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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계간평/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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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830회 작성일 08-02-29 02:48

본문

|계간평|<소설>


∙정도상 「소소, 눈사람이 되다」
∙조헌용 「숲에서 온 거인」
∙홍양순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오현종 「헨젤과 그레텔의 집」





삶의 실재에 바탕을 둔 삶의 상처들

고명철|문학평론가


1. 상처를 위무하는 문학
상처받은 자의 삶을 위무하는 것은 문학 본연의 역할 중 하나다. 흔히 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문학적 감동은 세계로부터 소외당한 자들의 상처를 진정으로 보듬어 감싸안을 때, 순간, 밀려든다. 그 아픈 상처를 견디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삶의 비루함을 넘어서는 삶의 어떤 신성성에 대한 전율을 느낀다. 우리들 삶이란, 세계가 가해오는 그 숱한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상처를 외면할 수 없으며,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문학으로부터 문학의 제 몫을 발견한다.
그런데 말이다. 상처에 민감해진다는 것과 상처에 과장되게 반응한다는 것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할 터이다. 상처에 대한 과장된 반응은, 상처를 낳게 한 삶의 실재를 휘발시켜버린다. 삶의 실재가 휘발된 상처란, 삶의 포즈에 불과하지 않은바, 따라서 그 상처는 삶의 비루함을 넘어설 수 없다. 도리어 삶 자체를 환멸투성이로 만들며, 급기야 ‘삶의 환멸’을 맹목화하게 된다. 삶의 부정성을 넘어서야 할 문학은 삶의 부정성에 갇힌 채 문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학은, 삶의 실재가 휘발된 채 삶의 포즈로 점철된 상처를 부풀릴 뿐이기 때문이다. 하여 삶의 실재에 바탕을 둔 상처를 섬세히 포착하고, 그 상처를 에워싼 삶을 치유하는 문학의 가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삶의 실재가 문학의 영토에서 휘발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수록 삶의 실재 속에서 상처받은 자의 삶을 위무하는 문학의 가치는 더 없이 소중하다.

2. 이방에서 겪는 삶의 상처들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는 이른바 탈북자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언론에서 탈북자의 문제를 다룬 적은 있되, 그 대부분의 접근 시각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점에 초점을 맞추거나, 서구의 관점에서 본 인권이란 측면에 초점을 맞추거나 한 것인 반면, 정도상의 소설에서는 탈북자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구체적 실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탈북자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남한 우월주의의 관점에 의한 게 아니라 탈북자의 삶의 진실을 통해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작가의 관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 언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쳐진 탈북자의 모습(북한 체제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탈북자의 또 다른 삶의 구체성을 보여줌으로써 탈북자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에 반성의 계기를 부여한다. 가령, 소설 속에서 탈북자로 등장하는 충심은 자신이 자진해서 중국으로 건너간 게 아니라, “바보처럼 속아서 강을 건넜다가 그대로 인신매매단한테 끌려가 목단강 근처 깊은 농촌으로 팔려가 강제결혼을 당했”(151쪽)으며,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도시로 도망을 쳐 중국 공안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말하자면 충심의 탈북자로서의 삶은 항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에만 기인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연이 있음을, 작가 정도상은 밝히고 있다.

충심은 말이 막혔다. 서탑에서 몸을 팔고 있는 은주나 청도에서 노래방에 나가고 있는 언니는 목단강에서 잡혀 단동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갔었다. 조선으로 돌아가 두달 정도 교양을 받고 본래의 직장으로 재배치되었는데, 직장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배신자 취급을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고난의 행군을 함께하지 않고 조국을 배신했다는 따가운 눈초리와 따돌림 때문에 인간의 위신을 지킬 수가 없어 다시 강을 건너오고 말았다는 것이다.(152-153쪽)

