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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신작단편/최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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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41회 작성일 08-02-29 02:58

본문

|신작단편|

나쁜 땀

최옥정


“잠깐만, 잠깐만 멈춰 봐.”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의 목에서부터 가슴팍까지 온통 장미꽃잎만한 붉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그는 한쪽 팔로 몸을 버티며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얼굴이다. 반점은 어떤 불길한 징조처럼 점점 더 붉어졌다. 손가락으로 도드라진 부분을 만져본다.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봐선 쐐기에 쏘인 자국 같았다. 그의 몸을 돌려 등과 허리 아래를 살펴보았다. 다리나 등은 드문드문 희미한 얼룩이 몇 군데 돋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곳은 역시 가슴팍을 중심으로 한 상체였다.
“도대체 니 몸이 왜 이런 거니? 언제부터 이랬어? 아프지 않아? 가렵거나.”
“숨넘어가겠다, 하나씩 물어봐라. 신경 쓸 거 없어. 별거 아냐.”
그건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멀뚱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니까. 그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고는 나를 안으려고 했다. 금기나 형벌을 상징하는 낙인처럼 붉은 반점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밀쳐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좀 말해줄래?”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 짜증나게 왜 자꾸 그래.”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김이 새버렸다는 듯 발에 걸리는 침대시트를 거칠게 걷어낸다. 탁자 위의 담배를 집어 들고 라이터를 찾았다. 나는 담배를 뺏으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샤워하고 한두 시간 지나면 가라앉으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길어봤자 하루면 낫는다고. 나는 대체 왜 그런 게 생겼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나도 몰라. 피부과 의사도 모르겠대. 짐작컨대 땀 알레르기인 것 같애. 내 땀이 아니라 니 땀. 다른 사람의 땀이 닿으면 이렇게 피부가 부풀어 올라. 보기에 징그러워서 그렇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아. 좀 스멀거리는 느낌이 있긴 한데 신경 쓸 정돈 아냐.”
그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떻게 내가 여태껏 이걸 몰랐을까. 그는 우리가 주로 밤에 만났고 자기는 원래 불을 끄고 섹스를 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그는 섹스가 끝나자마자 바로 샤워를 하는 버릇이 있다. 그동안 욕실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오는 모습만 봐왔다. 처음 반점을 발견했을 때 제일 당황한 사람은 그였을 것이다. 숨기고 싶었겠지. 진물이 흐르거나 살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의 몸이 구더기가 들끓는 죽은 짐승이라도 되는 듯 외면한다.
“뭐 이딴 기분 나쁜 병이 다 있냐.”
병이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이상반응 정도로 해두자. 사실 그의 말을 다 이해하진 못했다. 원인이 내게 있다니, 그렇다면 무슨 소린가. 내 땀에 독이 있거나 적어도 나쁜 성분이 있다는 뜻이다. 나쁜 피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나쁜 땀이라는 말은 못 들어봤다. 지독한 땀 냄새라면 내가 그토록 끔찍해 하던 거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잘못은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 과민한 피부를 가진 그에게 있다. 이제 뭘 어째야 하는 거지? 답이 있긴 하다. 섹스를 안 하거나, 하긴 하되 땀을 흘리지 않는 것.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냔 말이다. 젠장, 정말 어렵다. 한 고비 넘기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 요즘 겨우 싸움 별로 안 하고 잘 지내나보다 했더니 이런 복병이 나타날 줄이야. 오늘도 얼마나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는 한 시간째 이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 버스정류장 몇 개는 거뜬히 걸었을 거리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늘을 찾아 우왕좌왕 헤매는 초여름 한낮.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은 목덜미와 티셔츠까지 흠뻑 적셨다. 무작정 걷다가 아무 데나 쓱 들어가면 될 걸 왜 이리 까탈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오분이면 해결할 일을 그는 온힘을 들여서 한다. 식당을 찾을 때도, 잠깐 쉬었다 갈 모텔을 고를 때도 허기와 피로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 까다로움에 대해 수차례 불평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꼭 고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둔감한 것보단 까다로운 편이 백배는 낫다고 생각한다. 시네마파크 뒷골목에서 그는 또 돌아섰다. 어떻게 쓸만한 곳 하나 없냐. 베네치아 모텔 벽에 붙은 싸구려 대리석을 문제 삼았다. 나는 온몸에서 열을 뿜어내는 사람들과 건물 사이를 걸으며 이 골목도 허탕이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맘먹었다. 다음 블록 입구의 수정장은 주변이 제법 말끔해서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말하려고 했다. 그가 이파리 끝이 말라 오그라든 베고니아를 보고 인상만 쓰지 않았다면 분명 말했을 것이다.
‘넌 새로 지은 깨끗하고 시설 좋은 곳만 찾지만 난 아냐. 나는 사실 여관방이 더 좋아. 오래되고 허름한 여관의 말갛게 씻어놓은 댓돌에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가,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너랑 조용히 잠들고 싶어. 창호지가 발라진 문으로 혹시나 달빛이 들어와 잠을 깨우면 그때 네게 말할 거야. 이제 그만 내 안으로 들어와. 그렇게 너와 밤을 새우고 싶어. 첫날밤인 양 고요히 안고 정상체위로 말이야.’
