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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정용주 작품론/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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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39회 작성일 08-02-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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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주 작품론|

자유와 고독을 사유하는 언어
김진희|문학평론가
정용주 시인은 현재 도심과 떨어진 치악산의 한 계곡에서 홀로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사람의 흔적보다는 새와 꽃이 있었던 자리나 하늘과 구름의 그림자가 더 많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최근의 생태주의를 표방하거나 혹은 자연과의 원만(圓滿)과 조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시는 자주 자연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적막하고 고독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에게 자연은 아직 ‘저만치’의 거리에 존재한다.
자유와 고독은 늘 공존한다. 시인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함께 외로움을 숙명처럼 끌어안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자유와 고독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통해 삶의 방향과 시적 지향을 찾아 나간다.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시인의식을 중심으로, 고독한 몸과 영혼이 자유롭게 비상하기 위해 뿌리내릴 언어의 집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1. 자유를 낳는, 한 움큼의 집
이번 시편들에서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새’와 ‘집’이 작품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징적으로 볼 때 ‘새’ 란 지상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정신의 비상(飛翔)으로, 땅위의 현실적 가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집’이란 안정과 정착이라는 현실적 가치를 상징한다. 이처럼 대립되는 이미지가 구현되고 있는 것은 현재 자유에의 갈망과 외로움이라는 주제가 시인의 내면의식을 움직이는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표지판 신호등
뚝방 아래
자전거 전용도로
개천을 따라 나아간다

넥타이 풀어헤친 사내
술이 끌고 가는 사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는다
고개를 쑤셔박고
팔을 휘젓는다

개천 유리창에
간판 불빛들
빼곡히 박혀 있다

물빛 속 그림자
나타났다 사라진다
현재만 가득한 사내
모든 길에 채이며 간다
―「집으로」 전문

위의 시에서 등장인물은 술에 취한 사내이다. 이 시는 그 사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닦여진 자전거 도로와 대비적으로 주인공 사내는 옷을 풀어헤치고, 팔을 휘저으며, 간혹 땅에 주저앉기도 하면서 집으로 간다. 인사불성이 된 그에게 현재 가장 분명한 것은 집으로 간다는 사실뿐이다. 시인은 이를 ‘현재’만 가득하다는 말로 비유하고 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사내에겐 과거나 미래에 대한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술에 취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오로지 집으로 가야한다는 의식만이 현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담담하게 이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런 풍경에 주목하고 있는 시인의 내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길에 채이면서도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집으로 간다’는 말은 인간의 본원적인 향수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둔 밤에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사내의 본능적인 행동에, 돌아갈 집이 없는 시인의 눈길이 가는 것이리라.

영원사 오르는 계곡 길 아래
조그만 돌집

문 잠겨 있고
안에서 라디오 소리만 나는 돌집

마당에 깔린 돌 틈 망초꽃 지고
함석지붕 단풍잎 쌓여도

사람 흔적 없고
라디오 소리만 나는 돌집

지날 때면 라디오 켜 있나
잠시 서 보는 돌집
―「돌집」 전문

그래서 시인은 계곡 아래 조그만 돌집에 마음이 간다. 문이 잠겨 있기에 들어갈 수는 없어도 말이다. 이때 ‘문이 잠겨 있다’는 진술은 시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외로움과 단절감을 증폭시킨다. 때문에 사람은 만날 수 없고 라디오 소리만이 고요한 내면의 적막을 깬다. 라디오 소리는 세상의 소리이며 사람의 소리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이에 이끌려 늘 그 집의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난한 영혼에게 남의 집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혹은 창틈으로 들리는 집안의 소리는 한없는 동경과 결핍의 감정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한편 시인은 돌집의 적막감과 시인의 고독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짧은 시를 5개의 연으로 나누어 ‘돌집’이라는 명사로 4개의 연을 끝내고 있다. 한 장면을 하나의 연으로 간명하게 처리함으로써 숲 속에 덩그마니 홀로 놓여 있는 돌집의 인상이 선명하게 전달된다.
이런 외로움과 슬픔에 시인은 자신도 집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새집 하나 만들어
복숭아나무 가지에 달았다

새는 오지 않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가
젊은 날
내 집으로 날아왔던
새들을 생각한다면
집을 짓지 말았어야 했는가

