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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서평/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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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우영 시집 집이 떠나갔다
■신종호 시집 사람의 바다
■박강우 시집 병든 앵무새를 먹어보렴
잘 겹쳐지지 않는 세 개의 ‘주름’
―새로운 ‘사건’을 기대하며
백인덕|시인
지난 세기는 분명 분리(分離)의 세기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분법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던 세기였다는 것이다. 가령, ‘현실과 이상’, ‘세계와 자아’, ‘주체와 대상’,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등등이 짝패처럼 몰려다녔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었는데 어떻게 ‘분리’의 세계였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분법’이란 기본적으로 ‘독단적’이다.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저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논리의 이면에는, 이것을 위해서는 저것은 제거되어야 한다거나 저것을 위해서 이것은 최소한 억압되거나 은폐되어야 한다는 사유가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일치하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한 철학자는 이러한 사정을 ‘일장기’와 ‘태극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일장기’는 국기의 한가운데 떠오르는 한 개의 붉은 점(태양)만이 있으므로 일원론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이분법적이고 따라서 분리를 지향한다. 반대로 ‘태극기’는 한가운데 태극이 붉은색과 푸른색, 음양(陰陽)으로 엉켜있어 언뜻 보기에는 이원론적으로 보이지만, 이 둘이 하나(태극太極)를 이루고 있으므로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융합을 지향한다.
비약이 좀 지나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내가 접하게 된 세 권의 시집은 모두 단적으로 지난 세기의 산물이라는 점이 공통된다. 각 시집마다 그 양상은 차이를 보이지만 어떤 분리에 의존하고 있다, 가령 정우영의 경우 ‘인간과 자연’, 신종호의 경우 ‘현실과 이상, 또는 생활과 시작’, 박강우의 경우에는 ‘의식과 무의식’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가 시작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 시집들이 지난 세기의 사유의 틀 안에 있음을 보여주며, 더불어 시의 개성(장르라는 의미보다는 그 지향적 스타일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면) 또한 인간적 생태시, 현대적 서정시, 환유적 실험시 등으로 이름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리’에 기반한 작업의 결과물임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프로이트 이후 ‘나’를 정의하기가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지나치게 일반화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리해보면, 정우영의 경우에는 “하찮은 풀의 마음도 우리와 같아서/거기서도 한 세상이 태어나고/나무 한그루의 사랑도 우리와 같아서/간절한 그리움으로 몸이 마른다.”(「사람만이 희망인가」)와 같은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생명 있는 모든 것에게로 시선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초자아’가 핵심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신종호는 “그림자도 얼어버린 빙벽 속을 걸어가는 등 굽은 낙타, 뙤약볕 어지럽던 날들, 모래에 묻힌 흰 뼈처럼 말라버리고 싶던, 그런 꿈을 꾼 날이면, 달도 모래처럼 부서져, 흰 눈으로 내리는, 여기 하얀 세상, 얼음이 되고 싶다”(「얼음이 되고 싶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지(‘싶던’, ‘싶다’), 곧 자아의 실현을 문제시하고 있다. 