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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서평/이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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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작과비평사, 2005)
이장욱,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 2005)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이현식
1.
아마 한국 문학이 갖고 있는 문화적 영향력이 1980년대 정도만 되었더라도 달려라, 아비의 작가 김애란은 문단 안팎의 주목을 한껏 받았을 것이다. 2005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연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 한 이 작가에게 선배 문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권위 있는 문예지들이 그 권위가 무색하게 그의 작품을 앞 다투어 싣고 있다. 이미 노쇠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우리문학은 24살에 첫 작품을 발표하고 26살에 처녀 작품집을 낸 이 작가로부터 어떤 원기를 회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듯하다. 24살이란 나이는 오정희가 22살에 등단하고 신경숙이 23살에 등단한 사정을 감안하면 결코 어리다고 말할 수 없는 데도, 80년생이라는 작가의 출생 연도가 그를 평하는 자리마다 거론되는 것을 보면 역시 한국문학이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김애란이 젊기에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젊은’ 한국문학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달려라, 아비가 갖고 있는 새로움이 있기에 그럴 것이다.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한 이장욱의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간 시를 써온 문인이 소설을 통해 새로운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도 주목할 바이지만 심사평들은 한결같이 이 소설의 신선함과 새로움을 지적하고 있다.
어쨌거나 2005년 한국문학은 개성 강한 신인을 맞이하는 축복을 누렸다. 그렇지만 그 새로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우리는 이런 새로움을 한국문학, 나아가 우리 문화의 창조적 상상력으로 발전시켜 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차례이다. 이 글은 그런 고민의 일단을 두서없이 끄적거려본 메모일 뿐이다.
2.
달려라, 아비가 주는 새로움은 매우 근본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달려라, 아비 이전의 한국문학과 이후의 한국문학이 구별될 수 있을 만큼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가 과거의 한국문학이 보여주었던 세계와 달라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상(李箱)이 「날개」와 「오감도」를 들고 1930년대 한국 문단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경악했던 것과 비슷하다. 혹은 김승옥(金承鈺)이 1962년 「생명연습」이라는 작품으로 한국 소설계에 가했던 충격파와도 맞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말의 바른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설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달려라, 아비가 주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문학이 이제껏 갖고 있던 온갖 종류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한국문학은 그것이 근대적인 문학제도로 존재하는 시기부터 이런저런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은 어떤 가치 평가를 전제하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강박관념이라는 말에 무슨 부정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근대사가 흘러온 과정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한국문학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근대 세계로의 주체적인 이행을 완수하지 못한 대신 제국주의에 의해 굴절된 근대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 권력 아래에 오랜 시간 시달려 오고 저항해 온 것이 한국문학이었다. 그렇기에 ‘민족문학’으로 통칭되는 한국문학 고유의 성과를 이루기도 했지만 여러 이념적, 미학적 강박관념에 붙잡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지칭하고 있는 강박증이나 강박관념이라는 다소 애매한 규정은 엄밀한 실증과 분석에 바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근대사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한국문학의 특징적인 경향성을 범박하게 가리키기 위함일 뿐이다. 강박관념이라고 표나게 지적하는 이유는 다른 나라의 문학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우리의 문학작품에서 특정한 이념적, 미학적 요소들이 과잉되게 표출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거기에도 개인마다 시대마다 그리고 미적 지향마다 상대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강박관념이란 말도 어떻게 보면 미적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긴장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이 갖는 고유의 성격 가운데에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 계몽주의 문학이나 민족주의문학, 프로문학, 친일문학, 그리고 모더니즘 문학까지 우리 문학에는 어떤 강박증이 있다. 해방 직후도 마찬가지이다. 반공주의문학이 그렇고 ‘순수문학’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순수문학’이 서구문학에서 지칭하는 순문학(belles-lettres)과 의미가 다르다는 점에서도 근대 한국문학은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다. 70, 80년대 민중․민족문학, 90년대 신세대문학과 포스트모던 문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은 이념적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비단 정치적 이데올로기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계층․전통에 붙들려 있는 문학들이 적지 않으며, 아닌 것 같지만 실은 특정한 강박관념의 역편향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는 문학도 적지 않다. 80년대 민중문학의 반발로 나타난 90년대 신세대 문학 역시 그런 강박관념의 소산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런 강박관념들은 미학적 경향과 방법에서도 완강하게 나타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축으로 한 미학 사상과 이에 토대를 둔 여러 기법과 형식들이 그것이다. 이들 사이의 자유로운 넘나듦의 전통이 우리 문학에는 매우 취약하다. 황석영의 손님이 리얼리즘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환상적인 기법을 도입했다고 해서 평론가들에게 주목받은 적이 있는데, 이런 사실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우리 문학의 옹색함을 반증하는 사례다. 사상과 이념, 미학을 둘러싼 진영(陣營) 논리가, 오랜 시간 우리문학의 강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강박관념처럼 작동하는 것이 한국문학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바로 그런 점에서 기존의 한국문학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집은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문법과는 다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구가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면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정치적 미적 이념과 방법 면에서 그의 소설은 어느 한곳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최원식이 말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 한가운데 김애란이 서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냉소적인 것 같되 따뜻하며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세심하다.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에 긴박되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과장되게 해체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도 그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질서와 도시적 삶의 익명성을 예리하게 묘파해낸다. 문장은 경쾌하되 가볍지 않고 우리의 상식과 통념의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맛도 갖고 있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무슨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이니 하는 구분 같은 것은 애당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달려라, 아비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건강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박민규의 그것보다, 혹은 정이현이나 김윤영의 그것보다 더 발본적으로 새롭다. 아래 인용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관찰하고 표현하고 있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 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 사러 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 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달려아, 아비 33면)