눈밭을 헤매는 새
―「새집」 전문

위의 시에서 ‘새’는 시인의 자아가 투사된 존재이다. 시인은 새집을 만든다. 이때 ‘새집’은 새(鳥) 집이기도 하고 시인이 정착할 새(新)집이기도 하다. 그런데 ‘새는 오지 않았다’. 이런 진술을 하는 시인의 어조에서 절망과 슬픔이 느껴진다. 새가 오지 않자 시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집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집을 만든 행위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가’라고 묻는 시인의 말에서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마음보다는 새들이 오지 않았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 있다.
시인은 젊은 시절 자신의 집에 날아왔던 새, 즉 자신을 떠올리며 새[新] 집 짓는 것이 부질 없는 짓이었는가 생각한다. 방황하며 눈밭을 떠돌던 청춘의 때에 집이란 새의 발목을 낚아채는 족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현실로부터 날아오르고 싶었던 새 혹은 시인은, 다리를 버리고서라도 날개와 몸통만으로 추운 겨울을 향해 가는가보다. 하여 지금 눈밭을 헤매는 존재는 현실의 집에 안주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의 초상화인지도 모른다.

눈밭에
三足烏 앉았던 자리

오래 생각한 자리
멀리 바라본 자리
꽁꽁 얼어붙은 자리

다리 뽑지 못해
몸통만 날아간 자리
―「겨울 가래나무」 전문

천상적 기운과 태양의 힘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는 시인이 지향하는 자유와 해방의 의미가 집중된 이미지이다. 잠시 지상의 눈밭에 내려 앉은 새는 몸통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하늘로 날아 오른다. 그것이 천상을 동경하는 자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새’는 하늘과 땅 두 공간을 삶의 근거지로 삼기 때문에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새는 눈밭에 앉아 지상의 삶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그의 영혼은 늘 먼 곳을 바라보며 현실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발은 삶의 무게로 땅에 붙박혀 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비유하기도 하는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일상의 우리들은 많은 이상과 꿈, 자유의 날개를 지상의 삶에 헌납하고 비대한 몸통을 키운다. 그러나 시인은 단호하게 지상을 딛는 발을 버리고 몸통과 날개만 갖고서 겨울 속으로 날아간다. 이런 비장한 결단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3연의 각 종결형을 ‘자리’라는 명사로 처리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새가 날아간 빈 자리를 시각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자유를 향한 갈망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렇듯 길게 진술하기보다는 짧고 압축적인 표현, 명사 종결의 사용은 시의 이미지와 의미를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정용주의 시는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를 직접 진술하기보다는 경치나 상황을 간명하게 묘사해 주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는 전통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성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런 형식은 자연을 시적 소재와 주제로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인데, 시인에게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이처럼 ‘집’이 환기시키는 가치가 인간의 자유와 이상(理想)을 박탈시키는 것이라면 시인은 지상에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그는 산비둘기의 집을 보면서 자유의 모태가 되는 집의 가능성을 본다.

새들의 집은 얼마나 아늑한가
새집을 볼 때마다 찬탄하는 것인데
유독 산비둘기 집을 볼 때 싱겁기 짝이 없다
늙은 소나무 삭정이가 떨어지다
대충 쌓인 것 같기도 하고
파전에 대파줄기처럼 숭숭하기도 한데
까치집으로 따지면 바닥 공사만 하다
부도라도 난 것 같은 이 집을 보면 픽
웃음이 나기도 하고 혹 알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한데 걱정 말라는 듯
새끼 기르고 산다
가느다란 가지에 얹힌 한 움큼의 거처가
산 넘고 하늘 날아다니는 자유로움의
모태가 될 수 있다니 자유는 또한 얼마나
단순하게 태어나는가
―「집」 전문

시인이 꿈꾸는 집이란 어떤 것일까. 위의 시를 통해 시인은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아늑한’ 집이 사실은 이상(理想)으로 날아가는 자유를 희생시켰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일반적으로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로운 집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시인이 등장시키는 산비둘기는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을 가진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것 같다. 산비둘기의 집은, ‘싱겁게’, ‘대충’ 지어졌고, 바람도 숭숭 들어오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움큼의 거처에서도 새끼를 기르면서 자유롭게 살아간다. 이들이 영위하는 삶은 무엇이든 잘 갖추어진 집만이 집이여야 한다는 일상적 편견에 도전한다. 오히려 단순함과 단촐함 속에서 자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근사하고 아늑한 집을 짓기 위해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일수록 우리는 현실에 집착하고, 이상을 향해 떠나지 못한다. 그런데 산비둘기처럼 최소한의 것을 갖고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생은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란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이는 집의 덕목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가능케 하려는 시인의 생각이다.

