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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장성혜 작품론/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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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혜 작품론|
절벽 위의 나날들
강경희|문학평론가
1. 가난의 연대
인간의 공포 체험은 의식의 심층에 숨어 있는 그 어떤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공포는 보이지 않는 관념적 대상으로 존재를 압박하기도 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무서움의 대상도 무서워해야 할 확실한 아무런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감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로 독자를 섬뜩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는 반면, 공포의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강경애의 「지하촌」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의 빈민촌의 참담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가난과 착취가 야기한 삶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멍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 ‘가난’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가난의 초점이 ‘가족’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있어 혈연을 기초로 한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은 나의 삶의 뿌리이자 중심이다. 가족의 연대성이 강조되는 것은 나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하나의 운명이라는 인식에 근간한다. 즉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나와 가족 구성원의 삶을 동일시하는 공동체적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난의 문제는 개별자로서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된다. 가난이 가족의 문제로 확장될 때 그것은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아버지의 가난이 나의 가난이 되고 나의 가난이 다시금 후대의 가난으로 대물림되는 현실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공포로 인식된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는 특수한 인간학적 관점을 형성한다. 그것은 가족이 나의 삶을 우선한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당연시되고 한편으로 그러한 삶은 무의식적으로 강요된다. 특히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의무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무한 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가장의 역할은 점차 그 빛을 잃게 된다. 장성혜의 신작시 「봄날의 현장」은 추락한 한 가장의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싹수가 노랐다고 했지요. 너무 일찍 세상에 눈을 뜬 걸까요. 변두리 옥탑방에 살림을 차렸지요. 달린 입을 위해 이리저리 가지를 뻗었지요. 비바람을 뚫고 뛰어다녔지요. 피자배달을 시작으로 세일즈맨도 하고 통닭집 주인도 했지요.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였지요.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지요. 빚만 쌓였지요.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날 하늘이 노랬지요.
맨몸으로 현장에 뛰어들었지요.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을 돌아다녔지요. 거푸집을 수도 없이 지었지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지요.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난 후 여기까지 왔지요.
엑스트라가 되었지요. 지금 드라마 속 사랑이 꽃피는 중이지요. 젊은 나무들이 목숨 걸고 사랑을 불태우지요. 한순간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려고 새벽부터 기다리지요. 세트장 안 햇살이 콘크리트처럼 쏟아지지요. 목구멍으로 철근 같은 허기가 올라오지요. 눈앞에 자꾸 노란 꽃만 피지요.
―「봄의 현장」 전문
「봄의 현장」은 가진 것 없는 한 인간의 삶의 내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힘겨운 삶, 생활에 쫓겨 이리저리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현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임없이 추락하는 생, 희망보다는 절망에 길들여진 불쌍한 한 인간의 초상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의 화자의 삶은 가난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두리 옥탑방”에서 시작한 살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밑바닥 직업을 마다하지 않은 생활, 그러나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일 뿐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릴 뿐이다. 가난한 가장에게 돌아온 현실은 “빚”만 쌓이고,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폐허 같은 삶이다.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한 가장에게 돌아온 현실은 가정의 파탄일 뿐이다.
노동의 수고가 추락한 삶으로 귀결될 때 화자는 삶을 체념하게 된다. 체념은 곧 저주이다. 생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긍정도 허락되지 못할 때 삶은 가꾸고 일구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디는 것이 된다. “싹수가 노랐다”는 말은 이처럼 수동화된 삶의 징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삶을 비극적 운명으로 인식함으로써 화자는 생의 주체자가 아닌 객체로 밀려나게 된다.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일을 화자는 치욕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비극적 운명을 막아낼 수 없다는 비관과 자조가 그의 세계관이 된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삶이 개선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그저 “철근 같은 허기”와 “콘크리트”처럼 “쏟아지는” 무거운 “햇살” 속에서 빛바랜 “노란 꽃”과 같은 자신의 육신을 바라볼 뿐이다. 이처럼 「봄의 현장」의 우울하고 무거운 현실은 「봄밤」에서도 계속된다.
머리가 긴 아들이 잠을 잔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어머니가 밥상을 차린다
털이 부스스한 개가 짖는다
어머니가 빌딩청소를 나가기 전 흔들어보는
아들의 방문은 잠겨있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개가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닌다
벽에 가화만사성 액자가 걸려있다
길어진 나무그림자가 창문을 두드린다
머리가 긴 아들이 일어난다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인다
비쩍 마른 개가 꼬리 치며 짖는다
아들이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신다
두루마기 휴지처럼 하루가 굴러간다
어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온다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이 껌벅인다
다시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잠겨진 아들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개가 혼자 베란다 문틈에서 킁킁거린다
창밖 목련이 터지려고 한다
―「봄밤」 전문
「봄밤」은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 아파트의 하루 일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에는 “빌딩청소”를 하는 어머니와 하루 종일 집안에 있는 실업자인 “머리가 긴 아들”과 “털이 부스스한 개” 한 마리 살고 있다. 어머니의 일상은 “새벽기도”를 다녀오고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일을 나가기 전 어김없이 잠겨있는 “아들의 방문”을 흔들어본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머리가 긴 아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이고,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시며 “두루마기 휴지처럼” 길고 무료한 하루를 보낸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집으로 들어오고 아들을 위해 “다시 밥상을 차”리고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어머니가 잠든 저녁 “잠겨진 아들 방안”에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이 시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들의 안부를 위해 문을 흔들어보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어떠한 노력에도 무반응이다. 대화가 단절된 어머니와 아들은 같은 공간에 거주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이질적 존재들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관여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아들의 태도는 자폐적이며 이기적인 삶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패배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능력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밤」이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 또한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현대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는 이미 와해되거나 붕괴되었다. 현대 사회의 가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오늘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긴밀히 관련된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된 개인은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병적 자아가 된다.
