 원작에서 남자로 설정되었던 지그 베르사미 소령이 영화에서는 여자인 소피 소령(이영애 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주인공이었던 베르사미 소령과 달리 소피 소령은 객관적인 관찰자로 기능하는 조연이 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사건 당사자들인 김수혁과 오경필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고 서사는 행동 중심적인 구성으로 전환된다. 여기에서 소피 소령은 소설의 주인공 베르사미와 그의 동료인 플로베르 중위를 합쳐놓은 듯한 인물이며 이 배역에 이영애라는 상큼한 외모의 여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자칫 칙칙해질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가 한결 산뜻해진다. 지금은 아무리 문제의식이 심오하고 서사구조가 치밀해도 화면이 주는 정서가 어둡고 우울하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 좋은 원작과 각색, 적절한 스타 캐스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어두움 때문에 실패한 영화가 바로 <주홍글씨>(2005)이다.
김영하의 데뷔작 「거울에 대한 명상」(1995)과 「사진관 살인 사건」(1999)을 절묘하게 결합한 변혁 감독의 <주홍글씨>(2005)는 흥행의 가능성이 높았던 ‘웰 메이드well-made’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서사장르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해외 유학파의 솜씨 좋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한석규, 이은주 등 A급 배우들이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뚜껑을 열었을 때에도 크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각색, 촬영, 편집, 미술 면에서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제목이 강력하게 암시하듯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죄악의 무거움’을 관객들은 견뎌내지 못했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날카로운 반전으로 사용되었던 동성애가 영화에서는 끈적한 집착으로 형상화되었다.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는 제3자를 범인으로 결론지으면서 무거움을 피해갔는데 영화에서는 결국 치정에 의한 친족 살해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죄악을 감당하지 못해 트렁크 안에서 피범벅이 되어 응징 당한다. 요즘 서사 콘텐츠에서 엽기적인 행동이나 하드고어 코드가 난무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놀이’라는 것이 전제될 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 관객들이 <킬빌>이나 좀비 영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즐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인하고 엽기적인 텍스트일수록 현실의 반영이나 재현이 아니라 이전 텍스트에 대한 반영적 형식으로서의 메타텍스트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주홍글씨>는 가벼운 원작을 가지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원죄의식을 향해 정면 돌진한다. 초반에는 트렁크 안에서의 총성과 대낮에 거리에 나타난 피투성이 여인이 단속적으로 제시되는 추리 소설적 구성으로 시작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주제의식이 표면에 드러나며 이야기는 단조로워진다. 그러면서 관객은 호기심을 가지고 추론할 거리도, 흥미를 가지고 따라갈 재미도 상실한 채 그냥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웰 메이드’임도 불구하고 실패한 원인이다. 그 주제의 심도와 세련된 감각은 높이 살만하지만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서까지 도덕적 가르침을 참고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JSA>에서는 초반에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하여 관객에게 할 일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방향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선명한 인물구도 속에서 갈등을 선명하게 함으로써 장르영화적인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게다가 2000년대 대중의 감각에 맞춰 행동 중심적인 영상을 매끈하게 배치하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절한 스타를 캐스팅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인물들이 아이처럼 어울리며 “우리는 왜 이렇게 사이좋게 놀면 안 되나요?”라고 묻듯이 천진하게 움직일 때 분단 문제는 영화의 재미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이것이 영화 <JSA>가 이루어낸 성취이며 이 영화가 원작보다 더 평가받는 이유이다. 원작에서 아쉬웠던 점들, 예를 들어 이연우의 일기장을 단순하게 제시한 것이나 베르사미의 지루한 내면 서술, 그리고 시각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김수혁의 진술 부분 등이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원작에서의 누수(漏水)가 영화에서는 깔끔하게 때워지고 때워진 부분까지 대중의 기호에 맞는 장식으로 정리된 셈이다.
3.
소설을 대중의 기호에 맞게 장르영화적인 문법으로 각색한다고 해서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성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원작이 가졌던 작품성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각색의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대개 원작이 좋을수록 영화화되었을 때는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원작의 그늘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체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상이하고 대중의 기대가 달라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성석제의 「소설 쓰는 인간」(1998)을 영화화한 <바람의 전설>(2004)이나 위기철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아홉 살 인생>(2004)은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된다.
「소설 쓰는 인간」은 왕년에 ‘고수(高手) 제비’였던 남자의 일인칭 서술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처하며 자신의 제비 생활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일인칭 화자의 입을 통해 바로 그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면서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 웃음은 한편으로는 그를 신뢰하지 않고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든 그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는 웃음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 효과를 성취한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신빙성 없는 서술’이 가지는 언어적 효과에 기대고 있으며 이는 현대소설의 중요한 수사학이다.
이러한 원작이 영화화되었을 때 아이러니는 자연히 약화된다. 영화에서도 일인칭 서술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주인공 박풍식(이성재 분)과 그의 사연을 듣는 여형사(박솔미 분)의 로맨스 라인이 서사의 중심에 놓이면서 박풍식의 내레이션은 진정성 있는 서술로 변환된다. 춤 영화의 공식에 맞게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들이 선사하는 청각적․시각적 즐거움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생활의 권태와 무의미함에 찌들어 있던 여형사가 춤을 통해 새 삶을 찾고 실의에 빠진 박풍식까지 구원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좋은 원작을 토대로 하여 안전한 각색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전설>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 영화 <쉘 위 댄스>(1996)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나 이듬해에 문근영을 내세워 제작한 영화 <댄서의 순정>(2005)이 성공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영화는 <바람의 전설>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데 가늠자가 된다.
