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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특집/권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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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신자유주의와 문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리고 문화
권경우|문화평론가
1. 세계는 평평하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규정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단어가 가장 포괄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꼽힐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세계화’는 그 자체에 대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어도 세계화 과정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우리는 ‘세계화’라는 용어에 익숙해져 왔으며, 어느덧 세계화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대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계화’ 담론과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경제정책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이전에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관철하는 원리들과 다른 점은 경제 영역을 넘어서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자본주의가 처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위기를 새로운 전략으로 돌파하는 자본주의의 ‘변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고, 사회 전반적인 민영화와 사유화가 진행되는 거대한 흐름과는 반대로 사회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한 저항과 투쟁의 과정을 겪어왔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한 대중문화의 팽창과 IT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한국사회를 세계화 담론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이처럼 세계화의 물결이 계속 밀려드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원리가 강요되는 환경에 처해 있다. 최근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편이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서 필요에 따라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다. 개방과 자유․상대주의․다문화주의 등이 대표적이며, ‘세계화’ 역시 그러한 얼굴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동시에 거론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신자유주의’는 비판하는 진영에서 많이 언급하는 반면 정작 신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직접 거론하기보다는, ‘세계화 시대’나 ‘세계화 과정’ 등 ‘세계화’라는 용어를 이용한 합성어를 자신들의 논리로 내세우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자유주의는 그 자체가 이론적이고 정치적 혹은 경제적 입장이 명확한 반면, ‘세계화’라는 용어는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계화’라는 거대 담론이 ‘신자유주의’와의 잘못된 만남을 통해 증식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를 지향한다. 따라서 세계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가 보인다. 하지만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만으로 환원되거나 등치되지 않는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얼굴도 있지만, 전혀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위 ‘세계화’ 담론의 어려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중층적인 관계를 염두에 둠으로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관계는 결코 단일하거나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복잡성은 그 문화적 성격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경제적 혹은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 부문이 문화 부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른 ‘문화산업’이 문화와 경제의 가장 대표적인 통합영역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월 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현 정부를 가리켜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했다. 보수 우파의 ‘좌파’ 공격, 진보 진영의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공격에 대해 나름대로 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인터넷 댓글에서는 도대체 ‘좌파’와 ‘신자유주의’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를 달리 하면 ‘좌파의 상업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찌되었든 분명한 점은 신자유주의가 점점 그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의 스펙트럼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리트머스 용지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문화 부문은 세계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영향을 끼치는가를 더욱 정확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고 선언한다. ‘평평하다’는 말은 자본을 비롯한 흐름이 유연하고 자유로워졌음을 뜻하는 말이다. 국가와 지역, 시․공간 등 수많은 경계가 소멸되는 세계는 그의 말대로 객관적인 현실인가? 많은 학자들이 변화하는 세계를 말하면서 현실에 대한 적응을 말하고 있다. 현실이 나아가는 방향의 문제점이나 한계를 지적하고,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논리의 하나는 복잡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약육강식의 시대, 자본의 힘이 극대화되는 시대에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하고,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들의 진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행 과제이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진단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그 진단에 따른 처방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로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화론자들의 진단은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거나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전체적인 차원에서 ‘세계는 평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지구촌 상당 지역은 세계화와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화 담론은 철저하게 소위 선진국, 즉 제1세계 중심으로 전파되는 담론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 포드주의가 대표적인데, 포드주의는 ‘아메리카주의’를 향한 원리였다. 그러한 아메리카주의는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개인을 그 배경과 절연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통한 보편화․획일화․추상화의 길로 이끌었다. 보편화․획일화․추상화는 곧 ‘세계가 평평하다’는 선언과 같다. 물론 ‘세계가 평평하다’는 선언은 앞서 잠깐 설명한 것처럼 세계화 담론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 중 ‘경계의 소멸’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는 현실적인 과정이다. 핵심적인 사항은 ‘문화의 경계’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 영화, TV, 음악, 스포츠, 광고 등의 월경(越境)하는 문화적 형태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한 양상은 한편으로는 문화적 차이를 허용하고, 문화개방을 통한 상호소통의 증진을 강조하고, 잡종성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논의가 ‘다문화주의’(multuculturalism)일 것이다. 다문화성은 생물다양성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처럼 ‘존재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이다. 그 중의 하나가 올림픽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역에서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결합이 시도됨으로써 문화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중요한 절합 지점으로 작동한다.
