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계간평(시)/정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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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시>
∙노춘기 「Suicide Bubble」
∙조용미 「낯선 피」
∙김언희 「모르는 일」
∙배용제 「多情」
∙한혜영 「어떤 첼리스트의 노동」
∙이태선 「움푹」
∙이기인 「흐린 창문 밖으로 보니」
∙김근 「처녀들은 둥글게 둥글게 사라지고」
∙이근화 「박춘근 氏 밑에서 일하기」
∙유안진 「프로박테리아의 꿈」
좋은 시의 사소한 조건
장석원|시인
1. 거품더미 연옥을 예감하며 라라라 노래를 부른다
흘러넘치는 시. 시의 위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지친다. 시는 많으나 시를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를 읽는 사람은 많으나 좋은 시를 가려 읽는 사람은 적다. 시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 좋은 시의 조건은 무엇일까. 좋은 시의 기준을 정의하기란 힘들다. 독자의 주관에 좌우되고, ‘좋다’는 평가의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바깥을 향하여
맥주거품이 치솟는다
유리벽 너머를 응시한다
알몸을 빙글 뒤집으며
날아오른다
오 천국; 오 천정;
거품더미 연옥을 예감하며
라라라 노래를 부른다
멀리 있는 것들이여
내 밑으로 내려가라
라라라 라라라
훤히 보이는 바닥에서
낳는 자 없이 태어난 것들이
죄 없이 투명한 것들이
수면 위에 켜켜이 쌓이는
천만 송이 흰 꽃잎 무더기
꽃잎이 세계를 품는
윤곽이 사탕처럼 녹아 흐르는
거품 속으로
거품 속으로
―노춘기 「Suicide Bubble」(≪리토피아≫ 2006 봄) 전문
이 시는 젊다. 즐겨 마시는 맥주가 제재이다. 새로운 시는 새로운 대상을 모색한다. 맥주 거품을 ‘자살하는 거품’이라고 표현하는 젊은 시인의 재능이 돋보인다. 우리 시는 늘 젊음이 쇄신해왔다. 노춘기 역시 젊은 감각과 시선으로 시에 활력을 부여한다.
잔에 담긴 맥주의 거품을 시인은 바라본다. 거품이 탱탱한 알몸을 뒤집으며 바닥에서 수면으로 떠오른다. 부글부글 넘치는 맥주 거품의 일대기를 본다. 거품은 잔 밖으로 탈출하려는 듯이 서로 엉킨다. 거품 무리가 넘실댄다. 흘러넘치기 전에 맥주 거품을 마셔야 한다. 거품이 도달한 그곳을 시인은 “오 천국; 오 천정;”이라고 노래한다. 마신 맥주가 시인의 식도를 타고 흘러내린다. “멀리 있는 것들이여/내 밑으로 내려가라.”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의 대비. 그리고 시인이 꺼내든 언술. “훤히 보이는 바닥에서/낳는 자 없이 태어난 것들이/죄 없이 투명한 것들이” “천만 송이 흰 꽃잎 무더기”로 전신(轉身)된다. 거품의 황홀한 변화를 시로 쓴 젊은 시인의 재능이 부럽다. 가벼운 듯하지만 날카로운 안목을 숨기고 있다. 서툰 듯하지만 진지하다. 시인이 피워 올린 거품 꽃잎이 “세계를 품는”다. 우리는 즐겁게 노래 부를 수 있다. “거품더미 연옥을 예감하며/라라라 노래를 부른다.” 즐거운 연옥에서 살아간다.
거품의 기원 없는 탄생과 염세적 종말을 가볍고 즐겁게 노래하는 이 시는 미시적 시선의 응축을 보여준다. 노춘기라는 젊은 시인의 독특성이라고 부를 만하다. 극단을 파고드는 그의 세필은 일견 감각의 거품으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이 감각의 축제를 지켜보면서 완강한 시인의 의지를 발견했다. 낳는 자 없이 태어나는 생명과 낙화암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무더기 꽃잎의 죽음을 대비시키는 시인의 물러서지 않는 시선의 개입 때문에, 이 시는 훅 불면 사라지는 감각의 축제에 그치지 않는다. 새 감각을 선보이는 노춘기의 언어는 그것을 관할하는 시인의 금속성 시선에 장악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다른 시인과의 분기점을 그는 마련한다. 자살하는 거품을 지켜보며 시인은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계를 시에 끌어들인다. 눈앞의 세계는 여전히 거대하다. 거품 같은 생이지만 버릴 수 없다. 세계를 껴안으려는 시인의 힘이 느껴진다.
2. 낯선 피가 침입하고 있다
새로운 시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새로움의 범주를 정하기 역시 쉽지 않다. 그것은 세부에 의해 설정되는 비정형의 전체이다. 각 요소가 서로를 관할하는 유기적 성질을 지니지만, 결코 전체에 의해 규정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 새로운 시는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는 개종도 불사한다.
