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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신작시/황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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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봄은 무덤이다
발목을 다쳤다. 아픈 만큼 가슴에 텅텅 여백이 생겼다. 바람 든 무처럼 가벼워졌다. 너는 너무 무거워, 도대체 외통수야. 지난겨울 그가 코앞에 날카로운 금을 긋고 지나갔다. 무 자르듯 잘라 숭숭 구멍 뚫린 나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겨울이 다 가도록 나는 그 금을 넘지 못했다.
싹 난 감자를 땅속에 몽땅 묻어버렸다. 잘라도 잘라도 시퍼렇게 싹 돋는 봄이 징글징글했다. 한번 긋고 지나간 금은 지워지지 않는다. 목련꽃 진다. 이제 금 간 나를 지울 차례다. 언제부턴가 그를 향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메워도 쓸데없이 자꾸만 깊어졌다. 그 깊이만큼 묻을 것이다. 봉분 없는 내 무덤 위엔 해마다 삼베조각 같은 목련꽃잎이나 하릴없이 쌓일 것이다.
벌레 먹다
복숭아 껍질을 깎다가 벌레를 베었다
벌레 한 도막은 복숭아 살에
또 한 도막은 끈끈한 칼에 붙어 꿈틀~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쓰윽 긋고 지나갔다
하얀 피가 묻어났다
벌레를 도려내고 칼을 다잡았다
나머지 껍질을 깎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복숭아는 밤중에 먹어야 이뻐진단다, 얘야
상처도, 상처에 돋아난 뿔도, 먹으면 약이 된단다
아버지! 이제 그만 무덤에서 나오세요, 가을이에요
벌레 먹은, 아까워하던 당신 딸을 이렇게 깨끗이
껍질 벗겨 놓았어요, 이거 우리
같이 먹어요
황희순․
충북 보은 출생
․1993년 ≪오늘의문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나를 가둔 그리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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