익명성이 보장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이면, 그리고 그것을 든든하게 유지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질서가 24시간편의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위의 인용문 안에는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획일성과 평균성을 무의식적으로 강요받으면서도(우리는 상품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다) 삶의 다양성은 기가 막히게 숨겨진(혹은 숨기고 싶은) 세계가 바로 우리의 일상임을 위 인용문은 명징하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낸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달려라, 아비에는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없는 결핍된 가족, 자식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부모들, 겉으로는 부모를 원망하는 자식들이 등장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가족은 해체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정쩡한 가족 이데올로기로 갈등을 얼버무리는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가족은 없었던 것처럼 주인공들이 과잉된 고독의 포즈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애증의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거나(「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 윤리의 상징을 거둬내고 하나의 초라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달려라, 아비」,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화해를 시도한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 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달려라, 아비 27, 28면)
달려라, 아비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맺는 이런 저런 관계의 다양함과 그 이면들을 날카롭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이 택하고 있는 소재들이야 색다를 것이 없지만, 그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보여주는 방식은 아주 색다르다. 그리고 그 색다름 안에는 기존의 통념과는 거리를 둔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 진실성이 엿보인다. 한국문학은 이제 달려라, 아비를 통해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3.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은 작가의 명민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플롯을 엮어가는 솜씨가 보통 이상이다. 이야기로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장점을 십분 살려낸 작품이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읽다보면 왜 소설이 근대 문학의 총아로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초점 화자를 교체해 가며 동일한 사건을 둘러싸고 겹쳐지는 삶의 다양성을 드러내면서도(이런 기법은 이미 동양권에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실험한 바가 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긴박감을 더해주고 있다. 지하철 역 구내에서 발생한 연속 자살(엄밀하게 말하면 자살은 아니지만 자살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자살) 사건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되짚어오는 추리기법을 활용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고 있다. 우연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어떻게 쇠사슬처럼 이어져 있는가를, 사건에 관여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과 교직시킴으로써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진중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플롯을 구성하는 장인적인 능력은 인정되지만 정신의 새로움을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게다가 플롯을 구성해내는 재능 역시 이미 우리가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본 바와 같이 그렇게 새로운 영역은 아니다. 또한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의 플롯이나 발상은 그렉 막스(Greg Marcks)가 감독한 영화 <11시 14분(원제 pm 11:14)>과 매우 흡사하다. 갑작스런 죽음들이 불과 몇 분 안에 일어나고 그것을 둘러싼 복잡한 매듭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지면서 관객들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이 영화는 이미 그 시나리오의 정교함으로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은 바가 있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역시 내용은 다르지만 발상과 구성이 유사해서 소설을 읽으면서도 혹 작가가 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물론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된 게 2005년 6월이고(제작 연도는 2003년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이 같은 해 10월이므로 그런 혐의를 씌우기는 어렵다. 설령 작가가 이 영화를 미리 보고 거기에서 발상을 빌려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놓고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준은 아니다. 발상이 유사할 뿐 내용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발상이란 것도 저작권을 거론할 정도로 이 영화감독만의 독창적 영역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다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티프를 살려 내용을 논리정연하고 세밀하게 이어간 장인적 솜씨는 작가의 노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新人)은 정신의 새로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정 신인이라 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뛰어난 소설이기는 하되 새로운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4.
기력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문학에 재생의 기운을 불어넣어 줄 신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문학의 큰 축복이요 행복이다. 그런 신인들의 존재는 우리 문학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살아있는 징표이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그런 점에서 ‘벼락같이 내린 한국문학의 축복’이다. 물론 달려라, 아비가 흠결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을 파고드는 예리함은 있지만 우람한 자기만의 서사 세계를 구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그 가능성을 이 작가에게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이장욱만이 갖고 있는 미덕 역시 충분히 상찬 받을 만하다. 앞에서 이런저런 비판을 해대기는 했지만 이런 정도의 단단한 틀로 한 편의 장편을 이끌어가는 재능은 오늘 우리 문학에서 충분히 기대할 만한 기예(技藝)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그가 보여주는 세계 역시 그렇게 단순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가 단순히 장인적 재능만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기대를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쇄잔한 한국문학에 새로운 활력이 될 만한 후속작을 기대한다.
이현식․
1966년 인천 출생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등단
․저서 문화도시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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