낯선 피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낯선 피와 만나는 몸의 한 지점에
열이 높다
검은 장미는 큰 꽃이 되기 위해
먼저 가시를 지그시 박아넣는다
낯선 피가 침입하고 있다
열에 들뜬 순간
몸은 그 빛깔을 알 수 없는 꽃을 활짝 피운다
낯선 피는 나쁜 피다
물밑에 뿌리를 두고 자라는 연꽃처럼
나의 뿌리도
물밑 어디에 있는지
발걸음은 자주 늪이나 저수지를 향한다
나도 여기 살며시 뿌리를 내려볼까
낯선 피가 올라오고 있다
낯선 피는 물속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수면이 뜨거워지고 있다
―조용미 「낯선 피」(≪문학․판≫ 2006 봄) 전문
알 수 없는 존재가 시에 숨어 있다. 시의 밑바닥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이 눈을 치켜뜬다. “낯선 피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낯선 것을 만난 ‘나’의 몸은 아프다. “열이 높다.” 낯선 존재와 대면하는 일이 두렵다. 시의 앞부분에 시의 주제를 드러내는 검은 장미와 가시의 등장 때문에 긴장이 반감되지만, 3연의 “낯선 피가 침입”한다는 구절 때문에 다시 긴장하게 된다. 낯선 피의 침입으로 ‘나’의 몸은 “빛깔을 알 수 없는 꽃을 활짝 피운다.” 시인은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 도드라지는 이물, 낯선 피. 그것을 시인은 ‘침입’의 주체로 본다.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타자가 ‘나’의 동의도 없이 ‘나’의 몸에 들어왔다. 낯선 피와 ‘나’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낯선 것을 받아들인 ‘나’는 활짝 꽃을 피운다. 그런데 그 꽃의 빛깔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선연하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낯선 피는 나쁜 피다.”
낯선 피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시인은 ‘나’의 근원을 찾아간다.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나’의 근원을 시인은 “늪이나 저수지”의 물밑 어디라고 말한다. 죽음의 세계에 다다른 시인이 발견한 검은 구멍. 시인을 빨아들이려는 검은 물. 시인에게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검은 피. 시인은 검정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낯선 피, 검은 물, 익사, 끝없는 추락, 그리고 시인을 삼킨 검은 물의 비등(沸騰).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다.
낯선 피는 무엇일까.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죽음을 불러올까.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가. 이 시는 침범하는 타자와 싸우는 주체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자신의 투쟁을 고요한 수면의 열기로 집약한다. 낯선 피는 우리 존재의 이면에 들어와 있다. 시인은 격렬한 고요를 관조한다. 뜨겁지만 차갑다. 조용미는 흥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광경을 읽으면서 시의 힘을 다시 한번 믿게 된다. 새로움의 범주에 기입할 한 가지가 떠오른다. 시인의 힘이다. 그것은 정신의 파워이다. 더불어 그녀는 이미 복수 주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체의 분열을 넘어섰기에 새로 태어난 복수 주체 또는 다중 주체가 펼치는 언어의 교향악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3. 대천사의 귀두처럼 빛나는 사과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세탁기 속의 잘린 머리도
팬티 속의 훔친 사과
대천사의 귀두처럼 빛나는 사과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누렇게 뜬 변기 위의 스핑크스도
모든 답이 정답인 수수께끼도 모르는
일이다 목 빠지게 기다린 종말이
나만 모르고 지나갔다는 것도
새벽 세시 수화기 속의
새빨간 웃음소리도
그 웃음의 젖은 치모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답을 알게 되자마자 문제가
바뀌는 퀴즈 쇼도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할 추문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퀵 서비스로 받은
쉰두 개의 면도날도 공포에
삶긴 눈동자도 눈 밑의 칼자국도
모르는 일이다 적도가 하필 내 배꼽 위로
지나간다는 것도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나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는
나의 생일파티도
정녕 나는
―김언희 「모르는 일」(≪작가세계≫ 2006 봄) 전문
‘나’에게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화자가 모르는 일의 대상을 열거하는 이 시의 재미는 나열된 대상들의 관계없음에서 얻어진다. 그것들은 서정시의 유기적 통일성을 파괴한다. 부분을 따라가면서 전체를 기획하는 우리의 관습에 젖은 감각을 교란한다. 시인은 모른다고 부정한다. 시인이 모르는 일을 독자가 알기란 어렵다. 모르는 일을 왜 시로 쓰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꼭 아는 것만 시로 써야 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내가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시는 의미의 연결체인가.
‘모르다’의 대격들이 형성하는 관계의 논리적 인과를 찾아낼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 내가 의미를 알아내지 못하면 어려운 시가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시이므로 그 시는 좋지 않은 시이고, 알 수 없는 시를 썼으니 당신은 평가받을 만한 자격에 미달인 셈이다. 독자를 우롱하고 무시하는 이런 시를 써도 되는가. 평론가가 모르는 시를 써서는 고립되기 십상이다. 되도록 잘 이해되게 시 곳곳에 힌트를 숨겨야 한다. 시인과 평자의 퍼즐 게임은 쉬워도 대접받기 어렵다. 너무 어려운 경우,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시인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모르는 시를 쓴 죄 벌 받아 마땅하다. 모르는 시를 쓴 시인에게 무관심이라는 형벌이 기다린다.