충심과 같은 탈북자가 중국 공안에 쫓기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중국에서의 이러한 삶 때문에 경제적 혹은 인권적 침해를 감내하며 살 수밖에 없는 데에는,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외면한 삶에 대한 북한 사회의 냉대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 정도상이 주목한 충심이란 인물을 통해 탈북자가 놓여 있는 이중의 고통을 만난다. 하나는 충심의 고향인 북한에 떳떳이 돌아갈 수 없는 데 대한 고통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민족적 차별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고통이다. 타향에서의 이러한 이중의 고통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몰각했던 탈북자가 직면한 삶의 상처들인 셈이다. 소설 속에서도 그려지고 있듯이, 충심을 비롯한 탈북자들은 중국에서의 온갖 삶의 위협을 감내하면서 삶을 연명해 나간다. 비록 그들의 고향인 북한에 돌아갈 수 없지만, 또 다른 조국인 남한에 가기 위해 돈을 억척스럽게 버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돈의 마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감을 조성하며, 삶을 황폐화시킨다.
요컨대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를 통해 우리는 탈북자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성찰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정도상은 탈북자의 고통과 상처를 남한 우월주의의 관점으로 치유하지 않는다. 그보다 탈북자의 삶에 대해 혹시 선입견과 편견을 갖고 있다면, 그것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던져주고, 무엇보다 탈북자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이중의 고통을 공유하도록 한다. 이제 비로소 정도상을 통해 탈북자의 문제가 우리 소설의 영토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가 고향을 떠난 자의 상처에 주목하고 있듯, 조헌용의 「숲에서 온 거인」(≪실천문학≫, 2006년 봄호)도 역시 이방에서 겪는 삶의 고통에 공명(共鳴)한다. 조헌용의 「숲에서 온 거인」의 무대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라도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마라도에서 막산이란 인물과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막산은 겉으로 볼 때 보통사람들보다 정신 연령이 떨어진 듯이 보인다. 막산은 “안 왕이. 다들 다녀갔쥬. 길동이랑 걸리버도 다 다녀갔쥬. 근디 고향서 동무들만 안 온단마시. 여기 오는 게 경 어렵지는 않아, 이. 근디 무사 안 왕? 보고 싶은디…….”(150쪽)라는 제주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무엇인가(혹은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다. 막산은 이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물론, “꾸쁘리 홀홀 쏠붸 으흐럼 독크란 일지옴 몬수 함뷔럼 슈파니 옴브라 한한 일러럼…….”과 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막의 노래”(158쪽)를 입버릇처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바다에 돌고래가 나타날 때마다 돌고래를 쫓아 바다로 잠수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막산의 말과 행동은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막산의 이 언행에 연루된 막산의 삶의 비밀을 알게 된다.

“지난해던가 지지난해던가 아까 갔던 저치들이 어떻게 알고 막산을 찾아왔더라구. 민주화운동심의회인지에서 그때 잡혔던 사람들을 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더만. 그러면 뭐 해, 이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그 세월들을 어떻게 보상 받으라구. 허, 거 참. 세상이 우습단마시. 나도 그때서야 저놈(막산-인용자)이 우주인, 우주인, 왜 그렇게 지랄을 했는지 알겠더라니까. 쯧쯧, 사람 팔자라는 것이……. 오 년을 썩고 나오니까 아내는 고향 섬에 아들을 맡겨놓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늙은 노모는 벌써 죽고 아이는 어디 고아원에 맡겨졌다는데 막산 이놈이 옛집에 버려진 고장 난 손목시계 하나 차고 전국 방방곡곡을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던 모양이야. 처음에는 벙어리인 줄 알았어.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그냥 저기 저 최남단비 아래서 몇 날 며칠을 웅크리고 안 있어. 그래, 지금은 죽고 없는 저 윗집 할머니 하나가 그놈 불쌍하다고 한 삼 년을 같이 물질도 하고 그러면서 먹여살렸지. 그 할머니 죽고 나서 엉엉 울고 나더니 겨우겨우 제주도 사투리를 써가며 말을 하길래, 나도 제주도 어디가 고향인지 알았지 뭐야. 헤구. 거 참.”(163쪽)

막산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혹독한 탄압의 피해자로서 영육이 피폐해진 삶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물론 막산과 같은 인물들은 1990년대 초반 후일담류에서 곧잘 목도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막산이란 인물이 국가권력의 엄청난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었다기보다 과거사의 그 아픈 현재적 상처를 막산이 어떻게 치유해내고 있는가 하는 그 극복의 과정이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막산이 선택한 삶은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라도에서 제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막의 노래”를 부르며, 바다의 돌고래가 보일 때마다 돌고래를 쫓아간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입은 영육의 상처를 막산 특유의 삶의 형식을 통해 치유하고 있다. 고향이 아닌 낯선 곳, 그것도 가장 멀리 떨어진 섬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싸안는다. 막산은 바다의 원시성(原始性)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국가의 근대적 폭력으로 받은 상처를 말끔히 씻겨내고자 한다. 근대의 구조악과 행태악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태곳적 자연의 원시성으로 치유하는 작가의 서사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경제 논리에 예속된 삶의 상처들
홍양순의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리토피아≫, 2006년 봄호)와 오현종의 「헨젤과 그레텔의 집」(≪문학동네≫, 2006년 봄호)은 우리 시대의 경제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삶의 상처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들 삶에서 경제적 문제를 외면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은 없다는 말이 있듯, 경제는 우리들 삶의 주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홍양순의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는 은행의 구조조정과 직간접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 홍양순은 영욱과 조 대리란 인물을 통해 ‘지금, 이곳’의 은행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금융권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구조조정의 문제를 예각적으로 짚어낸다.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관치금융’과 같은 문제로 인해 금융권의 구조조정의 여파가 심상치 않았고, 아직까지 금융권의 구조조정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러한 경제 문제에 주목한 홍양순의 소설은, 우리 사회의 삶의 실재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가 금융권의 구조조정 문제를 소재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영욱과 조 대리란 인물이 우리 경제의 거시적 문제로 인해 자신의 직장에서 퇴출당할 위기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이 위기를 극복해내는 삶의 형식적 측면이다.
영욱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향기를 통해서인데, 영욱은 목욕을 할 때 혹은 직장에서 일을 할 때 특히 “요도 끝의 통증 때문에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75쪽)을 때 라벤더향을 맡는다. 신경을 이완시켜주는 독특한 향의 도움을 받으며, 세계의 상처를 견딘다. “이제 그것들(향을 내는 물질들-인용자) 없이는 한 걸음도 못 움직인다. 영락없이 향기에 사로잡힌 꼴이다. 향기에 사로잡힌 남자”(70쪽)다. 이렇게 영욱은 금융권의 구조조정이란 삶의 현실적 위기에 직면하여, 그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으로써 신경을 이완시켜주는 독특한 향내에 의탁한다. 여기서 홍양순의 문제의식에 주목해야 한다. 구조조정의 대상은 관치금융에 비협조적이어서 인사고과 성적이 낮은, 말 그대로 금융사의 조직에 순응하지 못한 이유 때문인데, 이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받은 상처는, 이 상처들을 잠시 망각하게 하는 신경이완성 향의 도움을 통해서다. 말하자면 삶의 문제를 삶의 현실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삶의 현실감을 마비시켜주는 어떤 마술과 같은 힘에 의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은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도리어 삶의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오현종의 「헨젤과 그레텔의 집」은 삶의 상처가 어떻게 덧날 수 있는지, 그 상처의 극단적 양상을 한 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통해 보여준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이 가족은 경제적 문제로 심각한 곤란에 처해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 혼자만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와 부모는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길거리에 일부러 방치하려고 한다. 여기에 천륜(天倫)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오직 가족들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는 게 최대의 현안이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어느 놀이공원에서 버리기로 한다. 그 놀이공원에는 ‘동화의 나라’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인 보배 역시 버리게 된다.