이와는 사뭇 다르게 박강우의 경우는 “생각은 폭우를 들고 들어왔다/젖은 두개골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옷걸이는 계단이 되었다/그리고는 쓰러진 계단을 그렸고/ 생각은 계단에 앉아 형광등이 되었다”(「나는 생각을 그리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실은 제목이 보다 의미심장하지만) 그는 ‘무의식(욕망)’의 세계를 이번 시집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순수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상이 무엇이냐,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왜 욕망에 시달리고 있느냐라는 것 중 단 하나의 물음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이 모든 질문을 뒤죽박죽 섞어 우스꽝스러운 ‘총체성’을 요구한다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이 글에서는 이 ‘인간의 이해’라는 문제를 각 시집에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 인식을 중심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나는 누구인가-시간의 문제
근대적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은 문학적 경험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칸트적 의미로서 감성적 직관의 순수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대상을 수용케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기능을 나타내지만, 전개 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질서로 전개된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나뉘어져 서로를 배제하는 계기적 질서로 전개되며, 공간은 여기/저기의 두 부분이 결합되는 병치적 질서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현대에 와서는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분열된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시간의 계기성과 공간의 병치성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사유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들은 그러한 사유의 일단을 희미하게나마 드러내고 있고, 그것이 곧 그들의 ‘나’에 대한 인식의 차이의 발단이 되고 있다고 보인다.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생강나무」 전문
정우영의 이 작품은 우선 ‘걸어다닌’, 즉 이동 가능한 ‘나’와 ‘한곳에 서 있는’ 정지 상태의 ‘생강나무’라는 대비를 통해 공간성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동/정지는 곧바로 시간성에 대한 인식의 차원으로 뒤바뀐다. 다름 아닌 ‘길’과 ‘여행자’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마흔여섯 해’를 걸어 다니면서 시인은 자신이 지구의 여행자라고 믿어왔지만, 그 시간동안 겨우 ‘노란 털눈’이나 뜨는 ‘생강나무’의 느린 시간 앞에서 지구의 여행자는 시인이 아니라 생강나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시인의 그림자’(정체성)를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 행위로 끝이 나는데, 이는 단순한 의탁이나 융합이기보다는 이른바 ‘마술적 시간’, 주기적 시간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진행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주기가 보다 긴 주기 속에서 반복하게 되는 것, 그것들이 생명의 이법임을 깨닫게 되는 시간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관은 시인에게 스스로 가늠 가능한 시간 너머의 ‘생명’에 대한 외경을 갖게 하며, 그러한 외경이 바로 시인에게는 ‘의지’나 ‘욕망’ 그 너머를 자꾸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칠억 년 전 우랄산맥에서 미끄러진 빙하의 꿈을 간직한 시베리아가 내 잠 속으로 밀려온다. 심장을 찔러대는 침엽수림 숲에서, 나는 잃어버린 순정의 견고함을 아낌없이 노래한다.
소리도 얼어 우두두 떨어지는 동토(凍土), 쩡쩡 갈라지는 얼음 영혼의 가슴을 혀로 핥으며 내 입은 견고하게 함몰된다. 아홉 개의 태양을 집어삼킨 회색 늑대의 울음이 지구를 흔든다.
상징의 숲에 깃든 차가운 시(詩)여! 나의 눈을 영원히 멀게 해다오.
―「시베리아」 전문
앞에서 살펴본 정우영과는 달리 신종호는 ‘역사적 시간’, 다시 말해 직선적 시간관을 드러낸다. ‘칠억 년 전’이 오늘의 ‘내 잠’ 속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경이로움이나 시간의 허망함이기보다는 현재의 내 ‘의지’의 확고함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말 그대로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기원하며, 그 결과 시인은 ‘상징의 숲에 깃든 차가운 시(詩)여! 나의 눈을 영원히 멀게 해다오.’라고 희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종호는 ‘자아’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의 시간은 과거(칠억 년 전)와 미래(영원히)가 다 현재 속으로 함몰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항상 내 눈 속에 들어 있던 그놈들을 쑥 뽑아서 버려두었더니 그곳에서 풀 한 포기가 자라나더라 애처러워 키웠더니 키 큰 나무가 되더라 가지마다 눈알이 맺혀 내가 잠들기 위해 눕는 곳마다 찾아와 나를 깨우니 그놈들을 피할 수가 없더라 나를 따라다니며 눈알들이 귓속말로 그놈들이 나라고, 그놈들 없이는 잠들 수 없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려