시와 비평의 본말 전도가 허다하다. 시를 쓰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 아는 것이 많아야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시인의 공부와 관심과 창조력을 자신의 독서와 기호와 지력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의 무의식과 자신의 의식을 번역하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제2외국어가 놓여 있다. 작품이 그것이다. 이중의 번역 과정에서 이해의 폭은 협소해진다. 시인만큼 공부하지 않고 어떻게 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인만큼 다른 시인이 쓴 시를 잘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모르면 화를 낸다. 객이 주인에게 상차림이 시원찮다고 성을 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김언희는 따돌림하기에 딱 좋은 시인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잘린 머리에서 생일파티까지의 거리를 짐작할 수 없었다. 갸우뚱거리다가 이해를 포기했다. 내용의 연관을 이해할 수 없다. 환자의 횡설수설을 경청하는 정신 분석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환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환자에게 자신을 투사한다. 분석가는 환자의 의식을 뚫고 나오는 무의식의 파편이 지시하는 거대한 그림 전체를 재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김언희의 언어들이 이루어내는 돌연한 충격은 독자의 낡은 감각을 분쇄한다. 대천사의 귀두와 사과가 일치된다. 발기한 귀두의 붉게 충혈된 모양과 빛나는 빨간 사과의 유사함은 익숙하다. 대천사의 귀두와 사과가 동일화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지근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사과의 농밀한 붉음은 충격적인 섹스 이미지로 확장된다. “팬티 속의 훔친 사과”이기 때문에 효과는 더욱 상승된다. 팬티, 팬티 속 성기, 귀두로 연결되는 환유적 인접성에 의해 배고파 훔친 사과와 굶주린 성욕이 맞붙는다. 욕망의 동기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붉게 충혈되어 곧 터질 듯한 긴장감이 생긴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욕망의 근원을 알겠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무의식의 언어는 실재로 치환되지 않는다. 언어는 실재가 아니다. 실재가 아닌 언어를 실재의 대리물로 착각하는 경우, 김언희의 시는 독해되기 어렵다. 김언희의 ‘귀두, 치모, 면도날, 배꼽’은 실재일까.
우리의 일상을 가로지르는 폭력의 근원을 김언희는 모른다고 한다. 왜 “적도가 하필 내 배꼽 위로/지나”가는지, 왜 “모든 답이 정답인 수수께끼”가 존재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당신은?
4. 그러나 나는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증오의 대상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증오의 대상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는 그를 증오하기 위해 존재한다. 증오 때문에 내가 부서진다 해도 나의 증오는 살아서 그를 향해 날아간다. 증오의 불꽃을 사랑이 피워 올린다. 사랑과 증오의 차이 없음을 말하려는 시, 「多情」.
나는 수많은 것들의 증오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바람난 사내의 피부가 반질반질 빛나는 월요일 저녁
창가에선 몇 개의 화분이 말라죽고 있었다
멀리서 휘파람을 부르며 풋내기 계집애가 오고 있는 월요일 저녁
어느새 치를 떨며 빛나는 가로등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수레를 끌고 어떤 사막을 건너온 낙타를 바라보던
거대한 광고판 아름다운 공주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희디흰 살결 위에서 헐떡이는 바람
가장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났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수많은 애무의 효과에 대해 말해주었다
서로를 겨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증오와 권태의 종류가 있는지
매일 밤마다 깨달았다.
세상에 어떤 밤이 고요했던가
또 어떤 어둠이 단 한번이라도 세상을 내버려 두었던가
꽃은 꽃의 방법으로,
바람은 바람의 방법으로,
눈물은 눈물의 방법으로 저마다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이 봄이라는 계절이고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것뿐이지
그러나 나는 모두 기억하고 싶었다
어두워지면 더욱 더 환하게 빛나는 공주의 희디흰 살결과
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과
수많은 낙타의 길과
가장 은밀한 시간을 가르치는 고양이의 교육철학과
비명을 지르며 피어나던 너의 이상한 고통의 체위까지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저녁이 오길 기대하는 바람난 사내가
어떤 은밀한 방식으로 이상한 꿈을 꾸어도 상관없겠지.
