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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2006년 봄호) 문화산책/안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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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2005년 한국 영화의 흐름과 관객의 선택
안시환|영화평론가
공중파를 타고 시청자라는 익명의 다수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한국 영화 시상식의 결과는 지금의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과 평단의 일정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흥미롭게 느껴진다. 청룡영화제는 <말아톤>이, MBC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영화 대상은 <웰컴 투 동막골>이 각각 그 주인공이 되면서 대중적 성공이 예술적 평가의 잣대임을 선언한 것이다. 양적 성공이 질적 평가를 대체하는 이러한 경향 속에서 해외 영화제에서 높게 평가받았던 김기덕과 홍상수로 대변되는 작가주의 영화들인 <활>과 <극장전>은 철저하게 팽을 당하고 말았다. 실제로 이 두 작품은 감독상과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대중과의 호흡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절대적인 미덕처럼 여겨지는 지금의 풍토에서, 홍상수나 김기덕의 작가주의적 작품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러티브의 구조적 실험이 돋보인 정지우의 <사랑니>, 민감한 정치적 소재를 야심차게 건드렸던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 등은 정당한 평가의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이 글은 이러한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대중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의 결을 따라 나아가고자 한다. 먼저 대중성과 예술성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면서 ‘상업적 작가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일련의 감독들(허진호, 박찬욱, 이명세, 김지운)을 중심으로 그들 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위험성을 진단하고, 2005년 최고의 흥행작들인 <웰컴 투 동막골>과 <말아톤> 등의 작품들을 통해 그와 함께 호흡했던 대중들의 집단적 정서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 이 글의 궁극적인 관심사이다. 그에 더하여 2005년 등장한 신인 감독들에 대한 검토까지, 이렇게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상업적 작가주의, 시각적 스타일의 나르시시즘
지금 한국 영화의 호황 속에서 주목받는 감독들의 작품 성향을 두고 김영진은 ‘제3의 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제3의 길’이란 장르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도 않지만 자기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절충적 영화이며, 그 길을 가고 있는 감독들로는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즉 상업성과 예술성, 혹은 상업성과 작가적 태도가 적절히 조화된 이들 작품들은 일반적인 작가 영화나 상업 영화와 차별성을 지닌다. 물론 김영진의 이러한 주장은 좀더 엄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현재 이들 감독들에 대한 평단과 관객의 기대치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상업적 작가주의’ 감독으로 구분될 수 있는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이명세 등이 신작을 내놓으며 꽤 화려한 라인업을 구축했지만, 이들 작품 대부분이 전작들에 비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어쩌면 이들 감독들은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평단의 지지뿐만 아니라 흥행이라는 관객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작가 감독보다 더 불안정한 지반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들 감독들이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전략 중 하나가 스타 캐스팅이라는 점에서 허진호의 <외출>에 주목할 수 있겠다. 허진호는 이 작품에서 관조적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핸드 헬드 촬영을 통해 순간적으로 새겨졌다 사라지는 인물의 표정을 발 빠르게 포착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문제는 허진호 감독의 변신이 배용준이라는 배우와 충돌할 때 발생한다. 활자 텍스트가 아닌 영화는 구체적인 ‘배우-인물’에 의해 감정이 표출되어야, 그것이 캐스팅이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외출>의 배용준은 시종일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영화 속 인수(배용준)와 서영(손예진)이 걷던 해변가의 뒤쪽에서 강하게 몰아치던 그 파도의 물결이야말로 인수가 느끼는 심리적 혼란 그 자체였고, 배용준이 표현해야 하는 인물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배용준은 자신의 한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을 부드러운 표정으로 일관함으로써 극중 인물인 인수를 삼켜버린다. 영화에서 인물의 감정선이 적절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행동이 표정을 대체한 롱 쇼트였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담벼락에 인수가 눈을 던지던 장면을 상기하라).