혼비백산
눈알들을 가지에서 모두 떼어내 내 눈 속에 집어넣고 나서야
나도 잠들 수 있더라
―「겨울잠․2」 전문
위에 인용한 박강우의 작품에서 시간관의 단초를 찾아내기에는 매우 어렵다. ‘나’와 ‘그놈들’의 관계가 어떤 계기성 아래 진행되는 것은 읽히지만, 이러한 계기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사실 환성성에 의지한 시는 계기성보다는 인접성, 환유성에 의지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는 필자의 인식의 불철저성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의 시간을 기술적 시간, 점괄적 시간으로 부르고자 한다. 시간을 미분불가능점까지 끌고 내려가는 사유를 통칭한다. 디지털 기술에 의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꿈속에서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박강우의 시간은 ‘무의식’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공간의 문제
이곳/저곳이라는 공간의 병치성을 비유적으로 바꾸면 안/밖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안/밖은 우주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되겠지만, 이 글의 편의상 ‘안’을 ‘나’로 읽으면, ‘밖’은 ‘그들’이 될 것이다. 이 ‘나’와 ‘그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건’을 빚어내는 곳이 ‘현실’이므로, 공간의 문제는 다시 시인들의 현실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연쇄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문학에 있어서 공간은 시간을 그 안에 녹여 안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역의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공간을 그것을 표상하는 이미지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타인)’과 맺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새엄마는 침실 벽에 창문을 그리고
창문을 열고
발뒤꿈치를 들어 내다본다
새엄마의 종아리에서 피어나는 찔레꽃
창문을 기웃거리는 나의 눈을
찔레꽃이 찌르고
새엄마는 피 흘리는 나의 눈을 열고
병든 앵무새를 먹어보렴
찔레꽃이 깔깔 웃는다
새엄마는 나의 속옷에 창문을 그리고
창문을 열고
병든 앵무새를 꺼내어
이렇게 먹는 거야
머리부터 한 입 베어 물고
찔레꽃이 깔깔 웃는다
나는 새엄마의 종아리에 창문을 그리고
창문을 열고
병든 앵무새를 꺼내어
머리부터 한 입 베어 물고
병든 앵무새의 눈물이 찔레꽃을 적신다
찔레꽃이 깔깔 웃는다
나는 찔레꽃을 한 입 베어 물고
창문을 닫는다
창문이 열린다
―「섹시한 새엄마」 전문
박강우의 이러한 시편들에서 물론 ‘새엄마’는 현실의 가족구조로 편입될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나-새엄마-찔레꽃’이 형성하는 관계, 또는 그 이미지들의 위계가 아니라 차라리 그 이미지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출몰하는 ‘병든 앵무새’일 것이다. 이 ‘병든 앵무새’는 무의식 속에 담긴 어떤 ‘상흔(트라우마)’의 이미지다. 이 트라우마의 반복은 공포를 자아내고, 시인의 ‘공포’는 ‘현실’이 거세된 곳에서 지극히 환성적인 놀이를 지속하고 있다. 박강우의 시는 이처럼 ‘현실’이 하나의 ‘차트’로 단순화될 수 있거나 비인과적인 인접성의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 차라리 중요할 것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 우시장 골목, 넥타이 졸라매고 우족 두 개 사가는 이 사람을 보라. 그대 삶의 권태를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가? 뇌 속에서 불타는 철(鐵)의 장미 한 송이. 심장 근처에서 합선된 동맥과 정맥의 스파크가 벌거벗은 돼지의 몸을 난도질한다.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가지런히 해체되는 지상의 양식들. 그대 영혼은 돼지 머리처럼 안전한가
(중략)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발목들이 연립주택 옥상 철제 십자가 피뢰침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들의 적은 우리들의 밥, 한 끼의 일용할 양식으로 뭉텅 잘려나간 영혼. 트럭에 실린 수십 마리 돼지들과 소들이 인큐베이터 같은 도살장 우리 속으로 실려가는, 무력한 오월. 밀려오는 라일락, 라일락 향기. 권태의 햇살이 바늘 되어, 사정없이 내 눈을 찌른다.
