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3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장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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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혜
봄의 현장
싹수가 노랐다고 했지요. 너무 일찍 세상에 눈을 뜬 걸까요. 변두리 옥탑방에 살림을 차렸지요. 달린 입을 위해 이리저리 가지를 뻗었지요. 비바람을 뚫고 뛰어다녔지요. 피자배달을 시작으로 세일즈맨도 하고 통닭집 주인도 했지요.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였지요.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지요. 빚만 쌓였지요.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날 하늘이 노랬지요.
맨몸으로 현장에 뛰어들었지요.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을 돌아다녔지요. 거푸집을 수도 없이 지었지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지요.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난 후 여기까지 왔지요.
엑스트라가 되었지요. 지금 드라마 속 사랑이 꽃피는 중이지요. 젊은 나무들이 목숨 걸고 사랑을 불태우지요. 한순간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려고 새벽부터 기다리지요. 세트장 안 햇살이 콘크리트처럼 쏟아지지요. 목구멍으로 철근 같은 허기가 올라오지요. 눈앞에 자꾸 노란 꽃만 피지요
봄밤
머리가 긴 아들이 잠을 잔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어머니가 밥상을 차린다
털이 부스스한 개가 짖는다
어머니가 빌딩청소를 나가기 전 흔들어보는
아들의 방문은 잠겨있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개가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닌다
벽에 가화만사성 액자가 걸려있다
길어진 나무그림자가 창문을 두드린다
머리가 긴 아들이 일어난다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인다
비쩍 마른 개가 꼬리 치며 짖는다
아들이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신다
두루마기 휴지처럼 하루가 굴러간다
어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온다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이 껌벅인다
다시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잠겨진 아들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개가 혼자 베란다 문틈에서 킁킁거린다
창밖 목련이 터지려고 한다
절벽 위의 식사
곧 철거를 알리는
붉은 경고문이 붙은 아파트
이사 가면서 버린 화분들이
노인정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
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
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
노인이 주전자로 뿌리는
물을 받아먹고 있다
줄줄 밑으로 흘리면서
흠뻑 젖고 있다
오늘
또 한 집이 떠나고
남은 노인 몇
평상에 나와 앉아 있다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
흠뻑 취하고 있다
하늘로 간 집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헉헉거리며 올라가는데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
집은 위로 달아난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
자전거가 따라 올라온다
집을 나와 담배를 피우던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온다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생수통이
집을 찾아 줄줄이 뒤를 따라온다
가도 기도 막힌 벽뿐이다
도대체 여기가 몇 층인가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데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은데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바구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삐걱대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고장이 날 것 같은데
흑백사진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
거실 액자 속으로
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
아버지가 닭을 잡는다
목을 비트는 손이 떨린다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며 먹물을 뿌린다
줄장미가 뭉개진다
채송화도 뭉개진다
화단 앞에 찡그리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
하나는 다리에 고개를 파묻고
하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하얀 닭털이 날아다닌다
눈을 뜰 수 없어요 아버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닭털처럼 흩어진다
칼을 든 아버지가 흔들린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에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다
아오라지를 건너며
검은 개가 따라왔어요. 따라오지 마, 돌을 던졌어요.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어요. 휘어진 소나무 위로 달아났어요. 징검다리 건너다 돌아봤어요. 검은 개는 보이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였어요.
검은 개를 찾아다녔어요.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왔어요. 누군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어요. 흐린 편지를 뜯으면 비가 쏟아졌어요.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었어요. 다시는 건널 수가 없었을 때, 내 몸 안에 어두운 강을 키웠어요.