이러한 병적 자아의 모습은 「봄밤」에서 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우울하고 음침하고 아이러니한 공간 설정을 통해 더욱 부각된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이리저리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니는 “털이 부스스한 개”, “벽에” 걸려있는 “가화만사성”이라는 “액자”, “종일 켜져 있는” 껌벅거리는 “형광등”은, 어둡고 그늘지고 창백하고 망가지고 모순이 가득한 생활을 투영한다. 그들에게 ‘봄밤’은 따뜻하고 화사한 날들이 아니라 우울한 일상, 지루하게 반복되는 가난의 일상, 희망도 미래도 없는 어두운 현실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장성혜는 아파트 안의 음울한 풍경과 창 밖의 목련의 아름다운 풍경을 대조시킴으로써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한 가족의 소외와 고통을 증폭시키고 있다.
장성혜 시인은 ‘가난’의 시편을 통해 무엇보다 가족의 와해, 개인의 소외, 소통 불능의 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절벽 위의 식사」는 가난을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확장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곧 철거를 알리는
붉은 경고문이 붙은 아파트
이사 가면서 버린 화분들이
노인정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
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
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
노인이 주전자로 뿌리는
물을 받아먹고 있다
줄줄 밑으로 흘리면서
흠뻑 젖고 있다
오늘
또 한 집이 떠나고
남은 노인 몇
평상에 나와 앉아 있다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
흠뻑 취하고 있다
―「절벽 위의 식사」 전문
철거촌의 풍경은 슬프다. 떠나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은 주인을 잃은 것들이다. 한때 그 물건들은 단란한 살림을 꾸미는 데 한몫 했으리라. 그러나 삶에 쫓겨 버리고 간 물건들은 이제 빛을 잃고 쓸모없이 버려졌다. 이처럼 처분된 화분들은 하나같이 생기 없는 화분들이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은 모두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다. 장성혜 시인은 이 생기 없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화분들과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은 노인들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다시 말해 죽어 가는 화분은 늙고 병들고 힘없는 노인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것은 마치 버려진 화분처럼 버려진 존재가 된 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비록 버려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생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임을 말한다. 버려진 화분이 “흠뻑 젖고 있”는 모습과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흠뻑 취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통일된 정서를 유발시킨다. 그들은 모두 한순간만이라도 세상의 시름을 잊고 “흠뻑 취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황혼조차도 편안히 안주할 수 없는 각박한 생을 살아야하는 노인들의 서글픈 삶을 통해 이 시대의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장성혜는 우리 현실 주변에서 익히 볼 수 있는 가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시련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체념의 대상이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 삶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방관자, 비루한 현실을 망각하는 것으로만 위로를 삼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다.
최근 우리 시단에는 가난을 소재로 한 서정 시편들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박영근, 박철, 박형준, 최종천, 박성우, 이기인 등 일부 시인들에게 있어 가난은 여전히 중요한 시적 모티브로 자리잡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는 문제, 비루한 삶의 흔적들을 다시금 반추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시편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가난이 과거를 향수 하는 낭만적 의식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가난의 문제를 ‘지금-여기’의 구체적이며 절실한 현실의 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들의 시가 1980년대의 작품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난의 문제를 보다 내밀하고 특수한 주관적 체험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당면 현실을 거론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구로부터 그들이 일정정도 미학적 거리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기인된다. 역사와 시대에 압도된 자아에서 개인 스스로의 삶의 내력과 사회적 관계를 내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가난’이란 자칫 진부해 보이는 주제를 새로운 미학의 차원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이번 호에 발표한 장성혜의 「봄의 현장」 「봄밤」 「절벽 위의 식사」 는 가난의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미적으로 형상화한 시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장성혜는 관찰자적 시선으로 가난의 문제를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서적 공감대 형성한다. 그것은 하나의 시적 소재를 보편적 정서로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그의 세련된 시작 방식에 기인한다. 즉 장성혜는 삶의 단편들을 소개하면서도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다. 이는 가난의 문제가 결코 자신의 삶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연대적 의식이다. 각각의 시편들은 다양한 사건과 방식으로 묘사되지만 그 속에는 공통적으로 ‘가난의 체험’ ‘가난의 연민’ ‘인간애’의 관점이 내재한다. 장성혜는 목격자로서 가난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의 뿌리를 이해하는 체험자로서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단초는 「흑백사진」 「하늘로 간 집」 「아오라지를 건너며」 「숨은 나비」 「그늘 속의 집」을 통해 확인된다.