―「우(牛)시장의 예수」 부분
생활 속에서 우연히 타인을 목격하게 될 때 가장 두려운 점은 그들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신종호의 이 작품에서 ‘그대’는 ‘타자’이거나 ‘타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 삶의 권태를 얼마나 잘 견디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음,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는 한숨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목에 나타나는 ‘예수’가 언제나 그렇듯이 ‘구원’의 상징이라면, ‘우시장의 예수’는 ‘구원’을 꿈꾸면서도 생활의 굴레 안쪽에서 서성이는 ‘권태로운’ 나의 상징쯤이 될 것이다. 이처럼 신종호의 ‘현실’은 자신의 ‘견고한 의지’를 실현하는데 장애, 또는 방해물로 작용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는 시인의 자의식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의 반증이며, 동시에 그만큼 그의 공간들이 부정적인 성격을 가짐을 의미한다.
집이 떠나갔다.
아버지가 가신 지 딱 삼년 만이다.
아버지 사십구재 지내고 나자,
문득 서까래가 흔들리더니
멀쩡하던 집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자리보전하고 누워 끙끙 앓기 삼년
기어이 훌훌 몸을 털고 말았다.
나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렇듯 날씨 매운 날 가시는가,
손끝 발끝이 시려왔을 뿐이다.
실은 그날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숨소리 끊기자 모두 다 빛을 잃었다.
아버지 손때 묻은 재떨이와 붓, 벼루가
삭기 시작했고 문고리까지 맥을 놓았다.
하여 사람들은 집이 떠나감을
한 세계가 지는 것이라 하는가.
두 손 모두어 경배하고
나이 마흔넷에 나는 집을 떠났다.
―「집이 떠나갔다」 전문
정우영의 이 작품에서 공간은 그 대표적 이미지로 ‘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집이란 가족구조의 외화된 표현에 다름 아니므로 더 넓게는 가족이라는 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의 표면을 따라가면, ‘집이 떠나갔다’라는 외연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는 내포가 한 짝을 이루고, 이짝은 다시 ‘집이 무너졌다’라는 밖과 ‘가족이 해체되었다(아버지 중심의)’는 안으로 다시 연결되고, 끝으로 ‘나는 집을 떠났다’ 곧 ‘내가 가족의 중심이 되었다’라는 짝으로 이어진다. 공간적 표상으로서의 ‘집’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점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끝이 시인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의미로 시의 초반부의 ‘아버지’의 의미와 다시 접속하는 순환의 구조를 형성한다. 정우영의 이번 시집에서 이 ‘순환의 구조’가 바로 그의 현실인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지난날의 ‘자기’, ‘자신’, ‘자아’라는 경계를 허물고 그 바깥을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시인이 밖으로 흘러넘쳐 섞이고자 하는 시작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금세기 ‘지금-여기’의 문화적 코드가 ‘퓨전, 하이브리드, 크로스 오버’ 등 분리가 아니라 융합의 용어들임을 부정할 수 있다. 이번에 살펴본 세 권의 시집은 그 지향점에서 매우 깊은 그러나 건널 수 없는 것은 아닌 협곡을 드러낸다, 정우영의 작품세계가 무의식이나 의지적으로 현실을 조정하려는 태도보다는 함께 상생하려는 모습을 드러내고, 신종호의 작품세계 또한 무의식의 세계보다는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의지적으로 조정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강우의 작품세계는 집요하게 무의식의 세계를 향하면서 의식이나 현실을 일그러진 무엇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들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는 읽은 사람들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이 자리에서 독자들을 향해 발언할 수 있다면, 앞에서 제시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우스꽝스러운 총체성’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깊이 고민하자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어떤 ‘상흔의 총체’이고, ‘의지의 결산’이며, ‘이상에의 열정’ 이 모두가 뒤죽박죽 섞여 끝없이 ‘사건’을 빚어내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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