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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시/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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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세 번째 죽은 마을
마늘을 찧고 감자를 쪼개는 날들,
도마 위의 그림은
날마다 조금씩 상하고 흐려진다
스티로폼 상자 속의 상추는 푸르고
겹겹이 살이 오른다
뿌리는 검고 알 수가 없다
나는 소문의 한 겹을 싸먹는다
조금 엿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문이 아니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과일을 돌려 깎는다
그늘의 호위 속에서
벌레 하나가 몸을 튼다
어떤 주문이라면 저 문을 뚫고
날아갈 수 있을까
악어의 눈물이
수면 위의 정적을 깨뜨린다
누가 고요한 날들을 믿겠는가
갈라진 발끝에 무심히 손이 가고
살비듬이 하얗게 떨어지는데
정글의 깊고 푸른 이야기 속으로
발목이 넘어간다
먼 대륙에서 발견되었다는
일 미터가 넘는 지렁이에 관해서나
새로운 습성을 가진 개구리에 관해서
귀를 열어둘 때에도
상추잎들은 계속 두터워진다
가지런히 무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이기도 하는 날들,
칼끝은 무디어지고
도마 위에 그려진 새는
훌쩍 날아가겠지만
우리는 손을 뻗어
그 새에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뜨거운 감자
오늘은 나도 가능하다
감자를 깎는다 이 단단함은
힘과 균형을 필요로 한다
껍데기가 뭉텅 베어져나간다
이 감자는 단단하게 잡힌다
감자를 둘러싼 의혹과 불만은
나의 것이 아니다 감자를 깎는다
뜨거운 감자는 일종의 비유다
나는 뜨거움에 대한 반역이다
감자를 깎는 수밖에
이 뜨거운 감자가 쪼개지는
어떤 순간에 대해서라면
당신은 걱정이 없다
감자를 둘러싼 의혹과 불만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불온한 감자를 상상하더라도
뜨거운 감자 그건 일종의 상태일 뿐
나는 감자를 깎는다
이 감자는 왜 단단한가
이 감자는 왜 뜨거운가
나는 감자를 깎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가능하다
감자를 깎는 비정치적인 행위와
이상하고 분명한 일상과
저기 뜨겁고 단단한 감자
껍데기가 뭉텅 베어져나간다
이근화․
1976년 서울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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