2. 달아나는 생을 쫓아
공간은 인간의 인식을 지배한다. 폐쇄적인 공간은 고립과 소외의 심리를 드러내며, 개방적인 공간은 소통, 교류, 확장의 심리를 유도한다. 이처럼 공간은 사람들의 환경과 생활에 작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만든다. 외부 공간에 대한 주체의 반응 방식은 곧 그의 삶의 지향성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지표가 된다. 「하늘로 간 집」 「구름 다이어트」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수직적 세계와 관련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헉헉거리며 올라가는데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
집은 위로 달아난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
자전거가 따라 올라온다
집을 나와 담배를 피우던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온다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생수통이
집을 찾아 줄줄이 뒤를 따라온다
가도 기도 막힌 벽뿐이다
도대체 여기가 몇 층인가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데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은데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바구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삐걱대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고장이 날 것 같은데
―「하늘로 간 집」 전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라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집으로 가는 길이 곧 ‘올라가는 길’ 임을 암시한다. 그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화자는 “헉헉거리며”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하지만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집은 위로 달아난다”. 즉 힘들여 오를수록 집은 점점 더 멀어지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나의 시도는 좌절된다. 왜냐하면 나의 육체가 올라가는 속도에 비해 집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집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자전거”도 올라오고,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오고,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과 “생수통”이 줄줄이 올라온다. 주변의 사물들은 어딘가를 향해 올라간다. 그것은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남루한 살림이, 무거운 철제가,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벗어나 올라간다. 나는 올라가는 것들을 그저 쫓을 뿐이다. 육체의 무게는 자신을 짓누르지만 정작 주변의 사물들은 한없이 가볍게 부유한다. 이 기이한 현상을 화자는 흥미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인식한다. 왜냐하면 화자는 그들처럼 가볍게 하늘로 오를 수 없는 몸을 지녔기 때문이다.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 “금방이라도/고장이 날 것 같은” “삐걱대는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몸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는 몸 안에 갇힌 존재이다. 그에게 몸은 무겁고 힘겨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감옥이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다. 지나온 과거의 심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자신은 인생의 길을 너무나 멀리 걸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야 할 목적지인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아득한 길을 그는 계속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수평이 아닌 수직의 길은 고통스럽다. 육체를 혹사하는 땀의 노력만이 수직의 세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성혜의 「하늘로 간 집」은 자유로운 비상과 낭만적인 상상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좀더 높은 곳을 향할 것을 강요받는 상승의 사회적 욕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고통은 「흑백사진」에서는 파괴적이고 섬뜩한 상상력으로 드러나며, 「아오라지를 건너며」에서는 죽음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
거실 액자 속으로
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
아버지가 닭을 잡는다
목을 비트는 손이 떨린다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며 먹물을 뿌린다
줄장미가 뭉개진다
채송화도 뭉개진다
화단 앞에 찡그리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
하나는 다리에 고개를 파묻고
하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하얀 닭털이 날아다닌다
눈을 뜰 수 없어요 아버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닭털처럼 흩어진다
칼을 든 아버지가 흔들린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에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다
―「흑백사진」 전문
「흑백사진」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돌연 시인은 “거실 액자 속으로/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라는 모습을 떠올린다. 아마도 그것은 과거의 내용을 상상하고 재현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섯 명의 아이들”을 둔 아버지는 손으로 산 닭을 잡는다. 닭의 목을 비틀고,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면서 “먹물을 뿌린다”. 섬뜩하고 살벌한 이 살생의 현장은 가족들 앞에서 진행된다. “칼을 든 아버지”, “닭털처럼 흩어”지는 아이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공포를 자아낸다. 이 모든 모습은 ‘흑백사진’ 속에 이미지다. 아마도 그것은 지나간 기억의 한 현장이거나, 잊을 수 없었던 공포의 순간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특징은 동사에 의해 살아난다. “쑥 들어온다” “잡는다” “떨린다” “달아난다” “뿌린다” “뭉개진다” “날아다닌다” “흩어진다” “흔들린다” “퍼덕인다” “찍혀있다”와 같은 상태동사와 행위동사는 모두 불안정하고 불길한 징후를 보여준다. 이러한 동사를 통해 알 수 있듯 화자에게 과거의 기억은 끔찍하고 잔인하고 비참한 삶의 일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시의 아버지는 잔인한 존재로 투영되지만 한편으로 보면 닭 목 하나도 제대로 비틀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칼을 든 아버지는 흔들리고, 끝내 자신의 손만 찍어 버린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이중적인 감정을 야기하게 만든다. 즉 이 시는 잔인함과 동정, 공포와 사랑, 무서움과 슬픔, 혐오와 연민, 삶과 죽음이라는 대조적 정서를 충돌하게 만든다. 장성혜는 이처럼 무질서하고 혼란되는 상반된 감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존재함으로 보여준다. 「흑백사진」 속에 드러난 이 혼란의 배후에는 생존의 문제가 담겨있다. 그것은 다섯 자식을 부양해야 되는 가난과 시련의 고통스런 생의 표정이 담겨있다. 쫓겨다니는 삶, 흔들리는 생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 「아오라지를 건너며」는 이러한 생의 고통과 조우하면서 체득한 삶의 깊이를 어둠의 이미지로 부각된 경우이다.
검은 개가 따라왔어요. 따라오지 마, 돌을 던졌어요.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어요. 휘어진 소나무 위로 달아났어요. 징검다리 건너다 돌아봤어요. 검은 개는 보이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였어요.
검은 개를 찾아다녔어요.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왔어요. 누군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어요. 흐린 편지를 뜯으면 비가 쏟아졌어요.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었어요. 다시는 건널 수가 없었을 때, 내 몸 안에 어두운 강을 키웠어요.
나는 검은 돌이 되었어요. 줄줄이 돌멩이를 낳았어요. 흐르다 내 어둠과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강바닥에 내가 던진 돌멩이만 가득했어요. 먹구름이 꼬리를 쳤어요. 아우라지 물결이 따라오며 컹컹 짖었어요. 검은 개는 끝내 보이지 않았어요.
