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문화산책/류상옥
페이지 정보

본문
문․화․산․책
【연재】원작이 있는 영화 ⑧
윌리엄 버로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네이키드 런치>
류상욱|영화평론가
1. 윌리암 S. 버로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구스 반 산트의 1989년 영화 <약국의 카우보이(Drugstore Cowboy)>에는 맷 딜런이 연기하는 젊은 마약중독자에게 근엄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 노신부가 등장한다. 그 노신부 역할을 한 배우는 다름 아닌 소설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의 작가인 윌리엄 S. 버로스였다. 그는 그 자신이 마약중독자였고 동성애적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약국의 카우보이>에서 신부로 등장하는 것은 좀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전방위적인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리 이상하게 보일 것도 없으리라.
그의 대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네이키드 런치」는 1991년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영화화가 불가능한 텍스트로 평가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은 일정한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되는,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도전을 했다. 캐나다의 이 영화감독은 1975년 첫 장편인 <파편들(Shivers)>에서부터 인간의 기이한 욕망과 괴기스러우면서 차가운 이미지를 영화에 담아내는 호러-SF 장르의 철학적 경지를 개척한 작가라는 평가에 걸맞은 시네아스트이다.
세르주 그륀버그의 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는 1991년에 찍은 사진이 한 장 실려 있다. 그것은 윌리암 S. 버로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신기하게 닮은 이 두 사람의 만남, 이것의 결과가 바로 영화 <네이키드 런치>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크로넨버그에게 이 소설은 매우 현대적으로 읽혀졌다. 또 그것은 반유대주의가 없는 셀린느의 소설처럼 보였고, 부인이 없는 랭보의 시였으며, 그림의 거래가 없는 게르트루드 스테인의 작품 같았고, 읽을 수 없는 난해함이 없는 조이스나 파운드의 작품이었다. 미국적인 동시에 보편적이었고, 스위프트를 경유해서 카프카에 이르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영화 <네이키드 런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원작이 있는 영화’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이 작업은 한 소설이 영화로 옮겨진 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윌리암 S. 버로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정신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탐구한 결과이다. 윌리엄 S. 버로스 자신은 1991년 크로넨버그의 영화화 결정에 부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영화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설이 대폭 각색된 데 대해서도 매우 관대한 입장을 밝힌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레이몬드 챈들러는 한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할리우드가 당신의 소설에 대해 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내 소설요? 왜요, 할리우드는 소설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소설은 그냥 책장 위에 놓여 있을 뿐이죠.” 또 이렇게도 말했다. “소설 원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별개의 작품인 셈이지요. 제가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와 크로넨버그 감독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윌리암 S. 버로스의 말처럼,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 그러니 어떤 소설의 열혈독자들은 영화로 각색된 텍스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위대한 소설가와 영화감독이 어떻게 창조적으로 대화하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감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윌리암 S. 버로스와 소설 「네이키드 런치」
이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은 일단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그것은 일반적인 소설의 내러티브 구조를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라는 화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약중독에 대한 병에 대해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마약에 대한 임상기록이 펼쳐지는 것이다. “마약은 ‘사악한’ 바이러스의 기본 구조식을 보여준다. 욕구의 대수학. ‘사악한’ 얼굴은 항상 절대적인 욕구의 얼굴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마약중독자이거나 동성애자, 아니면 변태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마약의 종류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마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마약중독은 이 소설에서 단순한 병적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 조건의 은유이다. 마약중독자는 모든 인간이 어떤 종류의 중독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챈다. 그의 신체는 생물학적인 함정에 빠지게 되고 사회는 권력을 동원해 중독을 통제한다. “마약 바이러스는 오늘날 세계에서 최우선적인 공중 보건의 문제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마약문제가 단순한 개인뿐만 아니라 대중의 히스테리에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은 ‘인터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제약을 벗어난 중간적 장소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공간은 미국이나 남아메리카, 탕헤르 등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마약중독에 대한 작가의 탐구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버로스는 인터존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정치적 음모를 분석한다. 권력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대중을 조작해 지배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에 과학자들이 생산해내는 과학적 지식이 동원된다. 벤웨이 박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상징체계의 조작자이자 조정자이며, 심문과 세뇌와 통제의 모든 면에서 전문가이다. 이렇게 권력과 지식의 공모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을 억압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단순한 마약중독의 기록으로 보면 안 된다.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전망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약과 섹스로 점철되는 이 극단적이고 무모한 방종의 어지러운 기록에도 역사는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 버로스는 이 작품을 통해 세계사를 유린한 파시즘과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드러낸다. 관료주의는 국가의 모든 곳에 뿌리를 내리고 악성으로 변하기도 하는 암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드러나는 가장 외설적인 것은 바로 사형제도일 것이다. 버로스는 이 소설에서 사형제도에 비판에까지 나아간다.