2. 한미 FTA와 스크린쿼터, 그리고 세계화의 문제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비판과 옹호, 대립 등이 이어져 왔다. 그렇지만 수많은 비판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현재 한국사회의 주류이자 대세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경제적 관점의 확산에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던 근대적인 구획 및 분할의 근간을 자본의 원리 및 경제적 효율성의 원리로 채워 넣는 것이 옳다는 관점을 도입시킨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의 등장으로 분명해졌다. 이후 한국은 소위 ‘개방’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는데, 대표적으로 관세 철폐와 같은 무역장벽의 해소를 통한 경제 영역의 개방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소위 강대국들의 문화 영역의 개방이었다. 한국 정부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였고, 올해 2월 시작된 한미 FTA 협상 개시 전 정확하게는 1월 26일 참여정부는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전격 발표했다. 한미 FTA의 원활한 협상을 위해서라는 게 정부의 답변이었지만, 사실상 ‘선물’이었다. 이와 더불어 특히 스크린쿼터 문제는 10여 년 이상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요구해 온 사안이라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스크린쿼터제는 연간 146일간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번에 축소되면서 의무상영일수는 73일로 축소하게 되었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결정된 후, 이를 둘러싸고 한동안 많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아직도 영화인들을 비롯한 상당수 문화예술인들은 스크린쿼터 축소와 한미 FTA에 대해 문화주권과 문화다양성의 침해를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또 다른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를 영화계만의 문제로 바라보거나 오히려 스크린쿼터 축소 혹은 폐지가 더 많은 종류의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터지자 보수 언론들은 한국영화계의 성장과 규모, 한국영화의 힘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것이나, 신중현과 같은 유명 문화예술인을 등장시켜 영화와 대중음악, 영화와 드라마 등 문화 영역별 차이를 조명함으로써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를 영화계만의 것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고립화 혹은 구획화이다. 사회집단, 각 부문과 영역 내의 분할 내지는 경계짓기는 서로 상대방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지를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 셈이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왔고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스크린쿼터제 논란의 핵심은 ‘문화다양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이다. 스크린쿼터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 문화다양성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화다양성과 문화향수권이 보장되는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이는 스크린쿼터의 또 다른 문제, 즉 영화 배급과 유통 구조의 문제점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차이이다. 스크린쿼터가 폐지되면 더 많은, 더 다양한 영화가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고 그 결과 관객들은 많은 영화를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는 게 영화계와 시민단체의 생각이다. 오히려 그렇게 될수록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의 한국 영화시장에 대한 지배가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찬성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는 ‘국산품애용 운동’이나 ‘밥그릇 싸움’과는 다른 위치에 처해 있다. 우리 영화를 많이 봐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계의 죽음을 막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결과적으로 스크린쿼터 축소를 결정하고 발표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둘러싼 싸움이 결코 영화계만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전반적인 문화 부문 전반에 대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20세기 대중문화의 핵심이다. 신자유주의와 FTA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다른 국가의 문화 속으로 가장 빠르고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영화’이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대중음악 등은 언어의 문제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이 높아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어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의 문제가 크다. 클래식과 달리 대중음악의 향유는 언어의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그대로 전파한다. 물론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변화는 있을 테지만, 전반적인 흐름에 비하면 미약하다. 이런 부분은 우리의 한류 문화가 대만이나 베트남, 중국 등에 전파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함께 추진되고 있는 것이 바로 방송, 즉 미디어 분야인 것을 보면 미국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영화를 비롯해서 TV와 케이블 방송 등 시청각미디어의 개방은 곧 또 하나의 미국사회를 건설하는 데 전초 기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한․미 FTA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는 특히 ‘문화 영역’과의 독특하면서도 긴밀한 공조(?) 관계를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는 직접적인 침투나 침략보다는 ‘문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이는 ‘잠입’을 감행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문화’의 관계를 살피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와 개방을 외친다. 세계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이를 위해 자유와 개방은 필수라고 항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세계화’와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서 세계화 담론의 어려움을 잠깐 언급했듯이, 세계화와 문화의 관계 또한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적으로 문화 생산과 문화 소비라는 소위 ‘문화경제’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화를 말한다는 말은 세계화의 복합적 의미화 과정을 긍정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생각은 세계화에 대한 가장 넓게 퍼진 생각이기도 하다. 다음은 세계화 개념에 대한 하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언급이다.