우선 <바람의 전설>에는 야쿠쇼 코지나 문근영과 같은 스타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춤 영화에서는 스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단적인 예로 <쉘 위 댄스>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때 리처드 기어를 기용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쉘 위 댄스>를 이미 본 사람이라도, 오히려 본 사람일수록, 리처드 기어가 춤추는 모습이 야쿠쇼 코지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기 위해 할리우드 리메이크 버전을 본다는 것이다. 이는 <댄서의 순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성공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람의 전설>이 춤 영화의 공식으로 들어간 듯 보이지만 다른 영화들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에서는 춤 영상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춤이란 본래 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비도덕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러한 춤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일상의 규범이나 질서와는 다른 세계의 기율로 움직인다. 그래서 춤 영화의 표면적인 주제는 그 사회에서 안정과 평화의 이름으로 지키려고 하는 가치의 손을 더 적극적으로 들어주곤 한다. <쉘 위 댄스>에서 가장의 일탈을 가부장적인 가치관으로 합리화하며 가족의 화해를 유도하는 것이나 <댄서의 순정>에서 첫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의 가치를 도덕적으로 입증하는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람의 전설>에서 박풍식은 춤에 미쳐서 가족을 등졌다. 그는 다른 여자들을 만났고 그녀들이 주는 돈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 하지만 아내조차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떠남으로써 그의 가족은 해체된다. 그는 계속 자신이 제비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개가 뮤지컬 장르적인 서사구조 속에서 ‘신빙성 있는 서술’로 이루어질 때, 주인공 박풍식은 그의 친구(김수로 분) 말대로 “정체성이 없는 놈”이 된다. 장르 영화에서 인물의 선명한 캐릭터는 매우 중요하다. 코지처럼 점잖고 보수적인 가장이거나 문근영처럼 순수한 열아홉 처녀일 때 이야기의 재미는 탄력을 받는다. 그러한 인물들이 일탈을 하고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때 관객이 경험하는 쾌감과 안도감의 진폭이 커지며 몰입의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의 전설>은 둘 중 어느 것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애매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는 <아홉 살 인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원작이 된 위기철의 아홉 살의 인생(1991)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나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같은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성장소설이자 세태소설이다. 과거의 변두리를 배경으로 어린 화자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의 가족과 친구들을 중심으로 월급 기계 담임선생․골방 철학자․풍뎅이 영감․상이군인 고물장수 등이 배치되고, 그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열되며, 화자가 아홉 살이었던 1970년대가 재구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여민이와 우림이의 로맨스가 중심에 놓이면서 원작의 세태소설적인 성격은 거의 배제되고 성장소설적인 성격만이 반영된다. 이로 인해 풍부한 에피소드들은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지도 못하고 중심 플롯으로 수렴되지도 못한 채 모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가 원작에 더 충실하려면 이 영화가 취한 멜로드라마적인 장르 문법이 아닌 새로운 편집 형식을 고안해야 했을 것이고, 만일 장르 문법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부수적인 이야기 요소들을 좀 더 치밀하게 중심 플롯으로 수렴시켜야 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대중적인 영화도, 실험적인 영화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에 머물고 말았다.
<바람의 전설>이나 <아홉 살 인생>의 실패는 원작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벗어나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원작에 더 충실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설 자리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할리우드 장르 구조의 지배력이 점점 더 강고해지면서 아이러니하거나 다양성을 담보하는 서사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진다. 영화의 성패가 극단화되듯이 제도권 영화의 서사구조도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4
‘불륜’ 혹은 ‘혼외정사’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멜로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진 단골 메뉴이다. <정사>(1998), <해피엔드>(1999), <주노명 베이커리>(2000),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 <밀애>(2002), <스캔들>(2003), <바람난 가족>(2003), <외출>(2005), 그리고 <가족의 탄생>(2006)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전환을 전후로 하여 <자유부인>(1956)의 문제의식을 잇는 영화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는 1950년대가 그랬듯이 문화와 제도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에 제기되곤 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영화들은 가족의 틀을 벗어나는 사건을 통해 낭만적 연애와 일부일처제로 요약할 수 있는 ‘근대적인 결혼 제도의 모순’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영화만의 것은 아니다. 이는 근대의 서사물들이 공유해 온 문제이며 당연히 근대서사의 대표적 매체였던 소설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루어온 문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소설 원작에서 출발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과 친연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영화들의 원조가 된 <자유부인>이 당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정비석의 신문연재소설을 영화화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밀애>는 1990년대 후반에 화제가 되었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또한 <스캔들>은 서구에서 여러 번 영화화된 바 있는 작품인데, 원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가 원작이다. <외출>은 오리지널 시나리오이지만 이것을 소설가 김형경이 소설로 각색하여 출간하면서 ‘문학의 위상’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외에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주노명 베이커리>와 <가족의 탄생>도 언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서 문학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멜로드라마를 대상으로 소설의 영화화 동향을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밀애>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도발적인 문제의식이나 묘사의 수위 면에서 비등하다고 할 수 있으며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주목을 받았던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달랐다. 여기에서 원작의 주제의식이나 대중성과 아울러 원작에의 충실성 문제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원작에의 충실성fidelity’ 문제는 문학과 영화의 상관성을 논할 때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매체 전환의 중요성과 창조성에 주목했던 앙드레 바쟁은 “단어 대 단어로 전환하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유로운 전환도 경멸을 낳을 수 있다.”고 하면서 원작에의 충실성이란 매체의 상이한 자질을 존중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전환을 함으로써 원작이 지닌 정신의 정수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원작에의 충실성은 영화의 창조성과 직접 비례한다.”는 것이다. 물론 앙드레 바쟁이 말하는 원작은 ‘고전 명작’을 의미하며 영화도 위대한 문학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든 평작이든 간에 문자서사를 영상서사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2000년대의 영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밀애>(2002)는 전경린의 장편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1999)을 영화화한 것이다. 원작은 30대의 미흔이라는 가정주부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이 믿고 꿈꿔왔던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면서 이웃 남자와 치명적인 사랑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는 격정적인 감정의 묘사와 함께 진한 정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서 영화가 이것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변영주 감독이 ‘수위 높은’ 이 멜로드라마의 메가폰을 잡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영화는 제작 발표 때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 주인공 남자 규의 직업과 미흔 아이의 성별이 바뀐 것과 같은 사소한 변화 이외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원작에서의 사건 배열과 계기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격정 멜로’라는 광고 문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줄거리를 무미건조하게 요약한 것 정도로 다가올 뿐 소설에서와 같은 강렬한 센티멘털리즘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종일관 카메라는 너무 밋밋하고 정직해서 영상을 단순하게 만들고 인물들의 심리를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마음을 다른 데 뺏기고 사나 봅니다.”