―「아오라지를 건너며」 전문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검은 색”에 대한 화자의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1연에서 화자는 “검은 개”가 자신을 따라오자 “따라오지 마, 돌을” 던진다. 이는 검은 개가 불길한 징조, 죽음 등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내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다. 하지만 화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언제든 검을 개를 쫓을 수 있는 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검은 개는 보이지 않”고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여간다.
2연에 오면 상황은 역전된다. 화자는 오히려 검은 개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넣어둔 돌멩이는 어느새 입으로 가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온다. 누군가 다가오면 그는 돌을 던져 쫓아버린다. 때문에 아무도 그의 곁에 있지 못한다. 나는 모두를 쫓아버리고 혼자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어요”라고. 미워서 쫓아버린 것을 그리워하고 싫어서 가라고 말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삶, 미움이 연민이 되고, 저주스러운 삶이 축복이 되고, 버리고 싶은 것들로 인해 살아가게 되는 현실, 떠나보내고 난 뒤에야 그것을 그리워하는 후회의 심정을 그는 아오라지를 건너며 되새김하고 있는 것이다.
3연에 이르러 화자는 드디어 스스로 “검은 돌”이 된다. 삶에 대한 미움, 시련, 아픔, 사랑, 그리움, 회한 모두를 그는 검은 돌로 만든다. 검은 돌은 화자의 내면을 비유한다. 그것은 단단하게 응결된 마음의 상처, 후회, 상념들일지도 모른다.
‘아오라지를 건너며’ 화자는 검은 돌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아오라지는 존재를 전환시키는 변화의 강이다.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던 자신은 이제 스스로 돌이 됨으로써 생의 모든 먹구름을 자신의 내면에 새기는 존재로 탈바꿈된 것이다. 세상을 향하던 분노와 비난 고통과 상처는 안으로 새겨들어 이제 존재 내부에 안착된다. 여기서 강을 건너는 과정을 흡사 제의적 형식으로 투영되기도 한다. 강은 존재를 씻기는 것이며, 강을 건너는 행위는 존재전환의 과정인 것이다.
3. 일상에 내재한 삶의 진실
장성혜 시인의 시적 특성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진지한 삶의 깊이를 관조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 「시다가 시를 쓴다」 등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그는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는 짓다만 건물의 잔해 속에서 밀림의 잔인한 생존 법칙이 난무하는 오늘의 비정상적인 삶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는 재활용을 하는 아파트 경비의 자루를 소재로 삼으면서 사납고 거친 사람도 그 ‘자루’ 속에 들어 갔다 오면 순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마법의 자루처럼 사람을 순화시키는 무엇이 있기를 희구하는 그의 건강한 소망을 보여준다. 또한 「시다가 시를 쓴다」는 시쓰기의 고통, 생각처럼 써지지 않는 창작자의 고통을 미용실의 시다와 손님으로 비유한 흥미로운 시편이다. 이처럼 장성혜는 일상적 소재를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일상을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에게 일상은 자신의 근원적인 삶의 문제와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도록 만들어주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성혜 시인에게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일상적 소재의 빈번한 차용이 자칫 시의 내용을 규격화되고 건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남아도는 것들에 대하여」 「차가운 알」과 같은 시편은 소재 중심적인 요소가 문제시된다. 「남아도는 것들에 대하여」의 경우 시적 진술의 반복된 표현이 시의 주제를 향해 응집되는 기여도가 낮으며, 「차가운 알」은 역을 돌아다니며 하루 생활을 연명하는 아이의 모습이 자세히 서술된 것에 반해 ‘차가운 알’이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은 시의 전체 주제를 잘 설명해 내지 못하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흑백사진」에서 보여주는 돌연한 상상력의 전환, 이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과감한 표현의 배치 등은 장성혜 시인의 개성 있는 시적 감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봄의 현장」, 「봄밤」, 「절벽 위의 식사」 등은 무엇보다 시의 제목을 선택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선입견과 상식의 틀을 과감히 시의 내용을 통해 빗나가게 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제목은 오히려 돋보이게 된다. 특히 「절벽 위의 식사」와 같은 제목은 시 전체의 내용을 상징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탁월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난’이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새로운 방식과 주제로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장성혜의 신작시는 우리 삶의 국면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일상을 중심으로 한 시를 비롯해, 파편화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는 시, 다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묘사한 실험시, 전통 서정시를 연상하게 하는 자연시 등 그는 다양한 방식과 기교를 통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열정이 구심점을 찾을 때 그의 시세계는 보다 견고해질 것이다.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타자의 언어학
․숭실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절벽 위의 나날들
강경희|문학평론가
1. 가난의 연대
인간의 공포 체험은 의식의 심층에 숨어 있는 그 어떤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공포는 보이지 않는 관념적 대상으로 존재를 압박하기도 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무서움의 대상도 무서워해야 할 확실한 아무런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감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로 독자를 섬뜩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는 반면, 공포의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강경애의 「지하촌」 「인간문제」는 일제강점기의 빈민촌의 참담한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가난과 착취가 야기한 삶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멍에는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 문학사에 있어 ‘가난’의 문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가난의 초점이 ‘가족’의 문제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농경민족인 우리에게 있어 혈연을 기초로 한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은 나의 삶의 뿌리이자 중심이다. 가족의 연대성이 강조되는 것은 나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하나의 운명이라는 인식에 근간한다. 즉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나와 가족 구성원의 삶을 동일시하는 공동체적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난의 문제는 개별자로서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된다. 가난이 가족의 문제로 확장될 때 그것은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아버지의 가난이 나의 가난이 되고 나의 가난이 다시금 후대의 가난으로 대물림되는 현실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공포로 인식된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는 특수한 인간학적 관점을 형성한다. 그것은 가족이 나의 삶을 우선한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당연시되고 한편으로 그러한 삶은 무의식적으로 강요된다. 특히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의무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무한 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가장의 역할은 점차 그 빛을 잃게 된다. 장성혜의 신작시 「봄날의 현장」은 추락한 한 가장의 비극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싹수가 노랐다고 했지요. 너무 일찍 세상에 눈을 뜬 걸까요. 변두리 옥탑방에 살림을 차렸지요. 달린 입을 위해 이리저리 가지를 뻗었지요. 비바람을 뚫고 뛰어다녔지요. 피자배달을 시작으로 세일즈맨도 하고 통닭집 주인도 했지요.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였지요.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지요. 빚만 쌓였지요.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날 하늘이 노랬지요.
