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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시/하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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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운명을 믿는다면
상처 입은 사슴은 울며 성한 사슴은 춤을 추며
이건 햄릿의 구절
당신 앞의 배우들을 믿어주세요
의도 없이 그들 모두
금요일 밤의 술자리에 흠뻑 취해가고
깨어 있는 사람 옆에 자는 사람
세상은 둥글둥글 돌아가네
이건 햄릿의 구절
나는 사소한 전화번호들을 입력시키고
어떤 새벽엔 사소한 키스를
세상은 둥글둥글 돌아가네
운명을 믿는다면,
당신의 사슴들이 뛰어놀게 내버려 두어요
울거나 춤을 추거나 슬프거나 상처 입거나
이건 나의 구절
가령 벚꽃 휘날리는 남산에서
손을 잡고 산책하는
늙은 일본인 남자와
저기 사슴이 한 마리, 혼자서
당신이 만약 사랑을 믿는다면
나는 호수가 보이는 모텔 창 앞에 앉아
서울에서 2시간 반,
테이블 위의 커피가 잔 속으로 스며들 때
모텔 카사블랑카, 흰 베란다의 긴 의자가 사랑스러워요
토요명화와 8시의 음악회와 까만 염소가 농축된
약봉지들을 티비 속에 포켓 속에 냉동고 속에
그대로 두고서
너의 이틀
나의 3시간
당신의 화요일
그런 것들을 전화기 속에 꼭 닫아두고서
거위가 괙괙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여기 504호실에서
내 발들도 조금씩 하얗게 변해가는 중
내 몸의 커튼을 양 옆으로 걷으면
창문이 꽤 여러 개라는 사실,
한강에 떠오른 돌고래를 기억해 줄래요
배를 뒤척이며 잠이 편치 않았을 텐데
이보다 더 멀리 오고 싶지는 않았지
커튼은 호수 밖으로 사라지네
자고 일어나면 또 잠들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서울에서 2시간 반
당신은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7번 국도를 달리고 있겠지만
그건 7번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나는 내 한심한 기억력이 정말 좋아요
하재연․
1975년생
․200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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