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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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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3회 작성일 08-02-29 03:00

본문

정용주





새들의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
새집을 볼 때마다 찬탄하는 것인데
유독 산비둘기 집을 볼 때 싱겁기 짝이 없다
늙은 소나무 삭정이가 떨어지다
대충 쌓인 것 같기도 하고
파전에 대파줄기처럼 숭숭하기도 한데
까치집으로 따지면 바닥 공사만 하다
부도라도 난 것 같은 이 집을 보면 픽
웃음이 나기도 하고 혹 알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한데 걱정 말라는 듯
새끼 기르고 산다
가느다란 가지에 얹힌 한 움큼의 거처가
산 넘고 하늘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의
모태가 될 수 있다니 자유는 또한 얼마나
단순하게 태어나는가



돌집


영원사 오르는 계곡 길 아래
조그만 돌집

문 잠겨 있고
안에서 라디오 소리만 나는 돌집

마당에 깔린 돌 틈 망초꽃 지고
함석지붕 단풍잎 쌓여도

사람 흔적 없고
라디오 소리만 나는 돌집

지날 때면 라디오 켜 있나
잠시 서 보는 돌집



집으로


표지판 신호등
뚝방 아래
자전거 전용도로
개천을 따라 나아간다

넥타이 풀어헤친 사내
술이 끌고 가는 사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는다
고개를 쑤셔박고
팔을 휘젓는다

개천 유리창에
간판 불빛들
빼곡히 박혀 있다

물빛 속 그림자
나타났다 사라진다
현재만 가득한 사내
모든 길에 채이며 간다



겨울 가래나무


눈밭에
三足烏 앉았던 자리

오래 생각한 자리
멀리 바라본 자리
꽁꽁 얼어붙은 자리

다리 뽑지 못해
몸통만 날아간 자리



새집


새집 하나 만들어
복숭아나무 가지에 달았다

새는 오지 않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가
젊은 날
내 집으로 날아왔던
새들을 생각한다면
집을 짓지 말았어야 했는가

눈밭을 헤매는 새



백일홍


백일홍 모종 솎아
새로 만든 꽃밭에 심었다

주저앉았다
바닥에 얼룩무늬 새겼다
물 한 바가지 끼얹었다

다음날, 꼿꼿하게 일어섰다
위아래 떡잎 네 장
그림자 거느렸다

물의 뼈 곧추세우고
그림자 층계를 높여
뜨거운 정수리



초식草食


식칼 끝이 얼굴 더듬어
살을 발라낸다
뼈와 칼끝 사이
무른 살이 갈라진다
턱뼈 밑으로 식칼이 올라와
혀를 도려간다

뼛국물 우려낸 염소대가리
멀리 던져진 염소대가리

개가 물고 풀밭으로 돌아온다
개는 몇 번이고 찾아가
뼛국냄새 없어질 때까지
핥고 돌아온다

파먹을 수 없는 깊은 살
바람이 발라먹는다
빗물이 뼛구멍을 씻는다

둥글게 패인 눈구멍과



희고 단단한 이빨을 갖게 된
염소대가리

풀밭을 기다린다



뿌리


엉겅퀴꽃 옮기려고 땅을 팠다
녹슨 칼이 나왔다
진흙이 달라붙어
칼을 먹고 있었다

입술에 꽃을 물고
한 삽 밑에서 칼을 먹는 혀
엉겅퀴꽃 실뿌리
칼을 감고 있었다



쥐약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쥐들이 집안에 들끓어
쌀로 만든 쥐약을 깨끗한 접시에 담아 놓았더니
너무 잘 먹어 나중에는 미안한 마음 들어서 쥐약 옆에
콩밥 한 덩이 던져 주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콩밥은
그대로 있고 쥐약만 깨끗이 먹었습니다



겨울비


장작 패던 도끼에 비 내린다
장작더미 속으로
빗줄기 스민다

빨랫줄에 수건 한 장
양말 한 켤레

툇마루 끝 사기접시
가루쥐약

달무리 떠 있는
처마 끝 알전구

독 같은 마음
독 속에 무청 누르는
돌 같은 마음






시작노트


지인이 선뜻 집을 내줘 전주 한옥마을 은행나무 골목에 터를 잡았다. 얼핏 보면 낡고 허름해 보이는 오래된 풍경들은 웬일인지 시금털털한 내게 새로운 맛을 더해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 맛에 끌려 이곳 한옥마을 단풍나무집에 두해 째 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로 나눠진 집에는 나말고도 내가 따르는 그림쟁이 선생이 살고 있는데 그는 안채에서 먹물로 그림을 그리고 나는 행랑채에서 괴발개발, 말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일터에 나가 밥벌이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각자 ‘낯설게 오래된 풍경’에 끌려 나돌고 돌아와 제각기 집채에 든다. 언제부턴가 술을 멀리하니 방은 고요한 늦밤을 주거나 곤한 잠을 청해주곤 했다.



정용주․
1962년 경기도 여주 출생
․2005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 시작
추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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