맨몸으로 현장에 뛰어들었지요. 빌딩이 올라가는 공사장을 돌아다녔지요. 거푸집을 수도 없이 지었지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지요.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난 후 여기까지 왔지요.
엑스트라가 되었지요. 지금 드라마 속 사랑이 꽃피는 중이지요. 젊은 나무들이 목숨 걸고 사랑을 불태우지요. 한순간 꽃잎처럼 떨어져 내리려고 새벽부터 기다리지요. 세트장 안 햇살이 콘크리트처럼 쏟아지지요. 목구멍으로 철근 같은 허기가 올라오지요. 눈앞에 자꾸 노란 꽃만 피지요.
―「봄의 현장」 전문
「봄의 현장」은 가진 것 없는 한 인간의 삶의 내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힘겨운 삶, 생활에 쫓겨 이리저리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현실, 아무리 노력해도 끊임없이 추락하는 생, 희망보다는 절망에 길들여진 불쌍한 한 인간의 초상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의 화자의 삶은 가난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두리 옥탑방”에서 시작한 살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밑바닥 직업을 마다하지 않은 생활, 그러나 “아무리 헤매도 잎만 무성한 나무”일 뿐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릴 뿐이다. 가난한 가장에게 돌아온 현실은 “빚”만 쌓이고, “두 딸을 데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폐허 같은 삶이다.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노동을 한 가장에게 돌아온 현실은 가정의 파탄일 뿐이다.
노동의 수고가 추락한 삶으로 귀결될 때 화자는 삶을 체념하게 된다. 체념은 곧 저주이다. 생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긍정도 허락되지 못할 때 삶은 가꾸고 일구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디는 것이 된다. “싹수가 노랐다”는 말은 이처럼 수동화된 삶의 징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삶을 비극적 운명으로 인식함으로써 화자는 생의 주체자가 아닌 객체로 밀려나게 된다.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일을 화자는 치욕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비극적 운명을 막아낼 수 없다는 비관과 자조가 그의 세계관이 된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삶이 개선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그저 “철근 같은 허기”와 “콘크리트”처럼 “쏟아지는” 무거운 “햇살” 속에서 빛바랜 “노란 꽃”과 같은 자신의 육신을 바라볼 뿐이다. 이처럼 「봄의 현장」의 우울하고 무거운 현실은 「봄밤」에서도 계속된다.
머리가 긴 아들이 잠을 잔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어머니가 밥상을 차린다
털이 부스스한 개가 짖는다
어머니가 빌딩청소를 나가기 전 흔들어보는
아들의 방문은 잠겨있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개가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닌다
벽에 가화만사성 액자가 걸려있다
길어진 나무그림자가 창문을 두드린다
머리가 긴 아들이 일어난다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인다
비쩍 마른 개가 꼬리 치며 짖는다
아들이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신다
두루마기 휴지처럼 하루가 굴러간다
어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들어온다
종일 켜져 있는 형광등이 껌벅인다
다시 밥상을 차려놓은 어머니가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잠겨진 아들 방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개가 혼자 베란다 문틈에서 킁킁거린다
창밖 목련이 터지려고 한다
―「봄밤」 전문
「봄밤」은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 아파트의 하루 일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에는 “빌딩청소”를 하는 어머니와 하루 종일 집안에 있는 실업자인 “머리가 긴 아들”과 “털이 부스스한 개” 한 마리 살고 있다. 어머니의 일상은 “새벽기도”를 다녀오고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일을 나가기 전 어김없이 잠겨있는 “아들의 방문”을 흔들어본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머리가 긴 아들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 대신 라면을 끓”이고, “개를 안고 커피”를 마시며 “두루마기 휴지처럼” 길고 무료한 하루를 보낸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안고” 집으로 들어오고 아들을 위해 “다시 밥상을 차”리고 “뉴스를 보다 코를 골며 잠이 든다” 어머니가 잠든 저녁 “잠겨진 아들 방안”에는 “불빛이 새어나”온다.
이 시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들의 안부를 위해 문을 흔들어보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어떠한 노력에도 무반응이다. 대화가 단절된 어머니와 아들은 같은 공간에 거주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이질적 존재들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에 관여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아들의 태도는 자폐적이며 이기적인 삶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패배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능력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밤」이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 또한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현대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는 이미 와해되거나 붕괴되었다. 현대 사회의 가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오늘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긴밀히 관련된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된 개인은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병적 자아가 된다.