―배용제 「多情」(≪현대시학≫ 2006 4월) 전문
배용제가 시의 첫 연에서 선언한 ‘증오의 증명’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떻게 증오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읽지도 않고 성급하게 사랑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다만 지금은 봄이라는 계절이고/오늘이 월요일”이기 때문에 증오는 생겨나고, 증오의 배면에 사랑이 움튼다. 월요일인데 바람난 사내의 살갗은 반질반질 빛난다. 그는 지금 “멀리서 휘파람을 부르며” 다가오는 “풋내기 계집애”와 연애 중인지도 모른다. 물큰한 연애가 벌어지던 “가로등 아래”에 시인은 서있다. “어떤 사막을 건너온 낙타”처럼 시인은 건너편의 세상을 쳐다본다. “거대한 광고판 아름다운 공주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는 저녁이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저녁은 찾아왔고, 사내와 여학생과 광고판은 바람에 삐걱인다. 오늘이 월요일이기 때문에 “가장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났다” 곧 부스러질 것 같다. 사라질 세계가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다. 저녁에 흡입되는 거리에서 시인은 “서로를 겨냥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증오와 권태의 종류”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가에 대해 말한다. 증오와 권태가 창궐하는 월요일 저녁의 몰려드는 “어둠이 단 한번이라도 세상을 내버려” 둔 적은 없었다. 증오와 권태에 나와 너와 그와 그녀와 우리들은 저마다 미친 듯이 흔들린다. “꽃은 꽃의 방법으로,/바람은 바람의 방법으로,/눈물은 눈물의 방법으로” 떨고 있다. 시인은 “모두 기억하고 싶”어 한다. 기억의 대상은 광고판에 그려진 “공주의 희디흰 살결과/아무 때나 피어나고 아무 때나 시들어버리는 생물들의 욕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나는 “가장 은밀한 시간을 가르치는 고양이의 교육철학”을 발견한다. 생은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증오의 증명은 끝없는 “생물들의 욕정과/수많은 낙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시의 깨달음 앞에서 무력해진다. 증오의 증명이 사랑의 증명으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온다. “다시 월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살아갈 뿐이다.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운명 같지 않은 잔혹한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시인이 포착한 “고양이의 교육철학” 앞에서 나는 정이 많은-「多情」한-시인의 따스한 마음을 느낀다. 인정해야 견딜 수 있고, 포기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증오한다 한들 벗어날 수 없다. 다정을 언어로 바꾸는 시인의 사랑, 사랑의 무기를 확인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인의 힘 때문에 나는 긴장한다. ‘고양이’와 ‘교육철학’의 연관 없는 연쇄가 새롭다. ‘다른 서정’(이장욱)의 영역은 몇몇 젊은 시인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5. 炭脈을 찾아 끝도 없이 내려가는 鑛夫
이 시를 읽은 후에 한혜영 시인의 시집 뱀 잡는 여자가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의 플로리다에 산다던 시인의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시인을 보고 난 후, 나는 플로리다의 푸른 돌고래를 떠올렸다.
연주자는 꽃잎을 불러 모으거나
깃털을 불러 모으는 마술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므로 음악을 감상하는 일이란
깃털로 만든 이불을 덮고 누워
꽃잎에서 추출한 향기를 맡는 것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방금 전에서야 연주자들 역시
노동자라는 사실을 어이없이 깨달은 것이에요
炭脈을 찾아 끝도 없이 내려가는
鑛夫라는 거, 삽 한 자루가
전 재산인 저 첼리스트를 보란 말이지요
땀 뚝뚝 흘려대며 필사적으로 놀려대는
저 삽질
어지간해서는 가슴 더워지지 않는
뭇 영혼에게 땔감 대주는 일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숨 막히는 작업인가요
진작에 땔감 떨어진 무쇠난로처럼
싸늘하게 식어 말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내 가슴에 석탄 한 삽을 막 집어넣고 돌아서는
첼리스트의 등허리가 그 사이 부쩍 휘었군요
―한혜영 「어떤 첼리스트의 노동」(≪서정시학≫ 2006 봄) 전문
7~8행 “그러다가 방금 전에서야 연주자들 역시/노동자라는 사실을 어이없이 깨달은 것이에요”는 어이없다. 고상한 연주가가 노동자라니. 시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시인에 의하면, 첼리스트는 “꽃잎을 불러 모으거나/깃털을 불러 모으는 마술사”가 아니다. 첼리스트는 “탄맥을 찾아 끝도 없이 내려가는/광부라는 거”다. 시인은 우악스럽게 첼리스트의 필사적 노동을 느껴보라고 한다. 그의 연주는 “깃털로 만든 이불을 덮고 누워/꽃잎에서 추출한 향기를 맡는 것처럼/우아하고 고상한 일”이 아니라, “땀 뚝뚝 흘려대며 필사적으로 놀려대는/저 삽질”이라는 것이다. 혼신을 다 하는 노동이기에 ‘나’의 “가슴에 석탄 한 삽”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의 노동이 가슴을 데운다. “진작에 땔감 떨어진 무쇠난로” 내 가슴에 첼로의 선율이 불을 지핀다.
난해하지 않은 작품이다. 연주자 역시 연주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일 뿐이다. 시인은 마치 아무도 모르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양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화자의 고양된 어조는 읽기의 속도를 증가시킨다. 읽다가 율독을 방해하는 두 부분에 걸린다. 한자로 표기되어 도드라지는 “炭脈을 찾아 끝도 없이 내려가는/鑛夫”와 시의 마지막 행 “첼리스트의 등허리가 그 사이 부쩍 휘었군요.” 광부가 된 첼리스트의 검은 노동과 탄맥은 잘 어울린다. 노동에 그의 등허리가 휜다는 것도 연결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나는 클래식 연주자의 검은 단복을 떠올린다. 몸만한 악기의 크기. 첼로의 저음이 들리는 듯하다. 아래로 아래로 파고드는 저음,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낮은 소리. 스며든 첼로 소리와 가려진 첼로 연주자. 있지만 감지하지 못해 없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시인이 지적한다. 한혜영의 어조와 번다하지 않은 표현의 직정적 힘.
