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신작시/정진경
페이지 정보

본문
정진경
런닝머신을 타는 돼지
원통형 주둥이 내밀며 런닝머신을 타는
저 멧돼지 좀 보고 가소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피는 꽃
석양이 번들거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의 말씀을 한번 읽어보고 가소
야생의 자유를 안전벨트에 채우고
출발선에 장착된 버튼을 눌러
네 발 달린 짐승의 질주를 런닝머신에 태우는
문명화된 시대 해학적인 풍경을
한번만 보고 돌아가소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멧돼지 경전
돼지 멱따는 소리라 외면만 하지 말고
들어나 보고 가소
느리게 달리는 동안에는
문명을 향유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 것
문명의 속도에 밀려서,
짐승의 유전자에 저장된 야성의 육질을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사실, 잊지 말 것
날카로운 송곳니 망각에 넣어두고
진화한 종족의 영역을 감히 침범 말 것
구두 밑창에 박힌 압정의 통증이
혈관을 찔러도
짧은 네 다리 아래 금속음이 지상을 긁어도
런닝머신을 타는 동안에는
야산으로 질주하는 행복한
상상을 할 것
그 상상은
네 발 달린 종족의 미래가 아니라
몸을 가공하는 퇴행,
밤하늘에 툭 부러지는 석양
뒤뚱이는 우리 몸짓 한번만 생각해 보고 가소
*링컨이 한 연설의 일부분.
현자의 돌
신경질이 파릇파릇 돋아난다
언젠부터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일어나던 거실 마룻바닥
살갗에 묻은 나무의 포자가 자라
내 몸에 잔가지 하나를 접붙여 놓았다
관(棺)을 등에 지고 가지런히 누운
나무의 주검들이 어느새 살아
내 몸을 제 몸인 양
능청스레 사용하고 있다
주검이라 믿은 나이테 신경줄이
파르르 떨리면서
말라붙은 제 가지에 나를 걸어 놓는다
요람에서부터 짓밟아 온 소소한 생명들
말을 잃은 식물들 미라를 생각 없이 밟고 다닌
나에게 나무는
제 관(棺)을 내 속에 접붙여 놓는다
나무는 나를 옭아맴으로써
생명을 꿈꾸고 있다
세상을 내 것이라 여긴 영장류를 비웃는 삐걱임이
신경질을 온몸에 돋아나게 한다
나무와 내가 교차하는 그곳에서 활개 치는
육신의 반란,
‘현자의 돌’로 변성하는 꿈을 꾸는 자만이
촉촉한 영혼에 가지를 뻗는다
가파르게 나무결을 깎던 대팻날이
내 옹이를 스쳐 간다
정진경․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알타미라 벽화
- 이전글22호 신작시/하재연 08.02.29
- 다음글22호 신작시/권성훈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