이러한 병적 자아의 모습은 「봄밤」에서 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우울하고 음침하고 아이러니한 공간 설정을 통해 더욱 부각된다. “침침한 열세 평 아파트 안”, 이리저리 “오줌을 찔끔거리며 돌아다”니는 “털이 부스스한 개”, “벽에” 걸려있는 “가화만사성”이라는 “액자”, “종일 켜져 있는” 껌벅거리는 “형광등”은, 어둡고 그늘지고 창백하고 망가지고 모순이 가득한 생활을 투영한다. 그들에게 ‘봄밤’은 따뜻하고 화사한 날들이 아니라 우울한 일상, 지루하게 반복되는 가난의 일상, 희망도 미래도 없는 어두운 현실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장성혜는 아파트 안의 음울한 풍경과 창 밖의 목련의 아름다운 풍경을 대조시킴으로써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한 가족의 소외와 고통을 증폭시키고 있다.
장성혜 시인은 ‘가난’의 시편을 통해 무엇보다 가족의 와해, 개인의 소외, 소통 불능의 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절벽 위의 식사」는 가난을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확장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곧 철거를 알리는
붉은 경고문이 붙은 아파트
이사 가면서 버린 화분들이
노인정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
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
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
노인이 주전자로 뿌리는
물을 받아먹고 있다
줄줄 밑으로 흘리면서
흠뻑 젖고 있다
오늘
또 한 집이 떠나고
남은 노인 몇
평상에 나와 앉아 있다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
흠뻑 취하고 있다
―「절벽 위의 식사」 전문
철거촌의 풍경은 슬프다. 떠나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은 주인을 잃은 것들이다. 한때 그 물건들은 단란한 살림을 꾸미는 데 한몫 했으리라. 그러나 삶에 쫓겨 버리고 간 물건들은 이제 빛을 잃고 쓸모없이 버려졌다. 이처럼 처분된 화분들은 하나같이 생기 없는 화분들이다. “얼굴이 누렇게 뜬 행운목/잎만 달랑 남은 호접란/머리숱이 엉성한 벤자민”은 모두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들이”다. 장성혜 시인은 이 생기 없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화분들과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은 노인들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다시 말해 죽어 가는 화분은 늙고 병들고 힘없는 노인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것은 마치 버려진 화분처럼 버려진 존재가 된 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비록 버려진 것일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은 생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임을 말한다. 버려진 화분이 “흠뻑 젖고 있”는 모습과 “안주도 없이 막걸리 몇 잔에/흠뻑 취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통일된 정서를 유발시킨다. 그들은 모두 한순간만이라도 세상의 시름을 잊고 “흠뻑 취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황혼조차도 편안히 안주할 수 없는 각박한 생을 살아야하는 노인들의 서글픈 삶을 통해 이 시대의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장성혜는 우리 현실 주변에서 익히 볼 수 있는 가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시련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체념의 대상이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소통하지 못하는 가족, 삶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방관자, 비루한 현실을 망각하는 것으로만 위로를 삼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다.
최근 우리 시단에는 가난을 소재로 한 서정 시편들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박영근, 박철, 박형준, 최종천, 박성우, 이기인 등 일부 시인들에게 있어 가난은 여전히 중요한 시적 모티브로 자리잡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이는 문제, 비루한 삶의 흔적들을 다시금 반추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시편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가난이 과거를 향수 하는 낭만적 의식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가난의 문제를 ‘지금-여기’의 구체적이며 절실한 현실의 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들의 시가 1980년대의 작품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난의 문제를 보다 내밀하고 특수한 주관적 체험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당면 현실을 거론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구로부터 그들이 일정정도 미학적 거리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기인된다. 역사와 시대에 압도된 자아에서 개인 스스로의 삶의 내력과 사회적 관계를 내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가난’이란 자칫 진부해 보이는 주제를 새로운 미학의 차원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이번 호에 발표한 장성혜의 「봄의 현장」 「봄밤」 「절벽 위의 식사」 는 가난의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미적으로 형상화한 시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장성혜는 관찰자적 시선으로 가난의 문제를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서적 공감대 형성한다. 그것은 하나의 시적 소재를 보편적 정서로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그의 세련된 시작 방식에 기인한다. 즉 장성혜는 삶의 단편들을 소개하면서도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다. 이는 가난의 문제가 결코 자신의 삶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연대적 의식이다. 각각의 시편들은 다양한 사건과 방식으로 묘사되지만 그 속에는 공통적으로 ‘가난의 체험’ ‘가난의 연민’ ‘인간애’의 관점이 내재한다. 장성혜는 목격자로서 가난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의 뿌리를 이해하는 체험자로서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단초는 「흑백사진」 「하늘로 간 집」 「아오라지를 건너며」 「숨은 나비」 「그늘 속의 집」을 통해 확인된다.
