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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시/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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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나무
만지면 부서지는 기억
부서지면 알리라
처마를 들락거리는 쥐들의 노래
날카로운 이빨로 서까래를 갉는 춤
온갖 세파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어깨들
길고 긴 역사의,
난파한 보트에서 찾는 한 토막 나무
꿈속에 가득한 불결한 언어들
빵부스러기처럼 귀찮은 생각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할,
아아 나는 시대의 첩보원이었지
굳은 얼굴로 타인의 내력을 짐작하여
노트에 베껴 적는 무명의 시인이었지
고매한 얼굴은 거죽만을 남긴 채
불결한 꿈은 계속되었지
비통한 밤,
넘쳐나는 언어 가운데 몇 오라기 기억하려고
머리를 쥐는 찰라,
이 도시에도 아침 새가 지저귄다
집 근처에 무심한 나무들이 있었지
그들도 새를 모으고 푸른 숨을
뱉어내는 나무인 것을
나무는 뿔로 남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뼈까지도
발각되는 운명이 좋을 리 없지
만지면 부서지는 재가 되어
가고 싶은 나라, 가고 싶은 사랑에게
살짝 머리를 얹고 싶은 것이지
새가 나무의 살점을 물고 와
유리창을 톡톡 친다
나무의 피가 천천히
몸을 타고 돈다
라디오를 듣는 새벽
우연,이라는 말. 머릿속이 딱딱해. 마치 서리가 서린 것처럼. 새벽녘 잠이 깨어 라디오를 켰지. 세계의 날씨 예보. 우연히, 알게 된 어느 고장의 구름과 바람과 비. 그러고 보면 우연히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일본이 바다로 내려앉고, 양극점이 이동한다든지, 미서부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냉대지방에 야자수가 열린다든지 하는 일들을. 혹은 내가 이 별을 빠져나가 어느 먼 혹성에서 지구를 지켜볼지도. 그러다 이 땅의 정수리부터 서서히 타들어가 끝내 불덩이로 뒤덮일 광경을 볼지도 몰라. 참호 속같이, 가장 안전한 땅, 그러나 결코 평화롭지 않은 땅을 그리워했었지. 목숨은 위태롭지 않았지만 싸움은 지옥 같았어. 머릿속이 딱딱할 때, 어느새 내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안위의 춤사위. 모든 의문을 우연,이라는 말 속에 가둬 놓는 속임수. 새벽녘 라디오를 들었지. 아름다운 선율의 비명과 곡소리를 들었지.
이재훈․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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