점점 더 초조하게 목을 위로 쳐들고 모텔 간판만 찾는 그를 보면서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직종에 종사해온 그는 근래 들어 자라목현상을 겪고 있는 중이다. 종일 모니터를 쳐다보아야 하니 자연히 고개가 앞으로 쭉 빠진 자세가 되었고 이제 그게 굳어져 버렸다. 그래서 뭔가를 할 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는 인상을 준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짜증과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제대로 좀 해봐. 내가 이 말을 자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제대로? 뭐가 제대론데?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따진다. 너까지 그런 말 할래? 난 그쯤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한다. 아무튼 발보다 머리가 먼저 앞으로 나가는 사람, 아무래도 멋있는 포즈와는 거리가 멀다.
결국 우리가 찾아 들어간 모텔은 신축한 지 얼마 안 돼 플래카드도 걷지 않은 곳이었다. 깨끗하긴 했지만 그것은 쾌적함과 상관없는 청결함이었다. 카펫에서는 화학약품 냄새가 났고 공기는 눅눅하고 탁했다. 아무리 에어컨을 세게 틀어도 실내에 오래 갇혀 있던 더운 공기의 무게를 덜어내진 못했다. 너무 걸어서 피곤한 탓도 있었지만 도무지 그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도 끈끈했고 공기도 끈끈했고 침대시트도 끈적거렸다. 몇 번 시도를 하다가 몸을 쭉 펴고 침대에 엎드렸다. 더위가 욕망마저 녹여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그의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지도 귓불을 깨물지도 눈두덩을 핥지도 않았다. 그 역시 돌아누운 내 어깨를 흔들지도 몸을 더듬지도 않았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확실히 피곤했던 거다. 그는 정말 배려가 없는 사람이다. 온종일 남의 집을 돌아다니며 책을 배달해야 하는 내 직업을 생각한다면 그를 만나서까지 걷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는 방문도서대여 일조차 감지덕지해야 하는 게 유휴노동력으로서의 내 처지다. 하긴 세상에 존재하는 일의 절반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친절하게도 나가야 할 시간이 다 됐음을 알려주는 프런트의 전화였다.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야. 그도 나한테 등을 돌린 채 깊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를 내 쪽으로 돌려 눕혔다. 그가 잠든 모습은 처음 본다. 아이처럼 짧은 속눈썹이 예쁘다. 인위적인 표정이 거두어진 얼굴은 그런대로 봐줄 만한 용모였다. 시니컬해 보였던 날카로운 코는 섬세했고 몸은 마르긴 했어도 단단해 보였다. 너는 계속 눈을 감고 잠들어 있어라. 그러면 지금보다 몇 배는 괜찮은 인간이 될 테니.
그는 눈을 감은 채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내 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곧 나가야 된대.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추가요금 내면 되잖아. 그는 내 배 가까이 입술을 갖다대며 말했다. 아랫배에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꽉 쥐었다. 그의 얼굴이 차츰 아래로 내려간다. 내 입에서 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배타의 시간은 짧았다. 서로의 체온과 숨소리가 뒤섞였다. 단조로운 섹스를 싫어하는 그는 매번 새로운 체위를 시도했고 나 또한 그것에 만족했다. 등뼈를 꺾어버릴 듯한 폭발적인 키스와 포옹을 거쳐 마침내 화살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절정에 이르렀다. 뾰족하고 묵직한 뭔가가 분명 내 몸을 관통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깊이, 높이 서로에게 이르렀던 적은 없었다. 이대로 죽어버리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함께 죽자는 남자의 신파는 감격스러웠다. 그의 목에 이마를 대고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다. 그의 몸 전체에 퍼져 있는 붉은 반점을. 반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크고 뚜렷한 병증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헛된 공상을 했다. 그와 결혼하면 날마다 이렇게 인생의 극점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판타지를 버리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인다는 교훈을 곱씹으며 풋 웃는다. 전혀 그럴 맘이 없으면서도 그를 보면 언제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첫 만남은 그래서 중요하다.
술자리의 대화란 게 항시 그렇듯이 그 날도 사람들은 중구난방 아무 얘기나 떠들어댔다. 개업식이 끝나고 남아서 뒷정리한 사람들끼리 이차로 옮긴 자리였다. 그러다가 어쩌다였는지 몰라도 얼굴이 희고 체격이 좋은 남자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날 일본식 주점을 개업한 주인공이자 우리 사무실 동료의 삼촌이었다. 그는 걷어 올린 셔츠 아래 드러난 긴 털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였다. 사람들은 남자의 몸에 난 털에 대해서 각자 두서없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털 없는 원숭이 입장에서 보면 그건 진화가 덜 되었다는 증거라는 둥, 여자들이 털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둥 싫어한다는 둥, 자기가 알고 있는 떠도는 말들을 총동원했다. 남자는 팔뚝과 손가락까지 뒤덮은 털을 부끄러워하는지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를 어조로 앞가슴도 똑같은 상황이라고 떠벌렸다. 여름엔 샤워를 자주 하기 때문에 빠져서 숱이 적다가 겨울만 되면 더 많아진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도 했다.