2. 달아나는 생을 쫓아
공간은 인간의 인식을 지배한다. 폐쇄적인 공간은 고립과 소외의 심리를 드러내며, 개방적인 공간은 소통, 교류, 확장의 심리를 유도한다. 이처럼 공간은 사람들의 환경과 생활에 작용함으로써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만든다. 외부 공간에 대한 주체의 반응 방식은 곧 그의 삶의 지향성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지표가 된다. 「하늘로 간 집」 「구름 다이어트」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수직적 세계와 관련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양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들고
헉헉거리며 올라가는데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
집은 위로 달아난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
자전거가 따라 올라온다
집을 나와 담배를 피우던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온다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생수통이
집을 찾아 줄줄이 뒤를 따라온다
가도 기도 막힌 벽뿐이다
도대체 여기가 몇 층인가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데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은데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장바구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삐걱대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고장이 날 것 같은데
―「하늘로 간 집」 전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라는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집으로 가는 길이 곧 ‘올라가는 길’ 임을 암시한다. 그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화자는 “헉헉거리며” “집을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 하지만 “내가 올라가는 것보다 빨리/집은 위로 달아난다”. 즉 힘들여 오를수록 집은 점점 더 멀어지고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나의 시도는 좌절된다. 왜냐하면 나의 육체가 올라가는 속도에 비해 집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집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니 집밖에 묶여 있던/자전거”도 올라오고,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올라”오고, “복도로 밀려나온 빈 화분”과 “생수통”이 줄줄이 올라온다. 주변의 사물들은 어딘가를 향해 올라간다. 그것은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남루한 살림이, 무거운 철제가,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벗어나 올라간다. 나는 올라가는 것들을 그저 쫓을 뿐이다. 육체의 무게는 자신을 짓누르지만 정작 주변의 사물들은 한없이 가볍게 부유한다. 이 기이한 현상을 화자는 흥미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인식한다. 왜냐하면 화자는 그들처럼 가볍게 하늘로 오를 수 없는 몸을 지녔기 때문이다. “숨이 차고 머리가 빙빙 도는” “금방이라도/고장이 날 것 같은” “삐걱대는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몸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는 몸 안에 갇힌 존재이다. 그에게 몸은 무겁고 힘겨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감옥이다.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이 우물처럼 깊”다. 지나온 과거의 심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자신은 인생의 길을 너무나 멀리 걸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야 할 목적지인 “사라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아득한 길을 그는 계속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수평이 아닌 수직의 길은 고통스럽다. 육체를 혹사하는 땀의 노력만이 수직의 세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성혜의 「하늘로 간 집」은 자유로운 비상과 낭만적인 상상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좀더 높은 곳을 향할 것을 강요받는 상승의 사회적 욕망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고통은 「흑백사진」에서는 파괴적이고 섬뜩한 상상력으로 드러나며, 「아오라지를 건너며」에서는 죽음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
거실 액자 속으로
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
아버지가 닭을 잡는다
목을 비트는 손이 떨린다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며 먹물을 뿌린다
줄장미가 뭉개진다
채송화도 뭉개진다
화단 앞에 찡그리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
하나는 다리에 고개를 파묻고
하나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하얀 닭털이 날아다닌다
눈을 뜰 수 없어요 아버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닭털처럼 흩어진다
칼을 든 아버지가 흔들린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에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다
―「흑백사진」 전문
「흑백사진」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후라이드 치킨을 시킨 저녁”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돌연 시인은 “거실 액자 속으로/핏기 없는 손이 쑥 들어온다”라는 모습을 떠올린다. 아마도 그것은 과거의 내용을 상상하고 재현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섯 명의 아이들”을 둔 아버지는 손으로 산 닭을 잡는다. 닭의 목을 비틀고, “반만 꺾인 목이 달아난다” 달아나면서 “먹물을 뿌린다”. 섬뜩하고 살벌한 이 살생의 현장은 가족들 앞에서 진행된다. “칼을 든 아버지”, “닭털처럼 흩어”지는 아이들, “발목이 잘린 감나무가 퍼덕이는 마당”, “아버지 손만 커다랗게 찍혀있”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공포를 자아낸다. 이 모든 모습은 ‘흑백사진’ 속에 이미지다. 아마도 그것은 지나간 기억의 한 현장이거나, 잊을 수 없었던 공포의 순간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특징은 동사에 의해 살아난다. “쑥 들어온다” “잡는다” “떨린다” “달아난다” “뿌린다” “뭉개진다” “날아다닌다” “흩어진다” “흔들린다” “퍼덕인다” “찍혀있다”와 같은 상태동사와 행위동사는 모두 불안정하고 불길한 징후를 보여준다. 이러한 동사를 통해 알 수 있듯 화자에게 과거의 기억은 끔찍하고 잔인하고 비참한 삶의 일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시의 아버지는 잔인한 존재로 투영되지만 한편으로 보면 닭 목 하나도 제대로 비틀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칼을 든 아버지는 흔들리고, 끝내 자신의 손만 찍어 버린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이중적인 감정을 야기하게 만든다. 즉 이 시는 잔인함과 동정, 공포와 사랑, 무서움과 슬픔, 혐오와 연민, 삶과 죽음이라는 대조적 정서를 충돌하게 만든다. 장성혜는 이처럼 무질서하고 혼란되는 상반된 감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존재함으로 보여준다. 「흑백사진」 속에 드러난 이 혼란의 배후에는 생존의 문제가 담겨있다. 그것은 다섯 자식을 부양해야 되는 가난과 시련의 고통스런 생의 표정이 담겨있다. 쫓겨다니는 삶, 흔들리는 생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 「아오라지를 건너며」는 이러한 생의 고통과 조우하면서 체득한 삶의 깊이를 어둠의 이미지로 부각된 경우이다.
검은 개가 따라왔어요. 따라오지 마, 돌을 던졌어요.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어요. 휘어진 소나무 위로 달아났어요. 징검다리 건너다 돌아봤어요. 검은 개는 보이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였어요.