배용준과 인수가 부조화되면서 삐걱거리는 <외출>의 한계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결합하려는 시도 속에 내재된 근본적인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외출>의 국내 흥행 실패를 단지 배용준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외출>의 흥행 실패는 파격적인 소재가 멜로드라마에 대한 관객의 장르에 대한 선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외도하던 두 남녀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서 만난 그들의 배우자끼리 또 다른 사랑에 빠지는 설정에서, 텍스트 내적으로는 그 이행 과정에 대한 감정적인 동기가 충분히 부여되어 있지만, 관객은 그러한 파격적 설정 자체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출>의 흥행 실패가 영화의 극적 설정과 관객의 장르에 대한 기대 간의 부조화에 그 원인이 있다면, 김지운․이명세․박찬욱의 작품들은 감독들의 욕망과 관객의 욕망이 서로 충돌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감독의 작품들은 모두 내러티브에 의해 구축되는 이야기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관객의 영화적 경험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먼저 이명세의 <형사 duelist>는 내러티브에 구축되는 스토리 층위를 극소화한 작품이다. 영화 촬영 전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구분하고 드라마를 하려면 왜 영화를 하느냐 등의 이미지의 중심의 영화를 표방했지만, 결국 그 대가는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이었다. 정치적 혁명을 꿈꾸는 관료(송영창)의 헛된 야망과 그를 거부할 수도 없지만 순응할 수만도 없는 그의 상징적 아들인 슬픈 눈(강동원)의 심리적 딜레마가 드러나고, 이들과 대립하면서 음모를 밝혀야 하는 형사들의 직업적 난관이 드러나야 하며, 남순(하지원)과 슬픈 눈의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선까지 표현해야 한다고 했을 때, <형사 duelist>의 내러티브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다만 이명세는 스토리의 기본적 골격만을 내러티브를 통해 제시하고, 그 속에 드러나야 하는 인물의 심리적 갈등이나 감정을 시각적 이미지의 운동으로 대체해버린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보아야 하는 진짜 영화 관객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감독의 욕망과 관객의 욕망이 일치할 수 없는 것이었고,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것과 관객이 보는 것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결국 일반 관객에게 <형사 duelist>는 러닝 타임이 너무 긴 뮤직 비디오에 가까웠을 뿐이다.
내러티브의 풍요로움을 욕망하는 관객과 시각적 이미지의 강렬함을 욕망하는 감독 간의 치명적 거리라는 <형사 duelist>의 한계는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에서도 발견된다. <달콤한 인생>은 일반적인 필름 누아르에 등장하는 인물 관계를 그대로 복사한다. <길다>(찰스 비도, 1946)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듯, 외설적인 욕망의 주체인 ‘아버지’와 그를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징적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에 동시에 걸쳐있는 ‘팜므 파탈’이라는 삼각관계는 고전적 필름 누아르 내러티브의 기본적인 골격이다. <달콤한 인생>은 이 뼈대가 내러티브의 전부일 만큼 빈약한 스토리를 지닌다. 또한 <달콤한 인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신체적 복수를 가하는 인물들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도, 그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형성된 이유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다. 영화의 엔딩에서마저 비밀은 밝혀지지 않는다. 밝혀지지 않는 진실의 공백이 인생의 달콤함일 수 있으나, 이는 관객이 원하는 달콤한 영화는 아니었다. 내러티브의 풍요로움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시각적 이미지의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이들의 시도는 2005년 관객들의 욕망과는 멀리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김지운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앞세우면서 등장했던 박광수나 장선우 등의 ‘코리안 뉴 웨이브’ 세대와 달리, 시네필적인 감수성을 앞세우는 상업적 작가주의 감독들(혹은 최근 데뷔하는 젊은 감독들)의 영화적 성향을 징후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감독들은 스타 캐스팅과 장르의 품안에서 대중성을 확보한 후, 내러티브보다는 시각적 스타일의 과시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뽐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시각적 스타일에 대한 그들의 집착이 영화 형식에 대한 고민이 아닌 단지 장식주의적 전시(展示)에 불과했던 2005년의 한국 영화를 거론하면서, “관객의 눈이 시각적 풍요로움에 빠져 있을 때, 의식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각적 물신화”를 우려했던 정한석은 상업적 작가주의가 빠질 수도 있는 함정을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인과율의 선형적 구조 대신에 선택한 시각적 스타일의 과잉이 관객의 외면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쉽게 간과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은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이다. 