시는 본질을 외면하는 우아하고 고상한 수사를 싫어한다. 부박한 지식을 부정한다. 타인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끌고 가는 시혜 의식을 혐오한다. 시가 정직한 언어 노동임을 일깨우는 시이다.
6. 거울 속 움푹한 눈 그 움푹한 속 들여다보았다
불이 났다 아무도 끄지 않는다 치맛자락 줄어들지 않고 탄다 불이 차갑다 얼음이 튀고 불꽃이 타오르고
숲이 계곡에 처박힌다 공동묘지 산사태에 파묻힌다 그 산천 前前 後後 펼쳐져 멀고 먼 세상
묵언중인 고목나무 구름이 왔다 간다 붉은 물이 흘러가고 또 다른 물이 흘러온다 상여집 지붕에 늙은 햇빛들 쌓인다
숨 쉬어도 숨 쉬지 않은 것 같다 팽창한 풍선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귀의 아가리 속인지 잠자던 방이었는지 산발한 머리통 일어나다 넘어지고 국 끓이고 아이 낳고 와르르 뒤범벅되어 버리는
머리 빗다 거울 속 움푹한 눈 그 움푹한 속 들여다보았다
―이태선 「움푹」(≪현대시학≫ 2006 3월) 전문
시를 읽으면서 편견 같지 않은 편견을 대면할 때가 있다. 여자냐 남자냐를 따지고 나이를 확인한다. 사적으로 시인을 아는 경우에도 증상은 나타난다. 모르는 시인이면 병이 심해진다. 이름이 분명 여성 시인인 경우, 시를 꼼꼼히 읽지도 않고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고 혀를 찬다. 나 역시 이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태선의 「움푹」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아프게 꾸지람한다.
시인이 목격한 환상 또는 무의식의 세계. 일의 순서가 헝클어진다. 원인 없는 결과의 세계가 펼쳐진다. 불이 났는데 차갑고, 불꽃이 타오르는데 얼음이 튄다. 전도(顚倒)된 세상에 시인이 서있다. 시인은 먼 과거로 끌려들었다. “숲이 계곡에 처박힌다 공동묘지 산사태에 파묻힌다 그 산천 前前 後後 펼쳐져 멀고 먼 세상”이다. 어쩌면 죽음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있었던 세상이 실재였는지 환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과거 또는 환상이 현재 또는 현실의 시인을 점령하고 있다. 시인은 수수방관 중이다. “숨 쉬어도 숨 쉬지 않는 것 같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인은 이곳이 “아귀의 아가리 속인지 잠자던 방이었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와르르 뒤범벅되어” 버린다.
시인의 내면 여행을 끝낸다. 시인이 말한다. “머리 빗다 거울 속 움푹한 눈 그 움푹한 속 들여다보았다.” 읽은 후에 다시 읽어야 시의 맛을 알게 된다. 거울 속에 움푹한 눈이 있다. 그것은 ‘나’의 눈일까. 시인은 거울 밖에서 거울 속 다른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 눈을 현실로 전이시키는 단어 ‘움푹’ 때문에 나는 걷다가 허방다리를 짚는다. 도사리고 있던 과거가 현재의 나를 틀어쥔다. 나는 과거의 아가리에 한 움큼 베어물린다. 읽을수록 단어 ‘움푹’이 산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시인의 속도 빠른 언어가 믿음직스럽다. 무의식의 심원을 탐험하는 시인이 ‘움푹’이라는 물질적 황홀을 포착해냈다. 나는 무의식과 의식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시인의 건강함이 부럽다. 온몸의 감각세포를 자극하는 이 시의 ‘움푹’ 꺼진 구멍, 과거의 아가리에 담긴 진경이 좋다. “상여집 지붕에 늙은 햇빛들 쌓”이고 있다.
