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신작시/김민휴
페이지 정보

본문
김민휴
불볕
백일홍 꽃잎이 빛 모래알을
힘겹게 이고 있다, 그늘 밑 강아지풀
목이 타들어간다
아스팔트에 뒹굴며 마르다가 쩍 갈라지는
언저리 털까지 뭉그러진 거죽,
저건 빛 폭탄을 맞은 도둑고양이다
볼따구니에 먼지투성이 화물차 한 대
종잇장이 다 된 거죽 위에 검은 똥을!
갈기고 달아난다
수박을 매단 나일론 줄이
여자의 손바닥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순댓집에서 나온 스쿠터 한 대
순대 속 같은 골목을 질주한다
느닷없이 엄습하는 살벌한 정적
구멍마다 식은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죽은 전남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앞 나무들에게
너희들이 너희들 생명 천년 살려온 것
천년 전 아이들과 어린시절 보내고, 그 후로도 천년
아이들 푸른 영토 되어주고
허리에 새끼줄 동여매고 무병장수, 평화 빌어준 것
흐르는 사람들 마음 닿는 항구 되어준 것
언제부턴가, 엄청 학문 많이 한 지성들, 엄청
공부 잘하는 헛똑똑이들 길러내는 대학 울안에서 풍월 읊은 것
알아, 앞으로도 천년 더 살 수 있을 나무들아
배은망덕으로 되갚아준 것, 미안하다
천년 살아온 너희들, 무시무시한 전기톱으로
한 개씩 베어내는 데는 채 십분도 걸리지 않았어
머지않아 연둣빛 어린 잎 고물고물, 파릇파릇 흔들어댈 숲
가을이면 단풍붓 휘둘러 푸른 하늘 색색으로 칠해 놓을 숲
송두리째 사라지고
포크레인에 뿌리까지 뽑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데는
일촌광음도 걸리지 않았어
미안하다 나무들아, 꼭두새벽부터
버스 끊긴 한밤중까지 교실에 아이들 가두어놓고
한 놈이라도 너희들에게 한눈팔까, 숨죽인 복종 깨뜨릴까
감시하느라, 벌주느라 까맣게 모르다가
어느 일요일 딸애와 나와 휑한 하늘 보고
충격 받은 일, 미안하다
정말 막막하도록 미안하다
이제 너희들 가고 없는 자리에
초현대식 국립치과대학병원이 들어선다더라
물론 치과병원도 있어야겠지……
내 이가 아프지 않아 일없길 두 손 모아 빌지만
너희들 중음신 소리 가득한 그 병원을 찾아
아픈 이 치료하고 걸어 나올 내가 두렵다
미안하다, 정말 깜깜하도록
죽은 은행나무야, 미루나무야, 마로니에야, 플라타너스야!
김민휴․
2003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 이전글22호 신작시/김열 08.02.29
- 다음글22호 신작시/하재연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