박찬욱은 스타 캐스팅을 통한 홍보뿐만 아니라, 깐느영화제 수상을 통해 확보된 자신의 예술성까지도 마케팅 전략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는 감독이라는 면에서 상업적 작가주의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물론 박찬욱은 앞으로도 대중적 흥행의 토대를 구축한 뒤 그 위에 자신의 작가적 세계관을 덧입히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그는 봉준호와 함께 상업적 작가주의를 대표하는 감독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척 불친절한 영화인 <친절한 금자씨>는 ‘모던 시네마’에서 즐겨 사용한 ‘거리 두기’ 장치, 즉 인과율적이고 선형적인 서사를 의도적으로 파편화시키고, 이전의 자기 작품을 인용하는 자의식적 표현, 여러 시각적 장치를 통해 영화가 스스로 영화임을 고백하는 자기 반영성까지 활용하는 등, 관객의 몰입을 차단하기 위한 여러 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문제는 역시 그의 이러한 시네필적인 영화적 표현이 관객과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가이다. 특히 그가 누리고 있는 독자적인 명성은 평단과 대중의 동시적인 지지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그는 어느 감독보다 위험한 토대 위에 서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평단에서는 비판과 지지가 공존했던 반면, 대중적으로는 박찬욱 매니아를 제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의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도 흥미롭게 한다. 실제로 <친절한 금자씨>가 앞서 언급한 <달콤한 인생>이나 <형사 duelist>와 유사한 대중적 한계를 지니면서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텍스트 자체의 매력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외적으로 작용한 산업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의 명성을 확인시켜줌과 동시에 그가 서있는 토대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의 욕망, ‘즐길 만한 고통’과 조우하기
<말아톤>(정윤철),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너는 내 운명>(박진표)은 2005년 대표적인 흥행작이다. 이들 세 작품은 그 소재와 장르 면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동일한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이들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는 달리 내러티브의 층위에서 자신들의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시각적 이미지는 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러한 특징을 흥행 여부에 대한 단선적인 인과관계로 환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일 수는 있으나, 2005년 관객들이 한국 영화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웰컴 투 동막골>을 보자. 영화 시작과 함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자막이 제시되면서, 영화의 소재를 명확히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들이다. 달리 말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들은 학살의 주범이었던 미군(스미스)과 그것을 동조했던 남한 군인, 그리고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북한의 군인들이라는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이 역사적 가정을 통해 또 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허구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했을 때, 궁극적으로 그 가정의 결과는 희생자의 위로가 아닌 가해자의 면죄부를 지향한다. 달리 말해, 자막으로 제시된 ‘학살당한 자’들의 고통(역사적 진실)은 영화적 허구 속에서 ‘학살한 자’들의 죄의식을 씻어내는 데 적절하게 봉사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동막골 폭격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이를 주장하는 미군과 이에 반발하는 남한군의 대립 속에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쁜 그들’과 ‘착한 우리’라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이분법을 제시하고, 모든 죄의 원인을 나쁜 그들(미군)에게 전가함으로써, 착한 우리는 죄의식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민간인 학살의 동조자이자 그 역사를 은닉하는데 ‘공조’했던 남한의 죄는 사라지고 추상적으로 제시된 미군의 잔인성만이 남는다. 물론 스미스의 눈물은 그런 미군에게도 휴머니즘적 각성의 여지를 남겨두는데 기여한다. 남과 북, 그리고 미군 군인들이 동막골 주민들의 순수함에 동화되면서 역사의 또 다른 차원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 <웰컴 투 동막골>의 진심이었겠지만, 동막골 주민들의 그 순수함이 마을 외부의 세계에 대해 눈과 귀를 막아버린 채 ‘감히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영화의 순수함이 깊은 성찰의 과정을 생략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감동이 역사의 고통을 즐길 만한 것으로 변형시킨 대가라는 점은 <웰컴 투 동막골>의 역사관을 ‘웰컴’ 하며 반길 수 없도록 한다.