7. 한 바구니의 사과 일가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과일장수는 사과에 앉은 먼지를 하나하나 닦아준다
사과는 금세 반짝반짝 몸의 상처를 찾아낸다, 몸의 중심을 잡는다
사과 위에 사과를 사과를 사과를 올려놓으면서
한 바구니의 사과 일가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앞으로 코가 빨개져서 서로 웃고 지나가는 가족이 보인다
흐린 창문 밖으로 보니 저들의 무릎이 더 반짝인다
―이기인 「흐린 창문 밖으로 보니」(≪詩로 여는 세상≫ 2006 봄) 전문
사과는 왜 빨간 것이지? 반질반질 윤나는 사과의 붉은 얼굴. 과일장수가 자꾸 만지니까 성이 났을까 아니면 성숙한 사과 엉덩이를 정성껏 애무해서 부끄러운 것일까. 내가 생각한 사과와 시인의 사과는 다르다. 시인의 사과는 “반짝반짝 몸의 상처를 찾아낸다.” 잘 닦으니 가려졌던 상처가 드러난다. 상처를 숨기지 말라고 사과장수는 사과의 몸을 닦아주었다. 사과는 제 몸의 상처를 활짝 열어 보인다. 상처는 몸의 중심이다. 숨길 수 없고 지울 수 없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고통스럽다. 고통 때문에 건강한 나머지의 중심이 잡힌다. 나는 몸의 상처와 몸의 중심을 이어놓은 시인의 이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다음 행 “사과 위에 사과를 사과를 사과를 올려놓”는 시인 사과장수의 얼굴을 떠올린다. 동사 올려놓다의 목적어 사과를 주목한다. ‘사과를’의 반복 세 번. 사과가 쌓인다. 무너질 듯하지만 견고하다. 이것은 나의 실수를 사과한다는 번복이 아니다. 이 짧은 시에 리듬을 부여하고, 상처 입은 시 속의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실재의 사과로 만드는 주문 같은 ‘사과를’의 반복. 4행의 사과 일가처럼 읽는 사람에게 “행복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반복.
흐린 창문 안에서 “한 바구니의 사과 일가”와 “그 앞으로 코가 빨개져서 서로 웃고 지나가는 가족”을 행복하게 쳐다보는 시인. “반짝반짝 몸의 상처”는 사과의 상처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상처가 아닐까. 시의 사과가 탐스럽게 느껴지지만 한 입 먹고 싶지 않은 이유, 시인의 행복한 사과가 슬프게 보이는 이유. 흐린 창문의 안과 밖으로 나뉘는 시의 분리된 공간이 완강한 사실의 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8. 그날부터 소년들은 자라려고 하지 않았대
햇빛이 포플러 나무 잎사귀마다 개구리처럼 와글와글거렸으나 하늘색 교회당의 종소리는 햇빛처럼은 울리지 않던 날이었다던가 공터에서 처녀들이 둥근 춤을 추웠더래 처녀들은 모두 하얀색 블라우스를 하늘거리며 검은 공단치마를 나풀거렸는데 처녀들이 발을 굴러 춤이 점점 더 둥그러질 때마다 공터의 속살이 보일락말락하던 것을 소년들이 녹슨 철조망에 꿰어져 흘겨보고 있었다지 총각들이 사라진 건 오래 전 일이야 어느 날 총각들을 검은 길이 돌돌돌 말아 가버렸는데 검은 길은 다시 공터로는 기어들어오지 않았다는군 그때부터였지 처녀들의 춤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어 총각들이 떠난 공터에서 소년들이 처녀들을 사랑한 건 처녀들의 둥근 춤 주변으론 오래 전부터 둥근 말이 떠다녔어도 아이고데고 둥근 말들은 둥근 노래가 되지 못했대 처녀들의 입 굳게 다물어지고 소년들의 얼굴 갈수록 파리해지고 소녀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고 아이고데고 햇빛이 포플러나무 잎사귀마다 개구리처럼 와글와글거렸으나 하늘색 교회당의 종소리는 햇빛처럼은 울리지 않던 날이었다던가 마침내 둥근 춤을 추던 처녀들은 눈조차 뜰 수 없는 햇빛 속으로 둥글게 둥글게 사라져버렸대 녹슨 철조망에 꿰어져 꿰어진 소년들에게 그날 남은 햇빛들이 개구리처럼 달려들어 야윈 몸을 온통 붉게 뒤덮어버렸다나 힘겹게 소년들이 손을 뻗었으나 검은 공단 치마 한 자락 잡아보지도 못한 그날부터 소년들은 자라려고 하지 않았대 공터에 덩그러니 남겨진 소년들이 꿰어진 사지를 잘랐다 붙였다 하기만 하고 아이고데고 하늘색 교회당의 종소리는 햇빛처럼은 끝내 울리지 않고 자라지는 결코 않는 소년들만 남은 공터로는 뼈만 남은 새들이 날아들었다던가 어쨌다던가 아이고데고 어허 나흐으
―김근 「처녀들은 둥글게 둥글게 사라지고」(≪유심≫ 2006 봄) 전문
젊은 시이다. 시인이 젊고, “자라지는 결코 앉는 소년” 화자를 다루는 시의 목소리가 젊다. 킥킥거리다가 짐짓 시의 말미에서 흐느끼는 화자는 비밀을 발설하는 목격자이다. 뭐 이렇고 저런 일이 있었는데 글쎄 그게 말이지 그게 말야 하면서 듣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다 듣고 나면 섬뜩한 두려움이 들기는 하지만 재미는 별로 없는 그런 일상의 이야기.
‘두려운 낯설음’이 일상에 내재된 공포의 근원을 일러준다. 시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호러물이 아니다. 아무리 호러블하더라도 낯섦이 없다면 새로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낯선 새로움이 없다면 공포는 취미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두렵지만 낯설지 않은 세계를 목격한다.