남자가 허리를 굽혀 차 안에 앉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심해 하는 빈정거림이 아닌 염려의 눈빛이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과 낯선 냄새와 이어지는 침묵이 나를 포박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눈을 돌리고 공연히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캐스터네츠 소리…… 긴 치마를 입고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길을 맨발로, 발바닥이 터지도록 오래, 걸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흔과 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오랫동안 지치고 힘들었던 미흔이 규에게 순간적으로 매혹되고 있는 심리상태가 ‘포박’ 이나 ‘달아올랐다’라는 표현,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을 환기시키는 ‘캐스터네츠 소리’와 잦은 쉼표의 사용 등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마음을 다른 데 뺏기고 사나 봅니다.”라는 규의 말만을 대사로 사용하며, 서사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규와 미흔의 시선 교환을 정사 역사로 평이하게 보여주고 나서 각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소설에서처럼 라디오 소리가 잠시 사용되지만 이는 영상과 결합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소음으로 처리된다. 이로 인해 서사의 리듬이 단조로워져서 이야기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규의 말은 문어(文語)로 읽을 때에는 규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지만 그것을 그대로 대사로 쓰면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이러한 예들은 원작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원작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는 효율적인 각색으로 문자서사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대중적인 영화가 된 경우이다. 원작이 된 이만교의 동명소설부터 장면 중심적 구성이나 빠른 전개가 영화의 흐름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학이 문화의 중심 장르로서의 권위적 위치를 점하던 시대’가 간 것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영화나 만화 못지않게 내 소설에 속도감과 재미가 묻어나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그대로 영화 시나리오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작업이 좀더 수월해질 수는 있다고 해도 역시 각색에는 복합적인 감각이 요청된다.
영화에서는 17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원작의 구성을 해체하여 보다 영화적인 기승전결 구성에 맞게 7개의 장(맞선, 데이트, 결혼식, 선택, 신혼여행, 주말부부, 파국)으로 단순화한다. 한편 주인공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장치인 일인칭 서술은 그대로 수용하여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문학적 분위기와 원작의 당돌한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쉬운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가 42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것은 이러한 면에 빚지는 바가 크다.
<밀애>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결과적으로 희비를 달리했지만 문학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각색이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도 문자가 영상으로 전환되었다기보다는 영화에 문학 언어를 영리하게 끌어들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소설 원작을 영화화하면서도 언어에의 의존도를 최소화하면서 그 의미와 분위기를 영상화하는 데 성공하여 오히려 더 문학적인 성취를 이룬 영화가 있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 「러브레터」(1997)를 원작으로 한 <파이란>(2001)이 그것이다.
원작소설은 삼류깡패인 다카노 고로가 위장 결혼해 주었던 ‘파이란’이라는 중국인 불법체류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법적인 남편으로서 그녀의 죽음을 정리하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소설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되, 앞에는 주인공(영화에서는 ‘이강재’)의 무의미하고 비참한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조직생활 시퀀스가 배치되고, 마지막에는 그가 보스의 요청을 거절하고 조직원의 손에 죽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파이란의 죽음을 수습하기 위해 동해안의 소도시로 떠나는 시퀀스부터는 강재의 현재가 파이란의 지나간 삶과 교차 편집되며 강재의 심경이 변모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영상으로 축적해 간다. 이렇게 구축된 서사 기반은 강재가 파이란의 유골을 안고 바닷가에 앉아 마지막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그를 오열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장백지의 목소리로 파이란의 편지가 낭독되면서 카메라는 강재가 편지를 읽는 모습과 읽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다 오열하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포착하는데 이 장면은 엄청난 집중력과 긴장감을 유발하며 강재의 통한을 전달한다. <밀애>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일인칭 내레이션을 사용하면서도 전달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깊은 내면이 <파이란>에서는 영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파이란>에서는 장백지의 목소리로 두 통의 편지 내용이 낭독되는 부분에서만 일인칭 서술이 사용되었는데도 영화 전체를 통해 훨씬 더 세밀한 내면서술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5.
2000년대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에서 <공동경비구역 JSA>와 <파이란>은 소설의 영화화가 지향해 온 두 방향을 보여준다. <JSA>가 장르문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해묵은 분단문제를 새롭게 조형해 낸 텍스트라면 <파이란>은 영상매체를 통해 문학적 세계를 구현하여 ‘카메라 만년필’이라는 비유를 환기시키는 텍스트이다. 전자가 대중성에 코드를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애초부터 대중성 면에서는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소설과 영화라는 두 매체만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는 이 두 방향이 단단히 대척을 이루고 그것을 축으로 다양한 영화들이 포진해야 진정한 의미의 문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1990년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의 문화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디지털 정보화와 더불어 소설과 영화의 양립구도는 깨졌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새로운 서사장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소설은 희곡, 시나리오, 만화 등 기존의 아날로그 서사물과 더불어 신종 서사물과도 경쟁 관계에 돌입한다. <그 놈은 멋있었다>(2004), <늑대의 유혹>(2004), 그리고 <도레미파솔라시도>(2006)로 이어지는 귀여니 신드롬은 상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작인 <아파트>(2006)나 <다세포 소녀>(2006)의 경우에는 인터넷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산될 조짐이다.
인터넷 서사물들은 아직 소설처럼 정연한 형식과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인터넷 소설은 근대소설에 익숙한 독자가 볼 때에는 너무나 유치하고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귀여니가 그렇듯이 그것을 창작하여 올리는 작가들은 주로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아주 젊은 층이다.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지닌 욕망이 날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인터넷 서사물은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매우 문제적이다. 한 예로 <늑대의 유혹>의 경우 30대 이상의 관객 중에는 이 영화를 보다가 포기했다는 이가 드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이백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는 것은 곱씹어 볼만한 일이다.