“겨울에 털갈이를 하느라 더 적어지는 게 아니라요?”
나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뭐라고 또 뻔한 농담을 했던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해도 지루하군. 속으로 혀를 차다가 깜빡 졸았다.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옆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별 말 없이 줄곧 구석자리를 지키던 남자였다. 이 자리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싫으면 일어나서 가면 될 것을 왜 저러고 있을까. 그때 누군가 그를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소개했다. 낮에는 컴퓨터 기사고 밤에는 시인이라던가. 그 말이 어쩐지 비아냥거림으로 들렸다. 서른 넘은 남자가 아직도 시를 쓴다면 그것은 무능으로 간주해도 된다는 듯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의무감으로 그가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채워주었다. 그는 그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했다. 고마운 일은 맞다. 잊지 않고 때맞춰 잔을 채운다는 것은 꽤나 신경 쓰이고 성가신 일이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맥주를 두 병째 비웠을 때였다. 남자는 반쯤 풀린 눈으로 밑도 끝도 없이 내게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나와 마주치는 중간쯤에 떠 있었다. 지향점을 알 수 없는 허허로운 눈길.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꿈이라도 꾸고 있든지. 옆에 앉은 사람은 내가 아닌 누구일 것이고, 이 술자리는 지중해 바닷가나 초원이 펼쳐진 몽고 어디쯤일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는 게 일시적인 자살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그 말에 반만 동의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죽지 않고 천상에 이르는 미약이기도 하다. 남자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이게 시인의 손이구나. 그의 손바닥이 내 손등을 감쌌다. 나는 손에 주었던 힘을 슬그머니 뺐다.
제가 성공하면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십년대식 구닥다리 발언, ‘성공’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생존해 있다니. 무능이 죄가 되는 나라에서 성공을 꿈꾸는 건 생활인으로서 올바른 자세긴 하다. 남자는 말끝을 흐리며 결혼해주세요를 반복한다.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힌 채 뭐라고 더 웅얼거린다. 그는 너무 취했다. 술만 취하면 첫사랑 얘기를 하는 남자가 있는 것처럼 아무한테나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급히 술잔을 비우며 그의 술버릇을 참아준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런 색깔도 맵시도 수식도 없는 그 말은 묘하게 나를 감동시켰다. 잠시 내가 만나왔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굳이 ‘들’자를 붙일 필요도 없을 만큼 몇 되지 않는 그 남자들은 때로 멀리서 때로 가까이서 기억 속을 드나들었다.
첫 번째 남자. 스무 살의 나는 그를 몹시 사랑했다. 그도 만날 때마다 사랑한다고 했다. 어떤 때는 열 번 넘게 말한 적도 있었다.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지겹거나 싫증나지 않았다. 사랑해. 그는 늘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세 음절을 어렵사리 발음했다. 그 말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게 안타까웠다. 나도 그를 따라 사랑해, 응답하기도 했고, 고개만 끄덕이거나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는 너무 어렸고 가난했고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에 후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나는 두 번째 남자와 결혼했다. 그는 어리지도 않았고 가난하지도, 서투르지도 않았다. 이따금 보석을 선물했고 고급음식점에 데려갔고 계절이 바뀌면 옷을 사주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방법의 매뉴얼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너 보러 오셨어.”
진지하게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그의 아버지를 만났고 결혼날짜를 잡았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아주 중대한 걸 빠뜨린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걸 오래 생각하고 있기에는 너무 바빴다. 깊이 사랑한 사람에게도 결혼한 사람에게도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토록 달콤한 여운을 가진 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남자 말대로 당장 어디 먼데로 도망 가 시골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살아버릴까? 그 순간 내 입술 사이로 꽈리가 터지듯 피비비,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결혼이라고? 내가?
내가 공상에 빠져 있는 동안 남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누군가 술값을 계산한 뒤 사람들이 몰려나갔다. 동료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고개를 잠깐 들더니 다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다들 벌써 나갔어요.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아까 손잡아서 미안합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술집 문을 나섰다. 나는 그가 잡았던 손을 펼쳐보았다. 일행이 두세두세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내려다보며 뒤처져 걸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는 밤도망을 하기엔 너무 소심한 사람임을. 그는 도망갈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하자고 말할 수 있었음을. 그래서 며칠 후 그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선뜻 그를 만나러 나갔다. 소심한 사람에게 상처주기 싫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적어도 진실을 피해 폭력 속으로 숨을 사람은 아니겠기에. 그와 지금껏 만남을 이어온 연유는 어쩌면 그날 밤의 내 기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피곤하고 갑갑하고 때론 상처까지 주는 그를 계속 만날 까닭이 뭐란 말인가.
“이제 어떡할래?”
“어떡하긴 뭘 어떡해? 샤워하고 나가면 되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나는 그를, 울긋불긋한 그의 몸을 쏘아보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마치 내 몸에 두드러기라도 난 것처럼 찬물로 구석구석 씻어냈다. 냉기 때문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한참 동안 물줄기 아래 서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연루되는 방법치곤 지나치게 과격한 게 문제지만.
거리로 나서자 더위는 한풀 꺾여 있었다. 우선 좁은 공간을 벗어나니까 살 것 같았다.