<말아톤>은 최근 나온 한국 영화들 중에서 인과율에 가장 철저한 내러티브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자폐 마라토너인 초원(조승우)이의 마라톤 서브 3(sub 3) 달성 과정을 통해, 해체되었던 장애인 가족의 극적인 화해와 실패한 인생이었던 코치가 삶의 의욕을 새롭게 회복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다. 물론 장애인을 통해 찢겨졌던 가족애를 확인하는 것은 <레인맨>(베리 레빈슨, 1988)과 <제8요일>(자꼬 반 도마엘, 1996) 등의 영화에서 반복되었던 장애인 영화의 상투적 설정이고, 열정을 지닌 제자와 생활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욕을 되찾는 코치의 모습은 여러 학원 스포츠 영화의 관습이라는 면에서 <말아톤>은 그리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특별하지 않은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원이의 성공 드라마가 현재 대중의 욕망과 적절하게 조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초원이는 장애인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그럼으로써 현실의 암담함에 좌절해 있는 동시대 대중의 대리인이고, 때문에 그의 성공담은 장애인의 승리라기보다는 ‘일반인-관객’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에 가깝다. 이러한 면에서 초원이 어머니(김미숙)의 태도는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보여준다. 초원이가 달리고 싶어 달리는 것인지, 아니면 초코파이를 미끼로 하는 자신의 욕심이 낳은 결과인지를 두고 발생하는 어머니의 고민은, 초원이 스스로 달림으로써 ‘깔끔하게’ 해결된다. 결국 초원이의 춘천 마라톤 완주는 어머니를 포함한 일반인-관객을 위한 처절한 봉사이다. 달리 말해, 타자(어머니, 가족, 코치, 관객 모두)들이 죄책감 없이 격려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초원이는 자신의 욕망으로 스스로를 위해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초원이의 개인적 욕망 추구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위해 봉사할 때만이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결국 <말아톤>은 신체적 장애만으로 고통 받는 장애인에 대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즉 장애인이 사회에서 고통 받는 가장 중요한 원인인 사회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말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장애는 철저하게 신체 속에 머물러야 하고, 그는 이러한 신체적 장애만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웰컴 투 동막골>이 한국 전쟁을 둘러싼 구조적 맥락을 삭제함으로써 관객에게 순수함을 선물했듯이, <말아톤>은 장애인을 둘러싼 여러 사회적 제도의 한계를 삭제함으로써 초원이의 인간 승리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너는 내 운명>이나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중 몇 가지 에피소드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동성애 커플이나 가난한 부부의 에피소드들은 그것을 생산한 사회적 구조를 개인의 화해나 결합으로 봉합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적인 고통과 갈등이 화해로 도달하는 그 복잡다단한 과정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이 영화들이 고통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를 개입시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남다은의 지적은 2005년 흥행작들이 지닌 한계를 적절하게 들춰낸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의 경우에도 에이즈에 걸린 여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곳곳에 묻어나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지향하는 순수함이 농촌의 저개발(이는 어디까지나 농촌 정책의 실패일 뿐이다)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는 앞선 영화의 한계를 반복한다. 물론 이러한 농촌의 저개발을 순수함으로 포장하는 것은 <마파도>, <나의 결혼 원정기> 같은 2005년 농촌 영화의 일정한 패턴이기도 하다. 이처럼 2005년 흥행한 한국 영화는 고통의 원인을 삭제하거나 축소하여 순수하고 낭만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면에서 동시대 대중의 감수성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고통의 원인은 보지 않으면서 고통 없는 세상 꿈꾸기, 그것이 2005년의 대중의 문화적 감수성이었던 셈이다.
신인 감독들의 출사표 점검
단편 영화가 주목받으면서 연출부 생활을 생략(혹은 최소화하고)하는 신인 감독들의 등장은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말아톤>의 정윤철, <남극일기>의 임필성, <가발>의 원신연 등은 이러한 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단편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했던 단체인 ‘청년’ 출신으로 오랫동안 현장의 주목을 받았던 임필성(정윤철 역시 청년 출신이다)은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남극일기>를 내놓았고, <빵과 우유>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문제 의식을 표출했던 원신연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공포영화 <가발>을 선택했다. 먼저 <남극일기>는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특히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이 작품에서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 약점이다. 영화 속에서 남극이라는 공간이 실체적으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은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버즈 아이 뷰 쇼트 외에는 찾기 힘들다. 남극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해외 로케를 감행함으로써 막대한 예산이 투자된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남극의 실체를 경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이는 시각적인 표현에서만 발견되는 실수가 아니라 서사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인물들의 광기가 남극 탐험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적절하게 조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들의 트라우마로 그 원인이 넘어가면서, 다시 한번 남극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은 소외되고 만다.