늑대의 유혹은 여고생의 판타지와 감정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하고 불우한 한경이라는 여학생이 있다. 한경은 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재가한 어머니를 찾아 상경하여 의붓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해원’과 ‘태성’이라는 ‘학교짱’의 사랑을 동시에 받게 된다. 그 중에서 태성은 한경을 누나라고 부르며 구애하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태성은 아버지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남매지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성은 한경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다가 결국 불치병으로 죽는다.
줄거리만 보아도 인과율이나 개연성으로 서사가 조직되지 않았다는 것, 십대 여학생이 욕망하는 대로 순간순간 극적 재미를 추구하며 인터넷에 연재한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감정 상태를 시각적으로 기호화하는 이모티콘의 사용이다. 일견 이모티콘은 다양한 듯하지만 매우 간단한 제자(製字)원리와 몇 가지 경우의 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구체적인 감정을 단순화한다. 즉 솔직하고 직접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좋다․싫다․슬프다․짜증나다 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며 실제로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단순하게 기호화시켜 버림으로써 오히려 추상적으로 만든다.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기호 체계로 서사를 구축하면 현실적인 개연성이나 연관성 속에서 사유할 여지가 없어지고, 자연히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이야기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모티콘의 사용이나 인터넷의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볼 일이다.
2000년대 이후 두드러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일본소설을 비롯해 만화, 드라마 등 일본의 서사물들이 한국영화의 원작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파이란>은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며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일본 서사 콘텐츠 유입은 개인적 취향의 수준을 넘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올드보이>(2003), <싱글즈>(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플라이 대디>(2006) 등이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일본소설이나 만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본의 콘텐츠를 사려는 충무로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제작영화의 10% 이상이 일본 서사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일본 서사물은 독자적인 매체로서뿐 아니라 매체 전환의 원재료가 되는 콘텐츠로서도 한국소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소설은 여전히 건재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비롯하여 무기의 그늘과 심청, 김별아의 미실, 김영하의 검은꽃,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김훈의 「화장」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이미 크랭크업했거나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한국문학과 한국영화의 재결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자축하기에 앞서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 문화계에 만연한 흥행추수주의에서 나온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추세는 작년에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문학에서 ‘이야기’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영화가 1/3 이상의 상영관을 차지하는 상황에서는 이른바 ‘대박’이 난 영화의 원작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일시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영화화되는 소설의 면면을 잠시 짚어보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황석영의 소설 세 편이 한꺼번에 영화화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근대적 서사성’이 현재 문화콘텐츠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미실>이나 <검은꽃>,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같은 소설들도 함께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 흥행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 <왕의 남자> 등과 같은 최고의 흥행작에는 시공간의 연속성에 토대를 둔 ‘이야기’가 강력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분단’이나 ‘이념’의 문제가 이미 낡은 테마인 듯하지만 <JSA>를 비롯해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 투 동막골>이 보여주듯이 영화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근대 소설은 인생과 사회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하면서 중요한 앎의 방식으로 존경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소설은 그러한 근대적 위상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계는 이야기에 목마르고 소설은 그 이야기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소설은 이야기의 보고(寶庫)이자 서사구성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최고의 브레인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유희․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
․저서 1950년대 소설과 반어의 수사학 등, 역서 소설과 카메라의 눈
․현재 고려대 강사
장르 문법의 강화와 ‘콘텐츠’로서의 소설
―2000년 이후, 소설의 영화화 동향
박유희|영화평론가
1.
<괴물>이 관객 최다 동원 신기록을 매일 경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괴물>의 흥행이 얼마나 이루어질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당분간 <괴물>이 예매순위 1위를 지키리라는 것은 예견할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괴물>과 게임이 될 만한 블록버스터 <한반도>나 <캐리비안의 해적 2>도 아직 걸려있기는 하나 이미 개봉한 지가 꽤 된 상태라 1위를 다시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여름방학 특수를 노린 픽사 애니메이션 <카>가 선전하고 있고 <플라이 대디>, <스승의 은혜>, <다세포 소녀> 등 한국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해외 영화제에서의 호평과 매출 실적을 후광으로 전국 620개 스크린(전국 1648개 중)을 점유하고 시작한 <괴물>의 적수가 되기에는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영화의 선전을 보며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게 문화계의 현실이다. <괴물> 돌풍에 힘입어 한국영화 점유율이 90%를 넘어서며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몇 개의 영화가 독식하고 있는 경향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2005년에 개봉한 영화 83편 중 10위 안에 드는 작품만이 한국영화의 화려한 점유율(59%)을 채우고 있으며 나머지 70여 편의 작품은 적자이거나 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새천년 들어 가속화되기 시작하여 2004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이룩한 천만 관객 돌파 이후 더욱 심해지면서 영화계에 “천만 든 영화 한 편, 백만 든 영화 열 편 보다 낫다.”는 심리를 부추겨 왔다. 그리고 이는 영화 콘텐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크게 노려볼 수 있는 블록버스터나 아예 저예산으로 짭짤한 수익을 기대해 볼만한 장르 영화가 아니면 투자를 받기 힘들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는 이러한 범위 안에서 선택되고 원작이 그렇지 않더라도 매체 전환 과정에서 장르에 충실하게 재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새로운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콘텐츠들이 다양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리피스 이후 확립된 고전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가 더욱 강고해지고 있다.