세계화란 문화적인 생산물이 생산․재현․학습에서 장소의 구속을 덜 받고, 짧은 시간에 또는 동시에 전 세계에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달 기술의 혁신으로 세계 도처에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 생산물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을 최대한 활용하면 누구나 전 세계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의 동일한 문화적 산물이 전 세계 누구에게나 전달될 수 있다는 것, 점점 더 많은 문화적 생산물이 지역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정보망을 통해 열린 세계로 확산될 수 있음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누구든지 점점 더 많은 문화적 산물을 이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
서로 교환하고 협력하며 상호 인정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문화 생산자들 사이에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생겨난다. 그들은 창조성을 발휘할 때 고정된 장소에 얽매어 있지 않는다. 그들의 일터는 전 세계이며, 그 속에서 창조성의 중심부들이 생겨난다.
과거의 분리된 삶을 넘어 이제는 서로 네크워크로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등장으로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혼합된 형태의 문화 생산물들이 등장하고 다양한 관객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접근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겨나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는 특정한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성의 중심부를 만들어낸다. 개별적인 장소나 지역에 국한된 장소가 아니라 전 세계를 공통의 장소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화를 통해 나타나는 공통의 분모는 긍정적 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우리 앞에 현존하는 세계화 과정을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긍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화 과정을 통해 부여되는 다양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향하는 끊임없는 지배와 종속의 시도들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와 경제, 정치와 문화,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인종과 인종 등 다양한 분열과 갈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 역시 단선적으로 문화산업의 차원에서 영화산업 혹은 영화계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문제를 일면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세계의 문화를 둘러싼 경제 관계는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층위가 겹쳐져 있다. 따라서 국산과 외산 등의 중심-주변 모델로는 분석될 수 없다. 세계경제와 개별 국가의 지역경제, 정체성과 대중문화, 문화정책 등 다양한 영역 사이의 차이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가능한 일이다.
3. 세계화와 문화다양성, 그리고 상상력을 위하여
세계화는 원론적으로 문화다양성의 측면에서 이중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WTO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 논의들은 대부분 문화다양성을 훼손하거나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FTA 협상은 그러한 세계화와 문화다양성의 관계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형태이다. 따라서 ‘반세계화’는 곧 ‘신자유주의 반대’를 뜻한다. 동시에 반세계화는 문화다양성에 대한 옹호이다. 문화는 특정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다. 문화 영역을 다룰 때 주의를 요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지역(local) 문화와 세계(글로벌) 문화의 특징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의 합성어인 ‘글로컬리즘’(glocalism)이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나타내는 말로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왜 ‘문화다양성’인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처럼, 문화는 삶의 총체적인 방식이다. 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대중문화 담론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문화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했다. 특히 유네스코를 통한 국제적인 논의는 보편성의 원리가 통용된다는 점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주목을 받는 것은 지난 2005년 10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3차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이하 ‘문화다양성 협약’)이다. 당시 총회에서 이 협약은 15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찬성 148, 반대 2(미국과 이스라엘), 기권 4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문화적 권리가 국제적인 규약의 하나로 작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협약은 2001년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선언’을 좀더 명시적으로 표현했으며 유네스코 가입국들의 국제적인 구속력을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다양성이 인류이 중요한 특성임을 확인하고, 문화다양성은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소중히 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문화다양성은 선택의 범위를 넓히고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육성해 주는 풍요롭고 다양한 세계를 창조하며, 그러므로 공동체, 민족,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원천임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다양성은 단순한 문화산업이나 경제적 논리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의 문제를 공공성의 영역에서 사고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화다양성’ 개념은 원래 문화의 공공적 성격을 인정함으로써 문화적 예외 조항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동시대 세계화 과정에서 산발적으로 거론되는 ‘문화다양성’은 ‘자본의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특수한 담론 속에 용해되어 자본의 증식에 이용당하고 있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즉 글로벌에 대비되는 로컬로서의 지역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한에서 문화다양성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듯하지만, 그 속내는 그러한 다양성을 무기로 하는 지역문화를 상품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인사동의 ‘스타벅스’는 전 세계 매장 최초로 한글 간판을 내걸었다. 한국사회에서 인사동이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상징을 수용한 것으로 밝히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결국 상품을 팔기 위한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인도에 진출한 맥도널드는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 특유의 식생활 습관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육식과 분리된 채식 중심의 코너를 따로 마련했지만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처럼 세계화와 문화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 ‘문화다양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은 출발지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개념 또한 소극적인 개념이라고 여기는 의견도 있다. ‘문화다양성’에 대한 좀더 적극적인 개념 규정을 통해 그 개념이 본래 갖고 있는 다층적인 의미들을 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문제연구그룹’(GERM) 회장 프랑수아 드 베르나르는 ‘문화다양성’ 개념을 재정립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라틴어의 ‘디베르수스’(diversus)가 ‘대립되는’, ‘불일치하는’, ‘모순되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강조함으로써 ‘다양함’(diversity)이 상이한(different), 다수의(plural), 복수의(multuple), 다채로운(various)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즉 다양성 개념에는 이미 운동과 투쟁, 그리고 갈등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문화다양성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정된 결과나 상태로서가 아니라 싸움과 갈등 과정에서 생겨나는 운동의 개념으로 살려낼 수 있게 된다.