“이제 뭐 할래? 집에 갈까?”
막상 무한대로 열린 공간으로 나오자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은 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난 걷기 싫어. 내일 아침부터 책 보따리 들고 하루에 서른 집이나 방문해야 한다구.”
“그럼 뭐 좀 먹을래?”
그는 달래듯 묻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 말에 발끈해서 제가 먼저 집에 간다고 팽 돌아섰을 것이다. 남의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항상 내키는 대로였다. 전화매너도 빵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그의 번호가 찍힌 액정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른 다음 내려놓는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듯이 언제나 망설이다 그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성급한 편이다. 벨은 서너 번 울리다 끊어질 때도 있다. 통화가 된 뒤에도 용건이 있는 날은 많지 않다. 그냥 걸었어. 나는 묻는다. 왜? 추궁한다고 느꼈는지 대답이 없다. 무턱대고 전화해서 그냥 걸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 궁금했다. 왜 그냥 전화했는지 묻는 것은 전화 받는 쪽의 권리다. 그냥, 그냥이라니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살펴주지 않는 내 태도에 한번 더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냥 건 전화답게 바로 끊었다. 내가 미루어 짐작해주길 바랐을까, 그는. 나는 싫다. 그냥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모호한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 내게로 떠넘겨지는 것이.
두 번째 전화한 날 그는 물었었다.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요? 내가 그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누구세요를 연발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자신이 나한테 번호를 저장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내 전화기에는 세 개의 번호만 저장되어 있다. 세 개까지 저장하다 지겨워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걸지도 걸려오지도 않을 번호들. 수첩 맨 앞에 적힌, 이름이 ‘ㄱ’으로 시작하는 세 사람. 그건 친숙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설명을 생략하고 그냥 ‘네’라고만 대답했다. 매너가 안 좋은 걸로 치자면 나도 만만치 않다.
그 다음 언제 누가 먼저 접속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와 어쩌다가 반말을 하는 사이로 발전했는지는 잊었다. 어쨌든 우리는 자주 전화하는 사이가 되었고 가끔 만났고 절반은 함께 잠을 잤다. 어쩌면 그것들조차 친숙함과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졌다. 밥 먹고 커피 마시다 헤어진 날은 밥을 먹고 나니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술을 마시다 모텔에 간 날은 술을 마시니까 피곤했고, 일어나서 걷다보니 모텔이 눈앞에 있었다. 좀 쉬었다 갈래? 둘 중 하나가 물었고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만나면 만날수록 뻔뻔해졌다. 아무 때나 불러냈고 걸핏하면 화를 냈고 욕을 했고 돈을 빌려갔다. 내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가슴팍을 밀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부를 때 내키면 나갔고 내키지 않을 때는 싫다고 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물러났다.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도 있으면 빌려주고 없으면 없다고 했다. 화를 내고 욕을 할 때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욕은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슴팍을 밀친 날도 내가 취했을 때 휘청거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강도여서 굳이 따질 맘이 없었다. 순응도 자기방어의 일종이라면 난 그 방면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나한테 줄 게 모욕밖에 없다 해도 관계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진 않는다. 나를 깨지면 안 될 도자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대하는 남자는 없다. 나는 반품된 물건이다. 약간의 흠집 덕분에, 설사 흠집이 없다 해도 반품코너에서 싼값에 팔릴 물건이다. 그런 물건의 수요자가 적지 않기 때문에 반품닷컴 같은 사이트까지 생긴 거 아닌가.
그는 얼마 전에 같이 갔던 갈비집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 그날은 뭔가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누구 생일이거나 월급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촌스러운 데가 있다. 특별한 날에는 갈비를 먹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담스러운 메뉴였지만 나는 묵묵히 따라갔다. 먹고 싶은 게 확실히 있는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무거운 책 들고 돌아다니려면 힘들 텐데 고기를 좀 먹어둬. 그는 호기롭게 갈비 삼인분을 시켰다. 난 배 안 고파. 이인분만 시켜.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걱정 마. 내가 다 먹을 테니까. 맘먹고 밥 한번 사주려는데 꼭 그래야 되겠냐?”
말하다 보니 더 화가 나는지 그는 손을 닦다 말고 물수건을 식탁에 팽개친다. 소심하기는. 아까 반점에 대해 따져 물어서 화가 난 게 분명하다. 전에 내가 한 얘기를 기억하고 일부러 엇나가는 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두 덩이씩이나 먹고 그걸 소화시키느라 쉬지 않고 떠드는 남자를 험담한 적이 있었다.
“나, 지금 고기 먹기 싫어. 그리고 지나친 지방섭취는 알레르기에도 해로울 거야.”
나는 끝내 고집을 부리며 주문을 정정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눈에 뭔가를 박아 넣듯 쏘아본다. 아마도 이런 뜻일 거라고 짐작해본다.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하는 건 인간 혐오와 깊은 관련이 있어. 채식주의자는 인간에 대해 절대로 낙관적일 수 없다구.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그 정도로 민감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 인간 본연의 오류와 허점, 위선에 둔감할 리 없잖아. 니가 지금 모든 걸 알아버린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경멸의 눈빛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게 그 증거야.’