그러면 기존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며 거대 자본을 투자한 블록버스터가 언제나 성공하느냐? 그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답 안에 문화 생산자의 고민과 함께 일말의 희망도 들어 있다. ‘관객’, ‘독자’, 혹은 ‘대중’으로 불리는 문화 수용자들은 이야기의 관습을 추수하고 기대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움을 갈망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 ‘고정’과 ‘역동’을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자는 기존의 장르들, 즉 멜로드라마, 추리물, 역사물 등이 가지는 이야기의 관습을 견지하면서도 참신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수용자를 만족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관습 안에서 관습을 넘어서는 역동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넘어서는 정도가 어디까지냐’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안전하게 가려고 해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너무 많이 가서’ 실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각 텍스트의 내적구조와 더불어 그것이 처한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고, 텍스트의 구조와 상황성의 세심한 고려를 통해 당대 ‘대중성’에 접근해 나가야 해명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대 이후 소설이 영화로 전환된 텍스트에 주목해 보는 것은 자본의 논리와 수용자의 기대 지평 안에서 형성되는 현재 문화 콘텐츠의 본질과 성격에 접근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매체 전환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안들, 즉 ‘영화가 왜 그 소설을 선택했는지’, ‘각색을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로 인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등은 현재 이야기 경향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가능케 하면서, 상이한 두 매체가 상호 거울로 작용하며 서로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
영화계의 새천년은 <공동경비구역 JSA>(이후 <JSA>)와 함께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2000년을 장식한 ‘대박 영화’일 뿐 아니라, 일본 시장 수익만 2백만 달러 이상을 올림으로써 한국영화 해외 진출의 눈높이를 올려놓은 영화이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영화의 전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박찬욱 감독의 활로를 열어준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했다고 할 때 이 영화의 원작이 장편소설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향후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박상연의 장편소설 DMZ(1997)는 제3국을 선택했던 인민군 포로의 아들이 중립국 감독위 소속으로 아버지의 나라에 파견되어 휴전선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한 평론가가 “남성적 서사의 진정성”이라고 말했듯이 이 소설은 근대소설적인 문법을 견지하고 있다. 지그 베르사미 소령의 아버지가 ‘김명준’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광장에 젖줄을 대고 있으며 ‘분단 문제’를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 80년대 소설의 맥을 잇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이 추리소설 구조를 취한 점이나 1990년대에 방영되었던 MBC 다큐멘터리 <중립국으로 간 포로들>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인물의 진술들이 영상화하기에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는 ‘1990년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영화의 원작으로 선택되는 데 주효했다고 판단된다.
<JSA>는 원작의 추리 구조를 전면화시켜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하며 출발한다.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서 그림 같은 한밤중 초소를 배경으로 클로즈업된 올빼미가 휙 돌아보고 총성이 들린다. 그리고 총알이 뚫고 나온 구멍으로 초소의 불빛 한 줄기가 선명하게 새어 나온다. 이 구멍 속으로 관객의 눈을 이끌어가는 과정, 즉 그 총성이 왜 울리게 되었는지를 추리해 가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을 이룬다. 소설에서도 총성이 울리는 것이 첫 장면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주인공의 꿈으로 처리된다. 이러한 각색은 DMZ가 <JSA>로 전환된 방향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지그 베르사미 소령의 시각으로 서술이 진행되며 그의 내면 서술과 아버지 이연우의 일기장 내용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을 형성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압축된다. 일단 원작에서 남자로 설정되었던 지그 베르사미 소령이 영화에서는 여자인 소피 소령(이영애 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주인공이었던 베르사미 소령과 달리 소피 소령은 객관적인 관찰자로 기능하는 조연이 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사건 당사자들인 김수혁과 오경필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고 서사는 행동 중심적인 구성으로 전환된다. 여기에서 소피 소령은 소설의 주인공 베르사미와 그의 동료인 플로베르 중위를 합쳐놓은 듯한 인물이며 이 배역에 이영애라는 상큼한 외모의 여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자칫 칙칙해질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가 한결 산뜻해진다. 지금은 아무리 문제의식이 심오하고 서사구조가 치밀해도 화면이 주는 정서가 어둡고 우울하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 좋은 원작과 각색, 적절한 스타 캐스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어두움 때문에 실패한 영화가 바로 <주홍글씨>(2005)이다.
김영하의 데뷔작 「거울에 대한 명상」(1995)과 「사진관 살인 사건」(1999)을 절묘하게 결합한 변혁 감독의 <주홍글씨>(2005)는 흥행의 가능성이 높았던 ‘웰 메이드well-made’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서사장르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고, 해외 유학파의 솜씨 좋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한석규, 이은주 등 A급 배우들이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뚜껑을 열었을 때에도 크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각색, 촬영, 편집, 미술 면에서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제목이 강력하게 암시하듯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죄악의 무거움’을 관객들은 견뎌내지 못했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날카로운 반전으로 사용되었던 동성애가 영화에서는 끈적한 집착으로 형상화되었다.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는 제3자를 범인으로 결론지으면서 무거움을 피해갔는데 영화에서는 결국 치정에 의한 친족 살해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죄악을 감당하지 못해 트렁크 안에서 피범벅이 되어 응징 당한다. 요즘 서사 콘텐츠에서 엽기적인 행동이나 하드고어 코드가 난무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놀이’라는 것이 전제될 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 관객들이 <킬빌>이나 좀비 영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즐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인하고 엽기적인 텍스트일수록 현실의 반영이나 재현이 아니라 이전 텍스트에 대한 반영적 형식으로서의 메타텍스트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주홍글씨>는 가벼운 원작을 가지고 오히려 기독교적인 원죄의식을 향해 정면 돌진한다. 초반에는 트렁크 안에서의 총성과 대낮에 거리에 나타난 피투성이 여인이 단속적으로 제시되는 추리 소설적 구성으로 시작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주제의식이 표면에 드러나며 이야기는 단조로워진다. 그러면서 관객은 호기심을 가지고 추론할 거리도, 흥미를 가지고 따라갈 재미도 상실한 채 그냥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웰 메이드’임도 불구하고 실패한 원인이다. 그 주제의 심도와 세련된 감각은 높이 살만하지만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서까지 도덕적 가르침을 참고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JSA>에서는 초반에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하여 관객에게 할 일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방향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선명한 인물구도 속에서 갈등을 선명하게 함으로써 장르영화적인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게다가 2000년대 대중의 감각에 맞춰 행동 중심적인 영상을 매끈하게 배치하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절한 스타를 캐스팅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인물들이 아이처럼 어울리며 “우리는 왜 이렇게 사이좋게 놀면 안 되나요?”라고 묻듯이 천진하게 움직일 때 분단 문제는 영화의 재미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이것이 영화 <JSA>가 이루어낸 성취이며 이 영화가 원작보다 더 평가받는 이유이다. 원작에서 아쉬웠던 점들, 예를 들어 이연우의 일기장을 단순하게 제시한 것이나 베르사미의 지루한 내면 서술, 그리고 시각의 일관성에서 벗어난 김수혁의 진술 부분 등이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원작에서의 누수(漏水)가 영화에서는 깔끔하게 때워지고 때워진 부분까지 대중의 기호에 맞는 장식으로 정리된 셈이다.