나는 검은 돌이 되었어요. 줄줄이 돌멩이를 낳았어요. 흐르다 내 어둠과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강바닥에 내가 던진 돌멩이만 가득했어요. 먹구름이 꼬리를 쳤어요. 아우라지 물결이 따라오며 컹컹 짖었어요. 검은 개는 끝내 보이지 않았어요.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성산동 언덕배기에
짓다만 채로 버려진 건물이 있다
찢어져 펄럭이는 검은 천 사이로
처량한 뼈대만 보인다
동물의 왕국 재방송을 본 날
마을버스 안에서 내다보니
강을 건너다 사자 발톱에 목이 잡힌
어린 물소가 생각난다
출입금지 팻말 위로 뚫린 구멍이
물고 늘어지는 날카로운 이빨을
빠져나오려는 겁먹은 눈으로 보인다
몸부림을 치며 사자의 얼굴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내는 순간도 보인다
사자가 힘이 빠져 잠시 놓친 물소가
피를 흘리면서 달아나는
숨 막히는 날들도 보인다
사자는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언덕에서 다시 물소의 목을 잡는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는다
버둥거리는 물소의 발이 클로즈업된다
살이 뜯기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인다
고가도로를 지나는 동안 세상이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보인다
사바나 레이스 다큐멘터리 나레이터는
사자가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사자의 생활일 뿐이라고 말한다
쫒기며 사는 휑한 눈으로 그 말을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
현대아파트 경비아저씨는
깨진 장식장 유리조각을
회색 자루에 넣었다
줄을 당겨 입구를 꽉 조였다
바닥에 사정없이 몇 번 내리치더니
얌전한 모래가 되어 쏟아지는 유리를
빈병이 담긴 자루에 부었다
손을 탁탁 털면서
말썽부리는 무엇이든
경비실로 가져오라고 했다
멱살 잡고 싸우던 남자들도
사나운 도둑고양이도
자루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순한 양이 됐다고 했다
자루의 비밀은 들어갔다 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했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날
반으로 쩍 갈라진 마음을
몰래 그 자루에 넣어 내리치려고
살며시 경비실 문을 열어 보았다
경비아저씨가 자루 속에
모래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시다가 시를 쓴다
주인은 없고 시다만 있는 미용실
제멋대로 자란 내 머리를
높은 의자에 올려놓는다
날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시다는 내 머리를 들여다본다
날개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거울 속의 새를 보며
날개를 달아달라고 주문한다
내 생각과는 반대방향으로
시다의 가위가 지나간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시다가 자꾸 중얼거린다
뭉텅뭉텅 털만 잘려서 쌓일 뿐
새는 날아오를 생각도 않는다
이제 그만 자를까요 시다가 묻는다
나는 더 잘라달라고 대답한다
귀가 보이게 머리를 잘라놓고
시다는 날아보라고 재촉한다
거울 속 이상한 새 한 마리
높은 의자에서 뒤뚱거리며 내려온다
구름 다이어트
하루에 십리를 걷기로 한다
저녁을 거르고
하늘공원으로 간다
걸어야만 갈 수 있는 언덕에
싱싱한 구름이 자란다
화살나무를 지나며
가지에 걸린 구름을 먹는다
토끼풀밭을 지나며
오물오물 구름을 먹는다
네잎클로버를 찾는 사람들이
뻐꾸기 우는 풀밭에 앉아있다
나도 빨리 저 평화로운 저녁의
주둥이로 들어가고 싶은데
꽉 끼는 옷을 입고
땀이 나도록 구름을 먹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
살을 버려야 갈 수 있는 길로
하얀 나비가 날아간다
얼마나 더 구름을 먹어야
나비를 따라갈 수 있을까
지그재그 계단을 나풀나풀 올라
살찐 한 마리 우울
하늘로 날릴 수 있을까
시작노트
길을 가다 보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눈길이 간다.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나오는 풀이나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다. 개미취나 패랭이꽃을 만나면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람에 흔들리며 뿌리내리고 사는 모습이 한편의 드라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날은 월드컵공원 물억새 밭으로 간다. 장마 지난 뒤에 갔더니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키가 자라 있다. 지천으로 부들꽃이 피어 있다. 모두 비바람을 잘 견디고 있다. 물옥잠도 보이고 몸통이 초록이고 검은 나비도 날아다닌다.
나무로 이어놓은 다리에 앉아 있으면 아무런 말이 필요 없다. 부질없는 말과 생각에 흔들리는 어리석은 내 모습이 보인다. 물억새 잎 부딪는 소리가 마음의 칼날 소리 같기도 하다.