검은 개를 찾아다녔어요.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왔어요. 누군가 가까이 오면 돌을 던졌어요. 흐린 편지를 뜯으면 비가 쏟아졌어요.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었어요. 다시는 건널 수가 없었을 때, 내 몸 안에 어두운 강을 키웠어요.
나는 검은 돌이 되었어요. 줄줄이 돌멩이를 낳았어요. 흐르다 내 어둠과 다시 만날 줄 몰랐어요. 강바닥에 내가 던진 돌멩이만 가득했어요. 먹구름이 꼬리를 쳤어요. 아우라지 물결이 따라오며 컹컹 짖었어요. 검은 개는 끝내 보이지 않았어요.
―「아오라지를 건너며」 전문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검은 색”에 대한 화자의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1연에서 화자는 “검은 개”가 자신을 따라오자 “따라오지 마, 돌을” 던진다. 이는 검은 개가 불길한 징조, 죽음 등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내 “검은 개는 먹구름 속에 숨었”다. 하지만 화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언제든 검을 개를 쫓을 수 있는 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검은 개는 보이지 않”고 “주머니에 돌멩이만 쌓”여간다.
2연에 오면 상황은 역전된다. 화자는 오히려 검은 개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넣어둔 돌멩이는 어느새 입으로 가 “입을 열면 돌멩이가 튀어나”온다. 누군가 다가오면 그는 돌을 던져 쫓아버린다. 때문에 아무도 그의 곁에 있지 못한다. 나는 모두를 쫓아버리고 혼자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어요”라고. 미워서 쫓아버린 것을 그리워하고 싫어서 가라고 말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삶, 미움이 연민이 되고, 저주스러운 삶이 축복이 되고, 버리고 싶은 것들로 인해 살아가게 되는 현실, 떠나보내고 난 뒤에야 그것을 그리워하는 후회의 심정을 그는 아오라지를 건너며 되새김하고 있는 것이다.
3연에 이르러 화자는 드디어 스스로 “검은 돌”이 된다. 삶에 대한 미움, 시련, 아픔, 사랑, 그리움, 회한 모두를 그는 검은 돌로 만든다. 검은 돌은 화자의 내면을 비유한다. 그것은 단단하게 응결된 마음의 상처, 후회, 상념들일지도 모른다.
‘아오라지를 건너며’ 화자는 검은 돌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아오라지는 존재를 전환시키는 변화의 강이다. 세상을 향해 돌을 던지던 자신은 이제 스스로 돌이 됨으로써 생의 모든 먹구름을 자신의 내면에 새기는 존재로 탈바꿈된 것이다. 세상을 향하던 분노와 비난 고통과 상처는 안으로 새겨들어 이제 존재 내부에 안착된다. 여기서 강을 건너는 과정을 흡사 제의적 형식으로 투영되기도 한다. 강은 존재를 씻기는 것이며, 강을 건너는 행위는 존재전환의 과정인 것이다.
3. 일상에 내재한 삶의 진실
장성혜 시인의 시적 특성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진지한 삶의 깊이를 관조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 「시다가 시를 쓴다」 등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그는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물소의 눈으로 사자의 말을 듣는다」 는 짓다만 건물의 잔해 속에서 밀림의 잔인한 생존 법칙이 난무하는 오늘의 비정상적인 삶을 비유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경비실에는 자루가 있다」는 재활용을 하는 아파트 경비의 자루를 소재로 삼으면서 사납고 거친 사람도 그 ‘자루’ 속에 들어 갔다 오면 순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마법의 자루처럼 사람을 순화시키는 무엇이 있기를 희구하는 그의 건강한 소망을 보여준다. 또한 「시다가 시를 쓴다」는 시쓰기의 고통, 생각처럼 써지지 않는 창작자의 고통을 미용실의 시다와 손님으로 비유한 흥미로운 시편이다. 이처럼 장성혜는 일상적 소재를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일상을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에게 일상은 자신의 근원적인 삶의 문제와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도록 만들어주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성혜 시인에게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일상적 소재의 빈번한 차용이 자칫 시의 내용을 규격화되고 건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남아도는 것들에 대하여」 「차가운 알」과 같은 시편은 소재 중심적인 요소가 문제시된다. 「남아도는 것들에 대하여」의 경우 시적 진술의 반복된 표현이 시의 주제를 향해 응집되는 기여도가 낮으며, 「차가운 알」은 역을 돌아다니며 하루 생활을 연명하는 아이의 모습이 자세히 서술된 것에 반해 ‘차가운 알’이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은 시의 전체 주제를 잘 설명해 내지 못하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흑백사진」에서 보여주는 돌연한 상상력의 전환, 이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과감한 표현의 배치 등은 장성혜 시인의 개성 있는 시적 감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봄의 현장」, 「봄밤」, 「절벽 위의 식사」 등은 무엇보다 시의 제목을 선택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선입견과 상식의 틀을 과감히 시의 내용을 통해 빗나가게 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제목은 오히려 돋보이게 된다. 특히 「절벽 위의 식사」와 같은 제목은 시 전체의 내용을 상징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탁월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난’이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새로운 방식과 주제로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장성혜의 신작시는 우리 삶의 국면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일상을 중심으로 한 시를 비롯해, 파편화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는 시, 다소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묘사한 실험시, 전통 서정시를 연상하게 하는 자연시 등 그는 다양한 방식과 기교를 통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열정이 구심점을 찾을 때 그의 시세계는 보다 견고해질 것이다.
강경희․
1967년 서울 출생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타자의 언어학
․숭실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추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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