“보배야.” 나는 아주 작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돌아오지 마, 절대로.”
모퉁이를 돌아 인파를 향해 달려간다. 앞으로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믿기로 한다. 보배는 피라미드 안쪽으로 두둥실 빨려 들어가 사라졌을 거라 믿기로 한다. 놀이공원 출구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아직 눈에 뜨이지 않는다. 문득, 막대사탕처럼 달콤한 것을 쪽쪽 빨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달콤한 것을 떠올리자 입 안에 침이 고이며 숨이 트인다. 코로 공기를 빨아들여도 소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달리느라 숨이 찰 따름이다. 조금, 아주 조금.(271쪽)

가족 구성원은 뿔뿔이 해체되고 있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경제활동 능력이 없는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의 선택을 천륜이란 관점에서 비판하기보다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연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소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것처럼 들리는 이러한 사건 설정은 우리의 삶과 현실이 그만큼 동화와 같은 ‘환(幻)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에 기인한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는 “로또는 희망이 있다. 만원어치가 아니라 한 장이라도 괜찮다. 어차피 끝장을 내는 건 단 한 방이다.”(259쪽)라는 일확천금의 욕망에 붙잡혀 있는, 삶의 과잉된 욕망을 가볍게 넘겨볼 수 없다. 가족마저 경제 논리에 의해 이합집산(離合集散)되는 작금의 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상처의 또 다른 양상을 낳는다.

4. 상처와 고통에 정직한다는 것
삶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야 한다. 적당히 곪은 상처는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다. 상처가 아문 것 같지만, 더 깊은 상처를 낸다. 곪을 대로 곪은 후 비로소 그 환부에는 새로운 살점이 돋는다. 즉, 상처의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상처에 대한 포즈를 취하지 않고, 상처의 아픔과 고통을 자연스레 드러내야 한다. 하여 탈북자의 삶의 상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국가의 근대적 폭력을 자연의 원시성으로 극복하고 있으며(조헌용의 「숲에서 온 거인」), 경제 구조조정의 현실적 삶의 문제를 마술적 힘으로 이겨내는 가운데 부각되는 삶의 상처를 새롭게 인식하며(홍양순의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경제 논리에 의해 사회의 재생산 단위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데 대한 삶의 상처(오현종의 「헨젤과 그레텔의 집」) 등은 바로 우리들 삶의 실재에 기반한 것이기에 삶의 진정성을 보증한다.  
요컨대 정도상, 조헌용, 홍양순, 오현종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삶의 상처와 고통이 지닌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거듭 강조하건대, 우리들 삶의 상처는 삶의 실재에 바탕을 둔 것이지, 삶의 실재와 무관한 영역에서 한갓 포즈로 전락해버린 삶의 상처가 아니다. 상처와 고통에 정직한다는 것, ‘지금, 이곳’의 우리 소설은 이러한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에 대해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를 통해 우리는 탈북자 충심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그것이 바로 일상의 행복임을 만끽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나이에 어울리게 살고 싶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고, 동무들과 밤마실을 다니며 수다 떨고 남의 흉도 보면서, 어린시절부터 꿈꾸었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며, 무엇보다도 신분증 없이 떠돌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삶을 충심은 간절히 소망했다.(「소소, 눈사람이 되다」 148쪽)



고명철․
1970년 제주출생
․저서 󰡔'쓰다'의 정치학󰡕 등
․광운대 교수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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