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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시/김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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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05회 작성일 08-02-29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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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옥





밭두렁에서 제비꽃 깊은 눈망울을 보다가
주눅 든 내 일곱 살이
아버지의 마르지 않는 술 주전자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본다

뱀이다!

내 한 살이, 열 살이, 열일곱 살이, 스물두 살이…
뱀이 되어 구불구불 술 주전자 속으로 들어간다

셋째 딸로 태어나 방구석으로 밀쳐졌던 핏덩이가
뒤란에 숨어 어깨를 들썩이던 어머니의 눈물이
이십 명도 안 되는 고등공민학교 교실이
때 지난 월사금 봉투가 들어있는 가방이
꽁보리밥에 노란 단무지만 들어있는 양은도시락이
어딘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대던 사춘기가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아, 징그러운 저 뱀이




출가


늦은 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탄다 부안 IC에 접근하자 갑자기 안개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길을 삼킨다 방향감각을 잃은 속도에 체인을 감고 안개 속 꿈틀거리는 길을 더듬거리며 간다 자정이 넘어 고향집 공동묘지 앞을 지난다 울음소리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 속, 무덤 하나 쓰윽 갈라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술을 마셔야 피가 돌던 아버지는 늘 주막거리를 맴돌며 바람 앞의 밀대처럼 휘청거렸다 우리들의 희망은 밀밭 뒤로 쓰러져 눕고, 나는 매일 마당귀에 나 앉아 차가운 달빛을 오도독오도독 씹어 삼켰다 내 손엔 책가방 대신 노란 술 주전자가 들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밥상이 마당에 나뒹굴었다 울컥울컥 똥물까지 게워 올리는 아버지의 절망이 어둠을 타고 퍼져나갈 때, 썩은 나무둥치 같은 아버지 속에 구멍을 뚫고 나는 쥐새끼처럼 고향을 빠져 나왔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으로



김찬옥․
전북 부안 출생
․1994년 ≪순수문학≫으로 등단
․시집 󰡔가끔은 몸살을 앓고 싶다󰡕
․수필집 󰡔사랑이라면 그만큼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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