<가발>의 원신연은 임필성과 정반대의 실수를 보여줬다. 가발이라는 소재가 해외 로케와 맞먹는 특수 제작비가 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일종의 맥거핀으로도 충분한 장치일 수 있다. 특히 <가발>의 근원적인 공포가 여동생을 시기하는 누이라는 인간 간의 관계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가발은 그러한 관계를 심화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신연은 이러한 소재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함으로써 스토리 자체를 무너뜨린다. 물론 이러한 원신연의 악수는 2005년 공포 영화들(<분홍신>과 <첼로>)에서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여고괴담 4-목소리>의 최익환은 이러한 소재주의적인 공포 영화보다 한 발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소리라는 소재의 독특함이 기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음으로써 아쉬움을 남겼다. 목소리가 주는 공포는 이 영화에서 그리 효과적이지 않았고, 때문에 영화는 공포 없는 공포 영화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들 신인 감독들의 데뷔작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선택한 소재의 효용적 가치와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오로라 공주>의 방은진과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은 이러한 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억울하게 죽은 딸에 대한 복수담을 담은 <오로라 공주>에는 장점 이상으로 단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복수의 대상들마다 그 처벌의 이유가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 정도의 잔인한 복수를 당할 정도의 죄였는가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약하다. <오로라 공주>가 취하는 전략은 그들과 죽은 딸과의 관계를 촘촘하게 직조하기보다는 그들을 악하거나 혐오스러운 인물로 추상화함으로써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관객이 그 살인을 승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로라 공주>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작품이 그 화법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라 공주>는 사회의 공적 기능이 마비된 현실 속에서 사적 복수에 의존하는 할 수밖에 없는 정순정(엄정화)의 모습을 통해 실패한 가부장 사회의 치부를 적절하게 노출시킨다. 그것이 정순정이 복수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자 목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딸의 복수극에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는 장면을 통해 정순정(엄정화)의 목표가 ‘복수-살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남편-가부장-공적 사회’로 확장될 수 있는, 목수가 되겠다던 형사 남편의 무책임과 무능이야말로 그녀가 분열적인 모성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다.
<오로라 공주>가 여성 감독이 여성의 입으로 가부장적 사회의 틀 속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문제를 말했다면,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 반대편에 위치한 작품이다. 사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준 군대 생활의 묘사는 특별한 것이 없고, 오히려 전형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은, 지금까지 군대 생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가로막았던 무의식적인 저항을 제대로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두 번의 자살이 있다. 첫 번째는 군대의 전형적인 고문관인 지훈(윤종빈)의 자살이고, 또 한 번은 휴가 나온 승영(서장원)의 자살이다. 문제는 이 두 자살이 끝내 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는 자살로써 분명히 메시지를 남기는데, 그 메시지는 끊임없이 차단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 속 태영(하정우)은 타고난 군인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예비군이기도 하다. 태영이 승영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 여러 핑계를 둘러대면서 회피하는 장면에서, 그 구체적인 이유는 삭제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일 것이다. 영웅담을 걷어낸 군대에 대한 진짜 기억은 언제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일 뿐이었고, 그것은 한국 영화의 배제의 대상이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이렇게 지금까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과감하게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 있다.
윤종빈의 이러한 시도가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과의 호흡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디지털 독립 영화였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04년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처럼, 그것은 일반 장편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소외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독립’이라는 딱지를 떼고 어떠한 성과를 보여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특히 윤종빈이 보여준 이러한 문제 의식은 2005년 흥행 경향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지금의 한국 영화를 평가하는 핵심이 대중과 어떻게 보조를 맞추느냐에 있는 것이라면, 작품이 아닌 윤종빈에 대한 지나친 평가나 섣부른 기대는 금물일 것이다. 2005년만큼 관객의 힘은 세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해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안시환
․동국대 영화과 박사과정 수료
․영진위 우수 논문상과 씨네 21 우수 평론상 수상
․씨네 21 등에 영화 평론 기고
․공저 한국 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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