나는 아래와 같은 생각을 담은 시선으로 그의 사나운 눈길을 받아낸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인간을 혐오하지도 않아. 어느 순간 냄새나는 음식이 끔찍해졌을 뿐이야. 내 입에 뭔가를 집어넣기 위해 수많은 공정을 거쳐 요리하는 것도 싫어. 싫어하는 음식 안 먹을 권리도 없니? 평화롭게 밥 한번 같이 먹기 참 힘들구나.’
종업원이 야채와 반찬그릇을 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조마조마했다. 또 그걸 트집 잡아 싸울까봐 그의 눈치를 살핀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다. 불판을 달구고 종업원이 고기를 구워 가위로 자를 때까지도 말이 없다.
“우리는 서로를 놀리기 위해 만나는 사이 같다.”
“난 그런 적 없는데.”
나는 갓김치를 입에 넣고 씹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를 왜 만나는데,라는 물음이 매달린 그의 시선을 무시한다. 불판에서 고기가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을 줄이고 고기를 건져내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석쇠를 정리하고 났을 때는 그나 나나 얘기를 진행시킬 맘이 사라진 뒤였다. 그가 허기진 듯 급히 고기를 먹는 동안 나는 가지나물과 상추쌈을 먹었다. 상추와 깻잎을 겹쳐 놓고 그 위에 버섯볶음과 콩장을 얹어 쌈을 만들었다. 너무 짜겠다며 그가 공깃밥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밥 한 공기 먹는 만큼 이곳에서 고기냄새 맡는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 그는 고기가 익는 족족 먹어치우더니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나 재미없는 사람이지?”
“응.”
내 쪽으로 오는 연기를 손으로 훼훼 저으면서 대답했다.
“근데 왜 만나냐?”
그를 왜 만나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겁이 많다. 판을 한번 깬 이후로 더 그렇게 되었다. 무슨 문제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오랜 숙고 끝에 얻게 될 답이 두렵다. 헤어지지 않는다는 건 서로 줄 거나 받을 게 남았다는 얘긴데 그게 뭘까.
“재미없다는 게 안 만날 이유가 되니? 난 재미없어도 만나, 그냥.”
그의 눈썹 가운데가 꿈틀한다. 나는 항상 그가 기대하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게 자주 질문을 해오고 대답을 기다리는 걸 보면 그도 은근히 내 대답을 즐기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성의 있는 대답을 내놓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이상하다. 뭔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처음이다. 신경을 곤두세워 문제를 극한까지 몰고 가려는 결의마저 느껴졌다. 직업이 두 개라 인격도 두 개인 건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갈빗집을 나온 우리는 다시 원점이다. 서로 할 일도 할 말도 없다는 표정으로 걷기만 했다. 나 이제 진짜 집에 갈래. 오늘은 그만 쉬고 싶어. 그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안 그래도 돼.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졌어? 그는 대꾸도 안 하고 내가 늘 타는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따진다.
“너 그동안 나한테 불만 많았다는 말로 들린다.”
눈치가 없지는 않네. 그가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지도 않지만 못마땅한 게 있어도 대충 넘어갔다.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하면 결국 그럼 우리 헤어지자로 결론 날 것이다.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별이라는 방식으로 상대를 응징할 필요까진 없었다. 단지 그것뿐일까. 혹시 이런 게 아닐까.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는 인간의 귀처럼 그도 너무 잘 아는 건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다고 믿는 걸까. 그의 진심은 다른 곳에 있다고, 까다로운 인간답게 내가 얘기 못한 것까지 알아차릴 거라고. 나야말로 순조로운 연애를 하려면 대화법부터 배워야한다. 설득과 이해와 포용의 수사들. 비난과 공격과 냉소 섞인 말을 너무 오랫동안 해왔다. 어쩌면 이제 그런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아닌지. 그와 나는 버스에 타서도 말없이 각자 다른 방향을 내다보았다.
“나는 니가 왜 나를 만나는지 잘 모르겠다. 이유 한 가지만 말해줄래?”
“너 오늘 진짜 집요하다. 그냥 만난다니까. 난 천사가 아니거든. 악마는 아무나 만나.”
그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굳이 이유를 말하라면, 너랑 있으면 딱 한 가지 편한 게 있어. 너는 나한테 관심이 없잖아.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다 할 수 있어서 좋아. 나 때문에 잠을 설치지도, 마음이 아프지도 않을 테니까. 지금 듣고 금방 잊어버릴 테니까. 어떨 때는 그런 니가 고마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너는 어쩌면 알고 있는 것도 같애. 내가 아직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마지막 말은 침과 함께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갈고리로 얽어매듯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흐리다. 그의 집은 나와 정반대 방향이다. 우리 집까지 가는데 30분, 다시 거기서 그의 집까지 가는데 50분, 오가며 보내는 시간까지 합하면 두 시간가량 걸릴 것이다. 그는 월요일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야 한다. 주말에 접수된 A/S건을 처리하려면 하루 종일 바쁠 것이다.
“고마워. 바쁜데 집까지 바래다줘서.”