2. 비상(飛翔)하는, 뿌리의 언어
생활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소유하고 사는 것, 단 한 움큼의 거처가 진정 지상의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산가에 꾸려진 소박하고 단촐한 시인의 생활은 이런 삶을 추구한다.

장작 패던 도끼에 비 내린다
장작더미 속으로
빗줄기 스민다

빨랫줄에 수건 한 장
양말 한 켤레

툇마루 끝 사기접시
가루쥐약

달무리 떠 있는
처마 끝 알전구

독 같은 마음
독 속에 무청 누르는
돌 같은 마음
―「겨울비」 전문

내리는 비, 마당에 쌓인 장작더미, 빨랫줄의 수건과 양말, 가루쥐약, 달무리, 알전구 등 이것들이 시인과 함께 하는 식구들이다. 이들에게 겨울비가 스며들고 있다. 이때 시인의 마음은 넉넉하고 깊은 독 같기도 하고 독안의 무청을 지그시 누르는 돌 같기도 하다. 이 시는 겨울비를 맞는 집 안팎 사물들의 풍경을 그리면서 자신의 심정을 읊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성을 하고 있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자신의 ‘마음’도 마치 집안 풍경과 함께 놓인 사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시를 읽을 때는 묘사된 풍경에도 눈이 가지만 마지막 연에 진술되고 있는 시인의 정감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하여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상상하게 된다.
상징적으로 독은 둥근 형태와 깊이 때문에 동굴이나 우물처럼 재생공간의 의미를 갖는다. 하여 스산한 겨울비를 맞는 이 초라한 집이 겨울을 지나 소생할 공간이라면 겨울비 역시 스산한 비가 아니라 소생을 위한 풍요의 물이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겨울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무청처럼 일어나는 욕망을 누르고 오로지 고통스런 추위에 대해 사색해야 한다. 때문에 시인은 돌 같은 마음으로 독 같은 마음을 겨울 내 채워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이 새로운 존재론적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엉겅퀴꽃 옮기려고 땅을 팠다
녹슨 칼이 나왔다
진흙이 달라붙어
칼을 먹고 있었다

입술에 꽃을 물고
한 삽 밑에서 칼을 먹는 혀
엉겅퀴꽃 실뿌리
칼을 감고 있었다
―「뿌리」 전문

인간이나 짐승들에게 집을 짓는 일이, 식물들에겐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그들은 한 몸의 집을 땅에 붙박고 살아간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그들은 튼튼하게 땅에 뿌리를 내려야만 쉬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다. 시인은 가늘은 실뿌리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칼의 몸을 감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뿌리 내리는 존재들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식물들이 뿌리 내리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개화시키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기 위해 튼튼히 받쳐줄 뿌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새롭게 개화하기 위해 뿌리 내릴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어떤 물리적 형태를 가진 것이든, 아니든 인간의 몸과 영혼의 안식과 비상(飛翔)을 가능케 하려면 ‘집’과 ‘뿌리’의 상징은 필요한 것이다.
정용주 시인은 산가에서 홀로 뿌리 내리기를 시작한 것 같다. 그것은 세상과 어울려 씨를 뿌리는 일보다 훨씬 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진정 삶을 꼿꼿하게 세우고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 위해서는 튼실한 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지상을 떠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백일홍 모종 솎아
새로 만든 꽃밭에 심었다

주저앉았다
바닥에 얼룩무늬 새겼다
물 한 바가지 끼얹었다

다음날, 꼿꼿하게 일어섰다
위아래 떡잎 네 장
그림자 거느렸다

물의 뼈 곧추세우고
그림자 층계를 높여
뜨거운 정수리
―「백일홍」 전문

위의 시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진정한 개화를 위해서 씨를 뿌리고 물을 끼얹는 수고의 과정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 존재는 정수리가 뜨거워지는 생의 열기를 느끼게 된다. 정용주 시인 역시 단순하고 단촐한 삶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오히려 새처럼 세상으로 날아가는 진정 자유롭고 뜨거운 언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안에서 맞이하는 존재의 변화무쌍한, 희열의 시간들을 통해 시인은 시와 삶에 관한 풍성한 변주(變奏)의 가능성을 찾게 되리라 생각한다. 시인에게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므로 정용주 시인에게 자유로운 집의 모색은 곧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詩와 언어에 대한 고독하지만, 치열한 탐구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해 본다.



김진희․
평론집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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