문화다양성을 강조할 때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으로 ‘언어다양성’이 있다.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 협약’에도 ‘언어의 다양성이 문화다양성의 기본 요소’라고 명시하고 있다. 언어는 문화다양성의 핵심적인 요소인데, 개별 문화가 갖고 있는 문학예술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록물 등은 언어와 문화의 관계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는 문화와 전통의 계승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어왔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언어의 통시성은 문화의 구성 과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언어의 다양성이 문화의 다양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주춧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언어는 상상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상력은 문화의 핵심이다.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은 상상력을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왔다. 건축이나 도시 공간의 구성 또한 상상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예술과 문화의 주축이 되는 상상력은 문화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보편성의 논리에 기댄 채 문화적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명시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전체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그렇다는 말이다. 세계화 논의에 있어서 경제 영역은 모든 상품의 동일한 단위로의 가치 전환을 목표로 한다. 그 결과 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생산물은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는다. 가치의 경제적 환원은 다양성을 없애고 획일성을 적용시키는 출발 지점이 되는데, 이는 다양한 가치의 공존이 아니라 가치를 경제적 원리로 환원시켜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치는 단일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으며 상대적이고 복수적이다. 아울러 문화는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는 총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다양성의 보존은 결국 문화적 가치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문제이며, 나아가 문화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잃지 않는 길이다.
5. 대안은 ‘문화정치’이다
아리프 딜릭(Arif Dirlik)은 글로벌(global) 시대에 ‘로컬(local)’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는 시기를 ‘신글로벌 자본주의(New Global Capitalism)‘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생산의 초국적화 혹은 국제적인 하청 생산을 통한 노동의 새로운 국제적 분업, 둘째, 특정 국가나 지역을 말할 수 없으며 도시들 간의 네트워크가 강력하게 연결되었다는 점, 셋째, 이러한 네트워크 연결의 매개체가 초국적 기업이라는 점, 넷째, 생산의 초국적화로 인한 국가 개념보다는 지역적 개념의 도입, 다섯째, 경제적 분열로 인한 문화적 분열, 즉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대두 등이다. 새로운 지구적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이를 ‘글로벌 권역주의(regionalism) 혹은 글로벌 지역주의(localism)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급진적인 생태학의 슬로건인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를 자신들의 것으로 이용한다. 그 결과 글로벌 지역주의는 70%의 글로벌과 30%의 로컬로 구성되는 것이다. 생산 및 경제 활동은 지역화되지만, 전체적인 자본의 관리는 초국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다국적기업을 넘어 등장하는 초국적기업은 기업의 글로벌리즘을 유지하면서 개별 지역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지역화(localization)한다. 초국적기업이 지지하는 다문화주의는 일종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와 지역주의(localism)를 훌륭하게 결합시킨다. 이쯤 되면 ‘로컬’은 더 이상 대안의 영역으로 인식될 수 없다. 신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로컬’은 저항이나 해방의 영역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의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다. 새로운 자본은 로컬의 정체성을 과거의 방식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과 방법으로 로컬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본의 증식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컬은 대안이 될 수 없는가. 딜릭은 그럼에도 로컬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때 로컬은 실험을 위한 영역이 되는데, 중요한 점은 전통적인 로컬 개념은 일정 정도 삭제한 채 글로벌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전통의 로컬 문화를 유지하고 확인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때 가능한 전략은 ‘지역횡단주의(translocalization)‘이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로컬 정체성의 소멸이 아니라 그 정체성의 유지를 통해 저항의 기본 요소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글로벌 자본주의와 로컬 정체성은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대의 세계화는 종래의 중심/주변 도식이나 생산/소비 도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차원의 문화가 이접적(disjunctive)으로 중첩되는 장을 형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기본적인 방향은 ‘보편화․획일화․추상화’이지만, 그 과정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중층의 장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계화는 어떤 일관된 원리에 근거하는 체계적인 운동이 아니라 통합과 분열, 균질화와 이질성의 증대, 자본의 지배와 노동력의 초국가적인 재편 등이 불균등하게 동시적으로 뒤얽히는 모순투성이의 과정인 것이다.”