형식적인 측면에 있어서 「네이키드 런치」의 새로운 비전은, 이 소설의 실험적 형태가 회화와 사진, 영화 그리고 재즈에서 왔다는 데에 있다. 버로스의 기본적인 글쓰기 테크닉은 시각예술에서 사용되는 콜라주나 몽타주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의 각 부분은 독립적인 하나의 조각들이면서 동시에 몽타주가 되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그 몽타주는 독백과 대화, 플롯 그리고 판타지와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마치 재즈에서의 즉흥연주처럼 이어진다. 때로는 길게 또 때로는 짧게 이어지는 그 몽타주는 그 안에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포함한다.
이 소설에도 구조라는 것이 찾아질 수 있다면 그것은 팽창과 수축의 변증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들은 병치되는데 그것들 사이의 논리적 연결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흥적인 변주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버로스가 그러한 몽타주와 즉흥적인 구조를 선택한 것은 일단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약물에 의존해서 글을 쓰기도 했던 그는 몽환적인 의식을 글쓰기로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독자의 의식을 팽창시켜 텍스트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소설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이지만, 다른 예술에서 차용된 기법으로 매우 독특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텍스트를 영화로 옮길 때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일까? 크로넨버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3.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네이키드 런치>
윌리암 S. 버로스의 작품세계와 가장 가까운 영화감독을 꼽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될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정신적 ‘스승’은 윌리암 S. 버로스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로 크로넨버그는 그 스승의 작품세계를 오래 연구했다. 크로넨버그는 단편영화를 만들 때부터 독특한 실험적 취향과 표현주의적인 건축공간을 활용했다. 그의 초기작 <열외인간(Rabid)>는 한 여성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로 변해가고, 그녀에게 물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종의 호러영화이다. 그런데 그 여성의 육체에 생긴 상처는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데 그곳에서 남성의 성기와 같은 기관이 나와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크로넨버그는 영화 경력의 초기에서부터 기이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스캐너스(Scanners)>는 텔레파시가 무기가 되는 돌연변이들을 등장시킨다. <비디오드롬(Videodrome)>은 인간이 기계로 변하는 맥루한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플라이(the Fly)>는 이제 인간이 파리로 변하는, 본격적인 곤충 호러영화이다. <데드링거(Dead Ringers)>는 샴쌍둥이의 이미지를 영화에 끌어들여 근친상간과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제기한다. <크래쉬(Crash)>는 자동차의 교통사고로 성적인 절정감에 이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해부한다. 이렇게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은 어쩌면 윌리암 S. 버로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주제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예술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끝까지 간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는 소설에 비해서 더 많은 테크놀로지와 예산의 제약을 받지만, 그 주어진 조건 내에서 크로넨버그는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한다.