처녀들이 둥근 춤을 춘다. 하얀색 블라우스, 검은 공단 치마. “공터의 속살이 보일락말락”한다. 소년들이 처녀들을 훔쳐본다. 처녀들과 짝을 이루어야 할 총각들을 어느 날 “검은 길이 돌돌돌 말아 가버렸”다. 왜 총각들은 떠나야 했을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소년들은 그때부터 처녀들을 사랑했고, 처녀들은 그때부터 춤을 추었다. 소년들이 사랑해야 할 소녀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하늘색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던 날, “마침내” “처녀들은 눈조차 뜰 수 없는 햇빛 속으로 둥글게 둥글게 사라져버렸”다고 화자는 말한다. “녹슨 철조망에 꿰어져 꿰어진 소년들”은 “자라려고 하지 않았”다고 화자가 우리에게 속삭인다. 화자는 청년들과 처녀들의 죽음을 비밀스럽게 구술한다. 소년들은 그때의 철조망에 사지가 절단된 채 꿰어져 있다. 화자 ‘나’는 과거의 어떤 날, 어떤 일, 어떤 장면을 “아이고데고 어허 나흐으” 흐느낀다. 사라진 시절의 성장통을 기억하면서, 사춘기의 격렬한 흥분과 두려움을 떠올리면서 과거가 현재를 물어뜯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반복되는 개구리와 햇빛과 철조망의 애매모호한 풍경.
익숙하기에 오히려 낯설어 더욱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익숙해서 낯설지 않고 더더욱 두렵지는 않은 것일까. ‘나’의 직접 화법이었으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전통의, 정통의 일반적 화법이었으면 어땠을까. 진정성과 상투성은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는 것일까. 직접 화법인 경우 “아이고데고”가 이 시에 기재될 수 있을까. 이 연극적 울부짖음이 위악을 만들어낸다. 이 위악은 어떤 사람에게는 재미로, 다른 사람에게는 포즈로 인식될 것이다. 나는 위악의 포즈가 지니는 새로움의 효력이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나’에 대한 간접화법에서 사라진 근원을 향해 거슬러오를 수밖에 없는 절망의 몸짓을 읽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소년이었고, 누구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는 길에 소녀와 처녀의 신비 때문에 끙끙 앓았다. 이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과장으로 부풀리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에게 비밀스럽게 말해주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지 않다. 사춘기의 어떤 원초적 경험이 쉽게 지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 전부를 내던질 파괴의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시인은 현재 어른이고, 그의 소년 시절은 지나갔다. “자라지는 결코 않는 소년들만 남”았다. ‘결코 자라지는 않는’이 도치된 이유. 시인이 자라지 않겠다, 그곳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화자를 퇴영적, 고착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을 ‘청개구리’ 같다고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조차 기획이고 의도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9. 우리는 독자적으로 아름다워지겠죠
아저씨는 형이상학적인 웃음소리를 냈어요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라는 이름을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
춘근이 아저씨의 목젖을 보는 것 같았어요
검은 창자가 흘러나온 것처럼 생겼지만
입은 박춘근 氏에게 중요한 기관입니다
백만인의 가족사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능력을 가졌죠
제가 박춘근 氏에게 처음 들은 말도 바로 그거였어요
제때 밥은 벅어야지, 하고 단 일초 만에 딴말을 했지만요
정오의 닭의 뱃속에는 가시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가진 흑발이었어요 박 아저씨는
염색 후에 상자에 붙은 여자들을 오리면서 진지해졌어요
춘근이 아저씨의 연애사는 가위질과 도배질 속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드를 불면 튀어나오는 환상처럼 벽이 울퉁불퉁해졌어요
명자야 명자야, 하며 잠꼬대를 했습니다 아저씨가
꿈속을 막무가내로 훔쳐보는 심보가 틀렸다면서, 내 머리통을 쳤어요
입속에서 콩 같은 것이 툭 튀어나오려 했지만, 박춘근 式으로.
子字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개명을 해요
개명은 낡은 유행이죠,라고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죽기 전에 명자 아줌마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진, 숙, 연 등의 이름을 가지고 오면 오면, 정말 고민이죠
방구석에 차라리 마네킹을 세워두었으면 좋겠어요
화려한 팬티와 커다란 브라를 입힌 여자로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의 일은 숨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상은 뻥 뚫린 벽 같은 것인지도 모르죠
바람 같은 손이 불쑥 나타나겠지만, 고요해진 날에는
파트너십을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것이 필요해요, 아저씨 건배.
사방에서 튀어나온 꽃들이 전속력으로 벽지 위에 도로 박힙니다
암술과 수술처럼, 우리는 독자적으로 아름다워지겠죠
멋진 아들딸들은 펜과 망치를 들고 슬프게 슬프게 울겠지만요
―이근화 「박춘근 氏 밑에서 일하기」(≪창작과비평≫ 2006 봄) 전문
박춘근 씨의 직업이 궁금하다. 이발사일까, 세탁소 사장일까. “백만인의 가족사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능력”을 지녔으니까 남의 이야기를 쉽게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박춘근 씨 밑에서 일하는 ‘나’는 아저씨를 관찰하고 평가한다.