그의 눈길은 내 이마쯤에 멈추어 있다. 아직도 할 말을 다 못했는지 질문은 이어진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지?”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계절을 생각한다. 겨울에 만났고 봄을 같이 보냈으니 아마 반년쯤.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기간이다. 기분으로는 십년쯤 만나온 고등학교 동창 같기도 하다. 어떤 땐 지난번에 처음 만나고 두 번째 만나는 느낌일 때도 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종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점만은 한결같다.
“되게 미안하네. 그동안 내가 너를 한번도 바래다준 적이 없다니.”
“나 남자가 집까지 바래다주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괜한 짓이잖아. 괜시리 왔다 갔다.”
“그래. 너의 그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맘에 든다. 내 결점들을 추궁하지 않고 봐주는 것도 항상 고마웠어.”
나는 코앞에 집을 놔두고 그와 미진한 감정을 수습하고 있다. 그는 빌린 돈을 갚으러 나온 사람, 아니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사람 같다. 무얼 더 말하기 위해 작별을 지연시키는 것일까. 정말 어색하다. 그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내 집으로 쏙 들어가야 하는 건지, 그를 먼저 보내고 나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는 나더러 먼저 들어가라고도, 먼저 가겠다고도 하지 않고 신발코로 땅만 툭툭 치고 있다.
“이제 정말 가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횡단보도 방향으로 걸어간다. 천천히 걸어라.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걸음을 늦춘다. 그는 옆으로 다가와서 또 묻는다.
“넌 왜 나한테 질문을 안 하냐? 궁금한 거 없어?”
나는 고개를 젓는다.
‘너에 대해 물으려면 나도 그만큼 내 얘기를 해야 하잖아. 귀찮은 일이야. 니가 없었던 내 인생에 대해서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보이는 것만 보면 안 되겠니? 주는 것만 받고.’
이렇게 말하면 짧은 질문에 너무 긴 대답이다. 나는 요약해서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알게 될 텐데 뭐 하러 묻고 대답하는 수고를 하니?”
“그래도 가끔은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냐.”
“없어. 내가 했던 말들이 내 목을 치게 될 까봐 겁나기도 하고. 니가 들어줄 준비가 돼 있는 거 같지도 않고.”
“미안해.”
“뭐가?”
“전부 다.”
그는 내가 사는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니가 사는 집 보고 싶다. 나는 몸을 홱 돌린다. 알잖아. 집은 안 되는 거. 그는 알고 있다는 듯 턱으로 허공을 찍으며 횡단보도 앞에서 건너편 신호등을 건너다본다. 일분 후면 초록불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여길 떠나는 거야. 그리고 한동안은 너를 보고 싶지 않겠지. 그를 돌아본다. 콧날이 역시 날카롭다. 지나치게. 저런 사람은 결코 타인에게 둥지를 틀 수 없을 것이다. 땀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쯔쯧.
“차 한잔 하고 갈래?”
내 입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고개를 바짝 들고 부릅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루쯤 율법을 깨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겠어?”
그는 웃는다. 낯설다. 웃음이 잘 안 어울리는 얼굴이다. 오늘은 어차피 이상한 날이니까 뭐든 다 봐주자. 그의 전화를 받고 내 결심이 깨질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무조건 집에서 쉴 생각이야. 다음에 만나자는 말에 그는 극구 오늘 꼭 만나야한다고 우겼다. 꼭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입술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꼭을 힘주어 발음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몸이 저릿저릿해졌다. 배란기가 원흉이다. 발바닥부터 간질거리며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한 이유가 그거였다. 그는 예스라는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길게 얘기하다 거절할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어쨌거나 기념할 만한 날이 되었다. 내 집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을 거라는 율법이 깨진 날이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숙박업소의 밀폐된 공기를 못 견뎌한다는 것을. 창문도 없고 대문도 없고 천장은 낮고, 무엇보다 제한시간이 있는 그곳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는 집이 갖고 싶은 사람이다. 아마도 매일 밤 결혼하는 꿈을 꿀 것이다. 그가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발을 뻗고 잠들고 싶어 하는 그곳이 내 집이 될 수는 없다. 맹세했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체취를 묻히는 일 다시 없기를. 냄새로 영역을 표시하려는 습성이라면 알 만큼 알았음을. 그런데 나는 지금 그를 초대한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단숨에 중대한, 결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 게 남녀관계라더니 함정에 빠진 기분이다.
그는 안으로 얼른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가 너 덮칠까 봐 그러고 서 있니?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자 신발을 벗고 쭈뼛거리며 식탁 앞까지 왔다. 무슨 차를 마실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건너편 아파트가 내다보이는 베란다에 시선이 가 있다.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위험하다지. 살인과 자살이 끊이지 않는 밤. 밤의 무엇이 죽음을 재촉할까. 완전히 검어지지 못하는 미련. 뭐든 삼킬 줄밖에 모르는 커다란 구멍.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한 계율들을 만들며 밤을 통과해야 한다.
“해가 지고 밤이 온다는 건 참 원더풀한 일이야, 그치?”
나는 중얼거린다. 배가 고파. 그는 대답한다. 비빔국수 같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 갈비 이인분을 혼자 다 먹은 지 겨우 한 시간 지났다. 비빔국수라면 가장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다. 어쩐 일이냐? 니가 그런 음식을 다 먹고 싶어 하고. 그는 밥을 주식으로 차린 밥상만이 끼니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부류에 속했다. 나 진짜 배고파. 그는 식탁을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정말 여러 끼니를 건너뛴 사람처럼 눈초리에 풀기가 빠져 있다.