3.
소설을 대중의 기호에 맞게 장르영화적인 문법으로 각색한다고 해서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성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원작이 가졌던 작품성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것이 각색의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대개 원작이 좋을수록 영화화되었을 때는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원작의 그늘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체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상이하고 대중의 기대가 달라지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성석제의 「소설 쓰는 인간」(1998)을 영화화한 <바람의 전설>(2004)이나 위기철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아홉 살 인생>(2004)은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된다.
「소설 쓰는 인간」은 왕년에 ‘고수(高手) 제비’였던 남자의 일인칭 서술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자처하며 자신의 제비 생활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일인칭 화자의 입을 통해 바로 그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면서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 웃음은 한편으로는 그를 신뢰하지 않고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든 그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는 웃음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 효과를 성취한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신빙성 없는 서술’이 가지는 언어적 효과에 기대고 있으며 이는 현대소설의 중요한 수사학이다.
이러한 원작이 영화화되었을 때 아이러니는 자연히 약화된다. 영화에서도 일인칭 서술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주인공 박풍식(이성재 분)과 그의 사연을 듣는 여형사(박솔미 분)의 로맨스 라인이 서사의 중심에 놓이면서 박풍식의 내레이션은 진정성 있는 서술로 변환된다. 춤 영화의 공식에 맞게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들이 선사하는 청각적․시각적 즐거움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생활의 권태와 무의미함에 찌들어 있던 여형사가 춤을 통해 새 삶을 찾고 실의에 빠진 박풍식까지 구원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좋은 원작을 토대로 하여 안전한 각색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전설>은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 영화 <쉘 위 댄스>(1996)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나 이듬해에 문근영을 내세워 제작한 영화 <댄서의 순정>(2005)이 성공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영화는 <바람의 전설>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데 가늠자가 된다.
우선 <바람의 전설>에는 야쿠쇼 코지나 문근영과 같은 스타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춤 영화에서는 스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단적인 예로 <쉘 위 댄스>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때 리처드 기어를 기용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쉘 위 댄스>를 이미 본 사람이라도, 오히려 본 사람일수록, 리처드 기어가 춤추는 모습이 야쿠쇼 코지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기 위해 할리우드 리메이크 버전을 본다는 것이다. 이는 <댄서의 순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성공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바람의 전설>이 춤 영화의 공식으로 들어간 듯 보이지만 다른 영화들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에서는 춤 영상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춤이란 본래 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비도덕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러한 춤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일상의 규범이나 질서와는 다른 세계의 기율로 움직인다. 그래서 춤 영화의 표면적인 주제는 그 사회에서 안정과 평화의 이름으로 지키려고 하는 가치의 손을 더 적극적으로 들어주곤 한다. <쉘 위 댄스>에서 가장의 일탈을 가부장적인 가치관으로 합리화하며 가족의 화해를 유도하는 것이나 <댄서의 순정>에서 첫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의 가치를 도덕적으로 입증하는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람의 전설>에서 박풍식은 춤에 미쳐서 가족을 등졌다. 그는 다른 여자들을 만났고 그녀들이 주는 돈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 하지만 아내조차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떠남으로써 그의 가족은 해체된다. 그는 계속 자신이 제비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개가 뮤지컬 장르적인 서사구조 속에서 ‘신빙성 있는 서술’로 이루어질 때, 주인공 박풍식은 그의 친구(김수로 분) 말대로 “정체성이 없는 놈”이 된다. 장르 영화에서 인물의 선명한 캐릭터는 매우 중요하다. 코지처럼 점잖고 보수적인 가장이거나 문근영처럼 순수한 열아홉 처녀일 때 이야기의 재미는 탄력을 받는다. 그러한 인물들이 일탈을 하고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때 관객이 경험하는 쾌감과 안도감의 진폭이 커지며 몰입의 효과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의 전설>은 둘 중 어느 것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애매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는 <아홉 살 인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원작이 된 위기철의 아홉 살의 인생(1991)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나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같은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성장소설이자 세태소설이다. 과거의 변두리를 배경으로 어린 화자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의 가족과 친구들을 중심으로 월급 기계 담임선생․골방 철학자․풍뎅이 영감․상이군인 고물장수 등이 배치되고, 그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열되며, 화자가 아홉 살이었던 1970년대가 재구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여민이와 우림이의 로맨스가 중심에 놓이면서 원작의 세태소설적인 성격은 거의 배제되고 성장소설적인 성격만이 반영된다. 이로 인해 풍부한 에피소드들은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지도 못하고 중심 플롯으로 수렴되지도 못한 채 모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가 원작에 더 충실하려면 이 영화가 취한 멜로드라마적인 장르 문법이 아닌 새로운 편집 형식을 고안해야 했을 것이고, 만일 장르 문법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부수적인 이야기 요소들을 좀 더 치밀하게 중심 플롯으로 수렴시켜야 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대중적인 영화도, 실험적인 영화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에 머물고 말았다.