저 의연한 모습들을 보고 평화를 얻고 위안을 받는다. 물억새 밭 깊은 정적 속에 앉아서 저무는 하늘을 본다. 사는 것이 구름이어도 살아간다는 것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장성혜․
경북 봉화 출생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봄의 현장
싹수가 노랐다고 했지요. 너무 일찍 세상에 눈을 뜬 걸까요. 변두리 옥탑방에 살림을 차렸지요. 달린 입을 위해 이리저리 가지를 뻗었지요. 비바람을 뚫고 뛰어다녔지요. 피자배달을 시작으로 세일즈맨도 하고 통닭집 주인도 했지요.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였지요.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지요. 빚만 쌓였지요.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날 하늘이 노랬지요.
맨몸으로 현장에 뛰어들었지요.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을 돌아다녔지요. 거푸집을 수도 없이 지었지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지요.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난 후 여기까지 왔지요.
엑스트라가 되었지요. 지금 드라마 속 사랑이 꽃피는 중이지요. 젊은 나무들이 목숨 걸고 사랑을 불태우지요. 한순간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려고 새벽부터 기다리지요. 세트장 안 햇살이 콘크리트처럼 쏟아지지요. 목구멍으로 철근 같은 허기가 올라오지요. 눈앞에 자꾸 노란 꽃만 피지요
봄밤
머리가 긴 아들이 잠을 잔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어머니가 밥상을 차린다
털이 부스스한 개가 짖는다
어머니가 빌딩청소를 나가기 전 흔들어보는
아들의 방문은 잠겨있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개가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닌다
벽에 가화만사성 액자가 걸려있다
길어진 나무그림자가 창문을 두드린다
머리가 긴 아들이 일어난다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인다
비쩍 마른 개가 꼬리 치며 짖는다
아들이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신다
두루마기 휴지처럼 하루가 굴러간다
어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온다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이 껌벅인다
다시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잠겨진 아들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개가 혼자 베란다 문틈에서 킁킁거린다
창밖 목련이 터지려고 한다
절벽 위의 식사
곧 철거를 알리는
붉은 경고문이 붙은 아파트
이사 가면서 버린 화분들이
노인정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
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
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
노인이 주전자로 뿌리는
물을 받아먹고 있다
줄줄 밑으로 흘리면서
흠뻑 젖고 있다
오늘
또 한 집이 떠나고
남은 노인 몇
평상에 나와 앉아 있다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
흠뻑 취하고 있다
하늘로 간 집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헉헉거리며 올라가는데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
집은 위로 달아난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
자전거가 따라 올라온다
집을 나와 담배를 피우던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온다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생수통이
집을 찾아 줄줄이 뒤를 따라온다
가도 기도 막힌 벽뿐이다
도대체 여기가 몇 층인가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데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은데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바구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삐걱대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고장이 날 것 같은데
흑백사진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
거실 액자 속으로
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
아버지가 닭을 잡는다
목을 비트는 손이 떨린다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며 먹물을 뿌린다
줄장미가 뭉개진다
채송화도 뭉개진다
화단 앞에 찡그리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
하나는 다리에 고개를 파묻고
하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하얀 닭털이 날아다닌다
눈을 뜰 수 없어요 아버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닭털처럼 흩어진다
칼을 든 아버지가 흔들린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에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다
아오라지를 건너며
검은 개가 따라왔어요. 따라오지 마, 돌을 던졌어요.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어요. 휘어진 소나무 위로 달아났어요. 징검다리 건너다 돌아봤어요. 검은 개는 보이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였어요.
검은 개를 찾아다녔어요.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왔어요. 누군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어요. 흐린 편지를 뜯으면 비가 쏟아졌어요.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었어요. 다시는 건널 수가 없었을 때, 내 몸 안에 어두운 강을 키웠어요.