윌리암 S. 버로스는 마약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바이러스’에 관한 영화들이다. 바이러스는 현대인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굳이 에이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대에 창궐하고 있는 수많은 전염병을 생각한다면, 그 바이러스는 현대적 ‘악(惡)’의 메타포이다. 그 바이러스는 질병을 가져온다. 그 질병은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 크로넨버그의 주인공들은 바이러스성 질병에서 절대로 치료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 영화의 인물들이 결국 죽음을 맞는 것은 단순히 내러티브의 결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음울한 성격의 소유자들이고 나르시시즘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약물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환각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 <네이키드 런치>는 현실과 환각이 뒤섞인 세계이다. 이 영화에서 현실과 환각을 구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부질없다. (<로보캅>에서 기계-경찰로 나왔던)피터 웰러가 연기하는 윌리엄 리(William Lee)는 해충구제원이다. 원작의 ‘나’는 특정한 직업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직업은 윌리엄 S. 버로스가 1942년 여름에 시카고에서 해충 구제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에서 따왔다. 크로넨버그는 원작에 작가의 삶을 교묘하게 겹치게 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든다. 윌리엄 리는 바퀴벌레를 잡는 살충제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없어진 약을(주디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아내가 가슴에 주사하는 것을 발견한다. 살충제가 마약대용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내는 친구들과 그룹섹스를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윌리엄 리는 환각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윌리암 S. 버로스의 삶에서 따온 것이다. 버로스는 조앤 볼머(Joan Vollmer)라는 여자와 만나고 동거를 시작한다. 이때는 1946년인데 버로스는 모르핀 시레트를 직접 자신에게 주사했고 마약이 일으킨 환각 증세를 경험한 후 중독에 빠졌다. 1951년 파티에서 연극 <빌헬름 텔>을 공연하던 버로스는 실수로 조앤을 총으로 쏴 죽인다. 이것 역시 크로넨버그에 의해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된다.
윌리엄 리는 벤웨이 박사를 만나고 인터존이라는 곳으로 가 보고서를 쓰라는 제의를 받는다. 영화는 기이한 첩보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터존은 이슬람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뉴욕에서 버스를 타고 올 수 있는 곳으로 나온다. 그 인터존은 설명되지 않는 음모로 가득 찬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보이는 것들이 윌리암 리의 환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힘들다. 윌리암 리가 사용하는 클라크-노바(Clark-Nova)라는 이름의 타자기는 기계이지만 곤충으로 변한다. 그리고 윌리암 리에게 첩보원(agent)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이 곤충 이미지에 대한 강박은 윌리암 S. 버로스와 크로넨버그가 공유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크로네버그는 인간이 파리의 유전자와 결합해서 곤충으로 변하고 마는 <플라이>를 만들었겠는가. 타자기는 거대한 딱정벌레처럼 보이고, 인터존에서 만난 조앤이라는 여자는 원래 지네였다고 밝혀진다.
윌리암 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윌리암 S. 버로스는 작가란 단순하게 “기록하는 기계”라고 말했다. 이것 역시 크로넨버그와 공유하는 사유이다. 이 두 사람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기계이다. <비디오드롬>은 인간의 몸이 텔레비전과 합체되는 것을 보여준다. 비디오테이프는 인간의 배가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 하나의 기관으로 변한다. 인간의 몸과 기계가 결합하는 것은 단순한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성적이고 환각적인 관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크래쉬>의 인물들은 교통사고가 난 자동차와 섹스를 한다. 기계를 통해서 성적인 만족을 얻는 것이다. 또한 자동차라는 기계의 충돌로 극대화된 오르가즘을 느껴보려 한다. <엑시스텐즈(eXistenZ)>에 이르면 인간의 몸 자체가 게임기계가 된다. 게임기에 연결된 탯줄처럼 보이는 줄이 기계와 인간을 접속시킨다. 그러면 바야흐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윌리암 S. 버로스의 소설은 일견 변태적인 섹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동성애는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도 동성애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키키라는 젊은이와 윌리암 리는 동성애 관계를 맺은 것처럼 묘사되고 줄리앙 샌즈가 연기하는 스위스인 이브 클로케는 키키와 강제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맺으려 한다. 