<바람의 전설>이나 <아홉 살 인생>의 실패는 원작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벗어나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원작에 더 충실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설 자리가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할리우드 장르 구조의 지배력이 점점 더 강고해지면서 아이러니하거나 다양성을 담보하는 서사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진다. 영화의 성패가 극단화되듯이 제도권 영화의 서사구조도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4
‘불륜’ 혹은 ‘혼외정사’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멜로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진 단골 메뉴이다. <정사>(1998), <해피엔드>(1999), <주노명 베이커리>(2000),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 <밀애>(2002), <스캔들>(2003), <바람난 가족>(2003), <외출>(2005), 그리고 <가족의 탄생>(2006)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전환을 전후로 하여 <자유부인>(1956)의 문제의식을 잇는 영화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는 1950년대가 그랬듯이 문화와 제도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에 제기되곤 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영화들은 가족의 틀을 벗어나는 사건을 통해 낭만적 연애와 일부일처제로 요약할 수 있는 ‘근대적인 결혼 제도의 모순’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영화만의 것은 아니다. 이는 근대의 서사물들이 공유해 온 문제이며 당연히 근대서사의 대표적 매체였던 소설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루어온 문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소설 원작에서 출발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과 친연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영화들의 원조가 된 <자유부인>이 당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정비석의 신문연재소설을 영화화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밀애>는 1990년대 후반에 화제가 되었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또한 <스캔들>은 서구에서 여러 번 영화화된 바 있는 작품인데, 원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가 원작이다. <외출>은 오리지널 시나리오이지만 이것을 소설가 김형경이 소설로 각색하여 출간하면서 ‘문학의 위상’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외에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주노명 베이커리>와 <가족의 탄생>도 언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서 문학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멜로드라마를 대상으로 소설의 영화화 동향을 짚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밀애>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도발적인 문제의식이나 묘사의 수위 면에서 비등하다고 할 수 있으며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주목을 받았던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달랐다. 여기에서 원작의 주제의식이나 대중성과 아울러 원작에의 충실성 문제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원작에의 충실성fidelity’ 문제는 문학과 영화의 상관성을 논할 때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매체 전환의 중요성과 창조성에 주목했던 앙드레 바쟁은 “단어 대 단어로 전환하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유로운 전환도 경멸을 낳을 수 있다.”고 하면서 원작에의 충실성이란 매체의 상이한 자질을 존중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전환을 함으로써 원작이 지닌 정신의 정수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원작에의 충실성은 영화의 창조성과 직접 비례한다.”는 것이다. 물론 앙드레 바쟁이 말하는 원작은 ‘고전 명작’을 의미하며 영화도 위대한 문학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든 평작이든 간에 문자서사를 영상서사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2000년대의 영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밀애>(2002)는 전경린의 장편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1999)을 영화화한 것이다. 원작은 30대의 미흔이라는 가정주부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이 믿고 꿈꿔왔던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면서 이웃 남자와 치명적인 사랑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안에는 격정적인 감정의 묘사와 함께 진한 정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서 영화가 이것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변영주 감독이 ‘수위 높은’ 이 멜로드라마의 메가폰을 잡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영화는 제작 발표 때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 주인공 남자 규의 직업과 미흔 아이의 성별이 바뀐 것과 같은 사소한 변화 이외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원작에서의 사건 배열과 계기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격정 멜로’라는 광고 문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줄거리를 무미건조하게 요약한 것 정도로 다가올 뿐 소설에서와 같은 강렬한 센티멘털리즘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종일관 카메라는 너무 밋밋하고 정직해서 영상을 단순하게 만들고 인물들의 심리를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마음을 다른 데 뺏기고 사나 봅니다.”
남자가 허리를 굽혀 차 안에 앉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심해 하는 빈정거림이 아닌 염려의 눈빛이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과 낯선 냄새와 이어지는 침묵이 나를 포박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눈을 돌리고 공연히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캐스터네츠 소리…… 긴 치마를 입고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길을 맨발로, 발바닥이 터지도록 오래, 걸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흔과 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오랫동안 지치고 힘들었던 미흔이 규에게 순간적으로 매혹되고 있는 심리상태가 ‘포박’ 이나 ‘달아올랐다’라는 표현,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을 환기시키는 ‘캐스터네츠 소리’와 잦은 쉼표의 사용 등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마음을 다른 데 뺏기고 사나 봅니다.”라는 규의 말만을 대사로 사용하며, 서사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규와 미흔의 시선 교환을 정사 역사로 평이하게 보여주고 나서 각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소설에서처럼 라디오 소리가 잠시 사용되지만 이는 영상과 결합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소음으로 처리된다. 이로 인해 서사의 리듬이 단조로워져서 이야기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규의 말은 문어(文語)로 읽을 때에는 규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지만 그것을 그대로 대사로 쓰면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이러한 예들은 원작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원작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는 효율적인 각색으로 문자서사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대중적인 영화가 된 경우이다. 원작이 된 이만교의 동명소설부터 장면 중심적 구성이나 빠른 전개가 영화의 흐름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학이 문화의 중심 장르로서의 권위적 위치를 점하던 시대’가 간 것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영화나 만화 못지않게 내 소설에 속도감과 재미가 묻어나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그대로 영화 시나리오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작업이 좀더 수월해질 수는 있다고 해도 역시 각색에는 복합적인 감각이 요청된다.
영화에서는 17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원작의 구성을 해체하여 보다 영화적인 기승전결 구성에 맞게 7개의 장(맞선, 데이트, 결혼식, 선택, 신혼여행, 주말부부, 파국)으로 단순화한다. 한편 주인공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장치인 일인칭 서술은 그대로 수용하여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문학적 분위기와 원작의 당돌한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쉬운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가 42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것은 이러한 면에 빚지는 바가 크다.
<밀애>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결과적으로 희비를 달리했지만 문학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각색이 성공적이라고 하는 것도 문자가 영상으로 전환되었다기보다는 영화에 문학 언어를 영리하게 끌어들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소설 원작을 영화화하면서도 언어에의 의존도를 최소화하면서 그 의미와 분위기를 영상화하는 데 성공하여 오히려 더 문학적인 성취를 이룬 영화가 있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 「러브레터」(1997)를 원작으로 한 <파이란>(2001)이 그것이다.