냉장고 속의 야채는 모조리 시들었다. 치커리는 뾰족뾰족한 테두리가 녹아서 물이 흘렀다. 야채를 전부 쟁반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먹을 수 있는 이파리만 추려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쓰레기통에 쓸어 넣고 싶다. 당근과 오이의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껍질을 두껍게 벗겨냈다. 치커리, 샐러리, 상추, 오이, 당근을 소쿠리에 담아 개수대로 가져갔다. 우둘투둘한 자주색 상추를 수돗물에 대고 쏴쏴 소리 나게 씻었다. 그는 식탁의자에 앉아서 내가 요리하는 걸 구경하다 가끔 한마디씩 던졌다.
“상추꽃 본 적 있니?”
“글쎄. 상추도 꽃이 피나?”
“그럼. 노랗게 피면 얼마나 예쁜데. 너 그럼 상추가 국화과 식물이라는 것도 모르겠구나.”
먹고사는 것과 하등 관련이 없는 지식들. 상추잎에 붙은 벌레알과 농약, 흙과 함께 그의 말들이 씻겨나갔다. 찬물을 맞자 야채들은 가까스로 푸른 잎을 조금씩 쳐들었다. 물방울이 묻은 야채는 제법 싱싱해 보였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큼직하게 썬다. 커다란 볼에다 갖은양념을 넣고 야채와 함께 버무린다. 시큼한 식초 냄새를 맡자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알맞게 삶아진 국숫발은 적당히 윤기가 흐르고 먹음직스럽다. 내가 만드는 비빔국수는 야채를 듬뿍 넣는 게 포인트다. 면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하자면 샐러드의 부재료로 국수가 들어가는 셈이다. 국수와 야채를 비비다 말고 한 가닥 집어 그의 입에 넣어준다. 후루룩.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고 열심히 먹는다. 그릇 바닥에 양념만 남기고 깨끗이 먹어치웠다. 야채상태가 그리 양호한 편이 아닌데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나는 팔을 높이 쳐들고 기지개를 켰다. 아, 이 포만감, 충족감. 눈을 감고 몸의 중심을 흘러가는 음식의 경로를 생각한다. 식욕만 건재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껍질 속의 안정된 삶조차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예 소파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차를 끓여놓고 그를 불렀다. 녹차로 식도에 달라붙은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씻어낸다. 음식이 소화되면서 칼로리를 만들고 그 칼로리가 태워질 동안 내 몸은 분주할 것이다. 마치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그는 알고 있었을까.
나는 남자와 섹스를 한 날은 온종일 샐러드로만 끼니를 때우는 습관이 있다. 이론적으로야 과도한 에너지 소비 뒤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육류를 섭취해야겠지만 내 입맛은 그리 논리적이지 않다.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긴 해도 입에서 당기는 건 음식냄새를 퍼뜨리지 않고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씹히는 채소니 어쩌겠는가. 두 번째 남자 때문일 것이다. 그의 체취, 그의 몸에서 풍기는 누린내가 싫었다. 땀냄새도 침냄새도 머릿내도 싫었다. 내 몸 가까이 다가올 때면 짐승의 살이 썩는 냄새가 났다. 영혼을 갉아먹는 맹독성 냄새. 지나치게 고기를 좋아하는 그의 식성 때문이라고 믿었다. 틀린 생각일 것이다. 비빔국수 같은 건 점잖은 사람이 먹는 올바른 음식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이 틀린 것처럼. 단지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변명이나 핑계를 끌어들이지 말자. 나의 대책 없음이 빚어낸 결과다. 섣불리 게임을 시작한 자의 자충수였다. 큰 화를 불러오는 것은 언제나 사소한 문제라는 사실을 몰랐던 대가는 의외로 컸다. 감당 못할 의무를 떠맡고 허덕이는 결혼생활은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나를 늘 질책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혼자 사는 자의 자유. 반찬을 갖춰 차린 밥 말고 그 자체가 주식과 부식을 겸하는 국수요리를 언제든 해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얻은 식단이다. 순조롭게 넘어가는 끼니가 없었다. 나는 늘 음식을 만들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식욕도 없었다. 브로콜리와 상추나 청경채를 치우고 마늘과 양파로 양념한 불고기나 스테이크로 냉장고를 채워야했다. 저녁메뉴인 스파게티에 고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시작된 싸움은 살인이 일어날 만큼 격렬해졌다. 이걸 음식이라고 먹으라는 거야! 각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개구리였고 뱀이었고 바퀴벌레였다. 넌 악마야. 그는 악마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밤은 죽음을 부른다지만 다행히 아무도 죽지 않았다. 몇 군데의 상처와 결별로 싸움은 종결되었다. 빨리 발을 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한 악연이 준 것은 많았다. 그게 없었더라면 인생의 절반밖에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바꿀 게 있다는 건 어쨌든 멋진 일이다.