조앤 프로스트와 가정부 파델라(결국 이 가정부는 벤웨이 박사로 밝혀진다)의 관계 역시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원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동성애 관계의 장면에 거대한 곤충을 등장시켜 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이 두 예술가에 있어 불가능한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니 동성애적 관계의 묘사는 그렇게 센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작가의 세계에서 여성은 바이러스 자체는 아니지만 적대적인 존재이거나 돌연변이 혹은 다른 종족에 속해 있다. <데드링거>에서 주느비에브 뷔졸드가 연기하는 여배우 클레르는 질에서 자궁에 이르는 관이 세 개인 일종의 돌연변이 여성이다. <종족(the Brood)>에 등장하는 여성은 딸을 위협하고 남성과 결합 없이 기형아들을 만들어내는 괴물 같은 존재이다. 크로넨버그의 여성은 괴물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을 거부한다. <플라이>에서 지나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기자 베로니카는 파리-인간이 된 세스 브런들(제프 골드블럼)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낙태하려 한다. 그리고 세스가 만들어낸 공간이동기계에서 실험하는 것도 거부한다. 인위적인 자궁을 상징하는 그 기계를 통한 새로운 탄생도 거부하는 것이다. <비디오드롬>에서 데보라 해리가 연기하는 니키는 맥스(제임스 우즈)를 텔레비전 안으로 끌어들인다. <네이키드 런치>에서 조앤 프로스트는 윌리엄 리의 적대적인 에이전트이고, 파델라는 벤웨이 박사가 변장한 여성이다. 결국 크로넨버그적 세계는 여성혐오의 성격을 갖는다. <데드링거>의 쌍둥이 의사들은 어릴 때부터 여성을 고문하려는 욕구를 가졌고, 성인이 된 후 그들은 여자를 공유한다. 그들이 가진 산부인과적 지식은 여성에 적대적인 그들에게 도구로 봉사한다.
그렇다고 이 두 작가의 세계가 마약중독과 환각, 섹스, 그리고 여성혐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두 작가 모두 미국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버로스는 소설에서 “미국은 젊은 땅이 아니다. 늙고 더럽고 악하다. 이주민들이 도착하기 전은 물론 인디언 이전에도, 악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썼다. 크로넨버그 역시 영화에서 윌리암 리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반복한다. 그에게도 미국은 부패와 퇴폐와 퇴화의 땅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데드 존(Dead Zone)>에서 묘사되는 미국 정치의 실상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미국 대통령은 세계전쟁을 일으키려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결국,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는 윌리암 S. 버로스의 소설을 다양한 층위로 새롭게 각색한 텍스트이다. 그것에는 원작의 내용과 원작자의 삶과 감독의 세계관이 화학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버로스의 사유를 충실히 계승한다. 버로스에게는 글쓰기에 대한 미친 듯한 욕망이 있었고, 크로넨버그는 그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해낸다. 또한 그들에게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얼마나 강력한 예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면서
이른바 정상적인 것을 선호하는 독자나 관객이라면, 버로스와 크로넨버그의 작품세계를 정서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그들의 작품들을 평가할 수는 있어야 한다. 윌리암 S. 버로스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는 진정한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적인 문학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또한 그의 자유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이러한 버로스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크로넨버그는 거기에 자신만의 기괴한 상상력을 덧붙인다. 이들 모두 소설이나 영화라는 매체적 경계 안에 머물지 않았고 다른 예술의 성취에 민감했다.
소설 「네이키드 런치」는 문자로 이루어진 종합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네이키드 런치>는 버로스적 세계에 보들레르와 랭보, 그리고 카프카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텍스트라고 평가받는다. 또한 그것은 매우 철학적인 메지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육체, 기계, 섹스, 여성, 괴물, 마약, 환각, 죽음 등의 크로넨버그적인 개념들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버로스와 마찬가지로 크로넨버그는 전혀 새로운 예술을 완성해낸다. 그것은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어떤 참조사항도 허락하지 않는 독창적인 것이다. 만일 그 세계에 매혹된다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세계는 경계가 허물어진 끝없는 상상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버로스의 소설을 읽고,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리라. 그것은 중독될 만한 가치를 지닌다. 또 그것이 바이러스처럼 세상에 퍼지는 것을 바라고 싶은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류상욱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졸업
․저서 호모 시네마쿠스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박사과정 수료
- 이전글21호(2006년 봄호) 문화산책/안시환 08.02.29
- 다음글21호 서평/임영봉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