나는 검은 돌이 되었어요. 줄줄이 돌멩이를 낳았어요. 흐르다 내 어둠과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강바닥에 내가 던진 돌멩이만 가득했어요. 먹구름이 꼬리를 쳤어요. 아우라지 물결이 따라오며 컹컹 짖었어요. 검은 개는 끝내 보이지 않았어요.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성산동 언덕배기에
짓다만 채로 버려진 건물이 있다
찢어져 펄럭이는 검은 천 사이로
처량한 뼈대만 보인다
동물의 왕국 재방송을 본 날
마을버스 안에서 내다보니
강을 건너다 사자 발톱에 목이 잡힌
어린 물소가 생각난다
출입금지 팻말 위로 뚫린 구멍이
물고 늘어지는 날카로운 이빨을
빠져나오려는 겁먹은 눈으로 보인다
몸부림을 치며 사자의 얼굴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내는 순간도 보인다
사자가 힘이 빠져 잠시 놓친 물소가
피를 흘리면서 달아나는
숨 막히는 날들도 보인다
사자는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언덕에서 다시 물소의 목을 잡는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는다
버둥거리는 물소의 발이 클로즈업된다
살이 뜯기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인다
고가도로를 지나는 동안 세상이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보인다
사바나 레이스 다큐멘터리 나레이터는
사자가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사자의 생활일 뿐이라고 말한다
쫒기며 사는 휑한 눈으로 그 말을 듣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
현대아파트 경비아저씨는
깨진 장식장 유리조각을
회색 자루에 넣었다
줄을 당겨 입구를 꽉 조였다
바닥에 사정없이 몇 번 내리치더니
얌전한 모래가 되어 쏟아지는 유리를
빈병이 담긴 자루에 부었다
손을 탁탁 털면서
말썽부리는 무엇이든
경비실로 가져오라고 했다
멱살 잡고 싸우던 남자들도
사나운 도둑고양이도
자루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순한 양이 됐다고 했다
자루의 비밀은 들어갔다 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했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날
반으로 쩍 갈라진 마음을
몰래 그 자루에 넣어 내리치려고
살며시 경비실 문을 열어 보았다
경비아저씨가 자루 속에
모래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시다가 시를 쓴다
주인은 없고 시다만 있는 미용실
제멋대로 자란 내 머리를
높은 의자에 올려놓는다
날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시다는 내 머리를 들여다본다
날개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거울 속의 새를 보며
날개를 달아달라고 주문한다
내 생각과는 반대방향으로
시다의 가위가 지나간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시다가 자꾸 중얼거린다
뭉텅뭉텅 털만 잘려서 쌓일 뿐
새는 날아오를 생각도 않는다
이제 그만 자를까요 시다가 묻는다
나는 더 잘라달라고 대답한다
귀가 보이게 머리를 잘라놓고
시다는 날아보라고 재촉한다
거울 속 이상한 새 한 마리
높은 의자에서 뒤뚱거리며 내려온다
구름 다이어트
하루에 십리를 걷기로 한다
저녁을 거르고
하늘공원으로 간다
걸어야만 갈 수 있는 언덕에
싱싱한 구름이 자란다
화살나무를 지나며
가지에 걸린 구름을 먹는다
토끼풀밭을 지나며
오물오물 구름을 먹는다
네잎클로버를 찾는 사람들이
뻐꾸기 우는 풀밭에 앉아있다
나도 빨리 저 평화로운 저녁의
주둥이로 들어가고 싶은데
꽉 끼는 옷을 입고
땀이 나도록 구름을 먹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
살을 버려야 갈 수 있는 길로
하얀 나비가 날아간다
얼마나 더 구름을 먹어야
나비를 따라갈 수 있을까
지그재그 계단을 나풀나풀 올라
살찐 한 마리 우울
하늘로 날릴 수 있을까
시작노트
길을 가다 보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눈길이 간다.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나오는 풀이나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다. 개미취나 패랭이꽃을 만나면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람에 흔들리며 뿌리내리고 사는 모습이 한편의 드라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날은 월드컵공원 물억새 밭으로 간다. 장마 지난 뒤에 갔더니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키가 자라 있다. 지천으로 부들꽃이 피어 있다. 모두 비바람을 잘 견디고 있다. 물옥잠도 보이고 몸통이 초록이고 검은 나비도 날아다닌다.
나무로 이어놓은 다리에 앉아 있으면 아무런 말이 필요 없다. 부질없는 말과 생각에 흔들리는 어리석은 내 모습이 보인다. 물억새 잎 부딪는 소리가 마음의 칼날 소리 같기도 하다.
저 의연한 모습들을 보고 평화를 얻고 위안을 받는다. 물억새 밭 깊은 정적 속에 앉아서 저무는 하늘을 본다. 사는 것이 구름이어도 살아간다는 것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장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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