원작소설은 삼류깡패인 다카노 고로가 위장 결혼해 주었던 ‘파이란’이라는 중국인 불법체류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법적인 남편으로서 그녀의 죽음을 정리하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소설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되, 앞에는 주인공(영화에서는 ‘이강재’)의 무의미하고 비참한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조직생활 시퀀스가 배치되고, 마지막에는 그가 보스의 요청을 거절하고 조직원의 손에 죽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파이란의 죽음을 수습하기 위해 동해안의 소도시로 떠나는 시퀀스부터는 강재의 현재가 파이란의 지나간 삶과 교차 편집되며 강재의 심경이 변모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영상으로 축적해 간다. 이렇게 구축된 서사 기반은 강재가 파이란의 유골을 안고 바닷가에 앉아 마지막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그를 오열하게 만드는 필연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장백지의 목소리로 파이란의 편지가 낭독되면서 카메라는 강재가 편지를 읽는 모습과 읽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다 오열하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포착하는데 이 장면은 엄청난 집중력과 긴장감을 유발하며 강재의 통한을 전달한다. <밀애>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일인칭 내레이션을 사용하면서도 전달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깊은 내면이 <파이란>에서는 영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파이란>에서는 장백지의 목소리로 두 통의 편지 내용이 낭독되는 부분에서만 일인칭 서술이 사용되었는데도 영화 전체를 통해 훨씬 더 세밀한 내면서술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5.
2000년대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에서 <공동경비구역 JSA>와 <파이란>은 소설의 영화화가 지향해 온 두 방향을 보여준다. <JSA>가 장르문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해묵은 분단문제를 새롭게 조형해 낸 텍스트라면 <파이란>은 영상매체를 통해 문학적 세계를 구현하여 ‘카메라 만년필’이라는 비유를 환기시키는 텍스트이다. 전자가 대중성에 코드를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애초부터 대중성 면에서는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소설과 영화라는 두 매체만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는 이 두 방향이 단단히 대척을 이루고 그것을 축으로 다양한 영화들이 포진해야 진정한 의미의 문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1990년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의 문화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디지털 정보화와 더불어 소설과 영화의 양립구도는 깨졌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새로운 서사장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소설은 희곡, 시나리오, 만화 등 기존의 아날로그 서사물과 더불어 신종 서사물과도 경쟁 관계에 돌입한다. <그 놈은 멋있었다>(2004), <늑대의 유혹>(2004), 그리고 <도레미파솔라시도>(2006)로 이어지는 귀여니 신드롬은 상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작인 <아파트>(2006)나 <다세포 소녀>(2006)의 경우에는 인터넷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산될 조짐이다.
인터넷 서사물들은 아직 소설처럼 정연한 형식과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인터넷 소설은 근대소설에 익숙한 독자가 볼 때에는 너무나 유치하고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귀여니가 그렇듯이 그것을 창작하여 올리는 작가들은 주로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아주 젊은 층이다.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지닌 욕망이 날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인터넷 서사물은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매우 문제적이다. 한 예로 <늑대의 유혹>의 경우 30대 이상의 관객 중에는 이 영화를 보다가 포기했다는 이가 드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이백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는 것은 곱씹어 볼만한 일이다.
늑대의 유혹은 여고생의 판타지와 감정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하고 불우한 한경이라는 여학생이 있다. 한경은 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재가한 어머니를 찾아 상경하여 의붓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해원’과 ‘태성’이라는 ‘학교짱’의 사랑을 동시에 받게 된다. 그 중에서 태성은 한경을 누나라고 부르며 구애하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태성은 아버지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남매지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성은 한경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다가 결국 불치병으로 죽는다.
줄거리만 보아도 인과율이나 개연성으로 서사가 조직되지 않았다는 것, 십대 여학생이 욕망하는 대로 순간순간 극적 재미를 추구하며 인터넷에 연재한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감정 상태를 시각적으로 기호화하는 이모티콘의 사용이다. 일견 이모티콘은 다양한 듯하지만 매우 간단한 제자(製字)원리와 몇 가지 경우의 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구체적인 감정을 단순화한다. 즉 솔직하고 직접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좋다․싫다․슬프다․짜증나다 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며 실제로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단순하게 기호화시켜 버림으로써 오히려 추상적으로 만든다.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기호 체계로 서사를 구축하면 현실적인 개연성이나 연관성 속에서 사유할 여지가 없어지고, 자연히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이야기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모티콘의 사용이나 인터넷의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볼 일이다.
2000년대 이후 두드러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일본소설을 비롯해 만화, 드라마 등 일본의 서사물들이 한국영화의 원작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파이란>은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며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일본 서사 콘텐츠 유입은 개인적 취향의 수준을 넘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올드보이>(2003), <싱글즈>(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플라이 대디>(2006) 등이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일본소설이나 만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일본의 콘텐츠를 사려는 충무로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제작영화의 10% 이상이 일본 서사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일본 서사물은 독자적인 매체로서뿐 아니라 매체 전환의 원재료가 되는 콘텐츠로서도 한국소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소설은 여전히 건재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비롯하여 무기의 그늘과 심청, 김별아의 미실, 김영하의 검은꽃,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김훈의 「화장」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이미 크랭크업했거나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한국문학과 한국영화의 재결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자축하기에 앞서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 문화계에 만연한 흥행추수주의에서 나온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추세는 작년에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문학에서 ‘이야기’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영화가 1/3 이상의 상영관을 차지하는 상황에서는 이른바 ‘대박’이 난 영화의 원작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일시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영화화되는 소설의 면면을 잠시 짚어보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황석영의 소설 세 편이 한꺼번에 영화화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근대적 서사성’이 현재 문화콘텐츠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미실>이나 <검은꽃>,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같은 소설들도 함께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 흥행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살인의 추억>, <왕의 남자> 등과 같은 최고의 흥행작에는 시공간의 연속성에 토대를 둔 ‘이야기’가 강력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분단’이나 ‘이념’의 문제가 이미 낡은 테마인 듯하지만 <JSA>를 비롯해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 투 동막골>이 보여주듯이 영화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근대 소설은 인생과 사회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하면서 중요한 앎의 방식으로 존경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소설은 그러한 근대적 위상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계는 이야기에 목마르고 소설은 그 이야기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소설은 이야기의 보고(寶庫)이자 서사구성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최고의 브레인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유희․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당선
․저서 1950년대 소설과 반어의 수사학 등, 역서 소설과 카메라의 눈
․현재 고려대 강사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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