포만감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진다. 나는 소파로 옮겨가 길게 눕는다. 그도 내 다리 옆의 빈 공간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는다. 훤히 뚫린 베란다의 창 때문인지 바깥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깊게 내쉰다. 국수를 먹었을 때와 밥을 먹었을 때의 포만감은 완전히 다른 종류다. 나에게 밥은 강요된 삶, 감옥의 표징이다. 뭐랄까. 국수 쪽이 좀더 정신적이랄까. 우스운 말이지만 단지 허기를 채우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는, 생존을 위해 강요된 음식이 아니라는 느낌 말이다. 나는 내 감각의 미묘한 차이를 즐긴다. 남자 손도 눈을 감고 잡을 때와 얼굴을 보면서 잡을 때가 전혀 다르다. 볼 때는 모르는데 눈을 감고 만지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눈 감은 내 앞에 백 명의 남자가 와서 차례차례 손을 잡아도 이 남자 손을 단박에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사물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아예 눈을 감고 사물을 접하면 더 확실해지는 게 있다.
나는 발가락으로 그의 웃옷을 들추고 배를 간질인다. 두드러기 난 건 좀 어때? 그가 옷을 걷어 보인다. 아직 얼룩덜룩한 반점이 넓게 퍼져 있다. 괜찮아? 집안 여기저기 나의 체취와 손길이 묻은 물건들을 둘러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거실에는 달랑 구식 텔레비전과 소파뿐이다. 장식물도 화분도 없다. 이 집은 이대로도 완벽하다. 살림도 없는데 뭐 볼 거 있다고 그렇게 보니? 잠시 후면 그의 체취가 남게 되겠지. 영역표시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의 시선은 정면 벽에 걸린 액자에 멈춰 있다. 15도쯤 몸을 틀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 누드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집에 남자는 저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손을 앞을 향해 있고 나머지 손은 엉덩이 옆에 늘어뜨린 채 뒤를 돌아보고 있다. 저 남자 앞에는, 또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앞을 향한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간절한 눈빛은 무슨 뜻일까. 그러고 보니 불안정한 눈빛이 그와 아주 많이 닮았다. 불손하고 방자한 눈빛은 타인의 땀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피부와 짝을 이루어 그가 점점 세상과 멀어져 시의 밤으로 달아나는 핑계가 된다.
“그만 보고 이리 와 봐.”
나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뻗는다. 그는 소파 틈새를 비집고 내 몸에 반쯤 기대 누웠다. 이대로 조금만 있자. 포만감 때문에 금방 잠이 들 것이다. 나쁜 습관이다. 배부른 채 잠드는 것. 건강한 삶을 위해서 이것도 곧 바꾸어야할 것의 목록에 추가해야 한다.
그는 소파 아래로 내려가 카펫 위에 누웠다. 팔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끈다. 그의 옆으로 가서 몸을 마주 붙이고 가슴 가운데 이마를 댔다. 한손은 그의 허리춤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내 손바닥은 그의 허리선도 외울 것이다. 졸렸다. 상추는 졸음을 부르는 음식이다. 나는 자주 악몽을 꿔. 잠결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기 때문이야. 죽은 짐승들의 영혼이 너를 찾아오는 거야. 상추쌈을 먹고 자. 그러면 깊이 잠들 수 있어. 너한테 필요한 건 꿈조차 없는 깊은 잠이잖아. 두드러기를 잠재울 수 있는 휴식. 나도 꿈결인 듯 속삭인다. 나쁜 방문객도 방문객이야. 그는 그 말과 함께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인다. 나는 백야가 무서울 것 같다. 인간을 쉴 수 없게 하는 밝음이 지속되는 낮. 낮의 날들. 죽음 같은 휴식이 있는 밤을 그리워하다 미쳐버리지 않을까.
눈을 떴다. 내 손은 아직도 그의 허리춤에 있다. 밖은 깜깜했다. 열어놓은 창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팔을 뻗어 내 등을 문질렀다. 우리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옷을 벗겨주었다. 알몸이 되어 더욱 세게 부둥켜안았다. 그는 모든 손놀림을 멈추고 격정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듯 나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후 아주 고요히 나를 바닥에 눕히고 내 위에 몸을 포갰다. 그는 양 무릎으로 내 다리를 벌렸다. 천천히,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 상태로 꼼짝 않고 몇 분이 흘렀다. 봉오리를 꼭 다문 꽃처럼 고요히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가 내 몸에 갇힌 신체의 일부를 빼낸 뒤 내게서 떨어져 나갈까봐 조바심을 냈다. 그를 안은 손을 깍지 끼었다. 두 몸이 묶여서 절대로 풀어지지 않도록. 그 순간 생각했다. 우리가 땀을 많이 흘렸을까. 흘렸다면 얼마나 많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떼지 않았다. 내 몸에 닿은 그의 살에서 나쁜 꿈의 흔적도, 밀폐된 공기와 타인의 땀을 거부하는 성마른 피부도 감지할 수 있다. 지금쯤 붉은 반점이 사라지고 새 반점이 돋아나고 있을까. 잠시만 더 기다리자. 나는 어둠 속의 그에게 말했다.


최옥정․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2001년 ≪한국소설≫로 등단
․소설집 󰡔식물의 내부󰡕
추천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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