충돌하는 시어들의 의미가 궁금하다. 형이상학, 이데올로기, 파트너십. 형이상학적인 웃음소리, 이데올로기를 가진 흑발, 파트너십의 예술적 승화. 젊은 시인답게 관념어 외래어 외국어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어와 모국어를 시인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라고 강권하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아니니까.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는 어떤가. 러시아어 고유명사를 발음해본다. 한번은 ‘형이상학적’으로 웃어야 하지 않을까.
아저씨와 명자 아줌마의 관계가 궁금하다. 명자 씨는 아저씨의 부인일까, 꿈에도 못 잊을 첫사랑일까, 아니면 숨겨둔 애인일까. 왜 떠났을까. 시인의 말대로 명자 씨는 “진, 숙, 연 등의 이름”으로 개명할까. 화려한 팬티와 커다란 브라를 입힌 마네킹과 어두운 방구석에서 사랑을 나누느라 끙끙대는 박춘근 씨의 모습은 비극적일까 희극적일까. 짓궂다.
우리에게 박춘근 씨를 소개하는 화자의 정체가 궁금하다. 화자는 박춘근 씨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박춘근 씨의 말 많은 입을 “검은 창자가 흘러나온 것처럼 생겼”다고 말하고, “춘근이 아저씨의 연애사는 가위질과 도배질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의 나이. 아저씨라고 부르고, 밑에서 기술을 배우니까 10대 후반일까. 남녀상열지사쯤은 우스워하니까 연애의 비린내도 알 것 같다. 애어른 같은 화자의 인생철학은 진지한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의 일은 숨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와 “세상은 뻥 뚫린 벽 같은 것” 그리고 언젠가 “바람 같은 손이 불쑥 나타나”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궁금하지 않은 것 둘. 박춘근 씨에게 “아저씨 건배”를 외치며 예술적인 파트너십의 승화를 제안하는 화자에 의해 획득된 이미지의 선명함. “사방에서 튀어나온 꽃들이 전속력으로 벽지 위에 도로 박”히는 광경. 또 하나, 박춘근 씨를 사랑하지만 박춘근 씨와 결별도 불사할 것 같은 냉철한 화자가 심드렁하게 내뱉는 말. “암술과 수술처럼, 우리는 독자적으로 아름다워지겠죠.” 이 행에 들어 있는 ‘독자적으로’ 젊은 시인의 젊은 시선과 생각이 새롭다.
10. 프로패셔널다웁게 프로레타리아다웁게 박테리아다웁게
나는 젊은 시인을 좋아한다. 다음 시인 역시 젊다. 50대 이후의 시인들이 더 열심히 쓰고,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열심히 계발한다. 예순을 전후로 더 많은 꽃을 피우는 시인들을 보면서 나는 경외감에 젖는다. 젊은 시인들의 폭발력에 비견할 만하다. 오히려 우리 시의 미래파는 60대가 아닐까 . 조로한 40대와 허무를 즐기는 30대의 시는 무기력하다는 반성. 시의 나이는 몸의 나이와 관계없다. 시와 몸의 나이는 생각의 나이와 관계없다.
신장 체중 몸집을 최소로
줄이고 달이고 졸여서
어느 상처에나 땀구멍 숨구멍에나 숨어 들어가
자동생식이든 처녀생식이든
초고속으로 부화와 번식을 되풀이하여
초강력 변신과 부활을 거듭하여
마침내 점령하고 정복하고 건설하고 싶어
김치 요구르트 막걸리 식혜 식초 고추장 된장이든
치즈 마유주 포도주면 어때
악성 종양 병원균이라도 좋아
인종 종교 계층 나이 성별 국적도 불문하고
프로패셔널다웁게
프로레타리아다웁게
박테리아다웁게
耐性不滅의 프로박테리아 제국을 말이야.
―유안진 「프로박테리아의 꿈」(≪애지≫ 2006 봄) 전문
생식, 부화, 번식, 변신, 부활, 점령, 정복, 건설. 그리고 프로패셔널, 프로레타리아, 프로박테리아, 마지막 행에 박힌 ‘耐性不滅’까지. 이 시인은 초월을 모르고 세상을 위장막으로 가리는 관조를 모른다. 변신하고 부활해서 끝없이 새로운 시를 쓸 것 같다. “악성 종양 병원균이라도 좋”다고 하는 이 무모한 긍정과 어이없는 사랑이 나이 어린 나를 질책하는 듯하다. 프로패셔널과 프로레타리아와 프로박테리아의 기표 연쇄를 따라간다. 새로운 서정시는 새로운 정신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언어라는 푸른 잎새를 피워 올린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시인 같다. 나는 ‘내성불멸’하는 사랑을 떠올린다. 타자를 ‘나’로 만들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본다. 시는 자동생식이든 처녀생식이든 가리지 않는다. 좋은 시인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생명을 품고자 하는 생식의 욕망, 사랑의 의지이다. 젊은 생각이 젊은 시를 잉태하게 하는 강력한 무기임을 확인한다.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저서 아나키스트 김수영 시의 수사학 등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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