즉 오늘날의 세계화가 전 지구적 대중문화를 지구 전역에 침투시키고 있고, 그 결과 서구문화가 유일하고 보편적인 문화로 강요되고 있는 상황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경계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전 지구적인 세계화 과정에는 문화와 정치를 분할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문화의 세계화’를 통해 문화 영역에서는 잡종성에 기초한 다양한 정체성을 허용하면서도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세계의 표준을 강요하는 것이다. 과거의 국민국가시스템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폐쇄성이나 국수주의적 태도는 상당 부분 약해지지만, 문화적 차이 자체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시스템으로서 세계화는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측면을 갖고 있다. 세계화와 문화의 관계를 살펴볼 때 이러한 절합 지점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단순한 투쟁이나 저항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문화 영역이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절합 지점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얻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문화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문화/정치’에서 ‘문화=정치’라는 문화에 대한 정치적 의미 부여를 획득한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통해 문화와 경제, 문화와 정치,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얽혀 있으며 상관관계를 형성하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문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기초이다.” ‘문화헌장제정위원회’가 작성한 <문화헌장> 초안의 첫 문장이다. ‘헌장’은 이렇게 계속된다. “문화는 시민 개개인이 삶의 다양한 목표와 염원들을 실현해 나갈 자유로운 활동의 터전이고 공동체를 묶어주는 공감과 정체성의 바탕이며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 의미,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한국사회에서 ‘아래로부터 논의가 진행된’ <문화헌장> 설립은 그 과정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의 기초’라는 표현과, ‘가치’와 ‘의미’, ‘아름다움’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국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다양한 ‘가치’를 삭제함으로써 하나의 기준으로 가치에 위계를 정함으로써 가치를 상품화한다. ‘의미’ 또한 마찬가지인데, 다양한 의미를 포용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준에 적합하고 들어맞는 의미들만 추려내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의미들은 ‘무의미한’ 것들로 치부해 버린다.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우리 사회의 경우 한국적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권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미국식 대중문화와 미적 기준을 수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대중문화의 유입을 통한 미적 기준의 획일화는 전 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치환한다. 이는 무한한 ‘개인화’ 혹은 ‘사유화’를 지향한다. 그러한 개인화 혹은 사유화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영역은 ‘문화 시장’이다. 그러한 가운데 어느 순간 공적 영역과 공공의 문화는 사라지고 상품으로서의 문화만 난무하게 된다. 대다수의 개인들은 문화를 더 이상 향수할 수 없는, 문화적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결과를 넘어서 세계화를 통한 문화의 위기는 양육강식의 신자유주의적 원리와 동물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도래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은 식물성의 저항이며, 여성성의 회복이며, 공공성의 유지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문화정치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문화정치’는 20세기 전반에 있었던 ‘예술의 정치화’ 혹은 ‘정치의 예술화’와는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각 부문 혹은 영역, 집단을 가르고 나눈다. 문화예술 영역의 경우 장르와 장르, 즉 영화와 대중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을 가르고, 영화산업 내부로 들어가면 제작자와 관객, 배우와 스텝 등을 서로 나눈다. 그러한 분할은 오직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이 속한 계급과 자신이 속한 문화 영역만 바라보고 사고하게 만든다. 그러한 전략이 성공하는 순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항이 사라진 이후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는 날, 문화/예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5월 4일,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이면서 반대 투쟁을 벌여온 평택 대추리의 ‘평화동산’이 군홧발에 짓밟혔고, 대추리분교에 세워져 있던 ‘전봉준 동상’이 부서졌다. 평화동산은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꾸민 아름다운 동산이었고, 동상은 조각예술품이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가 미군기지 이전과 결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대추리의 평화동산과 학교에 있던 동상이 곧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나아가 내가 살고 있는 공간도 언제든지 또 다른 대추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대안 마련의 시초가 될 것이다. 대추리는 ‘로컬’이다. 바로 그 ‘로컬’에서 미제국의 전 지구적인 방위체제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글로벌’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권경우․
(사)문화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중앙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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